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50화 (50/150)

50화

“미안해요. 내가 단솔 씨 센터 세워 달라고 했어요.”

“……네⁈”

놀란 단솔의 표정에 민혁은 오해하지 말라며 이야기를 꺼냈다.

“이거 단솔 씨 보고 생각한 콘셉트예요. 좀 기분 나쁠 수도 있는데…… 내가 보는 단솔 씨는 사람을 홀리는 기운은 있는데, 또 속이는 재주는 없는…… 착하고 순진한 여우 같달까.”

단솔은 민혁의 설명에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네? 제가요……?”

단솔을 처음 봤을 때, 민혁은 제가 여우에게 홀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 유명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솔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마치 작정하고 민혁을 홀리려는 구미호처럼.

하지만 단솔과 가까워진 후에 느낀 감상은 또 달랐다. 단솔은 자신이 사람을 홀린다는 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홀릴 줄은 알지만, 속일 줄은 모르는 모습을 보며 떠오른 음악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구미호의 운명을 타고나선 꼬리가 하나밖에 없는 순진한 여우를 떠올렸다.

“단솔 씨가 음악을 듣고 느낀 대로 준비하면 돼요, 부담스러워할 거 없어요. 단솔 씨의 해석이 곧 이 노래의 완성이 될 거니까.”

“형…… 부담스러워하지 말라고 하는 말 맞아요?”

“아…… 그게 그렇게 되나요?”

단솔은 민혁의 말을 듣기 전보다 오히려 더 얼어붙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단솔이 우는 걸 본 지수는 부담감에 경직된 단솔을 보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주단솔 매니저야. 일단 연습 시작하기 전에 밥부터 먹고 해.”

“형! 저는 나중에…….”

몸이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춤 연습을 하기 전에는 물만 마시는 단솔이었지만, 지수는 단솔이 먹지 않으면 비켜 주지 않을 심산으로 단솔에게 젓가락을 내밀었다.

“안 돼 지금 먹어, 체력이 얼마나 중요한데. 쟤 봐 봐. 먹으라는 소리도 안 했는데 열심히 먹고 있잖아.”

지수가 가리킨 방향에는 태오가 도시락 뚜껑까지 씹어 먹을 기세로 밥을 먹고 있었다.

“단솔 씨 빨리 먹어요! 연습 시작하면 먹을 시간도 없어요.”

음식을 입에 잔뜩 넣은 태오가 우물거렸다. 그걸 본 지수가 얼굴을 구겼다.

“뭐라는 거야. 야! 다 먹지 마! 우리 솔이 먹어야 해!”

단솔이 힘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자, 지수는 직접 태오가 먹고 있던 국그릇까지 뺏어 들어 단솔에게 쥐여 주었다.

“얼른 먹어. 너 숙소에서는 맨날 곰팡이 먹는다며.”

“아니…… 곰팡이를 먹는 게 아니라 그냥 같이 사는 거예요…….”

“그거나, 그거나. 같이 살면 먹기도 하고 그런 거지.”

지수가 마치 엄마라도 된 것처럼 단솔을 감시하는 통에 단솔은 억지로나마 스시 하나를 입에 넣었다. 회사 앞 분식집에서 먹던 떡볶이랑은 비교도 안 될 맛에 단솔의 눈이 커졌다. 단솔은 그제야 제가 춤 연습할 때 뭔갈 먹지 않던 습관이 그냥 음식이 맛이 없어서 만들어진 것을 깨달았다.

“솔아, 어때? 입에 맞아?”

“이건 입에 맞는 수준이 아니에요…….”

“응?”

“성공의 맛…… 너무 맛있어요……! 태오 씨! 빨리 먹고 우리 연습해요!”

맛있는 음식을 먹고서 금세 기분이 좋아진 단솔을 보는 지수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 * *

“그 부분에서 휘날리는 거랑 흩날리는 거랑 다르다고 한 건 아마 아이솔레이션이 잘 안 돼서 그런 걸 거예요. 자, 나 따라 해 봐요. 원, 투, 쓰리, 포.”

평소의 장난스럽던 모습과는 다르게, 본업으로 돌아온 태오의 모습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단솔이 버벅거리는 부분을 귀신같이 알아채곤 가르쳐 주는 모습에서 단솔은 제우스와 다이노소울의 격차를 느꼈다.

“어째…… 판을 잘못 깔아 준 느낌이다?”

막상 연습을 시작하자, 춤에는 문외한인 지수와 대수, 민혁은 연습실 한편에 앉아 태오와 단솔을 지켜보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페어 안무를 맞춰 보는 태오와 단솔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앉아 있는 세 사람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안무는 얼추 다 외웠으니까, 음악이랑 맞춰 볼까요?”

“……네!”

머릿속에 외운 안무를 되새기면서, 단솔은 심호흡을 했다. 앉아 있던 다른 사람들도, 단솔을 보며 함께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 어린 시선과는 다르게, 음악이 흘러나오자 단솔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태오를 유혹하듯 움직이는 단솔의 모습에 안무 연습을 도와준 태오도 속으로 놀랄 정도였다. 디테일은 연습을 더 해야겠지만, 단솔에게 화를 냈던 윤성이나 우현도 놀랄 만큼 짧은 시간에 발전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형 기획사에서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수업받으며 기초부터 다져 온 태오가 리드하는 안무 연습은 단솔에게는 신세계였다.

