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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75화 (75/150)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75화

단솔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유일하게 편한 사이였던 민혁과도 어색한 사이가 되겠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행동에 대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배가 많이 고팠어요?"

"......네."

"이거 먹어요."

민혁은 주머니에서 삼각 김밥과 바나나 우유 하나를 꺼냈다. 도대체 저런 바지는 어디서 산 걸까. 아무리 레트로가 유행이라지만, 민혁이 입은 카고 바지는 족히 10년은 된 것처럼 낡아 있었다.

단솔은 붉은 물이 얼룩덜룩한 제 티셔츠는 생각하지 못한 채 빨대까지 야무지게 나오는 민혁의 주머니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났어요?"

바지에 집중하느라 삼각 김밥과 바나나 우유를 이제야 발견한 단솔의 눈이 쏟아질 듯 커졌다.

“뭐...... 어쩌다 보니?”

편의점도 없는 무인도에서 도대체 이런 걸 어떻게 구한 걸까. 혹시나 단솔은 삼각 김밥의 유통 기한도 확인했다. 제조 일자는 오늘이었고, 유통 기한도 한참 남아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단솔 씨, 운명을 믿어요?"

".....네? 갑자기요?"

"우리 앞에 놓인 운명 중......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이건 그 부산물 같은 거예요. 부담 갖지 말고 먹어요."

뭔가를 알고 하는 소리인가. 해명 도사의 말처럼 이 중 회귀자가 또 있다면 높은 확률로 민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에서 의연하게 적응하는 건 자연 친화적인 민혁의 원래 성향이나, 단솔보다는 카메라에 익숙한 연차이기 때문이라고 쳐도 지금 그가 뱉은 말은 또 다른 회귀자가 누구일지 고민하는 단솔에게 꽤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대놓고 물어볼까......!'

또 다른 회귀자에게 조언과 도움을 청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직 민혁이 회귀자라는 확신이 없었다. 심증밖에 없는 상태에서 제가 회귀자라는 걸 밝혔는데 민혁이 회귀자가 아니라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맞아요. 그...... 운명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필연적인 것들...... 그러니까 정해져 있는 것들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가끔? 하하하."

단솔은 해명 도사가 했던 말을 따라 하며 민혁의 반응을 살폈다.

눈썹을 으쓱한 민혁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단솔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린 그걸 불가항력이라고 하죠. 그러니까, 우리 단솔 씨가 이걸 먹는 것도 불가항력. 먹어 봐요. 나무껍질보다는 훨씬 맛있을걸요?"

그걸 말이라고, 참치마요 맛 삼각 김밥과 바나나 우유는 미슐랭쓰리 스타가 와도 부럽지 않을 천상의 맛이었다.

일단, 민혁이 회귀자인지 아닌지 알아볼 기회는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 먹고 보자. 단솔이 어느새 속세의 음식에 정신이 팔린 사이 멀리서 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따라 시간이 빨리 가기라도 한 걸까.

'아직 민혁이 형이 회귀자인지 아닌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 지금이 뭐라도 하나 더 떠보기 딱이었는데, 갑자기 들어오는 배에 단솔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직 미션 할 시간 안 되지 않았어요?"

민혁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가 보면 뭔지 알겠죠. 설마 지금보다 더 나빠지기야 하겠어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하자, 다른 출연진들이 낚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도 이 시간에 배가 들어오는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는 듯 의문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자연스레 배가 들어오는 바다 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단솔은 앞에서 있던 태오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느라 나무껍질까지 빨아 먹었는데 대놓고 눈이 마주치다니. 단솔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저거 뭐야...... 최 PD......?! 이제야 들어오는 구먼."

몇 날 며칠 최 PD를 만나면 멱살잡이라도 할 기세였던 민성이 가장 먼저 뱃머리에 서 있는 최 PD를 알아보았다.

그 와중에도 선크림을 잔뜩 발라 민성의 얼굴은 허옇게 떠 있었다. 아직 해변가와 많이 떨어진 배에 또 다른 인영이 보였다. 최 PD의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민성이 손을 동그랗게 망원경처럼 말아 뱃머리를 보다가, 눈을 비볐다.

“저거 누구야, 누가 타 있는데......?"

