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55화
과거 생각에 마음이 잠시 흔들렸지만, 단솔은 도현에게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럼 도현 씨는 완치되신 거네요. 안 사라지고, 이렇게 남아 있잖아요."
“저 그때 가출하고 일주일 동안 숨어 있었거든요. 일부러 할머니가 하시는 오래된 민박집에서 일주일 묵었는데, 어느 날 티브이를 봤더니 애들이 텀블링하고 있더라구요. 내가 고정이었던 프로그램에서....... 나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멤버들도 나름대로 각자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난 나 혼자 애쓰고 있다고 착각했나 봐요. 내 자리는 누구든 대체할 수 있는 건데. 그래서 돈 떨어졌다고 거짓말하고 올라왔어요."
단솔은 아까 전 차 안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직도 멤버들은 도현이 그저 돈이 떨어져서 가출했다가 돌아온 줄 알고 있었다.
“근데 사람이 진짜 간사한 게 뭔지 알아요?"
단솔은 왜인지 모르게 도현의 말투가 쓸쓸하다고 느꼈다. 방금까지도 열을 펄펄 내던 사람이 금세 풀죽은 모습을 보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눈썹만 찡긋거렸다. 도현은 약간 술기운이 오른 듯 모노드라마를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다른 멤버들이 인기가 많아지니까...... 질투 나요. 외롭고, 두려워요. 나만...... 도태될까 봐. 멤버들이 잘되면 내 부담이 적어지니까 좋은데....... 이번처럼 바빠서 춤 연습도 제대로 못 하고 센터 자리까지 빼앗기면...... 좀...... 속상해요. 소인배 같죠?"
늘 제우스의 센터 자리를 도맡았던 도현은 이번 공연과 드라마 촬영 일정이 겹쳐 춤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게다가 애초에 단솔을 다이노소울의 센터로 세우기로 했을 때부터 주최 측에서는 화제성을 위해서라도 태오가 단솔과 페어로 메인에 서는 것을 원했다.
단솔은 그런 도현의 말에 허탈해졌다. 한강이 보이는 이 멋진 숙소와 따뜻한 음식을 해 주시는 엄마 같은 이모님.
각자 분야에서 정상을 찍어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도현이 느끼는 불안과 갈증, 그리고 스스로를 향한 혐오는 단솔 역시 지독하게 겪어 왔고, 여전히 겪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이 소인배 같은 게 아니라, 사람이라면 다 그럴 것이다.
지금이야 멤버들이 잘돼서 제 어깨에 놓인 짐을 덜어 낼 수 있었으면 하는 단솔 역시, 회귀 전에는 팀 해체 후 각자의 자리를 잡은 멤버들을 미워하다 못해 저주했었다.
단솔이 해체의 원인이었다는 식으로 언급해 이미 대중의 기억 속에 잊힌 지 오래인 단솔을 다시 인터넷 기사의 먹잇감으로 만들거나, 인터넷 방송이나 예능의 소재로 ‘망한 아이돌 해체한 썰’을 푸는 걸 보면, 멤버들이 꼭 자신을 자양분 삼아 피어나는 꽃들처럼 보여 다 꺾고 짓밟고 싶었다.
자신은 이미 골방에 처박혔는데 그들은 양지에 나와 있고, 그러면서도 혹시나 그들의 부름을 받고 다시 방송에 나갈 기회를 잡을 수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도현의 불안은 상상이나 허깨비가 아니라 단솔이 겪었던 진짜 현실이었다.
“도현 씨가 속이 좁은 게 아니라...... 사람이라면 다 그런 거...... 아닐까요. 저도 똑같거든요. 질투하면서, 애정도 하고...... 실컷 욕하고 나왔다가도, 맛있는 음식 먹으면 애들 생각나고 걱정되고 그래요. 이중인격자처럼."
“......그래도 요즘엔 좀 덜해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실 저희 팀이 올해가 마지막일 수도 있거든요 내년에 재계약이라. 이렇게 금방 헤어질 줄 알았으면...... 짜증 좀 덜 내고 잘해 줄걸."
단솔은 제우스의 데뷔 년도를 곱씹어 봤다. 벌써 내년이면 5년째.
대부분의 아이돌은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하거나, 재계약에 실패해서 사라진다.
다이노소울은 노예 계약에 가까운 10년 계약을 했다. 연차로 보나 계약 연수로 보나 제우스보다 한참 더 활동을 했어야 됐지만, 회귀 전에는 단솔이 국민의 적이 되는 바람에 제우스보다도 더 일찍 해체했다.
그리고 그때 제우스는 계약이 만료되는 해에, 멤버 모두가 재계약을 해 계속 활동을 했다.
“도현 씨, 다들 재계약해서 계속 활동할 수 있을 거예요. 전 먼저 자러 갈게요."
단솔은 걱정이 가득한 도현에게 말을 건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누워서도 단솔은 도현이 했던 말이 계속 생각났다.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으면, 잘해 줄걸!'
