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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77화 (77/150)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77화

“솔아! 잠깐만!"

지수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솔은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갔다. 구두 신고 따라오는 게 지치지도 않는지 그럼에도 지수는 계속 단솔을 따라왔다. 급기야 단솔은 거의 뛰다시피 해 지수의 시야에서 벗어나,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왜 자꾸 쫓아오는 거야.......'

도망가는 사람도, 따라가는 사람도 이유가 없는 추격전이었다.

“허억...... 되게 빠르네.......”

단솔이 바위 뒤에 숨은 줄은 모르는 지수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그냥 인사를 할 걸 그랬나. 저도 왜 도망쳤는지 모르겠지만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들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들키느니 차라리 돌아가는 게 낫지. 단솔은 커다란 바위를 돌아 지수가 서 있는 뒤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으악!"

하지만, 며칠째 날씨가 좋지 않아서였을까, 젖은 흙에 이끼가 끼어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넘어지면서 바위에 무르팍을 제대로 박았는지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솔아! 괜찮아?"

단솔은 아픔보다 창피함이 먼저였다. 너무 추하게 넘어져서 얼른 일어나 도망가야 하는데, 무릎뿐만 아니라 지난번 다친 발목에도 문제가 생긴 건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가만히 있어, 형이 갈게."

자꾸만 일어나려는 단솔을 말린 지수가 내리막길을 달리듯이 내려왔다.

짜증 나. 그러게 왜 쫓아와서는.......

단솔은 무릎이 깨진 제 다리를 끌어안고 자신도 모르게 한 생각에 깜짝 놀랐다. 웬만해선 남을 원망하지 않으려 했는데 제 성격이 또 삐뚤어진 걸까. 혼자 넘어져 놓고 자꾸만 지수에 대한 원망을 곱씹게 되었다.

"많이 아파? 걸을 수 있겠어? 업힐래?"

이런 단솔의 속도 모르고 지수는 꼭 제 살이 찢어진 사람처럼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랬어요?"

울고 싶은 건 단솔도 마찬가지였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질문이었다.

“미안해, 갑자기 쫓아와서....... 놀랐지?"

애초에 도망친 건 저였다.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지금은 카메라도 없는데.

단솔은 혹시 숨겨진 카메라가 있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변에 카메라를 설치할 만한 곳이 없어 찍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저를 못 본 척하고 대수와 사라지는 모습에, 방금까지도 지수가 저를 이용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오메가가 오메가를 좋아하는 신선한 조합으로 시선을 끌어 본인의 형질을 더 감추려고 했다거나, 무명 후배를 챙겨 주는 선량한 선배의 이미지를 원했다거나. 그러나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지수는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단솔의 상처에 안절부절못하고, 걱정하는 모습이 그대로였다.

프로그램은 물론, 연예계에 애정도 없었던 지수였다. 그러니 미련없이 은퇴하겠다고 할 수 있었을 터. 도대체 왜 돌아온 거지. 왜 알파라는 사실을 사람들한테 밝힌 거고.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에 지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단솔은 혼란스러웠다.

"태오 씨가 욕먹는 게 걱정돼서...... 밝힌 거예요? 기자 회견은 왜 했어요? 섬에는 왜 다시...... 돌아온 거예요?"

“그건...... 차차 말해 줄게. 일단 돌아가자 너 지금 많이 다쳤어.”

자꾸만 대답을 회피하는 지수에게 단솔은 자꾸만 답을 듣고 싶었다. 보는 눈이 많으니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불편해서도 있지만, 이럴까 봐 사람들을 피해 다닌 건데.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하는데 몸이 힘들어지니 자신이 자꾸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단솔 씨!”

그때, 멀리서 태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쳤어요?"

"그냥...... 좀 넘어졌어요. 괜찮아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잖아요. 빨리 치료받아야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자, 업혀요."

“아니...... 저 진짜 괜찮은데."

한달음에 달려온 태오는 단솔의 앞에 주저앉아 업히라는 듯 손짓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어색한 사이였다는 건 잊은 모양이었다.

“업히기 싫으면 안겨 갈래요?"

"어......."

단솔은 하는 수 없이 태오의 등에 올라탔다. 단솔이 태오에게 거리를 두었던 그사이, 대수와 가까이 지내기라도 한 건가. 협박에 가까운 태오의 말투에서 왠지 대수의 습관이 느껴졌다.

꽤 거칠게 단솔을 업은 태오는 생각과 달리 조심조심 걸어 숲을 빠져나갔다. 지난번 넘어지는 저를 잡아 줄 때도 느꼈지만, 같은 나이임에도 태오의 몸은 단단한 돌덩이 같았다.

어느새 단솔이 뒤를 돌아보았을 땐, 잘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한 지수가 보이질 않았다. 처음 와서 길도 잘 모를 텐데 혹시 길을 잃어 버렸나. 혹시 제가 너무 몰아세운 건 아닐까.

단솔이 태오의 등에 업혀 지수를 걱정하고 있을 때, 태오가 입을 열었다.

“단솔 씨.”

"......네?"

"미안해요."

단솔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그가 미안해하는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단솔이 사과해야 할 일이었다.

“아니요...... 제가 죄송하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하는 단솔의 코끝에 태오의 목덜미가 있었다. 단단한 그의 몸에서 체향이 느껴졌다.

