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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68화 (68/150)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68화

    해명 도사는 대수의 기에 눌린 듯 연이어 앉은 민혁과 태오에게는 누구나 할 법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웃으면서 다가오는 사람을 조심하라든가, 물을 조심하라는 뻔한 말에 단솔 역시 점점 흥미를 잃어 가던 찰나였다.

    "흠...... 묘하네 관상이."

    차례가 되어 앞에 앉은 이연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쳐다보던 해명도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엔 선녀라도 들어온 모양인지 그의 입에선 가느다란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악연이 붙었어. 네가 정리 못 하면 다른 사람들이 다친다."

    "네......?"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선택은 없어. 한번 마음먹었으면 그냥 밀고 나가."

    “좀 자세히 말씀을......."

    그 말을 듣자마자, 이연의 뇌리에 두현과 단솔의 얼굴이 지나갔다.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꼭 이연의 고민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이연을 보며 연신 헛기침을 한 해명 도사는 시계를 흘끗 보고는 그를 가차 없이 쫓아냈다.

    “다음!"

    단솔이 쭈뼛거리며 해명 도사의 앞에 앉았다. 그는 이번에도 게슴츠레한 눈으로 단솔을 보더니 한참을 고민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하는지, 조용한 촬영장에 시계 초침 소리까지 들렸다. 혹시 그가 눈을 뜨고 자는 건 아닌가 싶어 PD가 나서서 해명 도사를 부르려던 그때였다.

    “......이번에도 그리 살 건가."

    이번에는 중저음의 나이 든 남자 목소리였다. 단솔은 직감적으로 해명 도사가 모시는 신 중 가장 높은 신이 아닐까 싶었다. 틀린 짐작일 수도 있지만, 이전과는 분위기도 무게감도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뻔한 말만 늘어놓던 앞선 점괘에 피식피식 웃던 사람들이 무게감있는 음성과 예사롭지 않은 말에 조용해졌다.

    앞뒤 없이 뱉은 말에는 뼈가 있었다. 단솔은 당황했다. ‘이번에도’라니. 그는 마치 단솔이 회귀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네?"

    “기껏 죽다 살아났는데, 또 그리 살 거냐 물었어.”

    "어...... 저는 저기......."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 사람은 단솔이 회귀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놀란 단솔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는 마치 마침표를 찍듯 단호하게 말했다.

    단솔은 혹시나 그 말에 제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들킬까 봐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워낙 믿기 힘든 일이라 그런지, 다들 도사의 표현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두 번째가 마지막이야. 세 번 기회는 없어.”

    "오...... 어...... 그게 무슨......."

    "다음!"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엉거주춤 일어난 단솔이 제자리로 가자, 민혁이 단솔에게 조용히 물어 왔다.

    “단솔 씨, 죽다 살아났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민혁의 말에 다들 그게 궁금했던지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제가 진짜 죽었다가 살아났거든요!'라고 말할 수도 없고.

    단솔은 대충 얼버무렸다.

    "그...... 저희 팀이 이 프로그램 덕분에 조금 주목받기는 했지만, 완전히 묻힐 뻔했잖아요.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하라고...... 저렇게 말씀해 주신 것 같아요."

    “아아.......”

    민혁은 물론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설명에 납득이 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게 그 말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다는 말보다는 더 진짜처럼 들리겠지.

    "다음 없어?! 시간 없으니까 후딱 나오라고! 왜 안 나와?! 내가 사주를 받은 건 2명 더 있는데.......”

    해명 도사는 제작진에게 미리 받아 둔 생년월일이 적힌 종이를 펄럭거렸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카메라가 무섭지도 않은 건가. 카메라 앞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성실한 척하던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두 사람은 아파서 못 온대요, 도사님! 그러지 말고 저나 좀 더 봐 주세요! 물을 왜 조심해요? 저 수영도 잘하는데! 언제 어디서요?"

    태오가 답답한 듯 해명 도사를 붙잡았지만, 그는 먼지를 털 듯 태오의 손을 탈탈 털어 뿌리치고 나가 버렸다.

    "그냥 조심해! 아무 물이나 다 조심하라니까!"

    ***

    “큰일 났네 이거...... 쓸 게 없어."

    “확실히 한지수 없으니까 분량이 안 나오네요."

    “한지수가 싸가지는 없어도 예능감은 좋았지. 별생각 없이 툭툭 뱉은 멘트로 지나가는 장면들도 다 살리고."

    “유두현은 아직이래? 손가락 좀 베인 거 가지고 너무하는 거 아니야?"

    “지금 매니저랑 통화했는데 들어오는 중이래요!"

    낮 촬영이 됐든, 밤 촬영이 됐든 종일 카메라를 돌렸는데도 쓸 만한 촬영본이 없는 듯 PD와 작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나, 프로그램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껴진 것은 단솔의 기분 탓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괜히 그게 제 탓처럼 느껴진 단솔이 현관 밖으로 나와 스태프들의 눈에 띄지 않게, 기둥 뒤에 쪼그려 앉았다.

