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63화
“어...... 형 이번에도 일찍 오셨네요?"
스태프들도 아직 다 도착하지 않은 마당 한편에서 단솔을 반긴 것은 민혁이었다.
“응, 얘네 때문에요."
"...... 형 집에 갔다 오긴 하는 거 맞죠?"
“그럼요, 우리 서울에서도 봤잖아요."
“아, 맞다...... 그랬지."
민혁은 고양이가 신경 쓰여서인지 지난번부터 계속 가장 먼저 섬에 와 있었다. 섬의 풍경과 그곳에서 고양이들을 돌보는 민혁의 모습은 꼭 원래부터 이 섬에 살던 사람처럼 잘 어울렸다. 꼭 서울에서 봤던 사람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하...... 단탄지는 좋겠다.”
단솔은 아무 걱정 없이 뛰어노는 고양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단솔 씨는 강아지상인데, 고양이를 부러워하네요."
“아...... 그런 게 아니라요. 얘네는 아무 생각 없이 잘 놀기만 해도 칭찬받잖아요.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고."
“음...... 원한다면 단솔 씨도 칭찬해 줄게요. 화장실 앞에서."
“네에?! 아, 됐어요 !!"
도대체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감미롭고 감성적인 음악들을 만든 거지. 어째서인지 민혁은 이 섬에만 오면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장난이에요, 하하. 단솔 씨 근데 무슨 고민 있어요?"
"아! 아니에요! 절대!”
단솔은 민혁이 꼭 제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할까 봐 손을 내저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들 하지만...... 단솔 씨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니까, 더 안 물을게요.”
단솔은 그 말에 먼저 와 있던 사람이 태오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겼다. 다정한 성격에 단솔의 일이라면 언제든 발 벗고 나서려 꼬치꼬치 캐묻는 게 고마웠지만, 때로는 이렇게 민혁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게 더 위로가 될 때가 있었다.
“형은 볼 때마다 신기해요...... 꼭 인생 2회차 같아요. 형은 화도 안 내죠? 누구 미운 사람 없어요?"
“글쎄요. 나는 딱히 화낼 일이 없는걸?"
그럴 만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드는 사람한테 그런 폭풍 같은 불행이 있을 리가.
그럼에도 단솔은 순간 고민했다. 어차피 민혁은 이게 지수 이야기인 것도 모르는데 그냥 털어놓을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의 형질을, 특히 그것을 감추고 있는 사람의 것을 허락 없이 밝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일이었다.
“아! 생각해보니까. 있었어요. 크게 화내고 누굴 미워한 적.”
“언제요?"
“이십대 초반에......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한테 속아서 사이비 종교에 끌려간 적이 있어요. 시골에 솥뚜껑 닭볶음탕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갔는데...... 노래 부르고 기도하고 치성비를 300만 원이나 주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죠."
“헤에......!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게다가...... 아직도 그 종교 단체 내부에서는 제가 노래 부르는 영상이 돌아다닌대요.......”
“그래서 그 친구랑은 어떻게 됐어요?"
단솔은 당연히 민혁의 입에서 절교했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민혁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 친구가 지금 내 매니저예요."
“네?...... 정말요?"
“응. 저도 나중에 정신이 돌아왔는지 진심으로 사과를 하더라고요. 처음엔 막 화가 났는데......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든 실수를 하잖아요. 그런 일로 외면하기에는 그 친구가 날 도와준 적이 너무 많아서."
민혁의 말에 단솔은 생각이 많아졌다. 제게 지수와 대수가 도움을 줬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본 민혁이 말을 덧붙였다.
"근데, 그건 내 사정이고 단솔 씨는 상황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고민해 봐요. 잘못을 저지른 쪽보다는, 당한 쪽이 더......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한 법이니까."
***
촬영 시간이 임박해 오자, 단솔은 저도 모르게 문 쪽을 자꾸 살피게 되었다. 민성이 30분 늦게 촬영장에 합류했을 때도, 지수는 아직까지 오지 않은 상태였다.
지수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꼭 벌 받기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단솔은 점점 초조해졌다.
하지만 지수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혹시 지수 없이 탈락자 발표를 진행하나 싶던 그때였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지수가, 춘몽각의 문을 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필이면, 들어오자마자 단솔과 눈이 마주친 지수는 다시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메이크업도 안 한 상태로 카메라 앞에 선 지수의 눈이 피로해 보였다.
“......다들 오셨으니까, 곧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조연출의 외침에 모두가 앞마당에 모인 그때, 민성이 부러 지수의 옆에 다가가 비아냥거렸다.
“좋겠다, 잘나가서 그런가 방송 막 하네 한지수?"
"비꼬지 마, 오늘은 조용히 가자."
"오...... 역시 우성 알파라 그런가. 화나니까 꽤 따갑네?"
지수의 컨디션이 안 좋다는 걸 느낀 민성이 일부러 지수를 자극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미 날카로운 알파 페로몬으로 기 싸움을 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형질을 드러내지 않는 게 습관이 된 지수는 오히려 더 차분하게 이성을 유지했다.
“여태 안 들킨 게 신기해. 알파 새끼가 오메가 흉내를 내고 다니는데."
귓가에 속삭이는 민성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정면만 응시하던 지수의 눈빛이 때마침 마이크에 문제가 있던 단솔이 수습을 위해 자리에서 벗어나자마자 돌변했다.