-여러분, 저희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셨죠? 오늘은 그토록 기다리던, 새로운 알파가 오는 날입니다.

아직 가까워지지 않은 배에서 최 PD가 확성기로 말했다. 최 PD옆에 서 있는 사람은 뒤돌아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타이밍도 참......."

기다리기는. 다들 새로운 알파가 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대수가 낚싯대를 손보다가 흙이 잔뜩 묻은 제 셔츠를 털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자, 후드득 하고 떨어지는 모래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의 시야에 뱃머리 쪽에서 등을 기대고 서서, 천천히 섬으로 다가오고 있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실루엣은 대수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아...... 씹......"

제 눈을 의심한 대수가 해안가로 걸어가자, 다른 사람들도 영문을 모르는 채 그를 따라갔다. 민성은 이미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경악스러운 표정이었다.

“저 새끼가 왜 저기 있어.”

"형! 누구......? 아는 사람이에요?"

노을을 등지고 오는 사람의 모습에 태오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쳐다봤지만, 새까만 인영만 보일 뿐 사람의 얼굴은 보이질 않았다.

욕을 짓씹은 대수에게 물어봤지만, 대수 역시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던 와중, 뒤통수만 보이던 사람이 몸을 돌려 앞을 보고 섰다.

그제야 새로 온다는 알파의 얼굴을 정면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오는 걸 지켜보고 있던 모든 사람이 할 말을 잃었다. 그건 단솔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한지수.......”

"......저거 한지수 아니야?"

“설마......."

“지수 형......."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옷을 입은 남자는 지수였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배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빠르게 다가왔다.

배가 해안가에 도착하자, 지수는 바지 밑단을 걷어붙이더니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선 해안가에서 내려 걸어왔다.

“반가워요. 새로 온 알파, 한지수입니다."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는 표정에는 잔뜩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알파에 힘을 주어 말하는 지수의 소개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멍해진 사람들 사이로 깍깍거리는 새소리만이 들려왔다.

침묵을 깬 것은 대수였다.

“......미친 새끼."

“다들 잘 지냈어?"

탈락 전보다 살이 조금 빠진 듯 더 날카로워진 지수가 인사를 건네자, 대수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알파라뇨......?"

“한지수 씨가 왜 알파입니까?”

지수가 기자 회견을 할 때 출연자들은 무인도에 들어와 있었다.

지수가 알파라는 사실을 일찍이 알고 있던 대수와 민성, 그리고 얼마 전에 알게 된 단솔과 태오를 제외하고 민혁, 이연, 두현은 도대체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는 듯 보였다.

“나 원래 알파야. 사람들 속이고 섬으로 도망 왔어. 좀 있다가 가도 괜찮지?"

지수는 예전 모습 그대로 능글거리며 아직까지 멍하니 있는 민혁에게 윙크했다. 알파 오메가 따위가 별로 중요해지지 않은 시대이긴 했지만, 지수는 마치 MBTI를 구분하듯 너무도 쉽게 이야기를 꺼냈다.

"야! 한지수! 너 최 PD한테 뭐라도 대 줬어? 프로그램이 이래도돼? 나 이거 가만히 못 있어. 정식으로 항의, 아니 이 방송국 고소할거야!"

“하민성."

“왜!”

“미안하게 됐다.”

"뭐?"

“밖에 나가 보면 알겠지만, 너무 충격받을까 봐 미리 말해 줄게. 사람들이 너 보고 알파 좋아하는 알파 새끼냐 그러더라고."

물론, 형질 차별 금지법이 생기면서 동형 결혼이 합법화되었긴 했지만 알파와 알파, 오메가와 오메가가 만나는 게 자연스러워질 정도로 인식이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알오매치 서바이벌만 하더라도 제목부터 선입견이 분명한 프로그램이었다.

“뭐?! 이 개새끼가!"

주섬주섬 코를 만지던 민성이 화가 나 지수에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지수가 여유롭게 피하는 바람에 민성이 오히려 모래사장에 처박혔다.

“아 참, 너 그 함부로 주먹질하고, 성질부리는 거...... 이제 못 해."

"뭐?"

