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62화
식탁에서 일어나려는 단솔을 대수가 만류했다. 딱 봐도 술에 취한 목소리가 술주정이라도 부리려는 모양인데, 집에 아무도 없는 척 가만히 있으면 제풀에 지쳐 돌아가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에 침묵의 숨바꼭질을 택한 것이다.
“야, 정대수...... 너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주차장에 차 있는 거 다 보고 왔다."
"하...... 시발."
하지만, 지수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에 대수는 결국 식탁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집주인이 나갔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단솔 역시 거실로 따라나섰을 때였다.
“문 좀 열어 봐...... 나 진짜 오늘은 심란해서 술 한잔해야겠으니까. 후...... 나 태오한테 말했다 내가 알파인 거. 다음 탈락자 뽑을 때...... 나 떨어트려 달라고 부탁했어."
우뚝. 대수는 거실 한가운데 멈춰 섰다.
아마 지수는 단솔이 대수의 집에 있을 거라곤, 그래서 이 말을 함께 듣고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내뱉는 말이었다.
옥상을 통째로 정원처럼 쓰는 펜트하우스라, 예상외의 외부인이 들을 걱정은 사치였기 때문에 머뭇거릴 새도 없이 지수의 입에선 단솔이 들으면 안 될 말들만 주르륵 흘러나왔다.
“애초에 김 사장 그 개자식이랑 계약하면 안 됐던 건데, 차라리 계약을 포기했어야 했는데. 아무리 어린 나이였다고 해도...... 나는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사람들 상대로 거짓말 치고 다녀서 이제야 그 벌 다 받나 봐....... 단솔이 만날 줄 알았으면 좀 착하게 살걸......."
지수는 하민성처럼 철석같이 제가 오메가일 거라고 믿고 다가오는 놈들을 골려 주는 게 재밌던 순간도 있었다. 그런 악랄한 장난을 한 대가가 이거였나.
처음 연예계에 발을 디디게 만들어 준 김 사장 덕분에 마냥 순탄하지는 않은 연예계 생활을 겪은 지수는, 더는 이 생활에 미련이 없었었다.
김 사장 때문인 것도 있지만, 애초에 진지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도 아니었기에 이 일도 금방 접고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을 만나 그 모든 게 무너졌다.
"......나 이번엔 진짜 은퇴할 거야, 너도 말리지.”
철컥.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지수의 취중 진담에 어디로 시선을 두어야 할지도 모르고 이리저리 눈을 돌리는 단솔을 대수가 흘긋 보았다.
그러다 결심한 듯 현관문을 열자, 그 앞에서 마치 방언을 쏟아 내듯 주정하던 지수가 말을 멈추고서 대수를 보았다.
“적당히 하고 오늘은 너희 집으로 가.”
“아...... 왜! 오늘 같은 날 혼자 있기 싫......."
커다란 덩치로 현관문 앞에 서서 집 안에 있는 단솔을 가리고 있던 대수를 밀쳐 내고, 억지로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지수의 눈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단솔이 보였다.
“다...... 단솔아...... 네가 왜...... 여기."
"대수 선배님이 밥 한 끼 먹자고 하셔서...... 전 이만 가 볼게요. 시간이 늦어서."
단솔은 지수의 시선을 피하고서 서둘러 제 겉옷을 챙겼다. 아직도 못 볼 것을 본 듯 우뚝 서서 저만 보고 있는 지수를 피해 현관을 나설 때였다.
“솔아, 잠깐만.”
탁. 다급하게 단솔의 손목을 붙들어 잡은 지수의 손을 단솔이 매몰차게 뿌리쳤다. 이것은 단솔도 의식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다.
깜짝 놀란 단솔이 고개를 들어 지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수도놀란 듯한 표정으로 단솔을 바라보았다.
늘 붙어 있다 못해, 같은 방, 같은 침대까지 쓰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근데 그런 형이 알파라고? 그리고 그 사실을 속였다고? 나를 만날 줄 알았다면...... 그 말은 또 어떤 의미고, 뭘 어쩌려고 했던 건지.
그동안 지수가 베풀었던 호의는 어떤 의미였을까, 설마...... 나를......?
단솔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왜인지 모를 배신감에 휩싸였다. 단솔이 이제껏 알고 있던 지수와 진짜 지수가 다른 사람이었던 걸까.
저 역시 회귀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지만, 형질을 숨긴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놔주세요, 집에 갈래요."
“솔아...... 너 이대로 가면. 하...... 데려다줄게. 아니, 내가 싫으면 대수한테라도 데려다 달라고 해."
“싫어요...... 제발 놔주세요. 혼자 가고 싶어요.”
상황을 보아하니, 대수 역시 지수가 알파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이 분명했다.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더니.
회귀 후, 아무도 믿지 못하고 무기력증에 빠졌던 단솔을 안심시켰던 것은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두 사람 모두 낯설게 느껴졌다. 저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를 속이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믿다니. 바보같이.
회귀 전, 이미 여러 번 사람에게 배신당한 전적이 있는 단솔은 또다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스르륵 지수의 손에 힘이 풀린 틈을 타, 엘리베이터로 곧장 향하는 단솔의 얼굴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분명한 실망감이었다.
***
무슨 정신으로 대수의 집에서 다이노소울의 숙소까지 택시를 타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단솔은 역시나 아무도 없을 지하 숙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하지만 채 현관을 열기도 전에 힘이 풀려 계단에 쪼그려 앉아 울었다.
계단의 냉기가 청바지를 뚫고 들어와 엉덩이가 시렸다. 그제야 단솔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단솔이 마주한 것은 아까 전 제가 내려놓은 짐 가방이었다. 역시나 멤버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고요한 숙소에 남은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그 순간, 잘 들리지 않던 한쪽 귀에서 갑자기 온갖 소음이 밀려오는 듯했다. 대수와 지수의 말소리, 라디오 DJ의 목소리, 멤버들이싸우는 소리까지.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들에 단솔은 현기증을 느꼈다.
