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79화
잔뜩 열이 받은 모양인지 대표의 전화가 여러 번 울렸지만, 단솔은 아예 대표의 번호를 차단해 버렸다. 남의 핸드폰을 빌려 쓰는 주제에 이런 민폐를 끼칠 순 없지.
<알오매치 서바이벌 in 아일랜드 포털>
단솔은 떨리는 손으로 포털을 눌렀다.
단솔지수 방송전부터 사귀던 사이였다에 내 왼쪽 새끼손가락 건다
(첫인상 후기에서 주단솔 말하는 한지수.jpg)
(갈비찜 산처럼 쌓아주는 한지수.jpg)
(공포체험 후에 무섭다고 한지수 방 들어가는 단솔.jpg)
이외에도 개인인터뷰때마다 단친놈처럼 단솔이 이야기하고, 단솔이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묘하게 철벽치면서 한지수가 하면 다 받아줌.
내생각엔 둘이 진짜 뭐 있긴 했던듯. 애초에 저런 생짜 신인이 캐스팅된것도 그렇고, 이번 프로그램 애청자고 단솔이 처음부터 좋게보고 입덕할 뻔했는데 완전 실망함. 갑자기 뜬 신인들 보면 전부 마케팅이고 이런 거 다알았지만, 이번엔 좀 충격이 큰듯.
⤷단솔이 생긴것도 좀 여우같이 생기지 않음? 원래 저런애들이 부뚜막에 올라간다고. 10년 넘게 그냥 오메가로 활동하던 한지수가 갑자기 알파고백? 자숙기간도 없이 프로그램 복귀? 뭔가 좀 어이없음
⤷아니 그래서 님들이 하고싶은 이야기가 뭔데, 음모론만 자꾸 펌프질하고 핵심이 없네. 한지수랑 주단솔이 프로그램 전부터 사귀고 있었다는 거임? 님들 말대로라면 주단솔 좆소출신 망돌인데 한지수랑 마주칠 일이나 있었을 거 같냐.
⤷그건 모르는 거지, 연예계에 그런 거 연결해 주는 사람들도 따로있다던데. 사귄 거 아니고 두 사람 스폰관계일지 누가앎?
한지수―주단솔 스폰썰 정리한다.
두 사람이 스폰이면, 정대수는 이미 결혼하고 애낳고 증손주까지 봤음.
(넘어지는 주단솔 잡아 주는 정대수.jpg)
⤷ㅁㅊㅋㅋㅋㅋㅋ이제보니까 맞네 ㅠㅠ 둘이 거의 껴안는데? 하아아앙...... 대수야 힘내라...
⤷그렇게치면 태오도 마찬가지 아님? 페어 안무도 했는데?
⤷ㅁㅈ무인도 1회차 못봤냐 진짜 썸은 태오인 듯 약간 서로 쑥스러워하는 거 완전 청춘로맨스 그자체인데
단솔은 손이 저릿저릿하게 떨려 오는 것이 느껴졌다. 대표가 화를 낸 이유가 이거였구나.
물론 반대 의견도 상당히 많았지만,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는 장면까지 확대해서 지수와 제가 무슨 대단한 관계인 양 떠들어 댔다.
“씨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고 삼켰다. 이번 생은 최선을 다해 살아 보자고 다짐한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대표에게 반항하고 난 뒤라 분출된 아드레날린이 채 식지 않아 더 감정이 북받쳤다.
“어…… 어디 갔지?”
생존 전략을 적어 둔 종이를 꺼내 새로운 작전을 짜려고 했지만, 분명히 주머니에 있어야 할 종이가 보이지 않았다.
“……되는 일이 없네.”
그냥 떨어트린 거라면 다행이지만, 누군가 주웠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단솔은 종이에 제 이름을 써 놓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선생님. 죄송한데 펜이랑 종이 한 장만 주실 수 있나요?”
단솔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커튼을 살짝 걷어 지나가는 의료진을 붙잡고 물었다. 바쁜 응급실에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게 미안했지만, 이 일 역시 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단솔을 알아본 모양인지 의료진은 병원 로고가 박힌 손바닥만 한 수첩과 볼펜을 가져다주었다.
“저희 병원 수첩인데 어차피 안 써서요. 가지고 가세요.”
“어! 감사합니다!”
단솔은 새로운 생존 전략을 짜기에 앞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와 ―로 나눠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다.
『― : 유두현, 하민성... 한지수...?』
생존을 위해 최대한 거리를 둬야 하는 사람들 목록에 지수의 이름을 적으면서, 단솔은 머뭇거렸다. 아까 본 게시글에서 지수가 저를 챙겨 주었던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 : 유두현, 하민성... 한지수...?』
그 뒤로도 단솔은 몇 명의 사람을 마이너스에 넣었다가 지우길 반복했다.
“다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야…….”
회귀 전 제가 그토록 미워했던 이연, 지수의 형질을 함께 속였던 대수는 물론, 갑작스레 고백한 태오나, 회귀자로 착각하게 만든 민혁까지.
하나하나 떠올려 보면 이번 생에는 다들 제게 잘해 준 기억밖에는 없었다.
회귀 전처럼 사람들이 저를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여기고, 무시했다면 이 결정이 조금 쉬웠을까. 대중들에게 욕을 먹고, 대표에게 혼나는 상황에서도 단솔은 왜인지 전처럼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대책도 없으면서 이상한 자신감만 차올랐다. 단솔은 수첩을 탁 소리 나게 접어, 최 PD에게 들키지 않게 일단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 * *
“단솔 씨는 괜찮으려나…….”
