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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69화 (69/150)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69화

    단솔은 촬영이 시작되기 전 어젯밤 침실에서 써 놓은 메모를 꺼내 다시 한번 살폈다.

    해명 도사의 말을 들은 뒤로 회귀 전과 후가 어떻게 달라졌고, 앞으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었다.

    왜 진작 이걸 정리해 볼 생각을 못 했을까. 연습한답시고 학교도다니는 둥 마는 둥 하느라 펜을 잡아 본 게 언제인지, 글씨를 쓰는 손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1. 욕을 먹기 시작한 것은 프로그램이 중반부를 지난 후부터.

    이제 자극적인 소재가 필요한 시점이다. 악편의 떡밥을 내어주지 말 것.

    2. 회차가 끝으로 치달아 갈수록 최 PD는 사람을 극한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것을 즐긴다. 어떤 미션이 나와도 당황하지 말자.

    3. 결국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장 선한 사람. 선한 척하는 사람.

    착한 말투, 착한 표정.

    언제 어디서든 카메라 주의. 잘 때도 웃으면서 자기.

    4. PD 말에 토 달지 않기. 상황이 애매할 때는 무조건 제작진 편을 들자. 어차피 편집은 제작진이 하니까 제작진에게 찍혀서 좋을 일이 없다.

    5. 구설수에 오를 수 있으니 인기 많은 연예인은 피할 것..

    마지막 항목은 어차피 자신 빼고 다 유명한 연예인이라 소용없는 짓이라 생각해 지워 버렸다.

    몇 줄 되지도 않는 항목을 단솔은 외우고 또 외웠다. 숙명이니 운명이니, 해명 도사가 알쏭달쏭한 말만 하고 사라지는 바람에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제 노력으로 바뀌지 않는 숙명, 그리고 죽을지 안 죽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두고 지금 단솔이 할 수 있는 건, 겁먹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 뭐라도 하는 것, 그리고 욕을 먹지 않고 프로그램을 끝마치는 일뿐이었다.

    안티 팬에게 쫓기다 죽었으니, 안티가 없으면 그런 일이 안 벌어지지 않을까.

    운 좋게 또 다른 회귀자를 찾게 된다면, 이런 상황을 같이 상의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단솔은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로 도대체 누가 회귀자일지 고민했다.

    왠지 도인 같은 소리를 내뱉는 민혁이 형......?

    회귀 전과 달리 저에게 친절하고 관심을 보이는 대수 선배?

    미련이 뚝뚝 남은 얼굴로 저를 보는 이연 선배.......

    아니, 이연 선배는 아닐 거야. 본인이 회귀자고, 양심이 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사과를 했겠지. 그럼 도대체 누굴까.

    “아무래도 저희...... 촬영 장소를 좀 이동해야 할 것 같아요."

    단솔이 공상에 빠져 있는 사이, 최 PD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고 늘 개인 인터뷰를 진행했던 아래 연차의 B 팀 PD가 바들바들 떨면서 전달 사항을 읊었다.

    PD는 겨우 장소를 옮기는 것뿐인데,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갑자기요? 어디로요?"

    “어...... 일단 저는 전달 사항만 읊는 거니까요...... 자세한 건 최PD님 오시면 이야기해 주실 거예요. 일단은 자리를......."

    그리고 켕기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눈을 피했다. 단솔은 어젯밤 우연히 들은 이야기도 있었고, 그간 느껴진 분위기도 있었고, 촬영장소를 이동하는 게 방송 분량 탓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번엔 데이트 없어요?"

    태오의 물음에 PD가 핸드폰 메모장에 적힌 걸 그대로 읊었다.

    “지난번 데이트권은 한지수 씨가 한 장, 그리고 나머지는 여기 계신 분들이 서로 갖겠다고 싸울 때 찢어 먹어서...... 사라졌기 때문에 이번 회차는 데이트가 없습니다.”

    PD의 말에 대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헛기침하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구해 주기만 하면 대수에게 데이트권이든, 탈락자 투표권이든 뭐든 주겠다고 한 약속이 어그러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지금 유튜버들이 개떼처럼 끓고 있어서....... 섬 자체를 통제하려고 주인이랑 연락을 취해 봤는데 도통 연락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섬 주인이요? 연락처는 있어요?"

    최 PD의 말에 민혁이 앞으로 나와 눈을 빛냈다. 탄단지를 입양하기 위해 섬 주인 연락처를 찾아 헤매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을 터.

    "어...... 있긴 있는데 그분이 외국에 있어서 연락이 안 돼요."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탄단지를 데려갈 꿈에 부풀었다가 금세 실망한 민혁을 뒤로한 채, 민성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삐딱하게 서서 PD에게 물었다.