이미 충분히 지쳐 있는 상태였다.
'기껏 회귀까지 했는데도 또 사람에게 속다니!'
'새로운 삶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도망갔어야 했나!'
‘이미 얼굴이 전국에 다 알려졌는데, 회귀 전보다 잘 살 수 있을까!'
죽기 전에 느꼈던 무력감이 또다시 단솔의 전신을 감쌌다. 자꾸만 과거를 되짚어 가며, 이렇게 했다면, 저렇게 했다면 어땠을까 되짚어보길 수십 번. 결국엔, 바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그만 좀 해."
단솔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비틀거리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오르려 했으나, 단솔이 없는 동안 짐칸으로 쓴 모양인지 단솔의 침대 위에는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녔다. 단솔은 그걸 치워낼 힘도 없어 그냥 침대 밑으로 물건들을 떨어트린 뒤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퀴퀴한 냄새와 눅눅한 이불, 좁아서 뒤척일 공간도 없는 녹슨 이층 침대와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 방. 그래 맞아. 이게 내 자리지.
“그냥 빨리 다 끝났으면 좋겠다.......”
역시 제 삶은 몇 번을 다시 시작해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렇게 엉망진창인 게 어울렸다. 회귀를 한다고 해서 쉬워질 인생이었으면 애초에 그렇게 되지도 않았겠지.
결말이 기대되지 않는 망한 드라마처럼, 단솔은 제 앞에 그려질 미래가 하나도 기대되지 않았다.
***
그렇게 쓰러지듯 수마에 빠졌을 때였다. 누군가 잠든 단솔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느껴졌다.
“솔아! 솔아, 일어나 봐. 오늘 촬영장 가야지."
"으음...... 길성이 형?"
“그래, 오늘 컨디션 안 좋아?”
“아...... 아니야.”
단솔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사고 이후 아픈 몸을 이끌고도 제 스케줄을 위해 일찍이 퇴원한 길성 앞에서 앓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숙소엔 여전히 멤버들 중 아무도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뭐라고 이야기라도 하고 다시 섬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오늘따라 혼자라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단솔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곤,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 * *
“나 데려다주고, 형은 다시 가는 거지?"
“어,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저기 솔아...... 다른 매니저들처럼 촬영장 근처에서 대기 못 해 줘서 미안해.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라도 생기면 꼭 전화해. 내가 안 되면 대표님한테라도."
길성이 늦거나, 촬영장에서 대기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정도로 비일비재했던 걸 알기 때문에 창밖을 보며 태연히 고개를 끄덕거리던 단솔이 ‘대표’라는 두 글자에 펄쩍 뛰듯이 날뛰다 앉았다.
“대표님한테 내가 전화를 왜 해......!”
“왜는 왜야....... 혹시 너 혼자만 섬에서 못 나오는 일 생길까 봐 그러지."
“그럴 일 없어. 혹시나 있어도 그냥 다른 사람들 차 얻어 타고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 달라고 할게.”
“에이...... 그래도 명색이 연예인인데 그건 조금 그렇지!"
넉살 좋게 웃는 길성의 말에도 단솔의 굳은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연예인은 무슨,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지하철 탈 돈도 없어서 걸어 다니던 단솔이었다.
“뭐가 불편해! 대표님이 직접 오는 게 훨씬 두 배, 아니 백배는 더 불편해!"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았길래 이렇게 피해야 할 사람들투성이 인 건지. 단솔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이연이나, 유두현을 보는 것보다 회사 대표를 만나는 일이 더 꺼림칙했다.
동창회 같은 개인 일정에 당장 큰 스케줄을 앞둔 다이노소울을 부를 정도로 개념 없는 인간이었다.
형으로서, 그리고 리더로서 직접 나서서 언젠간 한 번쯤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처럼 머리가 복잡할 때는 피할 수 있을 만큼 피하고 싶은 단솔이었다.
회귀 전 그는 새로이 걸그룹을 만들기 위해 투자를 받던 중 다이노소울이 해체 수순을 밟은 덕에 큰 위기를 맞았다.
마침 회사에 들렀다, 투자자에게 거절당하고 온 대표와 마주친 단솔은 그날 이유도 모른 채 욕설을 들으며 대표에게 얻어맞아야 했다.
그때 입은 부상 때문에 아직까지 청력에 문제를 겪고 있는데, 그를 보는 게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PD한테 연락 왔는데, 오늘 탈락자 촬영하면 이틀은 나와서 기다려야 한다. 야외 촬영 준비해 둔 게 강풍에 날아갔다나...... 이럴 줄 알았으면 스케줄 하나라도 더 잡았을 텐데. 그렇지?”
탈락자 촬영에 대한 이야기에 어젯밤 지수의 말을 생각하느라, 단솔은 길성의 물음에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태오는 정말 지수를 탈락자로 뽑을까. 지수가 제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지수도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저를 계속 보며 촬영을 이어 나가기에는 껄끄러울 테니.
“형, 그럼 나 이틀은 쉴 수 있는 거네?"
“어...... 그건 그런데.......”
"그럼, 내가 알아서 할게. 차를 얻어 타고 나오든, 섬에 계속 머무르든 알아서 할 테니까 절대! 절대! 대표님한테 전화하면 안 돼. 형! 약속해!"
“아니 뭐...... 그래. 그럼.......”
좀처럼 고집을 부린 적 없던 단솔의 완강한 태도에 길성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차는 춘몽도 입구에 다다랐다.
내리기 전 다시 한번 길성에게 대표에게 연락하지 말 것을 당부한 단솔은 춘몽각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