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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43화 (43/150)
  • 43화

    방송을 듣고 나간 앞마당에는, 춘몽각으로 들어오던 이연이 있었다. 단솔은 애써 이연을 마주하지 않으려 이연이 서 있는 쪽의 반대편에 섰다.

    그런 단솔의 옆에는 지수와 태오, 그리고 대수와 민혁이 듬직하게 서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민성과 두현은 이번에도 트레일러에서 나란히 나왔다.

    “30분씩 야무지게 잘도 쓰시네…….”

    태오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그들을 바라보자, 태오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는 단솔이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태오는 단솔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편하게 대화하라고 하루에 30분 쓰는 저거, 두 사람 오늘만 두 번째 들어갔어요. 점심 먹고 들어갔다가, 저녁 먹고 또 들어감. 알뜰살뜰하게 잘 쓰네요.”

    “오…….”

    민성의 취향이 두현이라는 사실에 놀랐지만, 어차피 그를 이성이 아닌 어릴 적 우상쯤으로 생각했기에 단솔은 그저 잠깐 놀라고 말았다. 그 이상의 아쉬움 비슷한 감정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그보다는 앞에 늘어서 있는 각종 장비에 더 눈길이 갔다.

    “이게 다 뭐야…….”

    두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다들 모이셨군요. 좋은 저녁 되셨나요? 마음에 드는 사람과 로맨틱한 저녁을 보내신 분들도 있을 테고,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실 텐데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여러분에게 기회는 남아 있으니까요.

    —오늘은 경쟁자 제거를 위한, 투표권 획득 게임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우아악!”

    “으어어!”

    바로 그때, 태오의 발밑으로 가발 하나가 툭 떨어졌다. 태오의 괴성에 놀란 단솔이 같이 비명을 질렀다.

    —오늘의 게임은 바로바로 공포 체험입니다. 해안가에 보이는 흉가 안에, 투표권 8장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숨겨 놓았습니다. 단 한 번의 기회로 경쟁자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이번 게임의 룰은 간단합니다.

    —파트너의 이름이 담긴 캡슐과 들고 들어갈 장비와 순서가 적힌 캡슐을 각각 하나씩 뽑은 뒤 출발해 주시면 됩니다.

    —준비된 주머니는 단 하나이며, 주머니의 위치는 매번 변경됩니다.

    절벽 밑에는 정말 언제 지은 건지 꽤 그럴듯한 흉가 세트가 있었다. 귀신의 집에서 이미 한번 겁쟁이 인증을 받은 단솔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주단솔 씨?

    “네⁈”

    어느새 겁을 잔뜩 집어먹은 단솔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도 깜짝 놀랐다.

    —주단솔 씨는 공교롭게도, 매 회차마다 데이트를 하셨군요.

    “네에…….”

    —꽤 운이 좋은 편이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로 먼저 캡슐을 뽑아 보시겠어요?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닌데 단솔은 최다 데이트 수혜자라는 명목으로 제일 먼저 캡슐을 뽑게 되었다.

    단솔은 바들거리는 손을 캡슐 통에 넣었다. 내심 대수와 함께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날 귀신의 집에서 보니 대수는 겁이 없는 편인 듯했다.

    “으아아아악!”

    쑥 캡슐 상자에 손을 넣은 단솔이 캡슐을 고르고 있을 때, 물컹거리는 느낌과 함께 다른 사람의 손이 잡혔다. 단솔은 저도 모르게 나동그라지듯 주저앉았다.

    “솔아! 괜찮아?”

    울먹거리며 주저앉은 단솔을 일으킨 지수가 상자로 다가가니, 오후 내내 단솔의 데이트를 따라다녔던 막내 조연출이 구부정한 자세로 상자 밑에서 나왔다.

    —이런, 놀라셨나요? 아직 놀라긴 이릅니다. 저희가 준비한 폐가에는 더 놀랄 만한 장치들이 숨어 있으니까요.

    —주단솔 씨, 손에 있는 캡슐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으어…… 네…….”

    그 와중에도 캡슐을 잡은 모양인지, 어느새 단솔의 손에는 빨간 캡슐이 들려 있었다. 의지할 만한 사람이 나오길 바랐던 단솔의 바람과는 달리 땀으로 축축해진 종이에는 마태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태오 씨…….”

    단솔이 바들바들 떨며 태오의 이름을 부르자, 이름을 불린 태오는 이미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태오는 도살장에 끌려 나오듯 장비와 숫자가 적힌 캡슐을 뽑아 들었다.

    “호롱불…… 4번이요…….”

    바람만 살짝 불어도 꺼지는 호롱불에 마지막 순서라니. 단솔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태오도 마찬가지였는지 다시 만난 아이돌 연합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그사이 지수가 나와 캡슐을 뽑았다. 캡슐을 열어 이름을 확인한 지수가 한쪽 눈썹을 으쓱하더니 다시 캡슐을 닫고는 처음인 양 새로 캡슐을 뽑으려 했다.