“어차피,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고 한 말도 아니었어요. 그냥...... 제가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단솔 씨에 대한 마음이 너무 커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어요."

단솔이 자신의 운명에 빠져 있는 사이, 태오는 어느새 마음을 그렇게나 키운 걸까. 고마운 마음과 그에 응해 줄 수 없다는 미안함에 단솔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내 마음은 내 거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 단솔 씨는...... 단솔 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괜히 나 신경 쓰느라...... 도망 다니고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티 났어요......?"

“네. 완전 발 연기였어요. 슬쩍 눈만 마주치면 로봇처럼 뚝딱뚝딱. 누가 잡아먹나......."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만......."

"이제 미안해하지 마요. 내가 단솔 씨를 남몰래 좋아할 자유가 있는 것처럼, 단솔 씨가 나를 받아 주지 않을 자유도 있는 거니까. 대신 우리 예전처럼 친구 해요."

멀리서 사람들이 낚시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라도 잡지는 못한 모양인지 다들 흥미를 잃은 표정이었다. 단솔과 태오를 발견한 사람들이 단솔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태오는 단솔을 내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태오 씨! 내려 줘요! 네?"

단솔이 민망함에 버둥거렸지만, 태오는 오히려 더 단단하게 단솔을 붙잡았다.

“예전처럼 친구 해 준다고 하면요."

“아......! 알겠어요! 알았다니까요? 빨리 내려 줘요!"

“밥도 챙겨 먹을 거죠? 물론 줘야 먹긴 하겠지만......."

"네! 먹을게요! 그러니까 이것 좀!"

"약속."

이쯤 되니 단솔을 놀리려는 의도가 분명히 보였다. 태오는 당황한 단솔과 달리 능글거리며 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약속! 약속! 빨리 내려 줘요!"

후다닥 약속에 도장까지 찍은 단솔이 서둘러 태오의 등에서 내려왔다. 급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다친 쪽 다리를 땅에 디딘 단솔이 아픈 신음을 냈다.

"윽."

“뭐가 그렇게 급해요. 내가 어련히 잘 내려 줄 건데.”

“남들이 보면...... 좀 창피하잖아요. 나도 다 큰 어른인데.”

하지만 단솔의 생각과는 다르게 단솔이 다친 걸 알고 달려온 알파들은 무슨 유치원생 막냇동생이 다친 것처럼 단솔의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단솔 씨 괜찮아요?"

“뼈는 안 다쳤어요? 잡고 있을 테니까 움직여 봐요."

“빨리 소독해야 해."

“PD님 여기 약 좀 갖다줘요."

다치지도 않은 머리와 어깨까지 살피는 모습에 단솔은 차라리 이럴 줄 알았으면 태오의 등에 업혀 있을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

결국, 다리가 심하게 부어 올라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는 정도가 되자, 단솔은 최 PD와 함께 배를 타고 섬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방송에 안 좋게 비칠까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단솔에게 민혁이 동행을 청했다.

“그래도 보호자 한 명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같이 가도 되죠?”

민혁의 말에 최 PD가 찝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호자라 할 것도 없이 최 PD를 비롯한 스태프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인 건 방송 때문이었다. 요즘 단솔이 다른 출연자들을 피해 다니면서 유난히 민혁과 붙어 있는 장면이 많이 잡혔다.

최 PD는 육지로 나가는 배 안에서도 끊임없이 단솔을 챙기는 민혁의 모습을 클로즈업했다.

“계속 아파요? 뼈 다친 게 아니어야 할 텐데......."

“괜찮아요...... 이 정도는 뭐....... 근데 저 때문에 촬영이.......”

“꽤 오래 걸릴지도 몰라서 섬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미션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네.....…..”

한참이나 카메라를 쳐다보던 VJ가 최 PD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둘이 꽤 잘 어울리는데요?"

“그러게, 의외네."

제갈민혁이 원래 저런 캐릭터였나. 단솔의 앞에만 가면 알파들이 이상하게 말랑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지수나 정대수만큼 캐릭터가 분명하진 않았지만, 제갈민혁도 꽤 개인주의자에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민혁에게 처음 캐스팅 요청을 했을 때, 매니저조차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끊긴 전화만 수십 통이었다. 거절하려고 만든 핑계인 줄 알았으나, 음악 작업에 몰두하면 주변 사람이나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산이나 바다로 숨어 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어찌나 놀랐는지 최PD는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했다.

희한한 재주가 있네. 가만히 있어도 알파가 줄줄이 꼬인다니. 그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러 연애 예능을 제작한 최 PD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건 저주에 가까웠다.

특히 알파들의 소유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면...... 오메가 입장에서는 정말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해서, 그들의 경쟁심을 자극해야만 하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근데, 비주얼 조합은 좋은데 영 재미가 없네요.”

VJ와 최 PD의 대화에, 막내 작가는 자기도 모르게 두 사람에 대한 평가를 내놓았다. 막내 작가는 최 PD가 쳐다보자 당황한 듯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 제 말은...... 그...... 프로그램이 재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연애 예능은 두 사람이 밀고 당기고 하는 게 있어야 아무래도 재미있지 않나.......”

그 말에 최 PD 역시 일면 동의를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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