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65화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의 방문으로 그렇지 않아도 가관이었던 분위기는 두현이 쓸데없이 트집까지 잡아 대며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더 빠르게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럴 거면 왜 밖에서 따로 만나서 밥 먹고 친목질하고 그 지랄을 한 건데, 너 혹시 진짜 한지수한테 차였냐? 덕분에 나랑 다른 선배들만 왕따니 뭐니 떠들잖아. 밖에 스태프들 좀 봐, 저 사이버 렉카새끼들 막는다고 고생하는 거 불쌍하지도 않아?"
개막식 전날, 다섯 사람이 사석에서 따로 모여 식사한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단솔도 태오와 관련한 글을 찾아보다가 몇몇 사람이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본 적 있었다.
그들은 왜 이이연과 하민성, 그리고 유두현만 그 자리에 없었는지 의문을 갖고서 그 일을 언급하고 있었다.
한 프로그램에 같이 나온다고 해서 모두가 친한 건 아닌데, 사람들은 그들이 모두 하하 호호하는 환상의 세계에 있다고 믿었다.
"선배, 말이 좀 지나치시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재 태오가 욕을 먹고 있는 상황에 비하면, 유두현이 말하는 왕따 논란은 지나친 비약일 뿐이었다.
“넌 빠져. 내가 지나쳐? 밖에 있는 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아닐걸. 미꾸라지 한 마리 때문에 오늘도 나만 고생하네. 출연료는 저 새끼들이 다 가져가는데. 이런 생각이나 하겠지.”
두현은 단솔의 말에 지고 싶지 않은 듯 총알처럼 쏘아 대며 말했다. 물론 단솔의 눈에도 출입을 통제하느라 바쁜 스태프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원래도 촬영 첫날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편인데,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다들 완전히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두현이 던진 돌에 태오는 물론 단솔의 마음에도 균열이 생겼다.
두현의 마지막 말이 단솔의 머리를 계속 시끄럽게 했다.
그리고 단솔의 머릿속을 시끄럽게 만드는 생각이 하나 더 있었다.
인터넷에 지수가 탈락했다는 스포 글을 올린 것도 스태프 중 한사람이라고 했다. 혹시 저렇게 내부 상황을 캐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지수가 알파라는 사실까지 들키면 어떡하지.
그게 밝혀진다면, 지금 태오가 겪고 있는 폭풍은 작은 시작일 뿐, 쓰나미보다 더 큰 폭동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이러다 회귀 전보다 더 답답한 상황에 처하는 게 아닐까.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에 단솔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철커덕.
때마침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이연 덕분에, 단솔은 헛된 상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현은 이연이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선배! 왔어요?"
저번 촬영에서 데면데면하게 굴 때는 언제고, 마치 퇴근한 배우자를 맞이하듯 두현이 현관으로 가 이연의 캐리어를 받아 들려고 했지만, 이연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 손을 거절했다. 단솔 앞에서 거절당한 게 민망했던지. 두현은 금세 2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지레 겁먹고 두려워하지 마!'
아침부터 두현이 헛소리나 해 대는 통에 단솔은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다 견딜 수 없이 불행한 생각들이 밀려오자 손톱으로 제 손바닥을 마구 눌러 댔다.
가끔 스스로의 공상에 빠져 호흡이 거칠어질 때면 하는 행동이었다. 저릿한 손에 피가 돌면서 그제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단솔 씨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형! 저도 있는데 왜 인사 안 해 줘요......."
“어, 태오 씨도 오랜만이에요. 너무 구겨져 있어서 태오 씨인 줄 몰랐어요."
숙소에 들어와서야 한숨을 돌리던 이연은 단솔을 보곤 표정을 갈무리하며 웃었다. 바깥의 상황이 아까 전보다 좋지 않은 모양인데, 이연은 일부러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오늘은 출근길 정체가 심각하네요. 정대수 씨 혹시 기자나 유튜버도 때려 봤어요?"
“......그게 무슨. 저 사람 안 때립니다."
그 뒤로 들어온 민혁과 대수가 거실의 무거운 분위기를 읽은 듯, 어울리지 않게 농담을 했다. 하지만, 출연자 중 가장 앞장서서 분위기를 주도하던 지수가 없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실이 조금은 공허하게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거실이 텅 비어 보이네요."