모진 말을 하고 돌아설 때의 멤버들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 만약이지만...... 어쩌면 제가 운명을 벗어나지 못해 또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이번 생에서만큼은 동생들에게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 애정하는 쪽이 지는 싸움에서 늘 지는 쪽을 택한 건, 회귀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멤버들이 아니라, 단솔이었다.
“내일 아침에 리허설 가면...... 꼭 먼저 사과해야지.”
***
“안 자고 뭐 하냐."
단솔이 방으로 들어간 뒤, 창밖을 바라보며 남은 술잔을 비우던 도현의 등 뒤로 태오의 음성이 들려왔다.
폼을 보아하니,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나온 모양인데 도현은 태오가 제 말을 어디까지 들은 건지 몰라 주춤거렸다.
“단솔 씨 꼬드기지 마."
“그런 거 아니거든? 귀엽긴 한데, 내 스타일은 아니야.”
“뭐......? 귀여워? 네가 뭔데 단솔 씨를 귀여워해.”
태오를 보자 센치해졌던 기분이 다 식어 버린 도현은 갑자기 피로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못 말리는 주단솔 빠돌이 덕분에 불면증이 싹 달아나네."
잔을 싱크대에 넣고 돌아서는 도현에게 태오가 배를 긁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다른 애들한테는 말 안 할게.”
"......."
“돈 떨어져서 돌아온 거 아닌 거."
"야."
“그리고 난 할 거야, 재계약. 자라.”
***
“단솔 씨! 좋은 아침! 잘 잤어요? 잠자리 불편하지 않았어요?"
이튿날 아침, 가장 늦게 일어난 단솔을 반긴 것은 태오였다.
“아니요...... 너무 편해서 영원히 잠들고 싶었어요......."
“아니...... 아침부터 왜 그런 소리를 해요......! 단솔 씨 이거 먹어봐요! 너무 맛있어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질걸?"
그저 이불이 너무 좋아서 감상을 말한 것뿐인데 태오는 놀라 식겁해서 이모님께서 아침으로 만들어주신 샌드위치를 단솔의 입에 넣어 주며 주스를 따르고 있었다.
애들은 밥 먹었으려나. 하지만 태오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솔의 머릿속엔 온통 멤버들 생각뿐이었다. 어젯밤 늦게 보낸 메시지에 민재는 아직 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리허설 가려면 일어나야 할 텐데.......”
“네? 단솔 씨 뭐라고 했어요?”
“아...... 멤버들이요. 이제 일어나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는데...... 메시지에 답이 없어서요."
“그런 건 매니저 형이 안 챙겨 줘요?”
“아...... 저희 매니저 형이 자주 지각하는 편이라. 제가 미리 깨워주는 게 나아요. 잠시 통화하고 올게요."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하지만 몇 번을 걸어도 신호음이 끊길 때까지 민재도, 우현은 물론 길성까지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단솔은 불안해졌다.
"전화 안 받아요?"
“네...... 가 봐야 하나.”
“씻느라 못 받는 걸 수도 있잖아요. 일단 우리 차 타고, 단솔 씨 먼저 이동해요."
평소에 욕실 하나에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싸우는 걸 생각하면, 시끄러워서 전화벨 소리를 못 듣는 것도 이해가 갔다. 단솔은 하는 수 없이 공연장으로 출발하는 제우스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했다.
***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하지만, 단솔이 현장에 도착해 기초화장을 하고, 의상을 확인할 때까지도 길성과 멤버들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다이노소울! 아직이에요? 좀 있으면 동선 체크하러 올라가야 하는데......!"
“어...... 다시 전화해 볼게요."
벌써 수십 통이나 전화를 걸었던 단솔은 배터리가 간당간당하게 남은 휴대폰을 들어 길성의 번호를 눌렀다. 메이크업을 위해 집게핀으로 앞머리를 올린 단솔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맴돌았다.
달칵.
"여보세요?! 길성이 형? 형! 어디야! 왜 아직도 안 와!”
―야 단솔아...... 어떡하냐...... 아무래도 우리...... 못 갈 것 같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 다들 기다리고 있어! 형 또 늦는 거야? 그럼 내가 미리 말해 놓을......."
-우리 교통사고 났어.......
"......어?"
삐이-.
단솔은 그 순간 귀에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귀가 어두운 쪽 귀로 전화기를 고쳐 들었다. 청력이 약해져 웅얼거리는 소리만 겨우 잡아낼 수 있는 귀에 들리는 말은 현실감이 없었다.
경부고속도로, 3중 추돌, 병원, 그리고 사이렌 소리.
어제 연습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간 줄 알았던 멤버들은 대표의 지시에 부산까지 내려가 행사를 뛰었다. 공식적으로 초대받은 것도 아닌 행사는 대표의 초등학교 총동문회였고, 모르는 아저씨 아줌마들에 둘러싸여 새벽까지 노래를 부른 멤버들이 아침 리허설에 맞춰 올라오다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왜 하필 지금 그 말이 생각난 걸까. 단솔은 어제 도현과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애...... 애들은 괜찮아? 다들 무사한 거 맞아? 형......! 병원은 어디래. 내가 지금 갈게!"
―아니! 저기 단솔아! 잠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