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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44화 (44/150)

44화

“지수야, 우리 이렇게 걷는 것도 오랜만이네?”

민성은 소나무 숲에 도착하자,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고서 잡히지도 않을 분위기를 잡았다.

지수가 손전등을 계속 비추며 약 올린 탓에 욱해서 튀어나왔던 욕설쯤이야 어차피 편집될 테고, 아련한 구 남자 친구 콘셉트로 방송 분량을 노리는 모양이었다. 명색이 배우가 연기력이 저래서야, 그러니 번번이 밀리지. 하는 생각과 함께 지수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 냈다.

“우리가 같이 걸어 본 적이 있었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주로 민성이 지수를 쫓아다녔고, 지수는 그런 민성을 피해서 도망 다니거나, 혹시 사진이 찍힐까 봐 차에 밀어 넣었으니까.

두 사람이 같이 걸어 본 적은 단 한 번…….

“왜, 그때.”

집 앞까지 쫓아온 민성을 피해 주차장에서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려던 때였지 아마. 갑자기 터진 카메라 플래시에 놀라 옆에 있던 민성을 붙잡는 바람에 변명할 여지 없이 확실한 열애설이 났었다.

지수는 그때만 생각하면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아 눈앞에 있는 민성의 코를 제 손으로 다시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엮여도 하필이면 이런 것과 엮일 건 또 뭐람.

누가 보면 뭐 퍽이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는 절절한 전 연인인 줄 알 것 같은 말투였다. 몇 날 며칠을 포털 사이트 메인에 걸려서 [한지수, 하민성과 열애! 아파트 주차장에서 어머, 자기야.] 따위의 헤드라인으로 오르락내리락한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 지수였다.

상대가 민성이 아니라 단솔이었다면 직접 기자 회견을 열어 주단솔이 내 남자다, 세상에 당당하게 외쳤을 텐데.

지수는 옆에 있는 민성이 뭐라고 하든 말든, 단솔과 열애설이 터지는 상상을 하며 흐흐 웃었다.

“뭐, 뭐야…… 무섭게 왜 혼자 웃고 지랄이야.”

보아하니 민성은 겁을 꽤 먹은 모양이었다.

그때는 물론이고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지수는 민성의 장단을 맞춰 주며,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악랄한 장난기가 발동한 지수가 가만히 민성을 응시하다 허공으로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민성은 뭐, 왜, 왜 그러는데, 하고 다급히 지수에게 물었다.

“어, 귀신이다.”

“으아악!”

지수는 대답해 주지 않고 다시 민성에게로 시선을 돌린 뒤 섬뜩한 표정으로 있지도 않은 귀신을 언급했다. 대화할 가치도 느껴지지 않는 겁쟁이에게는 겁을 주는 게 최고의 방어법이다.

지수는 잔뜩 놀라 식겁을 하며 추하게 소리 지르는 민성을 훑으며 피식 비웃었다. 상대에게도 명백히 전해지는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너…… 진짜!”

마음 같아서는 욕쟁이 할머니에 빙의해 한껏 욕지거리를 뱉어 주고 싶었으나, 아까 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카메라를 이제야 의식한 듯 더 심한 말을 뱉지 못하고 분하다는 듯 씩씩대는 민성의 귓가에 지수가 속삭였다.

“어디서 같잖은 게 알파 놀이야. 오냐오냐해 줄 때 적당히 해.”

무방비 상태에서 들어온 지수의 고압적인 알파의 페로몬에 민성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 버렸다.

두 사람의 열애설 기사가 날 때만 해도 하민성이 아깝다는 여론이 대세였다. 그리고 당시 민성 자신도 이제 막 신인 배우로 이름을 알리는 지수의 인지도에 제 이름값이 도움이 됐다는 약간의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바뀌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배우로 입지를 굳힌 지수에 반해 아직도 아이돌 이미지를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한 민성의 자격지심을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차라리 마주치지라도 않았다면 그저 단순한 질투심에서 끝났을 법한 감정이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더 널뛰었다.

“하…… 씹…….”

* * *

“단솔 씨 이거라도 넣어요.”

태오가 주방에 들어갔다 오더니 마늘을 한 주먹 가져와 단솔의 주머니에 넣었다.

“이게 뭐예요……?”

“귀신들이 마늘을 무서워하잖아요.”

“태오 씨…… 어차피 진짜 귀신이 아닐 텐데요…….”

진동하는 마늘 냄새에 단솔이 만류해 봤지만 태오는 막무가내였다. 다른 출연자들은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보고 있었다.

“귀신들이랑 싸우려면 이 정도는 준비해야 해요.”

“태오 씨, 담력은 스스로와의 싸움이에요. 우린 그…… 자신과 싸우는 거죠. 모든 두려움은 다 우리 안에서 나온다구요……. 그리고 귀신은 없어요.”

단솔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단솔 씨,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저…… 사실 귀신 본 적 있어요.”