    “아, 그러니까. 쟤네 때문에 다른 데로 가서 찍는다는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해요?”

    민성이 턱짓으로 진을 치고 있는 유튜버들을 가리켰다.

    “아...... 그러니까 저희는......."

    “간단하게 얘기하면 될걸.......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말해요. 저희 어디로 가요?"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하는 PD를 앞에 두고, 땡볕에 서 있는 게 퍽 힘들었는지 민성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재차 물었다. PD는 그제야 큰 결심이라도 한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무인도로 갑니다.”

    “에?”

    “네?"

    "무인도요?"

    PD의 말에 다들 제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무인도라니. 이 춘몽도도 무인도나 다름없는데, 또 무인도를 간다고?

    물론 회귀 전에도 산에 올라가거나 캠핑을 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야생에 던져 놓는 일은 없었다.

    해명 도사가 말한 숙명이란 도대체 뭐길래 제 앞에는 온통 변수투성이인지. 단솔은 이제 제 인생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춘몽도 옆에 딸린 작은 무인도가 있어요.”

    PD의 말에 민성을 제외한 출연진들은 설마, 하고 무인도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불안해 보이는 눈빛으로 시선을 모았다.

    “저희는 거기서 생존 게임을 합니다.”

    “미친 거 아니야? 이거 연애 서바이벌이라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화를 내는 민성에게 PD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 외 출연진들은 담담했다. 아니, 그보다는 올 게 왔다는 듯이 체념한 것에 가까웠다.

    “네! 에...... 그렇긴...... 하죠. 근데...... ‘연애......! 서바이

    벌!! '이죠."

    PD는 연애보다 서바이벌을 강조해 말했다. 민성은 마치 놀림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올 게 왔구나.

    단솔은 제가 어젯밤 종이에 적었던 1번 항목을 떠올렸다. 자극적인 소재가 필요한 시점.

    사실, 알오매치 서바이벌은 '연애'가 아니라 '서바이벌'에 방점을 찍은 프로그램이었다. 초반엔 여느 연애 예능처럼 설레고 풋풋한 모습으로 어필하지만, 최 PD는 뒤로 갈수록 극한 상황에 알파와 오메가를 몰아넣고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가볍고 하찮은 것이었는지 보여 주었다.

    물론,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빛이 나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그 자리가 주는 이미지를 노리고 출연했던 출연자도 많았고.

    "하, 일단 카메라 좀 꺼 봐요. 이 프로그램 원래 이런 콘셉트 아니잖아!"

    초반엔 예능판 영상 화보집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을 내보내는 게 특징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진다.

    지난 시즌엔 빙판 위에서 얼음집을 짓고 살게 하거나, 바다 한가운데 떨어진 배 위에서 생활하게 하는 등, 기발한 발상으로 독한 모습도 많이 보여 준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민성은 촬영 전 모니터를 앞부분만 한 건지, 소속사에서 들은 게 없는 건지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전개에 카메라도 의식하지 못한 채 길길이 날뛰었다.

    “아니......! 씨, 한지수 없다고 이래?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

    고......."

    민성은 순식간에 단솔이 작성한 생존 법칙 1, 2, 3, 4번을 모두 어기고 있었다. 민성이 화를 내는 사이, 단솔은 볼펜을 꺼내 지워진 5번 항목에 새롭게 추가했다.

    『5. 5. 구설수에 오를 수 있으니 인기 많은 연예인은 피할 것. 하민성과 가까이하지 않기.』

    B 팀 PD는 최 PD에게 도대체 무슨 지령을 받았길래 겁에 질려 말을 더듬으면서도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걸까.

    “어...... 그건...... 최 PD님께......."

    “하...... 나는 둘째 치고 회사랑 상의도 없이 이러면 안 되지. 최PD 어디 있어?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출연진 전원 회사랑 협의 됐어요!!"

    “그래, 협의를 해야! 협의가 됐다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내가 동의를 안 했는데!"

    당당한 PD의 말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민성이었다. 컴백이 예정된 태오, 영화 개봉을 앞둔 이연, 제 연예인을 온실 속 화초로 생각하는 대수까지. 그들의 사장을 설득하는 데 애를 먹기는 했지만, 결국 무인도행에 모두 동의했다.

    모니터링과 사전 미팅에서 오간 대화로 프로그램의 성향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협상이었다.

    게다가 민성의 회사 매니저는 민성이 일주일간 무인도에 갇힌다는 사실에 덩실덩실 춤까지 췄다. 평소 오죽 협조를 안 했으면 회사에서도 이런 반응을 보일까.

