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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67화 (67/150)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67화

“흠...... 평생 하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못 해 본 적이 없는 상팔자구먼."

"그런가요, 잘 모르겠는데."

해명 도사는 한참을 대수의 눈만 뚫어지게 보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대수는 그런 그가 영 믿기지 않는 듯 멀찍이 앉아 팔짱을 끼고있다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솔이 앉은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영문을 모르는 단솔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아직 대수를 태연하게 마주하기엔 불편한 찌꺼기들이 단솔의 마음에 많이 남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대수가 지수가 알파라는 사실을 숨겼다는 것이었다.

그런 단솔을 보며 마음이 답답해진 것은 대수도 마찬가지였다. 제집에서 지수가 알파라는 사실을 듣고 난 뒤로 노골적으로 단솔이 저를 어색해하는 게 느껴졌다. 다 같이 있을 때는 잘 웃다가도, 대수와 둘이서만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면 표정이 굳는 게 눈에 보였다.

지수의 비밀 때문에 저를 불편해하는 거라면, 날밤을 새워서라도 오해를 풀어 줄 수 있는데, 대화를 시도하려고만 하면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통에 정작 그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이렇게 눈치 보느라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산다니. 늙은이가 늘어놓는 궤변에 불과했다.

"믿지 않는구먼."

“......그런 것도 점괘에 나옵니까?"

“아니? 그건 자네 얼굴에 쓰여 있네. 집중을 안 하잖아! 집중을!”

대수가 못마땅한 듯 혀를 끌끌 찬 해명 도사가 방울을 쩌렁쩌렁 소리가 나게 흔들었다. 눈을 감았다 뜬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형형한 눈빛과 어울리지 않는 아기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집에 도둑 들었다, 큰 도둑."

“......아닌데요."

하지만, 대수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리고 대수의 집에 가 본 적이 있는 단솔도 그 말은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수의 집은 강남 한가운데 있는 초고층 주상 복합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였다. 외부인 차량은 철저하게 신분증 검사까지 마쳐야 들어갈 수 있었고, 게다가 집까지 가려면 펜트하우스 입주민 전용 카드로 개인 주차장부터 지나야 하는 곳인데 도둑이라니.

집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조차도 입주민 전용 카드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한데, 그런 집을 도둑이 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닌데...... 지금 아주 소중한 걸 훔쳐 가는데...... 앙앙! 앙앙!"

급기야 해명 도사는 강아지 소리를 내며 짖기 시작했다. 단솔은 그 소리를 듣자, 왠지 대수의 집에서 만났던 작고 소중한 솜뭉치 같은 강아지가 떠올랐다.

“아니라고요.”

“신령님이 맞다고 하면 맞는 거야! 괜히 점괘 방해하려고 거짓말치면 못써! 신령님한테 혼난다고!"

급기야 점괘가 맞지 않아 화가 난 듯 해명 도사가 자기 앞에 놓인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그에 대수도 지지 않고 으르렁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내가 아니라는데, 도대체 뭐가 맞다는 겁니까.”

***

그 시각 지수는 술병과 함께 대수의 집에 널브러져 있었다. 갑작스레 탈락해서 잠시 한가해진 김에 강아지 밥이나 주라는 대수의 말에 들렀다가 눌러앉은 지 3일째였다.

도대체 등잔 밑이 어둡다는 아주 적절한 말은 누가 만든 걸까. 바로 옆 동에 있는 대수의 집은 프로그램에서 탈락하자마자 온갖 영화 시나리오를 들고 와 지수를 1분도 못 쉬게 하는 대표를 피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지수 형!"

"한지수!"

하지만, 그런 지수의 평화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어...... 여긴 어떻게 알았대. 어떻게 들어온 거야? 너 요즘 어디서 기술 배우니?"

"당당하게 허락받고 온 거거든요!"

지수의 말에 매니저가 발끈했다. 삼 일 내내 여기저기 찾아봐도 안 보이더니 이렇게 가까운 곳에 숨어 있었을 줄이야.

“대수 형한테 전화 왔어요! 뭐 귀중품 안 없어지게 잘 좀 해 달라고. 형이야말로 요즘 그런 거 훔치고 다녀요?"

"내가 왜."

“근데...... 형 꼴이 왜 그래요......?"

지수는 단솔의 사진으로 가득 찬 방에서 다이노소울의 핑크색 슬로건을 목에 걸고, 단솔의 이름이 쓰인 머리띠를 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지수가 안고 있는 쿠션 역시 단솔의 전신이 프린트된 커다란 쿠션이었다.

매니저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저런 걸 어디서 구한거야.

단솔의 인형을 매니저에게 내밀어 보인 지수가 혼잣말을 했다.