    촬영을 진행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 은근히 쌀쌀한 바람이 부는 날씨인데도, 대문 밖은 유튜버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단솔은 그들이 담장을 넘어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둥에 더 몸을 붙인 채 납작하게 몸을 말았다.

    “두 번 산다고 쉬운 게 인생이 아니지."

    공벌레처럼 구겨진 단솔의 눈앞에, 한복 자락이 펄럭였다. 해명도사였다.

    “아...... 아직 안 가셨네요?"

    “아직 자네 대답을 못 들었네. 또 그렇게 살 거냐고 묻지 않았나."

    “네?"

    “아직도 회피하고 도망만 치고, 자네 무시하는 사람한테 한마디도 못 하고, 굽실거리면서 두 번째 생을 살 건가 이 말이야.”

    “......저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두...... 두 번 살고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감히 신령님을 속일 수야 있겠나. 발뺌해도 소용없어. 애초에 자네 사주가 하도 신기해서 온 거니까. 내 평생 이 길을 걸었지만 그런 사주는 처음이더군."

    기실, 해명 도사는 방송 노출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미 여의도와 강남 일대에는 그를 만나기 위해 1년 이상을 대기해야 하는 사람이 깔리고 널려 있었다.

    그런 그가 방송 출연을 받아들인 것은 순전히 단솔 때문이었다.

    원래는 제작진에게 사주를 받아서 풀이만 보내는 걸로 합의가 됐지만, 단솔의 사주를 보는 순간 얼굴을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을 사는 사주라니.

    해명 도사 자신 역시도 어릴 적 스승에게 전해만 들었던 경우였다.

    “나야 뭐, 내가 알아서 아는 건 아니고 신령님께서 알려 주시는 거지. 다신 그렇게 살지 마. 아까도 말했지만, 착하다고 해서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 건 없어. 딱 두 번째가 끝이니까.”

    “제가 뭘 어떻게......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전 왜 돌아온 거예요? 어떻게 해야.......”

    방금까지도 제가 회귀자라는 걸 극구 부인하던 단솔은 어차피 자신의 거짓말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뭐라도 얻어 내야 했다.

    단솔은 급기야 그의 팔에 매달렸다.

    “예전처럼 안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정말 몰라서 그래요......! 한 번만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정말 회귀 전처럼은 살기 싫은데, 자꾸만 제 운명을 반복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한 번 살아본 인생이지만 변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만화나 영화에서 본 회귀자들은 능력치도 높고 복수도 단칼에 하던데, 단솔은 능력도 없는 주제에 마음이 약했다. 그래서인지 들끓던 복수심이 점점 흐려졌다. 회귀 전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과 멤버들.

    제 감정만 생각하면 화가 나고 서럽다가도,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난 뒤에는 혼란스럽고 외롭기만 했다. 단솔이 회귀 전 겪었던 고통은 오로지 단솔만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솔이 꽉 붙잡은 손을 애써 뿌리치던 그는 별안간 버럭 화를 냈다.

    “아! 다 알려 줘도 모르겠다고 하면 어떡하나! 으휴.......”

    “그...... 그래도.......”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걸린 단솔은 그의 호통에도 꽉 잡은 옷자락을 놓을 줄 몰랐다. 그래 봤자 스물세 살, 그것도 유년 시절 대부분을 연습실에서만 보낸 단솔이 홀로 해결하기엔 너무도 벅찬 상황이었다.

    늘 외롭게 망망대해에 떨어져 있는 것 같았던 제게 해명 도사는 표류 중 만난 등대였다. 어쩌면 이 무속인이 제 인생의 정답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어.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네 번 다시 태어난대도. 네 노력으로 바뀌는 것들이 있지만, 그 운명의 영역까지 힘을 쓸 순 없어.”

    그 말에 단솔의 머릿속에 지난 과거와 회귀 후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비슷하게 반복되는 듯 미묘하게 틀어졌던 상황들에 오히려 생각이 더 복잡해졌다.

    꼭 일어나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이번 삶에서 아예 처음 겪어 본 일도 많았기에 더 혼란스러웠다.

    단솔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떤 일은 반복되고, 어떤 일은 처음 겪는 일이에요. 이렇게 반복되는 이유가 뭐죠? 제가 뭘 준비하면 될까요."

    "주로 필연적인 일들이 반복될 거야. 예를 들면, 네 인생을 바꿔 놓는 순간들 말이야. 사람들은 그걸 필연이나 운명 따위로 부르지. 그건 정해진 숙명이다."

    인생을 바꿔 놓는다니...... 그런 순간이 뭐가 있지. 인생이 어떻게 바뀐다는 거지.

    머리가 아플 정도로 그 말을 곱씹고 생각해 보았지만, 회귀 전의 상황처럼 반복됐던 순간에는 아무런 규칙성이 없었다.

