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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66화 (66/150)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66화

    “이제야 좀 조용하네.”

    파전을 만들 반죽을 젓던 태오가 창문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유튜버들이 헛다리 짚고 야외 세트장으로 자리를 옮긴 덕분인지, 촬영 장비를 실은 차량이 춘몽각에 모두 도착해 춘몽각의 대문을 걸어 잠근 덕분인지. 다행히 춘몽각 앞은 조용해졌다. 춘몽각을 둘러싼 담벼락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도 못 미더웠는지 태오는 블라인드를 꼼꼼히 내렸다.

    나이대가 비슷하거나 어린 팬들한테나 시달려 봤지, 저런 아저씨들이 쫓아오는 상황은 상상도 못 했을 텐데, 태오는 의외로 의연한 모습이었다.

    싱크대에서 칼국수에 넣을 재료를 손질하던 단솔은 그런 태오가 걱정됐다.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유튜버들이 분란을 일으키면, 그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조금의 배려도 없는 악플이었다. 내용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자극적인 섬네일에 선동된 사람들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손가락으로 칼침을 놓았다.

    “왜들 저렇게까지 하는 건지.”

    “조회 수가 곧 돈이니까요. 조회 수에 미쳐서 인간성도 팔아먹은 사람들이라니까요."

    대수의 말에 이연이 대답했다.

    “됐어요, 저러다가 말겠죠. 저 사람들도 먹고살려고 하는 건데요 뭐."

    그저 그들을 한심한 종자들 취급하고 말아 버리는 다른 출연자들과는 달리, 그들의 타깃이 되어 가정사부터 학교생활까지 있는 말없는 말로 탈탈 털려 본 적이 있는 단솔은 누구보다 그 무서움을 알았다. 그래서 애써 덤덤한 척하려 애쓰는 태오가 더 신경 쓰였다.

    태오에게 신경을 쏟느라 멍하니 해감한 재료를 가지고 가스레인지 쪽으로 향하던 단솔은 갑자기 허리를 뒤로 뺀 두현과 부딪힐 뻔했다. 단솔이 빠르게 피한 덕에 부딪히지 않았지만, 두현이 칼을 들고 있어 자칫하면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아!”

    하지만 그때, 조금 늦게 두현이 비명을 질렀다.

    “뭐야? 다쳤어?"

    “단솔 씨, 아...... 갑자기 그렇게 치면......."

    도마 위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두현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단솔에게 그 화살을 돌렸다.

    “잠시만요!"

    “두현 씨, 많이 다쳤어요?"

    부리나케 달려와 묻는 최 PD에게 두현은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단솔 씨가 걷다가 부딪쳤나 봐요. 제가 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단솔은 두현과 스치지도 않았다. 단솔은 그 순간 참지 못하고 미간이 찌푸려질 뻔했지만, 마침 카메라의 빨간 불빛과 눈이 마주친 덕분에 표정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최대한 걱정하는 표정을 지어야 해.'

    자해 공갈. 두현이 가장 잘하는 일로, 단솔을 나락으로 보낼 때 주로 썼던 방법이었다.

    애써 걱정하는 표정을 지은 단솔은 두현이 치료를 위해 자리를 뜨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사람들이 걱정스러워하며 거는 말에 답할 새가 없었다.

    먹은 것도 없는 속으로 노란 위액을 쏟아 내고 나서야, 단솔은 정신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제가 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젠장, 설마 나 하나 엿 먹이자고 제 손을 칼로 베는 미친놈이 있을까.

    아니지, 그런 안일한 생각에 회귀 전에도 당했었다. 두현은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 그걸 잊고 있었다. 혹시 이제 시작된 걸까. 지금까지 조용하다가 왜 갑자기.

    “......어떻게 해야 하지.”

    날짜를 세어 보니, 본격적으로 악플이 달리기 시작한 회차와 얼추 맞아떨어졌다.

    촬영이 끝나고 나왔을 때는 이미 단솔은 전 국민의 역적이 되고난 후였다. 도대체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한 건지 궁금했던 단솔은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프로그램이 중반을 넘어설 즈음의 시점부터 여론이 저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는 것을 알아냈다.

    불안감을 감추지 못해 손이 벌벌 떨려 왔다. 이번 생은 다르게 살기로 했는데, 존재감 없이 지내다 하차하겠노라, 다짐한 계획은 틀어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한 번은 당해도, 두 번은 당할 수 없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찬물로 세수한 단솔이 다시 주방에 들어갔을 땐, 모두의 시선이 단솔을 향해 있었다.