“단솔아 인사해....... 여기는 형이 소속된 회사의 매니저야. 내가 벌어 온 돈으로 월급 받는 주제에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대표 말만 듣는 괘씸한 놈이지."

“형...... 혹시 약 같은 거 했어요?"

탈락자 발표 때, 차마 단솔을 똑바로 볼 수도 없었던 지수는 대수의 서재를 한가득 채운 주단솔 컬렉션을 보고 반쯤 미쳐 버린 듯했다.

정작 단솔에게는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한 주제에 술만 마시면 주단솔 쿠션에 대고 당사자는 듣지도 못할 사과를 해 댔다.

수염도 깎지 않아 파리한 안색이 어찌나 기괴한지, 매니저는 단칼에 거절했던 공포 스릴러 장르의 대본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정도였다.

"대표님이 전화 좀 달래요."

“죽었다 그래.”

“살아 있는데 어떻게 죽었다 그래요. 대표님이 와서 시나리오 받아 가래요. 엄청 대작이라던데 무슨 오메가의 금지된 사랑...... 아무튼 시대극이라고. 찍었다 하면 영화제는 휩쓸 거라고.......”

형질을 속여 이 난리가 났는데, 또 오메가 역할이라니. 그것도 순애한 사랑.

대외적으로는 지수가 오메가로 알려져 있으니 종종 이런 시나리오도 들어오기도 하지만, 오히려 지수는 대놓고 형질을 내세우는 작품은 피하는 편이었다.

그걸 대표가 모르지 않았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매니저에게 들어 보니 이미 캐스팅이 완료된 서브 주인공부터 조연들까지 한가득 같은 소속사 유망주들로 채워져 있었다.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던 지금의 회사와 계약했던 것은 순전히 제형질에 관한 비밀 유지 조항 때문이었다.

지금 소속사는 지수가 신인일 때부터 로드매니저까지 도맡아 하던 실장이 나와서 차린 회사였다. 자연스레 제 비밀을 알고 있어 작품을 고르기 편했고, 사생활에 대한 터치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 욕심이 끝이 없다고, 강남 한복판에 건물을 세워 줬더니 이제 고층 빌딩이라도 갖고 싶은 건가.

제2의 한지수라며 신인들을 내보내는 것도, 제가 가는 곳마다 그들을 끼워 팔기 하는 것도, 문어발식으로 자회사를 확장하는 것도 모르는 척 눈감아 준 지 오래였다.

윤여민이나 유두현을 비롯해 그런 식으로 키운 연예인들만 해도 셀 수 없었다. 경영에 관련해서는 괜히 참견하고 싶지도 않았고.

비겁하게도 그런 걸 다 눈감아 준 것은 순전히 제 자신이 자유롭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비밀을 나누고, 돈을 나누는 사이에 영원히 아름다운 관계는 있을 수 없는 법인지라 아무래도 제가 진짜 은퇴할 때가 된 모양이었다.

"준범아, 나 계약 기간 얼마나 남았지?"

“왜요? 한...... 2년 정도?"

"그건 왜 물어봐요, 무섭게....... 혹시 다른 데서 연락받았어요 형?"

“그런 거 아냐.”

“아, 형! 최 PD도 형 연락 안 된다고 하던데?”

“최 PD? 무슨 최 PD."

드라마, 영화, 예능....... 지수는 저와 인연이 있던 최씨 성을 가진 PD들의 이름을 떠올려다 봤다.

“알오매치 서바이벌 최 PD요, 최미진 PD."

“그 사람이 왜? 탈락 축하한다고 회식이라도 하재?"

뜻밖의 이름에 지수가 벌떡 일어났다. 혹시 회식하면 단솔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아니구요...... 이거 때문인 것 같아요."

매니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알오매치 서바이벌 in 아일랜드 포털>

생긴 것과 다르게 IT 기기와 친숙하지 않고, 악플을 읽는 가학적인 취미 또한 없는 지수는 처음 보는 사이트였다.

대배우 한지수가 안받아 준다고 탈락시켜 버린 마태오가 하알파인 이유. 폐가 체험때 기절했음ㅋㅋㅋㅋㅋㅋ

⤷미친 주단솔도 멀쩡한데 개쪽...

⤷와.... 저러니까 한지수가 걷어차지... 한지수 가끔보면 정대수도 씹어먹는 상오메가인데

⤷깜짝 놀래키면 기절할 수도 있지. 저런 바닷가에 폐가 지어 놓고 들어가라고 하는 제작진이 미친놈들 아니냐.