    회귀 전과는 다르게 짝 피구를 하고, 발목을 접질린 채로 산에 올랐던 게 내 인생을 좌우하는 순간이었다고?

    단솔이 고민하는 사이, 해명 도사가 대문 쪽에 서 있는 차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솔은 그를 다시 붙들고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그럼...... 하나만 더요. 저...... 혹시...... 이번 생에도 그렇게 죽게 되나요?"

    아무래도 인생을 바꾼 순간이라면, 제가 죽던 날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하나 물어보지. 자네 당장 내일 다시 죽는다고 하면, 계속 이 게임에 참여할 텐가?"

    단솔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내일 죽는다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더 앞섰다. 복수도, 용서도. 두 번씩이나 겪는 상황인데 아무것도 제 손으로 끝낸 게 없었다.

    “정답을 안다고 해서 모두가 똑바른 길로만, 정답으로 향하는 건 아닐세. 누구는 똑바로 가고, 누구는 돌아서 가고, 누구는 답을 아는 데도 비껴가겠지. 지금 조금 망쳤다고 끝난 게 아니란 말일세. 치열하게 살아, 치열하게. 이번엔...... 포기하지 말고.”

    해명 도사는 단솔이 딱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타인의 인생을 꿰뚫어 보는 게 업이기에 타인의 비극이야 익숙했지만, 그런 그의 눈에도 단솔의 인생이 꽤 가혹해 보였던 탓이었다.

    결국, 동정심을 이기지 못한 해명 도사가 마지막으로 천기누설을 하곤 자리를 떴다.

    “......이곳에 하나 더 있어. 자네 말고도."

    “네? 그게 무슨 말씀.......”

    “자네 말고, 다시 살아난 놈이 한 놈 더 있다고."

    “그게 누군데요?"

    회귀자가 또 있다고? 하지만 해명 도사는 끝끝내 또 다른 회귀자가 누구인지 말해 주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단솔을 두고, 그는 제 갈 길을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러다 여전히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는 단솔을 안쓰러운 듯 돌아보았다.

    “네가 제일 어두운 곳에 떨어졌을 때도, 손 내밀어 주는 놈. 바로 그놈을 꼭 붙들어."

    하지만, 회귀자의 존재를 들은 단솔의 귀엔 다른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그가 차량에 올라 춘몽각에서 차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뒤에도 단솔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선배님, 우리 이거 진짜 해야 합니까?"

    "어."

    “아니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최 PD님이랑 사장들이랑 이야기된 건데 뭐. 이참에 고생 좀 해 보라고 춤추는 곳도 있다더라.”

    “아.......”

    “사장들이 바보도 아니고, 다 얻는 게 있으니까 오케이 한 거야. 이걸 어떻게 허락받은 건지 PD님도 대단하다, 능력이라면 능력이지. 아무튼 잔말 말고 움직여."

    오늘따라 춘몽각의 아침이 시끄럽게 시작되었다. 마당에서 무언갈 준비하는 제작진들 사이에 웬일로 최 PD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 촬영 내용을 설명하러 온 아래 연차의 PD들만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젯밤 일로 밤을 새우다시피 누워 있다가 시끄러운 소란에 일어난 단솔이 테라스에 나와 창밖을 보고 있을 때였다.

    "왜 혼자 나와 있어요."

    단솔의 뒤에서 이연이 나타났다. 이연도 마치 잠을 설친 사람처럼 얼굴이 까칠해 보였다.

    “바깥이 시끄럽길래.......”

    “다들 요즘 예민하죠? 방송 분량 안 나온다고 얼마나 화를 내던지. 확실히 한지수 씨가 없으니까 좀 조용하네요."

    “......그러게요."

    지수의 빈자리를 느낀 것은 저뿐만이 아닌 듯했다. 단솔은 이연과 할 말이 그리 많지 않아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노골적으로 그를 피하며 미움이나 원망을 품지 않으려 애썼다.

    죽을 때까지 미워했던 사람인데도, 막상 또다시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니 겨우 그를 미워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게 아깝고 부질없이 느껴졌다.

    "차에 싣는 장비가 심상치가 않네......."

    이연이 내려다본 앞마당에는 커다란 트럭이 들어와 있었다. 마치 촬영을 철수라도 하는 것처럼 스태프들이 각종 촬영 장비를 트럭에 싣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걸까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괴롭히는 데는 워낙 선수잖아요. 마음의 준비라도 해 놔요 우리.”

    이연의 ‘우리’라는 말에 단솔이 움찔했다. 이연도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일부러 아는 척하지 않았다.

    "...... 네."

    “참, 그리고 단솔 씨.”

    "네?"

    이연이 단솔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되도록이면...... 혼자 다니지 마요."

    어제 두현의 전화를 엿들은 덕분에 두현이 단솔을 향해 악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연은 단솔이 겁을 먹을까 봐 그 이유를 굳이 말하지 않았다.

    "......왜요?"

    “그냥, 위험하잖아요. 크고 무거운 장비들도 많이 왔다 갔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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