    "단솔 씨, 괜찮아요?"

    “괜찮아?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어...... 괜찮아요."

    “손 다친 건 난데, 다들 단솔 씨 걱정뿐이네...... 단솔 씨 좋겠어요."

    살짝 베인 상처에 일부러 눈에 띄게끔 과하게 드레싱 붕대를 감은 두현이 단솔을 향해 비꼬는 말을 했다. 장난처럼 온화하게 뱉은 말이었지만, 단솔은 그게 두현의 진심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일부러 그 말에 상대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토기가 밀려와 생리적인 눈물이 고인 뒤라,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누가 보면 단솔이 화장실에서 울고 온 것으로 오해할 만한 장면이었다.

    “......죄송합니다. 다들."

    애매모호한 사과였다. 손을 베인 두현이 아닌 모두를 향한 사과.

    하지만 단솔의 공손한 행동에 오히려 두현이 당황했다.

    "왜......."

    “저 때문에 다치셨잖아요.......”

    단솔은 애써 미안한 척하며 사과했다. 다른 건 몰라도 회귀 전처럼 굴면, 손해를 본다는 것은 확실했다.

    회귀 전, 두현은 뜨거운 것을 옮기거나, 몸싸움하는 게임을 할 때마다 일부러 단솔의 근처에서 움직였다. 깜짝 놀라거나, 물건을 떨어트리곤 단솔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장면만 해도 수십개. (주단솔 유두현 괴롭히는 짤.jpg)로 게시글 하나가 따로 나올 정도였다.

    정말 부딪히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지나친 장면이었는데, 어느새 단솔은 선배를 일부러 치고 사과도 하지 않는 싸가지 없는 후배로 둔갑해 있었다.

    '모르고 넘어가면 또 당할지도 몰라.'

    "선배님이 하시던 건 제가 할게요, 쉬세요."

    단솔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서 두현이 쥐고 있었던 칼을 빼앗아 들었다.

    "어......?"

    자신이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두현은 맥없이 자신의 칼을 단솔에게 내주었다.

    “아니다, 들어가서 쉬고 계실래요? 제가 마무리까지 다 할게요."

    그것도 모자라 애써 씩씩한 척 두현을 카메라 앵글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아니, 나는......!"

    두현이 당황하는 게 단솔에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당당한 척하는 단솔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기민하게 그걸 알아차린 대수가 단솔에게 다가갔다.

    “칼 이리 내.”

    “네?"

    “손 떨잖아. 내가 할게. 나 칼질 잘해."

    “대수 씨, 제가 올해 들은 말 중에 가장 신뢰 가는 말이네요....... 제가 본 사람 중에 대수 씨가 제일 칼질 잘하게 생겼어요."

    “썰고 싶은 거 있음 주시든지요."

    “왠지 사람 이름을 말해야 할 것 같은 거 있죠?”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어느새 분위기는 언제 얼어붙었냐는 듯 풀어졌다. 가벼운 농담을 던지는 사람들 사이, 두현이 못마땅한 듯 표정을 찌푸렸다.

    다친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두현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한참을 주방에 서 있었다. 하지만 끝끝내 아무도 알아주지 않자, 화가 난 듯 주방을 나가 버렸다.

    “아...... 나도 두현 씨 간호하러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카메라에 게으르게 보이는 것은 싫었던지 파전에는 쓰지도 않는 대파만 몇 번씩 닦고 있던 민성이 두현을 핑계로 따라 나가려고 하자 태오가 잘됐다는 듯 대꾸했다.

    “형, 그냥 방에서 쉬세요. 어차피 여기 있어도 별로 도움도 안 되는데.......”

    태오가 뒷말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끔 조용히 구시렁거리듯 하자, 이를 듣지 못한 민성이 냉큼 답했다.

    “그럼 부탁해.”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나가는 민성의 등 뒤에 대고 태오가 카메라에 보이지 않게 민성을 째려보았다.

    * * *

    “이 형들 진짜, 무슨 상전도 아니고 아 배고픈데......! 왜 안 와!"

    상차림이 끝날 때까지도 두현과 민성이 돌아오질 않자, 태오의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내가 데려올게요, 먼저 먹고 있어요."

    그 모습을 본 이연이 태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출연진은 모두 자신의 방 말고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유튜버들은 대부분 야외 촬영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그중 몇몇은 허탕이라는 걸 눈치챈 건지 다시 담벼락 너머로 돌아와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웅성거리는 소음이 적잖으니 도무지 모를 수가 없었다.