⤷그랬으면 다 기절 했어야지 왜 마태오만 기절함?ㅋㅋㅋ

⤷댓수준들 왜이러지 그때 마태오가 남들은 못본 귀신 본 거 모르냐. 벌크업해서 등치로도 정대수한테 안밀리는데 헛소리 좀 그만해라. 마태오가 한지수한테 까인 것도 그런 소리 한 사람 아무도 없는데 왜 니들끼리 난리인건데.

⤷너야말로 뇌절금지~둘이 오마카세 먹는 사진 못봤음? 설마 합성이라고 우길건 아니지?

⤷그건 다른 사람들도 같이 먹은 거라니까. 옆에 주단솔도 있고 정대수도 있고 제갈민혁도 있었음

"뭐야 이게......."

준범의 표정이 꽤 진지하길래 집중해서 읽던 지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냥 애들 장난하는 사이트잖아.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네.”

"아아, 이건 약과예요 형. 이것 좀 보세요."

생각보다 시큰둥한 지수의 반응에 준범은 눈에 불을 켜고 다른 게시글을 찾아 보여 주었다.

날 미치게 하는 태오지수 서사 타임라인 정리.

첫만남: 데면데면 지수->태오 약혐관

플로팅 요가: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태오->지수 플러팅 시전, 지수 싫지 않은 듯 받아줌

“......내가 받아줬다고? 이게 미쳤나...... 준범아. 얘 찾아내서 고소해."

“형 계속 읽어 봐요!”

본격 연애: 지수 호칭 ‘선배’에서 ‘형’으로 바뀌고 서로 다정하게 웃어 주는 모습 잡힘.

현재: 무슨 이유에서 인지 파국&지수 하차 엔딩...

여튼 태오지수 주식 폭망했다. 얘들아 힘내자...

⤷아직도 믿기지 않아서 nn번째 돌려보는 중

⤷다음 주 방송쯤에 나오지 않을까? 마태오가 왜 그랬는지? 솔직히 둘이 너무 잘어울렸는데...

서로 다정하게 웃어 주는 모습이라니, 이건 완전 악마의 편집이 따로 없었다.

지수는 화면 속 자신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건 태오가 아니라 단솔을 향한 미소였다.

그 뒤로도 준범이 보여 주는 게시글들은 다 비슷비슷한 내용들이 이어졌다. 태오와 지수를 응원했는데 이제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나 태오의 선택이 이해되질 않는다는 글들이 태반이었다.

지수는 이번 일로 태오에게 큰 빚을 졌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물론 은퇴 발표를 할 때 태오에게 알파라는 사실을 들켰고, 태오가 이 이상의 분란을 막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것으로 입을 맞춰 놓은 상태였지만, 이 정도로 역풍이 거셀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아이돌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더 쉽게 이야기를 지어내는구나.

같은 연예계에 있지만, 아이돌의 삶은 잘 몰랐던 지수는 그제야 태오가 왜 그렇게 반대했는지 깨달았다.

은퇴 계획을 더 앞당겨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저 때문에 애꿎은 태오와 제우스의 멤버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건 아닐까. 지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렇게 무심코 스크롤을 내리며 게시글을 확인하던 그때였다.

[나는 이번에 한지수 탈락에 주단솔 책임도 있는 것 같음.]

지수는 그 게시글 제목을 보자마자 홀린 듯 게시글을 눌러, 읽어 내렸다.

나 진짜 충격먹어서 알오매치 서바이벌 전편 nn차

관람중임. 그러다가 발견한 건데, 다들 알다시피 방

송 초부터 지수랑 단솔 친한 건 다들 알지?

근데 태오가 지수한테 플러팅 좀 걸려고 하면 주단

솔이 눈치없이 끼어들어서 붙어 있는 것도 앎?

처음엔 착각인가 했는데 그러다 나중에 가니까 마태

오 시선이 항상 한지수 쳐다보고 있다가 주단솔쪽

보고 있음.

내 생각엔 태오지수 둘이 잘되어 가고 있던 찰나에

주단솔이 끼어들어서 태오가 한지수 탈락시킨듯.

태오와 지수의 사이를 오해한 수만 개의 글 중에는 단솔을 오해하는 글도 있었다. 역시 팩트보다는 본인이 믿고자 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어느새 그런 선동글에 동참해 심각하게 떠들고 있었다.

"이것들이...... 진짜......."

⤷웃기시네 니가 뭘알어 단솔이 그런 애 아니거든? 너 어디살아 학교 어디야 너 자꾸 이런 쓸데없는 글쓰면 너희 부모님한테 다 말씀드린다.

⤷주단솔 씨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단솔을 향한 악플에 반박해 보았지만, 뜻하지 않게 조롱거리가 된 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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