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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73화 (73/150)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73화

“한지수 씨,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PD님 같으면 연락하겠어요? 그 난리를 피워 놓고."

최 PD는 연락이 두절된 지수와 닿기 위해 제 모든 인맥을 동원해야 했다. 마태오와의 찌라시를 해명해야 할 때는 반협박식으로 굴어도 안 받던 전화를 순순히 받고, 집 주소까지 알려 주는 걸 보니 지수 역시 최 PD에게 뭔가 부탁할 거리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 난리를 피워 놓고 이제 와서 연락을 받는 이유는......?"

“아! 성질도 급하시네....... 커피 드실래요? 아니면 주스?"

“그냥 물 줘요. 무슨 일이 있긴 있나 봐요? 한지수 씨 성격에 나한테 마실 걸 다 챙겨 주고."

“에이...... 서운한데요? 제가 또 언제는 안 챙겼다고......."

생수 한 병을 꺼내 컵에 부은 지수가 최 PD 앞에 내려놓았다. 최PD는 그 모습을 재미있는 영화를 보는 사람처럼 꽤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캐스팅하러 왔을 때, 저 여기 주차장에서 돌아갔었는데 기억 안 나나 봐요?"

“푸흡."

병에 남은 물을 들이켜던 지수가 사레에 걸려 컥컥거렸다.

“미안해요. 지수 씨는 이제 시간이 넉넉하겠지만, 내가 시간이 없어서 용건만 간단히 이야기하죠. 나는 한지수 씨가 다시 우리 프로그램에 나와줬으면 좋겠어요."

“무...... 무슨 말이에요? 제정신입니까?"

친절한 얼굴로 가면을 쓰고 있던 지수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을 본 최 PD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물을 한 모금 넘기곤 말을 이어 나갔다.

“한지수 씨 덕분에 지금 캐스팅이 안 되고 있어요. 당장 새 알파 멤버가 들어가야 하는데 아무도 안 하려고 한다고요."

"허."

지수는 기가 막힌다는 듯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핑곗거리를 찾으려면 좀 더 적당한 걸 찾으셨어야죠. 비슷한 급으로 찾으려니 없는 거 아닙니까. 눈을 좀 낮추는 건 어때요."

“아, 예를 들면 주단솔 씨 같은 망돌급으로 찾아보라는 말씀이신가요?"

"뭐라고요? 당신 지금 말 다 했어?"

지수는 최 PD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솔에 대한 노골적인 평가에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 으르렁거렸다.

"의외의 캐스팅은 한 명이면 족해요. 억지로 급에도 안 맞는 사람들 데려다가 꾸역꾸역 종영까지 만들어 내느니, 미친놈이라 욕먹는게 나아요."

“안 합니다.”

“어차피 몇 년쯤 쉬다가 적당히 이미지 쇄신할 영화 한 편 하고, 토크 쇼 나와서 눈물 찔끔 흘리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활동할 거잖아요."

“아뇨, 정말 은퇴할 겁니다.”

“그렇게는 안 될걸요. 원래 대중의 관심이라는 게 마약 같아서, 특히 한지수 씨처럼 정상을 맛본 사람들은 특히 그 맛을 못 잊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무리수를 두는 겁니까? 대중의 관심이 고파서? 그럴 거면 PD 말고 연예인을 하지 그러셨어요."

“근데 그거 알아요? 이미 한지수 씨는 은퇴하기 글렀어요. 해외에 나가도 다들 알아보는데 언제 어디선가 몰카 찍혀서 한지수 근황으로 떠도는 것보단, 제대로 카메라 앞에서 맞서는 게 나을 텐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합니다. 바쁘시다면서 이제 막 은퇴한 일반인 걱정까지 해 주시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제 예상보다 더 단호한 지수의 반응에 최 PD는 눈썹을 으쓱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꾸역꾸역 제안한 사람치고는 가벼운 몸짓이었다.

“그래요. 이렇게 싫다는데 싫다는 사람 붙잡아서 뭐 해. 물 잘 마셨어요."

가뿐하게 일어나 현관으로 향하던 최 PD가 빙그르르 돌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안 궁금해요? 내가 왜 쟁쟁한 스타들 모셔 놓고 주단솔 같은 생신인을 캐스팅했는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아까부터 최 PD는 단솔을 주제로 지수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마치 그의 약점이 어디인 줄 안다는 듯이.

"빌런이 필요했어요, 지난 시즌 찰스처럼."

찰스는 지난 시즌 알오매치 서바이벌에서 악마의 편집으로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진 뒤 자살 소동을 벌이고, 최 PD를 고소한 출연자였다. 애초에 호감, 비호감을 따지기도 애매한 무명에 가까운 아이돌이었다.

