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78화
결국 병원 응급실에 온 단솔은 반깁스를 하는 신세가 됐다. 단순히 피만 나는 줄 알았는데 넘어지면서 인대가 늘어난 모양이었다.
프로그램에 민폐덩어리가 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어째 전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지고 있었다.
커튼이 쳐진 간이침대 위에 걸터앉은 단솔이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때, 어딜 다녀온 건지 민혁이 단솔 앞에 프랜차이즈 도넛 한 상자와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단솔 씨, 배고프죠. 이거 먹어요."
"도대체 자꾸 이런 걸 어디서 들고 오는 거예요?"
정말 회귀자라서 회귀할 때 연금술이라도 얻은 걸까. 이쯤 되자 단솔은 점점 민혁이 회귀자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당연히 무일푼이었다. 그뿐인가, 섬에 있을 땐 모두가 꼬질꼬질하니 몰랐는데 큰 병원에 오니 다른 사람들에 비해 민혁과 단솔이 꽤 눈에 띄었다.
특히나 민혁의 주머니 많은 바지에서는 민혁이 조금만 움직여도 모래가 우수수 떨어졌다. 해변에서 워낙 게임을 열심히 한 탓이었다.
아무래도 명색이 연예인이라 커튼을 쳐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까 쟀던 혈압을 재고 또 재고, 의료진들뿐만 아니라 커튼이 또 언제 열리나 기다리고 있는 다른 환자들과도 자꾸만 눈이 마주쳤다.
"저번에도 말했죠. 우리 앞에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있다고. 이것도 불가항력이에요 부담 갖지 말고 먹어요."
또 그 소리. 이번에야말로 단솔은 민혁을 제대로 떠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정말 회귀자라면 말뜻을 알아들을 테니까.
“제갈민혁 씨, 정말 너무하시네요! 한 번은 참아도 두 번은 못 참아요!"
하지만 그때, 막내 작가가 응급실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
“......형, 이게 무슨 소리.......”
“박 작가님, 환자도 있는데 소란 피우지 말고 나가서 얘기하시죠."
“됐어요. 최 PD님 오셨으니까 제갈민혁 씨한테 크게 감점 적용해 달라고 얘기할 겁니다, 전."
"아니......! 너무한 거 아닙니까? 전 몰라도 단솔 씨는 환자인데 밥도 안 주고......!”
막내 작가는 화가 잔뜩 난 듯 보였지만, 프로 의식을 발휘해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응급실의 모든 의료진은 물론, 아파서 온 환자들까지 이들이 있는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서 딱히 소용은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은 급기야 조곤조곤한 말투로 싸우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단솔이 절뚝거리며 아픈 다리를 끌고 커튼을 쳤다.
“그 도넛이랑 커피, 안 그래도 원래 두 분께 드리려고 산 거였어요. 그새를 못 참고...... 그걸 훔쳐요?"
“형...... 그럼 그때 삼각 김밥이랑 바나나 우유도.......”
"네! 맞아요! 여기 계신 제갈민혁 씨가......! 선배들이 이리 부르고 저리 불러서 한 끼도 못 먹고 그거 하나 겨우 갖고 있던 건데......."
“그날 저희도 제대로 못 먹었거든요? 이상한 빵 쪼가리 몇 개 던져 주고......!"
"그럼 게임을 좀 잘하시던가요!"
“그렇게 배가 고팠으면 간식 간수를 좀 잘하지 그걸 왜 흘리고 다닙니까!?"
그렇다면, 그 말은 다 뭐였지. 불가항력이니 운명이니 했던.......
"형! 형! 잠깐만요......! 그럼 그때 그 말은 다 뭐였어요? 우리 앞에 놓인 운명이 어쩌고.......”
"......걸어가는데 바나나 우유랑 삼각 김밥이 놓여 있었어요. 오늘 이 도넛 상자도....... 누가 흘린 건 줄 알고 그만.”
“흘리긴 누가 흘려요! 분명 카메라 가방 사이에 뒀는데!”
“제가 찾아보니 가족들끼리 훔치는 건 범죄가 안 된다고 하더군요. 뭐였더라...... 아! 친족상도례! 스태프와 출연진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이게 범죄는 아닙니다.”
어디서 그렇게 음식을 구해 오는지, 그리고 그 의미심장한 말은 또 뭔지. 그 의문 때문에 민혁이 회귀자라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그는 그냥 스태프들 간식을 턴 사람이었다. 무슨 장발장도 아니고.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 막내 작가가 떠나고, 민혁은 아무렇지 않게 도넛 상자를 열어 단솔에게 내밀었다.
"형...... 이거 먹어도 괜찮아요? 아까 보니까 작가님 많이 화나신 것 같던데."
“어차피 화가 나셨으니 우리가 이걸 안 먹는다고 화가 풀리진 않을 거예요."
들어 보니 맞는 말도 같아 단솔은 쉽게 수긍했다. 사실, 그보다는 배가 고파 눈앞의 도넛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게 맞았다.
“형은 맞는 말만 하시네요. 혹시 인생 2회차세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솔은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민혁을 떠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솔을 더 힘 빠지게 만들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제가 인생 2회차면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 프로그램 안 나오죠. 그때 그 전화를 받는 게 아니었는데...... 아! 단솔 씨 만난 걸 후회한다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운명이니까 여기가 아니라 다른 데라도 또 만날 수 있었을 테니까."
"하하, 그러니까요....... 바보가 아니고서야 다시 태어났는데 여길 나오겠어요......."