    —한지수 씨! 한번 뽑은 캡슐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이고, 이런 이미 섞어 버렸네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지수의 모습에 AI처럼 감정의 동요가 없던 방송의 음성이 잠시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한지수 씨는 하민성 씨와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왜 그걸 마음대로 정해요⁈ 아무리 자극적인 방송이 대세라지만, 이거 월권 아닌가요? 자꾸 이러면 법적 대응합니다?”

    —지미집에 다 찍혔습니다.

    진지하게 항의하는 지수에게 방송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열일하시네…… 지미집 감독님.”

    억지로 입꼬리만 당겨 웃은 지수가 지미집 감독에게 마음에도 없는 앙증맞은 손 하트를 날렸다.

    두 사람의 조합에 평소였으면 지수보다 더 호들갑 떨었을 단솔과 태오였지만, 두 사람은 캄캄한 제 앞날에 얼굴이 허옇게 질려 벌써부터 아무 말이 없었다.

    하기야 예전에는 커플이었던 지수와 민성이 운명처럼 카메라 앞에 다시 만나, 커플들이 하나가 되기 딱 좋다는 공포 체험을 다녀온다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겠지만, 당장 제가 저 귀신의 소굴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남의 커플 연애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을 터. 그리고 그 당사자가 태오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리고 차례로 두현과 대수가 핸드폰 불빛, 이연과 민혁이 헤드램프를 뽑아 한 팀이 되었다.

    —코스는 해송 숲을 지나 폐가에 들러 자물쇠가 달린 캡슐을 들고 해안 절벽 아래에 있는 동굴에 도착하면 끝나게 됩니다. 동굴 안에는 열쇠가 있으며, 이 안에는 데이트권이 들어 있습니다. 끝으로, 경쟁자를 한 번에 제거할 수 있는 무려 8장의 투표권은 폐가와 숲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손전등을 뽑은 지수는 민성과 한 팀이 되어 기분이 여전히 안 좋은 듯 안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친절한 설명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깜빡거리는 손전등만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야, 한지수. 표정 관리 좀 해. 혹시…… 쫄았냐?”

    그런 지수에게 민성이 시비를 걸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피식 웃은 지수가 손에 들린 손전등으로 민성의 눈을 비추며 약 올리듯 무심하게 비웃었다.

    “악! 안 치워?”

    민성이 길쭉한 팔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요리조리 피해 보았으나, 민성 못지않게 길쭉한 지수는 그것을 다 피해 민성의 눈 쪽으로 손전등을 계속해서 비췄다.

    명색이 과거 연인으로 소문난 팀인데 그 장난 아닌 장난에서 조금의 애정도 엿보이지 않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야, 이! 시발!”짜증을 잔뜩 내며 손전등에서 쏟아지는 빛을 이리저리 피하던 민성은 집요하게 쫓아오는 손전등 불빛에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지르며 지수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민성의 손길에 애꿎은 손전등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깜빡깜빡하던 불빛은 금세 점멸하고 말았다. 그 소음에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을, 정확히는 민성에게 향했다.

    하필이면 그 순간 주변이 고요해진 탓에 민성의 욕지거리가 유독 크게 들렸기 때문이다.

    “하하…… 우리 장난이에요 장난, 그렇지?”

    애써 싸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민성을 향해 지수가 빙그레 웃으며 저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민성은 그 능글맞은 얼굴을 보며 속에서 천불이 끓는 것만 같았다.

    —한지수 씨, 하민성 씨 먼저 출발하실까요?

    “네.”

    “손전등 고장 났는데요?”

    지수가 아까 전 소란으로 깨져 버린 손전등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당연히 고쳐 주거나, 교체해 주리라고 생각하며 말했지만, 세상은, 특히 방송국 놈들은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다고들 했던가.

    —저런,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그건 하민성 씨와 한지수 씨의 부주의로 인해 하나뿐인 손전등이 고장 나 버렸군요. 아쉽지만 룰은 룰입니다. 혹시 켜질지도 모르니까 한 번 들고 가 보시던지요.

    단솔은 제 귀를 의심했다. 역시나 방송국 놈들은 뭐 하나 쉽게 주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의도치 않은 상황에 꽤 즐거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무서운 사람들 같으니라고…….

    태오와 단솔은 호롱불의 심지와 기름을 다시 확인했다. 깨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행인 건가. 호롱불은 발밑만 겨우 밝히는 정도였지만 두 사람이 지금 의지할 수 있는 건 서로가 아닌, 애석하게도 이 빈약한 호롱불이었다.

    “다녀올게.”

    지수는 겁도 없는지, 손전등 없이도 앞서 나갔다. 민성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지수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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