    "네! 하민성 씨는 매니저분 통해서 회사 측과 협의 끝났어요! 자, 여기...... 매니저님이 그래도 차기작이 로맨틱 코미디라고 선글라스랑 선크림은 꼭 챙기시랍니다. 원래 다른 분은 개인 소지품이 허용되지 않지만, 하민성 씨만 특별히 허용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이 부분은 모두 양해를......."

    “이런 씨......! 최 PD! 어디 있냐고 !!"

    제작진들은 이미 입을 맞춘 것처럼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모두가 작당 모의했다는 사실에 민성은 최 PD를 찾아 댔다. 하지만 이미 지난 새벽 섬을 나간 최 PD가 대답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기실, 최 PD가 섬 밖으로 나간 건, 새 멤버를 섭외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내정된 사람이 있었지만, 최 PD가 연락하자 모두 영화부터 해외 스케줄까지. 없는 스케줄을 만들어 핑계를 대기 일쑤였다.

    프로그램이 방송의 절반을 넘어선 상태에서 시즌 통틀어 가장 뜨거운 논란을 빚어 내고 있는지라, 이번 시즌은 누구도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았다.

    게다가 지수의 다음으로 들어오는 알파는, 우성 알파만 득시글한 춘몽도에 들어와 얻을 실익이 없었다.

    삑!

    “지금부터 선착순으로 무인도에서의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B 팀 PD는 최 PD의 지시 사항을 아주 충실하게 이행하는 사람이었다. 민성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PD의 호루라기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민혁과 대수였다.

    운동선수 출신의 순발력이 발휘된 순간이었다.

    “야! 진짜 이 말도 안 되는 촬영을 한다고? 이렇게 뛴다고? 이거 지금 제작진한테 말리는 거야!"

    민성은 이 말도 안 되는 촬영에 참여하면 안 된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두 사람은 이미 오래 전부터 훈련된 선수처럼 달려가 각각 불과 물을 집어 든 후였다.

    단솔은 당황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가는 두 사람 중 한 명이 회귀자인 게 아닐까 고민하느라 뒤늦게 대수의 뒤에 합류해, 라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태오, 이연, 두현도 얼떨결에 뛰어들어 칼과 침낭, 에너지바를 집어 들었다.

    민성 홀로 여전히 아무것도 집어 들지 않은 채 항의하고 있었다.

    “아니! 다들 미쳤어?"

    출연만으로도 득을 볼 단솔과는 달리, 연차와 인지도가 이만한데 무인도에 가고 싶지 않은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들은 민성과는 달리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봤을 뿐.

    “빨리 핸드폰 내놔요. 나 소속사랑 전화해야겠으니까! 카메라 꺼!"

    하지만, 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최 PD가 넘기고 간 똥을 맡은 B팀 PD의 눈이 민성이 보지 않는 사이에 초연하고 조용하게 돌아 있다는 것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잔뜩 겁먹어 있던 B 팀의 PD는 민성이 날뛰는 뒷모습을 보며 도리어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단솔의 팔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저건 겁에 질리기는커녕 덫에 걸린 사냥감 보는 듯한 흐뭇한 미소였다.

    그제야 왜 사람들이 방송국 놈들은 아무도 믿지 말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저 PD는 지금 약한 사람에게 더 큰소리치고 화내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자극하고 있었다. 출연진의 반응이 두려워 겁먹은 게 아니라, 그런 척하며 이 순간에도 악편에 써먹을 장면을 뽑아내는 것이다. 지독한 방송국 놈들.

    당연하게도, PD는 민성의 고함 따위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 밧줄 안 쓸 거면 내가 가져도 됩니까?”

    모니터링도 안 하고 들어와 떼쓰는 민성 때문에 땡볕 아래서 덩달아 대기하는 게 피곤하고 짜증 났던 대수가 무심하게 물었다. 그러자 민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누가 안 한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5성급 호텔 침구에서 일어나 온갖 대기업의 협찬으로 범벅된 춘몽각에서 여유를 부리던 출연진들은 버스에 실려 선착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동 중에도 유튜버들이 좀비처럼 달려들긴 했지만, 버스에 선팅을 어찌나 진하게 해 두었는지 출연자들은 머리카락 한 올도 노출되지 않은 채 이동할 수 있었다.

    제작진들은 그에 그치지 않고 연예인 차라고 불리는 밴을 뒤따라 출발시켜 시선을 분산시키기까지 했다.

    “어째...... 분위기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 같네요."

    민혁의 말에 태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꼭 범죄자가 돼서 이송당하는 기분이에요."