태오의 중얼거림에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사람들의 손이 멈칫했다. 단솔의 부상으로 저녁 식사 게임은 취소되었고, 덕분에 다른 사람들까지 며칠 만에 멀쩡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게, 지난번에 다친 쪽 발 같던데.”
지수의 말에 두현이 물었다.
“지수 선배는 단솔 씨한테 되게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지난번에 다친 곳도 기억해 두고. 둘이…… 우리가 모르는 뭐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다지 친분도 없는데 혼자 친한 척할 때는 언제고, 지수가 알파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부터는 시시때때로 두현은 지수에게 말을 툭툭 뱉었다. 두 사람이 아예 대화가 없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예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왜? 내가 단솔이한테 관심이 많아 보여서 질투 나?”
“하하, 선배 무슨 소리예요? 우리가 무슨…… 그런…… 사이라도 된다고.”
“그 정도는 기억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같이 지낸 게 벌써 몇 주짼데.”
“아…… 그런가.”
그 모습을 본 태오가 이연에게 말을 걸었다.
“형, 원래 두현이 형이 지수 형한테 저렇게 편하게 대했어요? 좀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은데.”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아니…… 방금 반존대한 거 아니에요? 매번 선배님 하면서 깍듯하게 굴더니. 설마, 알파인 거 알고 관심 생겼나……?”
아니, 그보다는 반대에 가까웠다.
두현이 단솔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어느 정도 두현의 행동이 읽히기 시작했다. 두현은 제 이미지를 지키면서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방금은 마치 단솔과 지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기를 바라는 투였다. 섬 안에 갇혀 있어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정황상 지수의 여론이 좋지 않을 테니 부리는 수작이겠지.
이연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 배 들어온다. 단솔 씨 오나 봐요.”
멀리서 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연은 차라리 부상 정도가 심각해 단솔이 그냥 무인도 회차를 건너뛰었으면 했다. 단솔을 보호하기 위해 이연이 나설수록 두현의 질투가 심해질 게 불 보듯 뻔한 일이라, 이연은 손발이 묶인 사람처럼 단솔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단솔 씨 괜찮아요? 깁스했네요?”
“인대가 문제래요. 다행히 반깁스라 괜찮아요. 씻을 땐 뺄 수 있어요.”
“무인도라 차라리 다행이네요…… 안 씻어도 돼서.”
아무리 생각해도 태오가 가진 긍정의 힘은 상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걸 말이라고. 단솔은 태오와 전처럼 지내기로 약속한 게 생각나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어 보였다.
“그러게요.”
배에서 내리는 단솔에게 여러 개의 손이 내밀어졌다. 한쪽 발로 땅을 딛기에 꽤 힘들어 보였다. 흔들리는 뱃머리 때문에 육지와 배 사이에 공간이 계속 왔다 갔다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지만 단솔은 고개를 푹 숙인 탓에 그 손길을 다 못 본 척, 뱃머리에 철퍼덕 앉아 혼자 배에서 기어 내려왔다.
조금 초라하긴 해도, 괜한 구설수에 휘말리느니 이편이 훨씬 나았다.
아직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꾸만 지수와 저의 스폰 관계를 의심하던 댓글이 뇌리를 스쳤다.
민혁이 단솔의 뒤를 따라 내리자, 일제히 내밀었던 손들이 거둬졌다. 민혁은 그 와중에 돌아서려는 대수를 붙잡고 내려왔다. 대수가 인상을 팍 썼지만, 민혁은 늘 그랬던 것처럼 빙그레 웃어 보였다.
단솔과 민혁까지 도착하자, 드디어 출연진이 모두 해변가에 모였다.
최 PD는 그들의 한가운데 늘 보던 스피커를 내려놓았다. 이 야밤에 또 무슨 게임을 하려는 걸까.
―주단솔 씨, 큰 부상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스피커는 단솔의 깁스한 발은 보이지도 않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무인도에서의 일정도 벌써 절반을 넘어섰는데요. 이제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무인도 탈출을 위한 게임이 시작됩니다.
―자세한 미션은 내일 알려드릴 테니, 오늘 밤만큼은 편하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스태프들이 들어오더니 값비싼 와인과 과일, 고기와 소시지 등. 화려한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춘몽각에 있을 때만 해도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이 주는 음식을 먹던 출연자들은 이제 함부로 음식을 주워 먹지 않았다.
무인도에 와서 배운 점이었다. 방송국 놈들은 대가 없는 호의를 베푸는 법이 없다.
“도대체 뭘 앞두고 있길래 이렇게 잘 먹이는 걸까요?”
“독이라도 탔나 보군.”
태오의 질문에 대수가 팔짱을 낀 채로 서서 말했다.
미션을 안 했는데도 저녁 식사에 야식, 술까지.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두 사람 멀뚱히 서 있을 뿐 차려진 음식을 먹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들 불신이 깊어진 모양이네. 일단 먹고 마셔,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아직 무인도에 들어온 지 하루도 안 된 지수만이 샤인머스캣 한 알을 입에 굴리면서 달궈진 그릴에 고기를 얹었다.
“역시 고기는 야외에서 먹어야지.”
지수의 말에 공감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서 있는 것은 단솔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