    하민성은 이미 잠에 빠져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굳이 잠든 걸 깨우면서까지 밥을 챙겨 줄 사이는 아니라고 판단한 이연이 다른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방 앞에 도착한 이연이 두현의 방문을 노크하려던 그때, 건물 뒤편 테라스 쪽에서 두런두런 누군가가 전화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보니, 두현이었다. 두현 역시 세컨드 폰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촬영 장소로 사용되는 앞쪽 테라스와 달리 스태프들의 흡연 구역정도로만 사용되고 있어 카메라도 마이크도 없는 곳이라 그런지 두현 역시 신경을 덜 쓰고 있는 듯했다.

    심각한 이야기라도 하는 걸까. 남의 전화를 엿듣는 취미 따위는 없는 이연이 그대로 발길을 돌려 내려가려던 순간, 단솔의 이름이 들려왔다. 무슨 상황인지 잘 들리지 않아 문 쪽으로 다가가 바짝 귀 를 기울이니 그제야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연은 그 뜻밖의 말에 석상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번 주 방송은 내가 주단솔보다 무조건 더 주목받을 수 있어요."

    그때 전화하는 상대방이 화가 난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수화기 밖으로 흘러나왔다.

    -내가 너한테 들인 돈이 얼만데! 그깟 예능은 그냥 홍보용이야! 배우가 예능 이미지 가져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다고. 서바이벌 같은 거에 목숨 걸 생각하지 말고, 대충 끝내고 우 감독 영화 들어가.

    “내가 싫다고 했잖아요......! 한지수나 정대수 같은 급들도 목숨 걸고 게임하는데 대표님은 왜 자꾸 나보고 대충하라는 거예요?”

    -네가 그런 급이 아니니까 대충하라는 거야! 걔네는 예능 같은데 나와서 열심히 하면 톱스타답지 않게 의외로 소탈하다고 칭찬받지만, 넌 그 정도 아니야. 예능 열심히 해 봤자 신비감 없어지고, 몸 값 떨어지는 거 금방이라고!

    “아무튼, 나 우 감독 영화는 안 해요. 누가 날 떨어트리기 전에 내발로 이 프로그램 나오는 일도 없을 거예요."

    ―아니 얘가 왜 이래?! 우 감독 작품은 왜 안 한다는 건데! 설마 너, 베드 신 때문에 그래? 베드 신이 아니라 작품성을 봐야지. 우 감독 영화는 무조건 해외 영화제 출품되는 거 몰라?

    “하......! 그거야, 그냥 주최 측에서 리스펙하는 거고...... 그 감독 경쟁작에 노미네이트 안 된 지가 언젠지 알아요? 지금 나보고 한물간 노친네 감독 판타지 포르노나 찍으라는 거예요? 그 새끼 변태라고 소문이 파다한데 이렇게 날 헐값에 넘기겠다고?"

    ―너 이 자식, 야! 유두현! 내가 너 키워 준 정이 있지 대가리 좀 컸다고 이제 네 마음대로 하려는 거야? 네가 주단솔만큼 스타성이 있길 해! 마태오만큼 예능감이 있기를 해!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너 몸값 떨어지면 그거 책임질 수는 있어?!

    “씹...... 또 주단솔. 내가...... 이긴다고 했잖아! 이번엔 내가 꼭 이길 거니까 방송 끝날 때까지 기다려요. 주단솔 모가지를 비틀어서라도 내가 이길 거니까."

    살벌한 말과 함께 전화를 뚝 끊어 버린 두현이 뒷마당에서 나오자, 이연은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오랜 시간 저를 스토킹하고, 제게 집착하는 모습에서 어렴풋이 두현의 이면을 짐작하긴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제가 아는 두현은 모두 꾸며진 모습이었다.

    대표에게 악을 쓰면서 단솔을 이길 거라고 말하는 두현에게는 어렴풋이 살의가 느껴졌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저만한 악감정을 품었을까.

    단솔이 지난 개막식 공연으로 호평받아 한 번 더 화제된 게 질투라도 났나, 두현은 가수가 아니니 그럴 리는 없는데. ‘이번엔’ 이긴다는 말은 또 무얼 의미하는 걸까.

    마치 원수라도 만난 듯, 두현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 동안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저런 모습을 평소에 어떻게 숨기고 있던 거지. 아까 전, 단솔의 실수로 손을 베였다고 울상 짓던 모습과 두현의 마지막 말이 오버랩 됐다.

    '주단솔 모가지를 비틀어서라도 내가 이길 거니까!'