매번 잔잔한 물 위에 돌을 튕기는 느낌으로 팝핀을 하라거나,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웨이브를 하라거나.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단솔의 안무 선생님보다 훨씬 간결하고 명료한 코칭에 단솔은 그동안 끙끙거렸던 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와…… 단솔 씨 진짜 천잰가? 이렇게 잘하는데 멤버들이 왜 그랬지?”

“그래, 솔아 진짜 잘했어.”

“나도, 멋있더라.”

웬만해선 말을 잘 하지 않는 대수까지 칭찬을 하자, 단솔의 귀는 터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칭찬에 넋을 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태오 씨! 우리 한 번만 더 맞춰 보면 안 돼요?”

* * *

한 번 더, 또 한 번 더.

밥을 잔뜩 먹고 연습을 시작하면 끝날 때쯤엔 배가 홀쭉해져 있을 정도로 징그럽게 연습을 하는 태오도 단솔의 집념에 지쳐 다크서클이 발목까지 내려온 것 같았다.

어느새 밖은 캄캄해졌고, 지수와 민혁은 대수의 너른 어깨에 기대 잠든 지 오래였다. 팔짱을 낀 채 정좌로 앉은 대수조차도 간간이 하품을 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단솔은 마치 당장 내일이 공연인 사람처럼 태오를 붙들고 놔주질 않았다.

“허억…… 단솔 씨, 우리 내일도 연습 있는 거…… 알죠?”

“어…… 죄송해요…….”

단솔은 그제야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라도 하나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태오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했다.

“하하, 괜찮아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우리 나가서 저녁이라도 먹을까요?”

졸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려는 듯 태오가 짝짝 박수를 치며 일부러 과장해서 크게 말했다. 단솔에게 차마 말은 못 했지만, 태오는 허벅지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다들 먼저 가실래요? 저는 연습을 좀 더…… 아, 아니다. 저는 저희 연습실 가서……!”

“어후…… 안 되겠다. 쟤 끌어내자.”

“어어……! 형! 잠시만요!”

하지만 그런 태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연습을 더 하겠다는 단솔에 대수와 민혁이 단솔의 팔다리를 잡고, 지수가 연습실 불을꺼 버렸다. 태오는 이미 저만치 앞서가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있었다.

* * *

“솔아 이것 좀 먹어 봐.”

“어…… 네. 형도 드세요.”

자다 일어난 지수가 이들을 이끈 곳은 조용한 한우 오마카세였다. 낮에는 스시, 저녁엔 한우까지. 지수는 마치 단솔을 못 먹여 안달 난 사람 같았다.

“형…… 저 돼지 아니에요. 이걸 다 어떻게 먹어요.”

“아냐, 너 이거 다 먹어야 해. 오늘 연습한 거 보니까 나는 네가 걸어 다니는 게 신기해 솔아. 이렇게 조그마한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 거지?”

“맞아요. 단솔 씨 안무도 못 외웠다고 하더니, 이렇게 잘하면서.”

단솔이 기를 쓰고 태오에게 안무를 배우려고 했던 건 멤버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나왔기 때문도 있었지만, 실은 태오에게 배운 걸 멤버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회사의 안무나 보컬 레슨의 강사들은 전문가가 아닌 대표와 친한 지인들이었다. 그래서 말은 못 했지만, 늘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재능과 센스가 있는 멤버들은 곧잘 따라가곤 했지만, 그렇지 못한 멤버들은 그저 제스처 하나까지 무식하게 외워 버리곤 했다.

하지만 오늘 태오가 알려 준 방식은 근본적으로 몸 쓰는 법을 알려 주는 느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따로 태오에게 레슨을 받고 싶을 정도였다.

단솔은 이런 기회가 희박한 걸 아니까, 뭐라도 멤버들에게 알려 주고, 내일 제우스와 함께 연습을 하면서도 동생들이 하나라도 더 배우길 바랐다.

“사실은…… 태오 씨가 너무 잘 가르쳐 줘서요…… 저도 잘 배워서 멤버들한테 알려 주고 싶어서요.”

“싸웠다면서요⁈”

“에이…… 이러다가 또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화해해요. 여태까지 계속 그랬어요.”

“하긴…… 나도 가끔 멤버들이랑 주먹다짐하고 그랬어요. 다음 날 생방송인 건 알아서 서로 얼굴은 피한다고 막 이렇게! 피하면서 싸웠거든요? 근데 민소매에 크롭 티라 멍든 거 다 보였어요.”

푸하하, 태오의 말에 조용한 식당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입을 가리며 웃는 단솔 외에도 민혁과 지수, 대수까지 술이 조금 들어가 한결 편해진 분위기에 태오의 상기된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그래 가지고 생방 끝나자마자 바로 라이브 켜서 어제 같이 마사지 받으러 갔다 왔더니 멍들었다고 해명하고 막…… 팬들은 그것도 모르고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고 막 그래서 또 해명하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요!”

그 말에 지수가 테이블을 치며 웃었다. 어차피 다른 손님들은 아무도 없는 터라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즐기던 그들은 아르바이트생이 자신들을 촬영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