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공포에 질린 단솔은 단순히 무서운 정도를 떠나 이제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절벽 위에서 남들이 비명 지르는 소리만 들으며 언젠가 돌아올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자니 공포심이 더 커졌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호롱불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혼자 가는 것보다는 사람 한 명이 함께한다는 것도 적잖은 힘이 되어 주었다. 단솔은 그 생각에 제 옆에 있는 태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괜찮느냐고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태오는 이미 땀으로 샤워를 한 듯 푹 젖어 있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겁에 질린 모습에 단솔은 괜히 애틋한 눈빛으로 호롱불을 바라보았다.
—주단솔 씨, 마태오 씨. 출발해 주세요.
“하아…….”
“태오 씨 괜찮아요?”
“네…… 아 매일 보던 곳인데 왜 이렇게 무섭죠?”
“기…… 기분 탓일 거예요.”
단솔은 태오의 덜덜 떨리는 손을 잡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잡은 손에서 땀이 잔뜩 느껴지는 게, 누가 보면 손을 물에 담갔다가 뺀 줄 착각이라도 할 정도였다.
“태, 태오 씨…… 비가 오나 봐요…… 자꾸 어디서 물이 떨어지는데.”
“죄송해요…… 제 땀이에요.”
단솔이 태오의 손을 놓고 축축한 손을 바지춤에 닦고 있을 때, 소나무 숲에 다다른 태오는 단솔을 두고 입구에서부터 놓인 귀신 인형에 혼자 소리를 지르며 내달렸다.
“으아아아악!”
“아아아악!”
호롱불이 일렁이며 만드는 그림자에 겁이 난 단솔은 호롱불마저 던져 버리고 태오가 도망친 방향으로 무작정 뛰기만 했다.
“잠깐!”
그러다 앞선 사람들이 걸린 함정 앞에 도착했을 때, 태오가 소리를 꽥 질렀다. 소리를 듣고 바로 멈췄지만,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흙바닥에 미끄러진 단솔은 하마터면 함정에 빠질 뻔했다.
“누가 표시해 뒀나 봐요. 함정이에요.”
“헤드램프…….”
단솔이 빠질 뻔했던 자리에는 이연과 민혁이 쓰고 갔던 헤드램프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이런 함정이 또 있을 수도 있어요. 발밑 보면서 천천히 가요 우리.”
태오가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알았으니까…… 이것 좀 놔줄래요?”
말과는 달리 태오는 단솔을 한 걸음도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끌어안고 있었다. 저보다 20㎝는 큰 태오가 매달려 있으니 단솔은 귀신에게 죽는 것보다 목이 졸려 죽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그 뒤로는 생각보다 시시한 장난 같은 장치들의 연속이었다. 나무에서 가발이 뚝 떨어진다던가, 갑자기 안개가 뿜어져 나온다던가 하는. 그렇다고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 봤자 예능에서 흔히 볼 법한 장치들이었다.
두 사람은 소나무 숲을 지나, 세트로 지어진 폐가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담장이 낮은 한옥 세트는 진짜 집을 옮겨 놓은 것처럼 리얼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태오의 귓가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단솔 씨……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
“……무……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그래요……?”
“아…… 아기 울음소리…….”
“여, 여기 아기가 있을 리 없잖아요. 단탄지 울음소리를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
“허……!”
“왜…… 왜요?”
그때까지도 거의 태오에게 반쯤 안긴 채로 걷던 단솔이 뒤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돌처럼 굳은 태오의 팔에 막혀 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정작 단솔에게 잔뜩 겁을 준 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 단솔 씨. 저기…… 아이가 있어요.”
“네?”
“이리 오…… 오라는데요?”
스르륵 풀리는 태오의 팔에 단솔은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느새 사라졌는지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홀린 듯 방 안쪽으로 걸어가는 태오만이 보였다.
“……태오 씨? 어디 가요⁈ 나…… 무서운데…….”
겁이 그렇게 많으면서 갑자기 무슨 용기가 났는지, 단솔의 물음에 대답도 않고 들어가는 태오에 단솔은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태오를 따라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마당에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5분쯤 지났을까, 방 안으로 들어갔던 태오가 싱글벙글하며 나왔다.
“고마워!”
태오의 손에는 주머니 하나가 들려 있었다.
“태오 씨! 그게 뭐예요? 어디 갔다 온 거예요?”
“애기가 따라오래서 따라갔더니…… 방 안에 이게 있더라구요.”
태오가 내민 주머니 안에는 탈락자 투표권 8장이 들어 있었다.
“한 장씩 숨어 있던 게 아니라 통째로 넣어 둔 거였구나…….”
“에잇, 이렇게 두니까 못 찾지. 아 이제 동굴만 가면 끝이네…… 얼른 나가요 우리.”
태오는 그제야 한시름 놓은 듯 단솔의 팔짱을 끼고 동굴로 향했다. 달빛 덕분에 동굴로 가는 길은 그리 무섭지 않았다.
“워!”
“으아아악!”
“꺄악!”