“억울한 척은 했지만, 솔직히 조금 의도한 점은 인정해요. 어차피 인지도도 거의 없었으니까 조용히 묻힐 줄 알았는데 그렇게 극단적으로 굴 줄은 몰랐지, 나도."

지수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최 PD는 수습이라도 하듯이 사족을 붙였다. 하지만 그 발언이 더욱 지수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면 이번엔 단솔을 그렇게 만들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래서, 이번엔 단솔이를 그 사람처럼 만들겠다는 겁니까?”

“솔직히 나도 자신 없어요, 수위 조절할 자신이. 특히나 이번엔 지난 시즌보다 더 공들여 캐스팅해서 모셨는데, 그 사람들을 빌런으로 만들 수는 없죠. 애초에 희생양으로 고른 게 주단솔이에요. 물론 한지수 씨가 하도 싸고도는 바람에 의도대로 풀리지는 않았지만."

사실 최 PD는 순전히 지수를 도발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지수가 단솔을 챙기지 않았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최PD는 이미 첫 촬영 직후부터 단솔이 이번 시즌의 신데렐라가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마스크가 기대 이상으로 뛰어났고, 신인 주제에 흐름을 읽는 눈치도 있었고, 때로는 대담한 결정을 내리는 게 몸 사리기 바쁜 톱스타들보다 나을 때도 있었다.

“허...... 이제 보니...... 그게 최 PD 방식이군요. 악랄하기 짝이 없네요."

“네, 이게 제 방식이에요. 괜히 사람들이 저를 악마의 PD라고 부르겠어요?"

“그딴 사족 집어치우고 본론만 말하시죠? 원하는 게 도대체 뭡니까."

“이미 말했잖아요. 한지수 씨를 다시 캐스팅하고 싶다고. 주단솔이 빌런이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한지수 씨가 직접 와서 대신 빌런이 되면 되겠네요."

단솔을 미끼로 내건 것은 순전히 최 PD의 도박이었다. 한지수가 알파라는 사실을 기자 회견에서 밝히자마자 최 PD는 그간 단솔에게 보였던 한지수의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저 막내에, 인지도 없는 신인을 챙겨 주곤 따듯하고 인간적인이미지를 챙겨 가려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쩌면, 알파 말고 오메가랑 데이트하면 안 되냐고 물었던 게 우스갯소리 안에 진심을 담은걸지도 몰랐다.

그런 최 PD의 촉이 들어맞았는지, 소파에 등을 기댄 지수는 한참을 고민하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댔다. 애초에 한지수는 거절할 일이라면 고민조차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방송국이랑은 협의된 거 맞습니까?”

“그럼요, 저희 국장님이 저에게 알아서 하라고 하셨는걸요."

"스케줄은 내 개인 번호로 전화해서 잡아요. 지금 있는 회사에 계약 해지 통보해 놓은 상태라 그쪽에서 알면 시끄러워질 수 있어요."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죠.”

***

ㅡ여러분 잘 지내고 계셨나요? 6시 미션 시간입니다.

―따듯한 보금자리가 어느 정도 마련된 모습을 확인하고 얼마나 감격했는지요!

-도시의 편리한 삶에만 익숙해져 있던 여러분이 이렇게 자연 속에 융화되는 모습을 보니 이런 미션을 기획한 저희 제작진도 참으로 뿌듯했답니다!

어김없이 여섯 시가 되자, B 팀의 PD가 스피커와 함께 배를 타고 등장했다.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 건지, 그들은 아마도 어디선가 모니터를 두고 출연자들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여러모로...... 자연과 융화된 모습이긴 하네요."

울긋불긋하게 티셔츠에 산딸기 물이 든 태오와 단솔은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오느라 머리가 산발이 되었고, 민혁과 대수는 아예 웃통을 벗은 상태였다. 이연이 입고 있던 셔츠는 언제 찢어졌는지 팔 한쪽에 구멍이 나 있었다.

잔뜩 성이 난 근육을 자랑하듯 구릿빛 몸매를 뽐내고 있는 대수와 민혁에게 태오가 다가가 물었다.

“옷은 어쩌고...... 이렇게 타잔처럼 있는 거예요."

“아, 화로 작업하고 짐 옮기다가 대수 씨랑 나랑 개울에 빠졌어요. 감기 걸릴까 봐 말려 놓느라 옷을 못 입고 왔네요."

단솔은 마르고 하얀 제 몸과 다른 그들의 몸이 신기한 듯 카메라가 안 보이는 각도에서 연신 힐끗거리며 눈을 돌렸다. 민망하긴 했지만, 언제 또 대수나 민혁의 근육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까. 그런 시선을 느낀 듯 태오가 자꾸만 단솔을 가로막고 섰다.

