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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45화 (45/150)
  • 45화

    “어째…… 좀 으스스하네요.”

    조용한 분위기가 어색했던 이연이 민혁에게 말을 건넸다. 비록 단솔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지만, 이연은 민혁을 꽤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데이트…… 어떠셨습니까?”

    “질투…… 하시는 거예요?”

    “그냥 물어보는 겁니다.”

    하지만 민혁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 누구보다 고요해 보이는 그는 이 경쟁에 상당히 진심이었다.

    “좋다고 할 수도…… 나쁘다고 할 수도 없겠네요.”

    “지금 단솔 씨가 별로였다는 얘기입니까⁈”

    민혁은 마치 자신이 단솔이라도 된 듯 발끈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연은 단솔의 호위 무사라도 되는 양 표정을 굳힌 민혁에 마이크를 살짝 그러쥐어 가린 뒤 목소리를 낮췄다.

    “단솔 씨가…… 나한테 화난 게 있는 것 같아요.”

    “이연 씨한테요?”

    “사과를 해 달라더군요. 그때는 미안했다고,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어요. 내가 뭘 잘못한 건지. 어우씨! 깜짝이야…….”

    이연이 소나무 숲에 다다라 입구에 매달려 있는 귀신 인형을 보곤 깜짝 놀랐다. 민혁은 그게 귀여운 듯 만지작거렸다.

    “음…… 그게 문제 아닐까요?”

    “뭐가요?”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거요. 가끔…… 존재만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겁니까?”

    “이연 씨는 모두에게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니까…… 그럴 확률이 높죠.”

    이연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인상을 썼다.

    “다정하고 친절한 게 죄가 됩니까?”

    “어떤 상황에서 모두에게 친절한 건 죄가 되기도 하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뒷전으로 보이게 만들거든요. 뭐랄까…… 같이 있어도 외로운 느낌을 준다고 해야 할까.”

    “……잘 모르겠어요. 내가 언제 그랬지……?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해요?”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서운함도 애정에서 출발하는데……. 이연 씨랑 단솔 씨랑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된 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선의의 경쟁을 위해서 더는 말해 주지 않겠습니다.”

    “아!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말해 줘요! 진짜 선의의 경쟁은 동등한 조건에서 시작해야죠!”

    “동등한 조건이 아으아아악!”

    “아아아아악!”

    * * *

    30분째 함정에 갇혀 있던 민성은 을씨년스럽게 울리는 까마귀 울음소리에 귀를 막고 있느라 이연과 민혁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제작진이 파 놓은 함정에서 나란히 만난 세 사람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서로의 얼굴을 보고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아악!”

    “하…… 민성 씨?”

    잔뜩 긴장한 탓에 땀범벅이 된 민성을 먼저 알아본 것은 민혁이었다.

    “어어어어! 민혁 씨! 이연 씨! 왜 이제야 왔어요……. 미친 한지수가 날 버리고 가는 바람에…… 아무튼 자세한 이야기는 위에 가서 해요, 여기 너무 덥고…… 벌레도 많고…… 얼른 올라가요!”

    “어…….”

    민성의 말에 이연과 민혁 두 사람 모두 목석이 된 듯 자리에 굳었다.

    “뭐 하고 있어요! 빨리 올라가요! 나 구하러 온 거 아니에요?”

    “그게…… 저희도 빠진 건데요.”

    * * *

    “와…… 여기 엄청 무섭네.”

    예능 출연을 자주 하는 편인 두현이 보기에도 제작진들이 준비한 세트로 가는 길은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바다의 파도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소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고, 주변엔 가로등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 너머에 있는 세트장은 버려진 지 수십 년 된 폐가를 모티브로 만들어 진짜처럼 정교했다. 바닷가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더 기괴함을 증폭시켰다.

    “영화 작업을 주로 하던 스태프들이 만든 거라 확실히 다르긴 다르네요…… 이거 세우느라 제작비 모자라서 그 이상한 음료수 협찬 받아 온 건가…….”

    “…….”

    하지만 대수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갑자기 엄습하는 두려움에 두현이 이성을 잃고 성질을 냈다.

    “아! 왜 말이 없어요! 오줌이라도 지렸! 아니, 바지에 실수라도 하셨어요?”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른 두현은 뒤늦게 아차 해서 목소리를 상냥하게 바꾸고 물었다.

    “……아직.”

    “어?”

    두현은 못 볼 꼴이라도 본 양 표정이 일그러졌다.

    “진짜 무서워요?”

    “아직…….”

    “뭐가 자꾸 아직이라는 거예요? 으아아아악!”

    대수를 보면서 걷던 두현이 발밑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구덩이로 떨어졌다. 아래에 있던 민혁과 이연, 민성이 떨어지는 두현과 부딪치지 않으려 벽에 달라붙어 가까스로 피했다.

    “아…… 아직인 줄 알았는데.”