"네가 발기 부전 숨기고 다니는 것만 할까."
“허, 발기 부전? 진짜 미쳤냐 한지수?"
“아, 맞다. 아니구나! 너 막 알파 새끼한테 발정 나서 세우고 그랬었지?"
“이 미친 새끼가......!”
지수는 자신을 도발하는 민성에게 페로몬을 드러내서 위협하는 대신, 오히려 두 사람의 흑역사를 들먹이며 망신을 줬다.
그사이, 마이크를 바꿔 단 단솔이 제자리에 돌아왔다. 힐끗 단솔이 있는 쪽을 본 지수는 민성에게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어설프게 공격할 거면 시작조차 하지 마. 난 어차피 내일 같은 거 없어."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의 눈빛. 돌이켜보면, 한지수는 항상 그랬다. 엄청난 커리어와 필모그래피를 쌓았음에도, 늘 언제든 망가져도 괜찮다는 듯 여유 만만하게 구는 모습이 더 싫었다.
늘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득바득 위로 올라가야 하는 민성에게 그런 지수의 태도는 자신을 향한 기만처럼 느껴졌다.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함께한 시간이 길어진 만큼 정이 쌓여 이 시간이 찾아오지 않길 바랐던 분도 계실 텐데요. 안타깝게도 그날이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탈락자가 나오는 날입니다.
오늘 태오는 평소와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죽상을 하고 있었다. 폐가 미션에서 탈락자 투표권 8장을 모두 태오가 갖게 된 덕분에 출연자들은 물론 스태프들까지 선택권을 쥔 태오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은 이례적으로 8장의 투표권이 모두 몰표로 한 사람을 지목했습니다.
정말 태오가 지수를 떨어트리는 걸까. 촬영 시간이 임박해 섬에 들어와 아직 지수와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단솔이 불안함을 감추려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수에게 잔뜩 실망했으면서도 그가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반, 한 공간에서 지내는 동안 비밀을 모른 척하기도 아무렇지 않게 전처럼 지내기도 힘들어 그냥 이대로 떠났으면 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이번 주의 탈락자는......! 한지수 씨입니다.
이변은 없었다. 태오의 표는 모두 지수를 향했다. 지수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탈락자 발표가 나오자마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단솔과 대수, 태오를 제외한 모든 출연자와 스태프는 입을 쩍 벌렸다.
이 상황의 내막을 모르는 저 사람들은 갑자기 지수를 탈락자로 지목한 태오의 의도가 궁금하겠지.
탈락자 발표 직후, 단솔은 지수와 둘이 이야기할 틈을 노렸지만, 단솔이 개인 인터뷰를 따는 사이 지수는 인사도 없이 춘몽각을 떠나고 말았다.
짧은 촬영이 끝난 뒤, 최 PD는 먼저 양해를 구했다.
"들으셨겠지만, 원래 준비했던 야외 세트장이 오늘 아침에 날아 갔어요. 섬 날씨가 참 변덕스럽네요. 일단 최선을 다해서 복구하겠지만, 장비 하나가 완전히 망가져서 고치는 데 한 이틀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이틀 뒤에는 대가리가 깨져도 어떻게든 촬영 시작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최 PD는 자리를 떴다. 스태프들은 그녀를 따라 야외 촬영을 준비하는 듯 어디론가 분주하게 사라졌다.
밖에서 들리는 소음을 ASMR 삼아 단솔은 제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어차피 길성은 데리러 오지도 못할 테고, 재촉해 봤자 그렇게 싫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대표님을 부르겠지.
“어차피 쉬는 거...... 곰팡이 냄새 나는 숙소보다야 여기가 낫지 않을까."
돌아가 봤자, 멤버들도 없는 컴컴한 집에 누워 있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단솔은 푹신한 이불에 누워 묵묵히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지수에게 연락해 봐야 하는 걸까, 하지만 제가 왜 이렇게까지 지수의 탈락을 아쉬워하는 건지 단솔 역시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지수의 탈락은 미리 알고 있었던 단솔에게도 그리고 모르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꽤 충격적이었다. 이제야 자신들이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는지 출연진들은 서로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하나둘 섬을 빠져나갔다.
"친한 척하지 말자 주단솔. 원래도 모르는 사이였는데 뭘. 어차피 프로그램 끝나면 다 모르는 사이가 될 테고."
결국, 지수에게 연락하기를 포기한 단솔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쓰곤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얼마나 잤는지 핸드폰 배터리는 방전되고, 주변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진짜 다 갔네.”
어쩐지 해방감이 드는 한편 약간의 서운함이 들던 그때였다.
드르륵.
드르륵.
1층으로 추정되는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을 감지한 단솔이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이상한 소리는 계속되었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주방이었다. 주방 근처까지 가자,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끽해 봤자 창문이 덜 닫혀 들려오는 바람 소리 정도를 생각했던 단솔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폐가 체험 때 태오가 봤다던 그 귀신인 걸까. 그냥 민망함을 무릅쓰고 누구의 차라도 얻어 타고 나갔어야 했나.
온통 캄캄한 단솔의 눈앞이 눈물로 가득 찼을 때쯤. 식탁에 앉아있는 인영이 보였다.
"누...... 누구세요?"
"으아악-!!"
"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