“형들 추우신 거 아니에요? 닭살 돋았어요! 제 옷이라도 벗어 드릴까요?"

근육이라면 저도 지지 않아 자신이 있건만, 대수와 민혁은 그런 태오의 호의를 거절했다.

“괜찮아요. 난 뛰어왔더니 더워서요."

“나도."

-오늘은 그래도 무인도에 들어온 첫날이니만큼 여러분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 준비했습니다.

-한우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 국민이 좋아하는 부위죠. 바로 삼겹살을 걸고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아까 너무 허무하게 끝난 게 아쉬워서 서로를 조금 더 알아보는 시간을 한 번 더 준비했습니다. 지금 PD님 손에는 아까 전 준비했던 필모그래피와 서로의 프로필이 적혀 있는 문제가 랜덤으로 섞여 있습니다.

-순서대로 맞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면 누구든 제한 시간 내에 문제를 맞히시면 됩니다. 저희는 정말 여러분이 고기를 드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기에 이번 게임의 제한 시간은 5초로 하겠습니다.

세 시간 만에 문제 난이도가 확 낮아졌다. 미션을 어느 정도 진행해야 방송 분량이 나오기 때문에 낮춰 준 것일 터. 온종일 움직이느라 배가 고팠던 단솔은 PD의 손에 들려 있는 두툼한 삼겹살이 너무도 먹고 싶었다.

“단솔 씨, 이번엔 꼭 고기 먹게 해 줄게요."

태오는 이번에도 단솔에게 의지를 보여 주었다. 고기를 보고 입맛을 다시는 건 비단 단솔뿐만이 아닌 듯 낮과는 다르게 비장한 분위기마저 흘렀다.

밖에 나가면, 삼겹살이 아니라 삼겹살 가게를 하나 산대도 통장잔고에 아무 이상이 없을 사람들이 거지꼴을 하고 달려드는 꼴이 이상할 법도 했지만, 단솔 역시 삼겹살의 영롱한 빛깔에 이미 홀린 뒤였다.

-자, 첫 번째 문제입니다. 저희 알오매치 서바이벌에서 힘과 체력 하면 바로 이분이죠. 정대수 씨에 관한 문제입니다.

-정대수 씨는 연예인이 되기 전,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이 운동 종목의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태오! 미식! 미식축구!"

―네, 맞습니다.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했죠. 그렇다면...... 정대수씨의 포지션은 뭐였을까요?

미식축구의 포지션이라면 단솔은 아는 게 하나밖에 없었다. 제가 좋아하는 하이틴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모두 ‘쿼터백’이었으니까.

대수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그 커다랗고 힘 좋은 서양인들 사이에서도 대수가 쿼터백을 맡을 수 있었을까.

-5, 4, 3.......

단솔을 포함한 모두가 고민하는 사이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정답! 쿼터백!"

―정답입니다!

다행히 시간이 더 가기 전에 이연이 손을 들고 문제를 맞혔다. 해안가에 부는 바람에 찢어진 이연의 셔츠가 펄럭였지만, 깔끔을 떨던 이연도 문제를 맞힌 게 즐거운 듯 셔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내가 맞출걸....... 단솔은 아는 문제를 놓친 것만 같은 기분에 잔뜩 긴장한 채 다음 문제를 기다리느라, 대수가 은근히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음 문제는 저희 알오매치 서바이벌의 맏형이죠. 하민성 씨 문제입니다.

다음 문제가 민성에 관련된 문제라는 말에 태오와 단솔의 귀가 쫑긋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민성의 아이돌 시절 문제라면 자신 있었다. 최근 들어 그를 좋아했던 과거가 조금 부끄러워지긴 했지만, 삼겹살 앞에서 자존심을 내려놓을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다.

-하민성 씨는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은 배우라는 건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하민성 씨의 할리우드 데뷔작인 이 영화, 액션 히어로 무비로 호평받았던 이 작품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5, 4, 3.......

“허.......”

제작진도 난이도가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잔뜩 사족을 붙이고 영화 속 장면까지 보여 주었지만 놀랍게도 해변가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가득했다.

5초의 시간이 다 가는 동안 유일하게 목소리를 낸 것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치는 민성뿐이었다.

ㅡ아쉽네요. 저희는 정말 고기를 드리고 싶었는데......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의 정답은 ‘스노우 데이 인 캘리포니아'입니다.

마치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PD가 제목을 말해 주었지만, 너무도 낯선 제목에 사람들은 아쉬움의 탄식조차 내뱉질 못했다.

“하...... 시발......."

그저 자존심이 상한 민성의 욕지거리만이 오디오를 메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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