태오도 그걸 느낀 것일까. 자조적으로 내뱉는 말에, 단솔은 겨우 발을 움직여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오가 축 처져 있으니 지수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태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아는 단솔도 이렇게 허전한데, 아마 내막을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나 시청자들이 느낄 빈자리는 더 크겠지.
그나마 민혁이나 이연이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단솔은 벌써부터 이번 주 촬영 분량이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유두현은 방에, 하민성은 밖에. 사람이 없으니까 거실이 텅 비어 보이지."
그런 모습을 본 대수가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지 말라는 듯 건조하게 대답했다. 대수는 일부러 단솔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다른 쪽을 보고 말했다. 그날 이후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 없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어색함이 흘렀다.
“하민성 씨는 왜 아직도 밖에 있어요?"
이연이 물었다.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단솔과 태오의 시선을 완전히 앗아 간 민성은 점차 본래의 성격이 드러난 덕분에 그들의 안중에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애초에 인성이 좋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오랜 팬심으로 실드 쳐 줄 수도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저기 있네요......."
민혁이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레드카펫 시상식에라도 참석한 양 차려입고 온 민성은 대문 앞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뭐야...... 왜 저 사람들이랑 인터뷰를 해?......."
어느새 민혁의 옆에 온 이연이 궁금한 듯 물었지만, 당연하게도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해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정말 이런 일이 있어서 유감이고, 또 제가 새로 왔으니까 프로그램을 쇄신할 수 있게 선배로서 저희 출연자들은 잘 이끌어 가야죠. 사실...... 지수 씨가 좀 까다로운 사람이죠. 아? 어떤 부분이 구체적으로요....... 그...... 전반적으로 다 까다로워요. 연예인 병이 좀 있달까...... 저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하하, 다들 아시다시피...... 저랑 그런 사이였으니까요...... 하지만...... 동료고 또 한때, 호감을 가졌던.......”
무슨 정치인 연설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창하게 으스대고는 있지만, 민성의 인터뷰는 사실상 알맹이 없이 계속 똑같은 내용만 반복하고 있었다.
저런 쓰레기 유튜버들이랑은 말을 안 섞는 게 상책인데, 먹잇감을 많이도 준다 싶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가, 기자 출신 유튜버가 여전히 정식언론사 기자라고 생각한 민성은 제 이미지를 깎아 먹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떠들었다.
민성이 회사나 매니저에게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언질을 조금이라도 줬다면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기를 쓰고 민성을 말렸을 테니까.
민성이 잔뜩 차려입을 때부터 불안했던 매니저는 숙소로 간다더니 숙소는커녕 눈에 띄지를 않는 민성을 찾아 돌아다니다, 인터뷰 중이라는 소식에 식겁해서 한 마리의 경주마처럼 민성에게로 향했다.
기실, 상황은 염려하던 것보다 더 좋지 않았다. 인기 멤버 한지수가 탈락한 데다, 톱 아이돌인 마태오까지 잔뜩 욕먹고 있으니, 마냥 남의 일이 아니다 싶었던 몇몇 소속사 사장들은 고민에 빠진 참이었다.
정작 제우스 소속사 사장은 탄탄한 팬층 때문인지, 데뷔 초부터 온갖 수모를 겪으며 성장한 그룹이기 때문인지.
이 상황에도 꽤 담담하게 상황을 관망했다. 자고로 아이돌에게 이런 고난 정도는 우습게 찾아온다나 뭐라나. 과연 톱 아이돌 여럿을 키워 낸 사업가다운 모습이었다.
물론 각자의 목적이 다르겠지만, 몇몇 출연자는 업계 톱스타라는 무거운 이미지를 잠시 내려놓고 대중적으로 다가가고자 출연한 프로였다.
요즘엔 아무리 리얼 예능이라 해도 대부분 대본이 있는 걸 대중들도 모르지 않으니, 잠깐 연애 놀음하는 것 따위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감정 대립이 벌어지면 그때부터는 아티스트의 인성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악플러의 먹잇감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다들 이참에 하차할 타이밍을 고려하고 있다. 는 소식이 슬며시 들려오고 있었다.
이 불안한 상황에서 입 꾹 다물고 있지는 못할망정 더 소란을 일으키니 민성의 매니저는 속이 답답하다 못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민혁도 한참을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보다가 민성이 벌써 세 번째로 지수와 사귀었던 옛날 이야기를 하자, 흥미를 잃은 듯 실내로 데려온 단탄지와 놀아 주러 가 버렸다.
