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다들 어디 가세요……?”
정오가 가까운 시간까지 지수가 단솔을 깨우지 않은 덕분에 단솔은 퉁퉁 부은 얼굴이었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해 비몽사몽 선 단솔의 앞에 짐 가방을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단솔 씨! 얘기 못 들었어요?”
“태오 씨…… 어디 가요?”
“우리 탈락자 발표 한 주 뒤로 미룬대요.”
“에……? 왜요?”
뒷머리에 잔뜩 까치집을 지은 단솔의 뒤통수를 커다란 손이 쓱쓱 문질렀다. 지수였다.
“아시안 게임.”
“아…….”
미리 찍어 두면 방영에 수월할 텐데도, 스포일러에 예민한 최 PD는 편집본을 쌓아 놓는 법이 없었다. 이미 한 번 겪어 봤으면서, 저 혼자만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는 게 단솔은 왠지 창피했다.
“가만 보면 단솔 씨는 늘 소식이 늦는 거 같아.”
“네?”
태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매니저가 일을 너무 안 하는 거 아니에요? 단솔 씨의 타고난 미모로 버티고 있지만…… 소속 아티스트를 너무 방치하는 느낌이라고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소속사로 옮길래요?”
“아…… 저는 아직 계약 기간이 많이 남아서…….”
“지금도 봐, 다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단솔 씨네 차만 안 보이는 거 알아요?”
태오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단솔은 제 잘못이 아닌데도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다른 사람들은 매니저와 코디가 두세 명씩 붙어 있었다. 촬영 중엔 섬에서 나가 있더라도, 춘몽각 근처나 아무리 멀리 가도 춘몽도 근처에 있어, 늦어도 30분 정도면 올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다른 멤버들까지 케어하고 있는 길성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게다가 건망증이 심한 그는 이렇게 갑자기 바뀌는 스케줄을 단솔에게 알려 주지 않고 까먹기 일쑤였다.
“한 소리 해요! 따끔하게!”
태오는 마치 자기 매니저가 늦기라도 한 것처럼 화가 나 있었다. 저를 생각해 주는 마음은 알지만, 단솔은 그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이미 알오매치 첫 방송 이후부터, 다이노 소울의 스케줄이 길성의 능력치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문제는 길성이 아니라 제대로 인력 충원을 해 주지 않는 회사에 있었다. 매니저가 한 명 더 생긴 것은 맞지만, 늘어난 스케줄을 소화하기엔 길성 하나로는 여전히 부족했다.
“……안 돼요. 저희 매니저 형 착한 사람이에요…… 제가 그냥 숙소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돼요.”
“에에…… 단솔 씨 어제 우리 귀신 본 거 잊었어요⁈ 스태프들도 다 나가는데? 그러지 말고 내 차 타고 나가요.”
태오의 말에 단솔의 동공이 흔들렸다. 숙소에서 기다리는 건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어제 일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여기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그 차 보단 내 차가 더 넓을 거 같은데? 내 차는 뒷좌석 개조해서 딱 두 자리밖에 없어. 어때?”
“어…… 음…… 저…… 저는……!”
단솔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지수가 끼어들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눈동자를 굴리던 단솔의 어깨에 턱 하고 무게감이 느껴졌다.
“나랑 있으면 되겠네요.”
“에?”
“나도 없어요. 매니저.”
“어…… 네 그…… 그럴게요! 민혁이 형이랑 기다릴게요…….”
이글이글 서로 견제하고 있는 태오와 지수를 뒤로하고, 단솔은 민혁과 함께 숙소에 남는 쪽을 택했다. 어부지리로 숙소에 단솔과 단둘이 있게 된 민혁이 승리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수는 물론 대수까지 나서서 안 가겠다고 버텼지만 이미 결방 소식을 알고 있던 매니저들은 밀린 스케줄을 해야 한다며 그들을 거의 끌고 가다시피 사라졌다. 반면 의외로 태오는 쉽사리 물러났다.
“형, 어차피 단솔 씨랑 나는 운명 공동체라 곧 만나게 될 테니까, 허튼수작 부리지 마요.”
대문으로 나가던 태오가 단솔의 옆에 선 민혁에게 알 수 없는 말을 남겼지만, 민혁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민혁과 단솔 둘만 남았다.
“근데…… 형은 왜 매니저가 없어요? 그러고 보니까…… 형네 매니저는 거의 못 본 거 같아요.”
“오지 말라고 그랬어요. 옆에 붙어서 잔소리하는 게 귀찮아서. 특별한 일 없으면 거의 혼자 다녀요.”
“형한테 잔소리를 한다구요?”
저 도인 같은 성격에 상대에게 조언을 해 주면 해 줬지, 남한테 싫은 소리 들을 일은 하지 않는 민혁이었다. 가끔 아침 일찍 산을 오른다던가, 동물과 대화를 시도한다던가. 종잡을 수 없이 굴긴 해도, 법을 어기거나, 나쁜 짓과는 거리가 멀었다.
“네. 나만 보면 자꾸 머리 자르라 그러고, 수염 밀라고 그러고. 심지어는 미용사 자격증까지 땄어요. 내 털 밀어 보겠다고.”
지난번 단솔을 위해 준비한 세레나데와 함께 밀었던 수염은 어느새 거뭇거뭇하게 제자리를 찾아 올라와 있었다.