“너희 회사가 빵빵하게 돈 먹인 방송국 사장님. 너무 많이 처먹었는지 배 터져서 돌아가셨대요. 어떡하냐? 그 양반 없으면 너 막아줄 동아줄도 없잖아?"

“그게 무슨......!”

“못 알아듣겠어? 네가 지금 여기서 말하는 거, 행동하는 거 하나도 편집 안 하고 다 나간다고.”

섬에 들어오기 전, 지수는 지금까지의 알오매치 서바이벌을 전부 모니터링했다. 재미있는 지점은 유독 카메라 의식을 하지 않고, 제가 원하는 대로 다 하던 민성이 방송에선 꽤 괜찮은 인간으로 그려진다는 사실이었다.

어찌나 자르고 붙였는지 오죽하면 민성이 이야기하는데 민성이 박수 치는 오류 장면이 방송에 잠시 나와 화제가 될 정도였다.

“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돈 먹인 건 너겠지. 알파라고 공공연하게 기자 회견까지 해 놓고, 다시 캐스팅됐다고?"

들리는 소문에 민성의 회사 대표와 알오매치 서바이벌이 나오는 방송국 사장이 대학 선후배라는 말이 있었다. 슬쩍 떠봤는데, 벌컥 화를 내는 걸 보니 진짜인 듯했다. 민성은 참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다시 화를 내는 민성에게 지수가 웃으며 말했다.

"난 기자 회견했다고 말한 적 없는데."

지수가 민성이 보란 듯 자신의 핸드폰을 흔들었다.

“혹시...... 핸드폰 같은 거 갖고 있는 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지키라고 있는 규칙인데.”

지수의 말에 민성은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춘몽각에서야 단솔을 제외하곤 다들 암암리에 다른 핸드폰을 들고 있었지만, 무인도는 아니었다. 최 PD의 지시에 따라 로봇처럼 움직이는 B 팀 PD가 공항에서나 쓰는 감지기로 소지품을 싹 걷어간 뒤였다. 이런 상황임에도 핸드폰을 갖고 있다면 누군가의 조력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그...... 그냥 추측한 거지!"

“제발 추측이길 바랄게."

지수는 제 핸드폰을 끄곤, 최 PD에게 건넸다. 이제 지수 역시 무인도에서 남은 시간을 보낼 준비가 끝난 셈이었다.

단솔은 그런 지수의 등장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안 그래도 어색한 사람들투성이에 회귀자일지도 모르는 민혁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지수까지 다시 돌아오다니.

필연은 반복이라면서, 그것도 다 믿을 말은 아닌 듯했다. 당최 회귀 전 삶과 반복되는 게 없으니 전략을 짜도 확신이 없고, 그마저도 변수가 많았다.

단솔이 고민에 빠진 사이, 근처에 있던 대수가 지수에게 다가왔다.

“나 좀 보자.”

올 게 왔다는 듯 지수가 대수의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단솔은 괜히 울적해졌다.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지수의 얼굴을 보자,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반가웠다. 원래의 지수라면 금방이라도 제게 다가와 사과를 하든 뻔뻔하게 인사를 하든 아는 척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수는 단솔을 슬쩍 내려다보더니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못 본 체하고 대수와 사라져 버렸다.

그동안 잘해 줬던 건 그냥 오메가처럼 보이기 위한 연막이었던 걸까.

단솔은 충격에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지수와 대수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역시, 너무 많이 멀어져 버린 기분이었다.

***

"은퇴하겠다며, 네가 왜 여기 있어."

“오...... 정대수, 나의 은퇴를 은근히 바랐나 봐?”

“장난칠 기분 아니야. 도대체...... 뭔데?”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은 대수의 기세에 지수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하나.

“최 PD가 부른 거야? 안 오면 고소라도 하겠대? 시청률이라면 환장한다더니...... 넌 돌아가. 내가 최 PD한테 말할 테니까.”

"그런 거 아니야."

"뭐?"

“내 발로 온 거야. 최 PD가 찾아오긴 했지만, 이건 내 의지야.”

지수가 바위에 걸터앉더니 담배를 집어 물었다. 섬에 들어오면서 용케도 담배는 챙긴 모양이었다.

"방송 나가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데...... 근데도 왔다고?"

“할 일이 있었어. 그래서 이 프로그램이 필요해,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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