"연예인인지, 정치인인지. 민성이 형은 입 여는 족족 죄다 마이너스인데 인터뷰하는 걸 왜 저렇게 좋아할까요? 그 사실을 설마 모르나?"
태오가 민성이 하는 양을 한참 지켜보더니 말했다.
“그걸 모르니까 자꾸 떠드는 거 아닐까.”
대수의 말에 거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피식거렸다. 민성은 과거제 아이돌 이미지를 싫어했지만, 그나마 그런 화려한 과거라도 있었기에 다소 과대평가를 받으며 지금 자리를 용케도 유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아이돌 활동기간을 다 합쳐 봐야 겨우 3년 정도, 그걸로 10년 넘게 먹고 사는 걸 보니 단솔은 진심으로 그가 부러워졌다.
***
“오늘은 상황이 이러니까, 실내에서 진행할게요. 밖에 있는 저 새끼들이 텐트 치고 나갈 생각을 안 해서...... 이틀 동안 야외 세트장 만든 보람이 없어졌거든요. 간단하게 밥 차려 먹고, 디저트 만들고, 이야기 나누고 저녁에는 선생님 한 분 오시면 편하게 이야기 나누면 됩니다."
"선...... 선생님이요?"
“우리 뭐 배워요?"
“배우는 건 아니고...... 그냥 뭐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듣는 거예요."
최 PD가 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리는 게 꽤 수상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출연자 중 그 누구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강풍에 날아가는 바람에 이틀 만에 기껏 다시 지은 야외 세트장은 주변에 카메라를 들고, 텐트를 쳐 놓은 유튜버들 때문에 통제가 안 될 지경이었다.
야외는커녕 앞마당조차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 최 PD는 모든 일정을 실내에서 소화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일단은 세 명, 네 명씩 나눠서 식사 준비부터 할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이틀 전에 찍었어도 될 장면이었다. 갑자기 바뀐 상황에 스태프들도 우왕좌왕하는 게 보였다. 태오는 마치 그 모든 상황이 저 때문인 것만 같아 죄책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
"태오 씨, 괜찮아요?"
'솔아, 괜찮아?'
단솔이 가끔 지금의 태오처럼 구석에서 자책하고 있으면, 어느새 지수가 나타나 단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었다.
단솔은 그게 카메라를 가려 주는 지수만의 위로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물론 지수와는 달리 제 덩치로 커다란 태오를 가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지수에게 배운 대로 태오를 향해 서서 카메라를 가린 채 서툰 위로를 건넸다.
카메라가 자신을 찍고 있지 않다는 생각만으로도 갑자기 찾아온 공황 상태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 단솔의 앞을 막아서는 커다란 그림자가 느껴졌다.
“팀은 어떻게 나눌까.”
“......저 .저는."
대수였다. 진작부터 앞치마를 집어 든 대수가 단솔의 앞에 섰다.
덕분에 사각지대 하나 없는 주방에서 빼꼼히 숨을 수 있게 된 단솔은 그제야 숨을 편하게 내쉬었다.
“가위바위보 하죠, 단솔 씨랑 두현 씨랑 하면 되겠다.”
"......네."
“가위바위보!"
세 판을 내리 이긴 두현이 이연과 민성, 태오를 뽑아 갔다. 태오가 저를 두현에게 보내지 말아 달라는 듯 단솔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그 기대는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좋네, 조용하고."
대수가 단솔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솔은 그 말에 옅게 웃었다.
“단솔 씨,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한식 좋아한댔죠?"
민혁이 스태프들이 가져온 장바구니를 뒤지며 말했다. 민혁이나 대수나, 애써 평소처럼 단솔을 대하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어...... 맞아요! 제가 맛있는 거 해 드릴."
“아니, 넌 가만히 있는 게 좋겠어.”
“아니 그래도 제가......!”
"쓰읍."
그 고마움을 알기에 나서서 직접 요리하려고 했던 단솔을 민혁과 대수가 극구 만류했다. 급기야 그들은 재료를 보고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단솔을 다시 앉혔다.
이 배려가 정말 배려인지, 본인의 생존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은 요리의 주도권을 제가 잡는 것에 굉장히 절실했다.
“내가...... 오늘은 요리가 하고 싶어서 그래. 진짜. 내가 하고 싶어."
“그래요, 우리가 오늘은 알아서 할게요."
이미 단솔의 음식을 먹어 본 전적이 있던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