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74화
게임 미션 때문에 오히려 더 어색해진 공기에 아무도 저녁 식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잠들었다.
두현이나 민성은 중간에 자기들끼리 라면이라도 끓여 먹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질 못하고 움직였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한데, 피곤함이 먼저였는지 다들 침낭에 들어가 금방 잠들었다.
원래도 불면증이 심해 일찍 잠을 못 자는 데다가, 배까지 고팠던 단솔은 초저녁부터 누워 있자니 꼭 벌을 서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오메가라고 배려해 준 덕에 두현과 함께 동굴 안쪽에 자리를 잡은 단솔은 꾸물꾸물 애벌레처럼 침낭을 빠져나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나와야 했기에 동굴을 빠져나오는 데 30분이나 걸렸다.
“휴...... 다들 배도 안 고픈가."
배가 고프다 못해 아프기까지 한 단솔은 아까 전 산딸기가 있었던 산길로 자박자박 걸어갔다. 다행히 달이 밝아 길이 그리 어둡지 않았다. 달빛을 따라 산길을 걷던 단솔은 생각이 많아졌다.
어느새 산딸기나무 아래에 도착한 단솔은 숨어 있는 딸기를 따 먹었다. 제 계절이 지나 볼품없고 크기도 작았지만, 그럼에도 열매가 이렇게 달고 맛있을 수가 없었다.
“완전 거지꼴이네.......”
무인도에 오니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느라 정작 방송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단솔은 혹시 제가 오늘 카메라 앞에서 실수한 게 없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최 PD가 원한 건 정말 이런 날 것의 모습이었던 걸까.
단솔은 다시 한번 오기 전에 적었던 생존 전략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이걸로는 부족해."
주변에 있던 나뭇가지를 주운 단솔이 흙바닥 위로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알오매치 O. 난청 O. 발목 부상 O. 멤버들이랑 약간의 다툼 O.』
아, 이건 맨날 있는 일이니까 빼야 하나? 아이 씨, 몰라. 죄다 안 좋은 일만 반복되네.
필연적이라는 건 불행한 일을 말하는 걸까. 다치거나 아픈 것만 반복되는 거라면...... 혹시 저는 정말 3년 뒤에 죽는 걸까.
심란한 마음에 단솔이 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을 때 저벅저벅 단솔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단솔 씨? 거기서 뭐 해요?"
“아! 태오 씨......!"
단솔은 태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메모를 서둘러 주머니에 넣고는 흙바닥에 쓰인 글씨를 발로 지웠다.
“뭐 하고 있었어요?"
“아...... 그냥요.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와요.......”
"......미안해요. 내가 그렇게 큰소리쳐 놓고.......”
눈치를 줄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단솔은 또 시무룩해지려는 태오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저도 몰랐잖아요 문제......!"
아직 어려서 그런 걸까. 악플에는 의연하면서 문제 좀 틀린 걸로 왜 이렇게 침울해지는지. 도대체 태오의 감정을 종잡을 수 없는 단솔이 애써 화제를 돌리려 산딸기를 집어 먹었다.
“태오 씨 이거 볼래요? 이거 먹으면 입술이 새빨갛게 돼요. 뱀파이어 같죠?"
태오는 그런 단솔의 모습에 애써 웃어 보였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제가 단솔에게는 천천히 스며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단솔은 타인의 감정을 헤아릴 줄 알았다. 때로는 바보 같을 정도로 눈치를 보는 것도 같았지만, 단솔과 함께 있으면 덩치도 훨씬 큰 자신이 오히려 보호받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하지만 이제는 좀 다르게 보이고 싶은데.
"아닌데, 새색시 같아요."
태오의 말에 당황한 단솔이 빤히 태오의 눈을 바라보고 섰다. 태오 역시 단솔의 시선을 피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마주치고 있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에 자꾸만 동공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어......."
갑자기 이상해진 분위기에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단솔이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태오의 입술에 단솔은 얼른 자리를 피하기 위해 움직였다.
“모기가 많네요. 얼른 들어가 자야겠다."
“단솔 씨."
"태오 씨도 산책 적당히 하고 얼른......."
하지만 그런 단솔의 팔을 태오가 잡았다.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바들바들 떨림이 느껴지는 태오의 손길에 단솔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좋아해요."
"......."
“좋아해요, 단솔 씨.”
"...... 저는."
“지금 대답해 달라는 거 아니에요. 그냥...... 그저 친구로만 보지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나."
태오의 진지한 고백 앞에서 단솔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주변에 설치된 카메라나 마이크가 없는지 살피는 일뿐이라는 것에 슬퍼졌다.
***
“라면 이게 마지막인데, 또 안 먹어?"