    이연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아...... 대수 형! 저 진짜 배고픈데 먼저 먹으면 안 돼요? 이연 형도 배고프면 먼저 먹으라고 했잖아요!”

    “어른이 오기 전에 먼저 숟가락 드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아니...... 저 형은 미국에서 왔으면서 매번......! 민혁이 형......! 형도 한마디 해요, 칼국수 면 다 불어요!”

    두현과 민성을 찾으러 간 이연 역시 무슨 일인지 돌아오지 않아 기다림이 길어졌다. 대수는 배고프다고 노래를 부르는 태오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탁을 지키고 있었다. 태오가 민혁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민혁도 대수를 이길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 제가 찾으러 다녀올까요?"

    보다 못한 단솔이 몸을 반쯤 일으키자, 석상처럼 앉아 있던 대수가 숟가락을 들었다.

    “아니, 먹자. 배고프면 말하지 그랬어."

    “와...... 대수 형. 내가 아까부터 배고프다고 계속 말했는데......!"

    태오가 억울함에 몸부림칠 때 얼굴이 사색이 된 이연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아, 이연이 형! 왜 이렇게 늦게 와요! 근데...... 나머지 두 사람은 어쩌고 혼자 와요?"

    “아, 두 사람 어디 갔는지 방에도 없네요. 미안한데 속이 좀 안 좋아서 난 올라가 볼게요."

    “에에? 지금까지 형 기다리느라 안 먹, 아! 대수 형 바지락 나도 좋아해요!"

    * * *

    -안녕하세요, 알오매치 서바이벌 in 아일랜드 출연진 여러분들. 다들 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돌아보니, 저희가 만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네요. 우리의 만남이 벌써 절반밖에 남지 않았어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데, 이렇게 인연을 맺은 게 너무 신기하지 않나요?

    ―허업! 혹시! 저희는 전생부터 운명의 끈으로 이어진 사이는 아닐까요?

    "오늘따라 사족이 기네요......."

    “그러게요, 불안하게. 근데 두현이 형이랑 민성이 형은 왜 아직도 안보여요?"

    촬영이 시작되었는데도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두현과 민성을 찾으려는 듯 태오가 두리번거리며 민혁에게 물었다.

    “두현 씨는 아무래도 병원 가 봐야겠다고 나갔고, 민성 씨는 몸살이라 방에 처박혔어요."

    “뭐야...... 다들 자기 마음대로네. 별로 다친 것 같지도 않구먼.”

    -서로가 서로의 악연인지, 인연인지. 앞으로 우리에게 놓인 길이 꽃길인지, 진흙탕 길인지 알아보기 위해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등장한 사람에게선 묘한 한기가 느껴졌다.

    깔끔한 두루마기 한복 차림에, 백발의 단발머리.

    "무슨 선생님......?"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는 백발의 사내와 눈이 마주친 단솔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희미하게 웃고 있지만, 무언가 꿰뚫어 보는 눈빛이 분명히 느껴졌다.

    -선생님, 자기소개 한번 해 주시죠?

    “나, 도상동 해명 도사요. 선생님은 아니고 그냥 동네 점쟁이요.”

    “실물은 처음 보네......."

    대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 대수 형! 아는 분이에요? 의외로 민간 신앙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태오의 말에 대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도 실물로 본 건 처음이야. 내 여동생이 신점 보는 걸 꽤 좋아해서 알아. 지난번 대선 결과도 맞힌 용한 점쟁이라더군. 맞힌 건지 찍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 그럼 그냥 동네 점쟁이가 아닌데요?"

    “높으신 분들도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라던데, 생각보다 제작진들 섭외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소문만큼 용한 점쟁이가 아닌 건지."

    “내 능력을 의심하는 모양이군."

    “다른 건 몰라도, 청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으신가 봅니다."

    대수의 말을 들은 해명 도사가 대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순식간에 싸늘해지는 공기에 단솔이 움츠러들었지만, 도사의 눈은 대수의 기에도 눌리지 않을 정도로 형형한 빛을 내고 있었다.

    "역시 기운이 보통이 아니구먼, 그렇게 믿기 힘들다면 자네 먼저 앉지."

    “첫판부터 사이비인 게 들통나면 아쉬우실 텐데요."

    “사이비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해명 도사는 지수가 탈락하고 광고주가 많이 떨어져 나간 뒤에 무리해서 섭외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삐거덕거리는 상황에 제작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러다 또 방송 분량이 제대로 안 나오면 어떡하지. 야심 차게 준비한 야외 세트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지 오래라, 특히나 제작비를 담당하는 부서의 스태프들은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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