    두 번씩이나 같은 타이밍에 비명이 들리는 걸 알아챈 대수는 이쯤 오면 무슨 장치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단솔이라면 모를까 두현의 말에 굳이 집중하고 있었을 리가 없는 그의 ‘아직’은 아직 눈에 띄는 장치가 없다는 말이었다.

    “이런 거였군. 한지수가 데이트권을 두 장 얻어 낸 게…….”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꺼내 줄 생각은커녕 태연히 자세를 낮춰 함정을 바라본 대수는 지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리를 뜨려고 했다.

    “어어어어! 선배님! 어디 가세요! 저희 구해 주고 가야죠!”

    “……내가 왜?”

    “그거야……! 사람들이 함정에 빠졌는데 그냥 가요?”

    “지금 내가 너희를 구해 주고 얻을 득이 뭐지? 데이트권이든, 투표권이든 난 너희와 그걸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안 뺏을게요!”

    땀에 절어 긴 머리칼이 얼굴에 달라붙은 민혁이 외쳤다. 대수는 그 말에 코웃음 쳤다.

    “그걸 어떻게 믿지? 너도 봤잖아, 마태오가 네 호주머니 안에 있는 투표권 훔쳐 가는 거.”

    위에서 내려다보는 대수의 시선이 꼭 잔혹한 사채업자 같았다. 굴 안에 빠진 사람들은 이게 영화의 한 장면인지, 자기가 정말 잘못해서 잡혀 오기라도 한 건 아닌지 급기야 헷갈렸다. 이 더위에도 흰 셔츠에 정장 바지를 고수하는 대수의 옷차림이 푸릇푸릇한 연애 서바이벌 예능을 더 살벌하게 만들었다.

    “투표권, 데이트권 찾으면 다 드릴게요. 투표권은 혼자 찾는 것보다 여럿이서 찾으면 더 유리하잖아요. 또…….”

    대수는 금방 흥미를 잃은 듯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단솔 씨!”

    “뭐?”

    내내 조용하던 이연이 입을 열었다.

    “단솔 씨가 다음 주자인데…… 이렇게 그냥 가시면 아마 실망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많은 사람을 구하지 않고 혼. 자. 투표권을 독식한…… 한지수 씨처럼 보이고 싶으신 겁니까?”

    마치 세일즈맨이라도 된 듯 조리 있게 말하던 이연은 얼핏 대수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발견했다.

    “저희를 구한 건 여기서 나가게 되면 단솔 씨에게 다 말해 드리겠습니다. 아하! 그러고 보니, 여기 함정이 있다고 확실하게 표시를 해 두면 되겠네요. 혹시 단솔 씨가 빠질 수도 있잖아요. 마침 저희에게 헤드램프가 두 개 있으니까…….”

    “됐고, 올라와.”

    이연의 말을 끊은 대수가 근처 나무에 밧줄을 묶더니 아래로 줄을 내려 주었다. 줄을 타고 올라올 기력도 없어 줄에 매달려만 있던 민성은 대수가 끌어 올려 준 줄 덕분에 드디어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대수가 다른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는 모습을 모니터하고 있던 PD들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톱 스타라고 별수 있나. 그들의 몸값만 해도 한 분기 제작비와 맞먹을 정도였지만, 무리해서 돈 들인 보람이 있었다.

    “저기, 정대수가 제갈민혁 손잡아 주는 장면 있지? 클로즈업해서 웅장한 음악 깔아. 저번에 정대수가 찍은 영화랑 오버랩 되게.”

    “크큭…… 재밌는데요? 어디 가서 저 사람들이 저렇게 유치하게 노는 걸 보겠어요.”

    “주단솔이 정대수한테는 약점이네. 여차하면 달나라까지 쫓아갈 기세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출연자들끼리 연륙교도 없는 무인도 같은 데 가둬 놔도 재밌겠는데요?”

    “그거 좋은데? 바깥에서는 난리겠지만, 결국 궁금해서 볼 테고. 제작비 이만큼 뽑아 먹었는데 무슨 수를 쓰든 시청률은 건져야지.”

    조연출과 작가들이 의견을 내자, 미진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다면 하는 그녀의 말에 스태프들이 주변을 살폈다. 출연진들이 들었더라면 식겁해서 당장 회사의 법무 팀을 불러와 프로그램 출연 계약을 해지하라며 난리 쳤을지도 모를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의 눈에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막내 조연출이 들어왔다. 미진은 그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네? 아…… 사랑은 원래 유치한 거 아니겠습니까?”

    “야! 너 이 새끼 딴생각했지? 집중 안 해?”

    다른 생각을 했는지, 맥락에 안 맞는 소리를 한 막내 조연출에게 비난의 화살이 꽂혔다. 그는 그런 반응에도 어색하게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고는 뒷머리를 긁을 뿐이었다.

    “일을 아주 못하지는 않는데…… 뭔가…….”

    “네? PD님?”

    “아…… 아니에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미진의 목소리를 듣고 작가가 되물었다. 하지만 미진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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