그리고 두 사람이 동굴 안 테이블에 놓인 데이트권을 집어 들었을 때, 앞서 출발했던 사람들이 나와서 단솔과 태오를 깜짝 놀래 줬다.
“오…… 마태오. 무섭다고 진저리 칠 땐 언제고, 데이트권이랑 탈락자 투표권 다 얻은 것 봐.”
“그러게요…… 아무리 뒤져도 안 나오던데. 어디서 찾았어요?”
지수와 이연이 태오를 보고 물었다.
“안방에서요. 그…… 아역 친구가 알려 줬는데요? 와 근데…… 분장이 얼마나 리얼하던지. 저 진짜 그 자리에서 오줌 쌀 뻔했어요.”
“응? 아역?”
“네, 그 얼굴 하얗고, 눈 크고, 청 멜빵바지 입은 어린아이…….”
“뭐야, 마태오 끝나니까 좀 여유 생겼나 보다? 아까는 벌벌 떨더니 그런 소리도 할 줄 알고? 나 방금 살짝 소름 끼침.”
지수가 제 팔뚝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네? 무…… 무슨…… 형들이 저한테 장난치시는 거죠? 단솔 씨! 단솔 씨도 봤잖아요!”
단솔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태오가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봤을 뿐, 단솔은 태오가 들었다는 아기 울음소리도, 아역 친구도 보지 못했다.
그때, PD인 미진이 나섰다.
“태오 씨…… 뭐 잘못 본 거 아니야? 우리…… 아역 섭외한 적 없는데. 그리고 상식적으로 이 야밤에 어린애가 혼자서 스탠바이하고 있을 리가…….”
“히익!”
“태오 씨!”
“마태오!”
그 말을 듣자마자, 태오는 까무룩 기절해 버렸다. 태오가 기절하는 순간에도 꼭 쥐고 있던 탈락자 투표권을 보고 곤란한 듯 막내 조연출이 최 PD에게 말했다.
“저…… PD님. 제가 탈락자 투표권 숨기는 걸 깜빡했던 것 같습니다…….”
“……뭐? 그럼 이건 뭔데.”
“아……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길래…… 선배님들이 숨기신 줄 알고.”
“뭐⁈ 이 자식이……!”
8장이 한꺼번에 들어 있는 투표권 주머니를 보고 스태프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펼쳐졌을 때, 태오의 동공과 맥박을 확인한 대수가 소리쳤다.
“지금 사람이 쓰러졌는데,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일단 그냥 기절한 것 같으니까 숙소로 옮기죠.”
* * *
그날 밤, 침대에 누운 단솔의 귓가에 오늘따라 유독 바람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린 단솔은 아까 전 춘몽각으로 돌아왔을 때, 지수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형…… 진짜 태오 씨가 뭘 본 걸까요?”
“……아니야, 그 아역 있었어. 나도 봤어. 스태프들이 장난치는 거지 뭐.”
지수가 단솔을 안심시키려 애써 거짓말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던 그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바람 소리에 놀란 단솔이 이불을 아예 머리끝까지 뒤집어쓰자, 바깥에선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무서워…….”
콰과광—!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바깥에선 무언가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결국, 참다못한 단솔이 베개를 들고 방에서 뛰쳐나왔다. 아까 전 봤던 무시무시한 귀신 분장들이 이제야 머릿속을 맴돌았다.
계속 이러다간 오늘 아예 잠을 못 자지 싶었다. 복도로 나온 단솔은 지수의 방문을 두드렸다. 지금은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었다.
똑똑.
“누구야.”
“형…… 저 단솔이예요.”
다행히 지수는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인 것 같았다. 단솔이 목소리를 내자, 지수는 기다렸다는 듯 벌컥 문을 열었다.
“솔아, 무슨 일이야?”
“아…… 저…… 그게…….”
단솔은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다 큰 성인이 혼자 자기 무섭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데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호…… 혼자 자기가…….”
“안 그래도 형아 혼자 자기 너무 무서웠어. 내 생각해서 와 줬구나?”
눈치 빠른 지수는 자신이 먼저 선수를 치곤 단솔의 손목을 잡아 방 안으로 이끌었다. 책을 읽고 있었던 모양인지, 지수의 침대맡에는 책 한 권과 낮에 마셨던 PPL 음료수가 놓여 있었다.
“깔라만시…… 되게 좋아하시나 봐요 형.”
“그러게…… 나 원래 신 거 잘 먹거든.”
“책 읽고 있었어요? 데미안? 으응…… 어려워 보여요.”
“딱히 그렇지도 않아. 다 읽고 나면 빌려줄게.”
“감사해요. 근데 보자마자 졸려요…… 자야겠어요.”
단솔은 정말 책 표지를 보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예능을 찍는 내내 그랬지만, 오늘은 정말 유난히 피곤한 날이었다.
지수는 제 침대 위에 올라온 익숙한 무게감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단솔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 뒤, 협탁에 놓인 조명의 밝기를 조절하고, 침대 헤드에 기대어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평화롭고, 조용한. 지수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