"전 괜찮아요! 아까 체한 게 안 내려가서......."
“이따 물고기 잡으러 갈 거면 미리 먹어야 해.”
어제저녁 미션에서 딴 낚싯대를 손보며 대수가 묻자 단솔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오늘 오전 미션을 성공해 받은 빵은 이미 소화된 지 오래였다.
벌써 무인도 3일 차, 대수나 민혁처럼 각자 사냥과 채집에 신체 능력을 살려 완전히 적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솔처럼 계속 겉도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단솔은 겉돌고 싶어서 겉도는 게 아니었다. 동굴은 생각보다 아늑했고, 침낭도 특별히 오메가 멤버들에겐 1인 1 침낭이 지급됐으니 불편할 게 없어 겉도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역시 가장 불편한 것은 상황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날 밤 고백 사건 이후, 단솔은 태오를 피하기 위해 이른 아침 동굴을 나가, 다들 잘 시간이 되어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래 봤자 해변가나 열매를 따러 돌아다니는 게 고작이었지만, 막다른 동굴보다야 너른 모래사장이 시선 처리가 용이했다.
“소화 좀 시킬 겸 산책 좀 하다가 올게요!"
회귀 전 기억 때문에 불편한 이연과 지수의 일로 해결하지 못한 앙금이 남아 있는 대수, 갑작스러운 고백으로 어색한 사이가 된 태오까지. 불편한 사람들투성이에 단솔은 아예 식사를 거부하고 나섰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속이 많이 안 좋은가. 벌써 산책만 세 시간째예요."
민혁의 말에 태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단솔이 저렇게 기를 쓰고 밖으로 나도는 이유가 저 때문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가 보시든지요. 제가 무슨 주단솔 엄마야, 뭐야."
며칠 전만 해도 가니 안 가니, 하던 민성조차도 어느새 무인도에 적응한 듯 제대로 익지도 않은 라면 앞에 제일 먼저 앉아 얄밉게 대꾸했다.
어찌나 꼬질꼬질해졌는지, 까만 선글라스와 얼굴이 허옇게 될 정도로 바른 선크림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곳 주민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다 먹지 마요! 단솔 씨 거 남겨 놔야 하니까.”
“라면을 어떻게 남겨 놔, 다 불어 터지는데. 체했다는데 뭔 라면이야......."
단솔이 먹을 걸 마다하다니, 이례적인 일이었다.
후루룩후루룩. 결국 민혁은 민성이 설익은 라면을 요란스럽게 먹는 소리를 뒤로한 채 단솔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 모습을 다른 알파들이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
“아...... 배고파...... 이러다 정말 아사하는 거 아닐까."
산딸기마저 거의 다 떨어지고, 이어진 해안가 숲길에는 정말 먹을 거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래도 라면은 죄가 없는데. 한 젓가락만 먹을 걸 그랬나.
“아니야, 더 이상 태오 씨랑 가까워지는 건 위험해.”
연애 상대로 보자면 태오는 나쁘지 않은 상대다. 아니, 과하게 분에 넘쳤다. 하지만 단솔은 태오의 고백을 받아줄 수 없었다.
태오가 고백하는 순간, 태오에겐 미안하지만 설렘 비슷한 감정보다는 태오의 수많은 팬에게 악플과 DM 세례를 받을 걱정이 더 먼저 들었다.
태오처럼 멋있는 알파에게 고백받고 조금도 두근거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단솔은 그 감정이 무인도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느끼는 일시적인 흔들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알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호감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회귀 전의 기억 덕분인지 단솔은 누가 되었든 쉬이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 밖에 나가면 잘나고 멋진 오메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곳에선 선택지가 없으니까 저같이 볼품없는 오메가에게 흔들리는 게 분명했다.
“나까지 흔들리면 안 되지.”
황새가 타고 노는 바람에 뱁새가 휘말리면 죽을 수도 있다.
사람의 감정에도 급이 있다는 사실에 단솔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옛날에는 배고프면 나무껍질도 벗겨 먹고 그랬다던데. 무슨 맛이지......?"
한참을 앉아 있던 단솔은 다시 밀려오는 배고픔에 옆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를 만지작거렸다. 나무는 벼락이라도 맞은 모양인지 단솔이 손을 대자 바사삭하고 껍질이 벗겨졌다.
주변을 살핀 단솔이 몰래 나무 속살을 뜯어 오징어 씹듯이 씹었다. 자꾸 씹으니 단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식감이 좀 질긴 명태같기도 한데.
단솔이 한창 이갈이하는 강아지처럼 나무 씹기에 몰두해 있을 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민혁이 못 볼 꼴을 본 듯이 물었다.
“단솔 씨......? 지금 뭐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