“네⁈”

“녹음실에서 기절한 적도 있구요. 점 보러 갔더니 연예인 안 했으면 신내림 받았을 거라고…….”

“아아악!”

태오가 말을 하고 있는데, 절벽 아래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정황상, 저 비명의 주인은 민성 아니면 지수일 터.

“아아…… 그걸 왜 이제 말해요오…….”

단솔은 그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말하면 더 무서워할까 봐…….”

단솔이 주섬주섬 아까 빼놓은 마늘을 제 주머니에 넣기 시작했다.

“선배는 귀신 같은 거 안 무서워하시죠?”

“…….”

두현이 대수에게 물었지만, 대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설마, 무서워해요?”

“글쎄…… 내 눈으로 보지 않은 건 안 믿는 편이긴 하지.”

“민혁 씨는요?”

두현은 의식적으로 이연을 쳐다보지 않고서 물었다. 무슨 생각인지 이연에게 단호하게 거절당한 뒤로 두현은 이연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없다고 생각하진 않죠. 특히나…… 섬에는 귀신들이 많다고 해요. 귀신은 물을 못 건너거든요.”

“다리 있잖아요.”

민혁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이 상황과는 다른 게 실제로 춘몽도는 다리를 통해 오갈 수 있는 연륙교가 있었다.

“그렇군요…….”

“저 사람은 어째 점점 더 도사 같아지는 것 같네…….”

“민혁이 형 사극 OST 작업 중이래요. 아마 그래서 그럴걸요.”

민혁의 대답에 두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태오가 두려움에 떨면서도 민혁 대신 대답했다.

“어째 넌 모르는 게 없네.”

비꼬는 두현의 말투에도 태오는 칭찬인 줄 아는 듯 부끄러워했다. 당최 대화가 통하질 않는 사람들투성이라 두현은 대화를 포기하고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이연 선배는 귀신 안 무서우세요?”

아까부터 줄곧 표정을 굳히고 있는 이연에게 태오가 물었다.

“귀신보다는…… 사람이 무섭지?”

이연의 말에 단솔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걸 잘 아는 단솔이었다.

* * *

“야! 한지수! 지수야? 지수 씨? 저 여기 있어요!”

한편, 민성은 제작진들이 파 놓은 함정에 떨어져 애타게 지수를 부르고 있었다. 쿠션으로 사방을 둘러놓긴 했지만 앞서간 지수를 따라잡겠다고 뛰어가다 구덩이에 빠졌을 땐 정말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던 민성이었다.

분명 평범한 땅바닥으로 보였는데, 밟고 보니 끝도 없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여간 성실한 양반들. 언제 이렇게까지 파 놓은 건지 짐작이지만 구덩이는 족히 300㎝는 넘어 보였다.

붙잡고 올라갈 것도 하나 없이 전체가 매끄러운 매트리스와 쿠션뿐이었다. 이제 보니 이건 그냥 공포 체험 수준이 아니었다.

“여기…… 줄이 있네.”

지수가 제작진이 미리 설치해 놓은 밧줄 끝을 흔들며 말했다.

“어! 그래! 그거 줘!”

“내가 왜?”

“우리…… 한…… 팀이니까?”

민성의 말에 지수가 코웃음을 쳤다. 민성은 무엇인가 잘못된 걸 느낀 듯 지수를 달래기 시작했다.

“하……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 어? 혼자 가면 너도 무섭고, 나도 무섭고…….”

“난 안 무서운데?”

“그…… 아니 너 이렇게 나 두고 가면 사람들이 막 욕할 텐데? 이미지 관리 안 해?”

“글쎄…… 워낙 싸가지 없는 새끼라고 소문이 나서 관리할 이미지가 없는데. 생각해 보니까 혼자서 찾으면 데이트권도 두 장 다 내 거, 탈락자 투표권도 다 내 거네? 구해 줄 이유가 더더욱 없는데? 갈게!”

동그란 하늘만 바라보던 민성의 시야에 지수가 사라졌다. 그저 장난이라 생각한 민성이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하하, 아이…… 한지수 씨? 장난이 심하시네. 지수 씨? 지수야? 한지수 선생니임—.”

“…….”

“야! 한지수 시발 놈아!”

하지만 지수는 대답이 없고, 까마귀 소리만 울려 퍼졌다.

—1번 팀의 한지수 씨가 동굴에 도착해 데이트권 획득에 성공했습니다. 현재까지 투표권을 찾은 팀은 없습니다. 다음 팀, 제갈민혁 씨, 이이연 씨 준비해 주세요.

“자…… 잠깐만요! 지수 형이 도착해야…… 가는 거 아니에요?”

—앞선 주자들은 결승 지점에서 대기합니다.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 그럼 저희가 먼저 출발하면 안 돼요? 우리끼리 있는 게 더 무서운데…….”

—이미 정한 순서는 바꿀 수 없습니다.

“다녀올게요.”

“다녀오겠습니다.”

이연과 민혁이 헤드램프를 쓰고 절벽 아래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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