단솔은 억지로 볼 근육을 끌어당겨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결국, 도넛 도난 사건으로 인해 민혁이 최 PD 손에 끌려가고, 혼자 남은 단솔이 침상에 누워 병원 천장의 무늬를 세고 있을 때 아까 민혁을 혼내던 막내 작가가 불쑥 나타났다.
“좀 괜찮으세요?"
“아......! 네...... 저...... 아까 도넛...... 잘 먹었습니다.”
“네, 괜찮아요. 그거 원래 단솔 씨 드리려고 했던 거라. 쉬시는데 불쑥 나타나서 놀라셨죠?"
“괜찮아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 다른 건 아니고. 부상 입으신 거 소속사에 알리려고 전화드렸는데 굳이 굳이 단솔 씨랑 통화해야겠다고 하셔서.......”
지난번부터 단솔의 발목을 걱정하던 길성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작가가 통화한 사람도 길성일 거라고 생각한 단솔은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넘겨받았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돼?
쿵. 단솔은 제 심장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길성인 줄 알았던 전화기 너머 상대방은 대표였다. 지난번 개인적인 행사에 멤버들을 부르지 말라고 단솔이 먼저 전화한 이후로 대표와 통화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 대표님이 웬일이세요."
―웬일이고 뭐고 너 한지수가 알파인 거 알았어, 몰랐어?
"네?"
―아이 씨! 한국말 몰라!? 한지수가 알파인 거 모르고 그놈 방에 가서 같이 자고 그런 거냐고 인마!
빽 지르는 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바깥까지 들렸다.
다행히 재빨리 소리를 줄인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지만, 단솔은 그가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모...... 몰랐어요. 알았으면 제가 그랬겠어요? 그리고 그건 방이 없어서......."
-에이 시발! 애초에 그 프로그램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어떡할 거야! 지금 너 때문에 다른 애들까지 다 싸잡아서 욕먹게 생겼는데! 어떻게 수습할 거냐고!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그걸 왜 제가 아니 그보다 뭘 알아야 말을......."
지난 삶의 기억 때문에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이번에는 또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단솔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우선 제가 잘못한 일인지 아닌지 알아야 욕을 먹든지 할 것 아닌가.
-넌 인터넷도 안 보냐!? 다른 놈들은 세컨 폰이고 뭐고 다 들고 간다던데 미련해 빠져서는...... 기대를 한 내가 등신이지!
프로그램에 나가라고 등 떠밀 때는 언제고, 제대로 말도 안 해 주고 욕부터 내뱉는 대표의 언행에 단솔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따지고 보면 마음의 상처는 회귀 전 일이니 지금 사람들에게 따질 수 없지만,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건 현재 진행형이었다. 물론 이것도 과거의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여전히 피해받고 있으니 완전한 과거의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뭐! 쓸데없이 사과 같은 거 한다고 시간 낭비.
“일단 프로그램은 대표님이 나가기 싫다는 사람 붙잡고 나가라고 하셨고요. 전 몰랐어요. 지수 형이 알파인 거."
―뭐...... 뭐야? 너 말 다 했어!?
"아뇨, 아직 한참 남았어요. 저희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고요. 하...... 세컨 폰, 세컨 폰은커녕 지금 제 핸드폰이 언제 산 건지 아세요? 5년 된 핸드폰에 제일 싼 요금제도 겨우겨우 내고 있어요, 지금. 정산해 주셔야 다른 핸드폰을 사서 들고 오든지 하죠. 돈이 없는데 어떻게 사요?"
―이...... 이 새끼가 키워 줬더니 이제 대가리 좀 컸다 이거야!? 어!?
“대가리는 대표님이 크시겠죠! 그리고 이런 일 해결하라고 회사가 있는 거거든요!? 전 할 말 없어요! 끊습니다!"
뚝.
"헉......."
단솔은 그제야 거친 숨을 내쉬었다. 뭐지. 래퍼로 전향해도 되겠는데.
그간 대표에게 이렇게 할 말을 다 하는 상상은 수도 없이 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기 시작하고, 집에 칩거해 지난 방송을 돌려 보면서도 대표에 대한 감정은 비교적 선명했다. 마구잡이로 욕을 하고 폭행을 가하는 그에게 제대로 말 한마디 못 하고 얻어맞고 있었던 것이 분해서 잠도 못 자던 날도 많았다.
마음 같아선 흠씬 두들겨 패 줘도 시원치 않지만, 일단 오늘은 이 정도로도 충분히 스스로가 기특한 단솔이었다.
짝짝짝.
그때, 옆에 있다고 자각하지 못한 막내 작가가 박수를 쳤다.
“단솔 씨...... 아니 단솔 선배. 멋져요."
“에?"
“저는 언제쯤 최 PD한테 그렇게 개겨 볼까요. 살면서 그런 날이 오긴 할까요? 아무튼...... 오늘의 그 반항 정신...... 잊지 않겠습니다."
“어...... 안...... 그게 아니라...... 저 그러면 부탁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핸드폰 좀 더 써도 될까요.....…? 포털을 좀 모니터링해 보고 싶은데......"
대표에게 할 말을 다 한 것과 별개로 도대체 지수와 저 사이에 어떤 말들이 오가고 있는지는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얼마든지요."
중요한 전화가 오면 스마트 시계로 받으면 되니 편히 쓰라는 말을 남기고, 막내 작가는 자리를 떴다. 단솔은 다시 혼자가 된 침상 위에서 알오매치 서바이벌의 포털에 접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