“처음엔 그깟 수염, 그냥 밀까 싶었는데 그 친구가 그러니까 왠지 더 버티고 싶더라고요. 뭐랄까 일종의 저항 정신……. 역시 내 안에도 록 스피릿이 있는 거겠죠?”
“그…… 네…….”
“역시 단솔 씨라면 이해해 줄 줄 알았어요. 같은 뮤지션끼리는 통하는 게 있으니까.”
동물도 모자라 바위나 나무까지 배려하는 사람이 자기 매니저 마음은 왜 이렇게 몰라주는 걸까. 단솔은 얼굴도 모르는 민혁의 매니저가 불쌍해졌다.
“단탄지 이 녀석들 걱정이 돼서, 섬 비울 때마다 마음이 좀 그래요. 태어나서부터 사람 손 탄 애들이라…… 우리 없이 잘 지내나 싶고.”
“얘네…… 형이 입양하는 건 어때요?”
“흐음…….”
난처해 보이는 민혁의 표정에 단솔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데.
“죄송해요. 형한테 책임지라는 게 아니라…… 저는 숙소 생활을 해서…….”
“아아, 아니에요. 사실 나도 얘네랑 어미 입양하고 싶어서 알아봤는데. 섬 주인한테 허락을 맡아야 한대요.”
“어…… 얘넨 길고양이잖아요.”
“그래도 여기가 사유지라, 문제 삼을 수도 있다나 봐요. 근데 섬 주인이 해외라도 나간 건지…… 도통 연락이 안 되네요?”
발 달린 동물이 어딜 가든 그게 무슨 문제겠냐마는, 민혁처럼 유명한 연예인이 입양하는 경우는 달랐다. 일반인이 했다면 칭찬받을 만한 행동도 연예인이라면 욕을 먹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수억 원을 기부해도 욕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 민혁은 귀찮은 게 싫어, 문제될 만한 일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습관이었다.
“너무 치사해요…… 섬 주인은 아마 얘네가 여기까지 들어와서 살고 있는 것도 모를 텐데…….”
“그러게요, 그래도 더 추워지기 전에는 어떻게 해서든 데려가려구요. 절도죄로 잡혀가기밖에 더 하겠어요?”
“형!”
“장난이에요.”
단탄지를 쓰다듬으며 개구쟁이처럼 웃는 민혁에 단솔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순간적으로 유치장에 갇힌 민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아마 그곳에 갇혀서도 유치장의 좋은 점 따위를 찾고 있을 것 같았다.
“솔아! 주단솔!”
“어……? 저희 매니저 형인가 봐요.”
웬일로 길성이 늦지 않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저녁까지 기다릴 생각을 하고 있던 단솔이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 문밖에 있던 길성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어⁈ 제갈민혁 씨도 계셨네요!”
“아…… 안녕하세요.”
길성은 무슨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단솔의 손목을 잡고 급히 이끌었다.
“형!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나 아직 짐도 안 쌌는데…….”
“뭐⁈ 아잇…… 아직도 짐도 안 싸고 뭐 했어. 애들 기다리는데!”
“형이 방송 미뤄진 거 말도 안 해 줬잖아! 우리 무슨 스케줄 있어?”
“아…… 내가 그랬나…… 일단 필요한 건 애들한테 빌리고 빨리 가자. 제갈민혁 씨! 만나서 반가웠어요!”
“어어……! 민혁이 형! 다음 주에 봐요!”
길성에게 끌려가면서 겨우 민혁에게 인사를 건넨 단솔의 앞에는 다이노 소울이 연습생일 때부터 타고 다닌 낡은 승합차가 서 있었다. 단솔이 조수석 문을 열자, 뒷자리에는 멤버들이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단솔을 기다리고 있었다.
“워어…… 형아! 제갈민혁이랑 호형호제하는 사이야? 와…… 대박이다…….”
“길성이 형! 우리 내려서 제갈민혁 선배랑 사진 한 번만 찍으면 안 돼? 나 진짜 팬인데…….”
“나중에 해! 나중에! 지금은 1분 1초가 급해!”
민혁의 머리털 하나라도 더 보려고 창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멤버들을 뒤로한 채, 길성이 거칠게 차를 몰고 춘몽각을 빠져나갔다. 그러고 보니 멤버들 모두 행사라도 다녀온 듯 무대 의상을 입고 있었다.
“무슨 행사 있었어? 애들은 왜 데려왔어?”
“말도 마, 형! 우리 방금까지 전어 축제 다녀왔어.”
“내 몸에서 생선구이 냄새 안 나? 이씨…… 거기까지 가서 냄새만 잔뜩 맡고 시간 없다고 한 입도 못 먹고 그냥 올라왔어.”
“가을은 전어, 전어는 가을인데. 형아가 좀 말려 봐 길성이 형 완전 폭주 기관차야! 여기까지 오는데도 계속 100㎞ 넘게 밟았다니까? 이거 승합차 아니고 제트기야.”
길성은 멤버들의 아우성에도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실실 웃을 뿐이었다.
“형! 도대체 뭔데 이 난리야? 우리 무슨 스케줄인데?”
“놀라지 말고 들어 솔아. 우리…… 아시안 게임 개막식 무대 서기로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