    “그걸 아는 사람들이 호루라기 불자마자....... 난 끝까지 항의했어야 한다고 봐. 이 프로그램에서 하자고 하는 대로 다 따라갔다간, 배우 이미지 박살 난다고."

    누가 본다고 무인도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선글라스를 포기하지 못한 민성의 말에 단솔이 용기를 내어 반박했다.

    “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해요."

    "뭐?"

    좀처럼 자기 의견을 낸 적이 없던 단솔의 말이라,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단솔은 마른침을 꾹 삼켰다.

    “최 PD님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걸 좋아하시잖아요....... 극한 상황에서 누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끌어내는 거죠. 꼭...... 알파 오메가끼리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인류애나 이런 데서 오는 감동의 가치를 높이 사서요."

    생존 전략 4번.

    단솔은 최대한 눈을 착하게 뜨고서 제작진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장면이 방송에 나가든 안 나가든, 어차피 편집은 제작진이 하기에 그들은 단솔의 이 발언을 인지할 테니, 최대한 그들의 편에서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

    지난밤, 밤을 새워 고민한 보람이 있었다.

    한순간에 국민 욕받이가 되어 집에만 처박혀 살던 시절, 질리도록 보았던 각종 연애 예능과 포털의 반응을 조합한 전략에 단솔은 진심으로 뿌듯해하고 있었다.

    물론, 노트에 그걸 하나하나 써 내려가면서 이연과 두현 사이에서 빌런으로 이용당해야 했던 지난날을 떠올리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는 방송을 몰라도 너무 몰랐었다. 어리고 의욕만 넘쳤던 단솔은 방송국 놈들이 이용해 먹기 딱 좋은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순순히 당해 줄 수 없지.

    “어, 맞아! 박현진 씨도 지난 시즌에 얼음집 지어서 유명해졌잖아요! 구멍 뚫어서 빙어 잡아먹고! 그래도 우리는 한겨울도 아니고 이제 막 가을인데 괜찮지 않을까요?"

    태오의 말에 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밌겠네요. 원래도 최 PD 기획력 하나는 인정하잖아요, 요즘 안 그래도 사람들 많이 떨어지고 분위기도 안 좋았는데. 오히려 재밌을 수도 있어요."

    민성의 마음을 풀어주려 하는 말이었지만, 오히려 민성은 그 말이 언짢았는지 괜히 태오와 민혁을 째려보며 말했다.

    “재미는 무슨...... 우리가 개그맨도 아니고, 애초에 예능에서 인기 얻는 건, 너희같이 인지도 떨어지는 애들이나 필요한 거겠지.”

    요즘 제일 잘나가는 아이돌과 싱어송라이터를 한꺼번에 무명으로 만들어 버린 민성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순식간에 차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인지도는 본인이 제일 낮지 않나."

    그때까지도 눈을 감고 자는 줄 알았던 대수가 고개를 들어 조용히 말했다.

    “할리우드 진출한다고 국내 활동 안 한 지 꽤 되는 걸로 아는데. 어차피 우리 다 여기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제작진 의도에 좀 따라줍시다. 그래 봤자 예능인데, 뭘 그렇게 따지고 들어요. 피차 피곤하게."

    예능으로 이미지 변신해 비슷한 콘셉트가 이어지는 걸 방지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물론 무인도라면 다른 예능보다 배로 힘들겠지만, 제가 하기에 따라 더 많은 것을 얻어 갈 수도 있다.

    시기를 놓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민성에게 가장 필요한 기회인데 그 연차로 이 정도 계산도 안 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연예인 병에 단단히 걸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다.

    "뭐?"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냥 갑시다. 정 못마땅하면 네가 PD 하던가."

    "갑시다? 네가? 하던가?! 이게 진짜! 넌 이제 선후배도 없어?”

    "그게 없었으면 그쪽이 아직도 떠들지는 못했겠지."

    대수의 살벌한 눈초리에 위축된 듯 민성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심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대수에게 덤빈 민성의 최후가 궁금했던 태오가 말리려던 단솔을 붙들었을 때였다.

    “도착했습니다."

    버스가 끼익 소리를 내며 정차한 뒤 문이 열렸다. 기사가 도착 사실을 알리자 태오가 단솔에게 귓속말했다.

    “아쉽다...... 연예인 병은 한 대 맞아야 낫는다던데.”

    그 말에 단솔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진작에 나았겠죠. 민성이 형 데뷔가 몇 년 찬데.......”

    “그러게요...... 저 진짜 민성이 형 팬이었는데, 이젠 팬이었던 과거까지 수치스러워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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