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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42화 (42/150)

42화

“제가 데이트 망쳐서 죄송해요…….”

오히려 저를 꾸짖는 듯한 이연의 말에 단솔이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뭐라고 변명을 하려던 이연의 입을 다물게 한 건 무전기의 소음이었다. 제작진들은 최대한 촬영이란 자각을 할 수 없도록 카메라와 무전기를 이곳저곳에 숨겨 놓았다.

―……어…… 저…… 선배님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군기가 바짝 든 말투를 보니 막내 조연출이었다. 여러 번 끼어들려고 했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타이밍을 재던 모양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한숨을 내쉰 이연이 차를 갓길에 세웠다. 뒤로 따라오던 승합차에서 급하게 내린 조연출이 창문으로 음료수 두 병을 내밀었다.

“저…… 오늘 PPL 음료가 있는데…… 선배님들이 시음을 해 주셔야 해서…….”

단솔은 그제야 지금 방송 촬영 중임을 자각했다. 워낙 티가 안 나게 숨어 있던 카메라를 인지하지 못하고 제 기분대로 굴었던 것 같아 갑자기 미안해졌다.

미간을 구긴 이연을 대신해 단솔이 허리를 쑥 내밀어 음료를 받아 들었다.

“그냥 마시기만 하면 돼요?”

“아…… 잠시만요!”

조연출은 하루 온종일 들고 돌아다녀 구겨진 종이를 꺼내 읊었다.

“상큼한 탄산이 두 배로 들어간 깔라만시 에이드를 강조해 주시고, 레몬보다 비타민이 30배 들어 있다는 것도 부탁드릴게요……!”

“네……!”

조연출이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가자, 차 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금방 아이스박스에서 꺼내 온 듯 음료 두 병을 들고 있는 단솔의 손이 금세 축축해졌다.

차를 천천히 출발시킨 이연이 얼마 안 가 신호에 걸리자 먼저 말을 꺼냈다.

“단솔아, 목마르지 않아?”

PPL이 익숙한 듯 자연스러운 멘트에 단솔이 삐걱거리며 뚜껑을 땄다.

“아, 네…… 음료수 드릴까요?”

“응, 고마워.”

음료를 한 모금 마신 이연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오묘한 표정을 본 단솔이 음료수 뚜껑을 열어 덩달아 입에 대려고 하자 이연이 그 손을 막고 말을 이어 나갔다.

“이거 상큼한 탄산이 두 배로 들어간 깔라만시 에이드네? 단솔아, 너 그거 알아? 깔라만시가 레몬보다 비타민이 30배나 넘게 들었대.”

“오…… 와…… 아니요. 몰랐어요.”

“하하, 그래? 난 원래 깔라만시 에이드 좋아하거든…….”

그 말을 끝으로 사레가 걸린 듯 쿨럭거리던 이연이 단솔의 손에 들린 음료수를 빼앗아 들곤 뚜껑을 꽉 닫아 뒷자리로 던져 버렸다.

“됐죠?”

―네, 됐습니다!

무전기에서 한층 밝아진 조연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상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단솔은 뻘쭘하게 머리만 긁고 있었다.

“내가 먹어 본 음료수 중에 최악이야 저건.”

“네?”

사실 이연이 깔라만시를 좋아해서 미리 챙겨 두는 건가 싶었던 단솔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무슨 깔라만시에서 화장품 맛이 나지…….”

“그…… 그러면…….”

이연이 일부러 저를 배려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단솔은 어쩔 줄을 모르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탄 차는 어느새 춘몽각의 주차장 앞에 도착해 있었다.

차를 세우고도 한참을 차에서 나오지 않는 두 사람 때문에 바깥의 스태프들이 졸지에 벌을 서게 됐다.

―저…… 선배님들 안 나오십니까?

보다 못한 조연출의 질문에 이연이 대답했다.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자리 좀 피해 줄래요?”

―아…… 넵! 알겠습니다!

“무…… 무슨 할 얘기…….”

이연은 단솔의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 문을 잠그곤 카메라와 무전, 마이크를 순서대로 껐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곳이라 바로 코앞에 다른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솔은 덜컥 겁이 났다.

“왜…… 왜요?”

“……미안해. 아까 일.”

“네?”

“제대로 사과해야 하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하느라 늦었어. 네가 먼저여야 했는데…….”

이연이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안전벨트를 꽉 쥐고 있던 단솔이 벨트를 풀었다.

“나는 이게 익숙해. 어떨 땐 나보다…… 남들 시선을 더 생각해. 나는 그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해도, 그 사람들 기억엔…… 내가 남을 테니까. 문제라는 거 알고 있어.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누군가의 미움을 받는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잖아.”

단솔 역시 그의 마음을 안다. 처음엔 자신을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솔이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사람들은 단솔의 일거수일투족을 트집 잡고, 비난했다.

이 바닥에서 한번 찍힌 낙인은 쉽게 거두어지는 법이 없었다.

이연도 저처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늘 반짝반짝 빛나고, 사랑만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단솔이 느끼는 고통 같은 건 모를 거라고 넘겨짚기도 했는데.

“알아요, 하지만 저는…… 여러 사람의 미움을 받는 것보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절 미워하는 게 더 아프더라고요. 형은 어때요?”

“응?”

단솔은 저도 모르게 회귀 전처럼 이연을 형이라고 불렀다. 그 친근한 호칭에 이연은 설레는 마음을 애써 모른 척 누르고서 대답했다. 무심코 한 말이지만 이연이 아는 체를 하면 단솔이 다시는 그렇게 불러주지 않을 것 같았다. 형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미워하는 게 나아요, 아니면 다들 날 미워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단 한 사람만 나를 믿어 주는 게 나아요?”

단솔은 둘 다 아니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도, 제가 좋아했던 사람도 모두 단솔을 미워했다. 하지만 그라면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세상 모든 사람이 날 미워하면…… 내 마음이 힘들어지겠지. 결국 못나진 나를 견디지 못할 거야, 그 한 사람도.”

“그렇구나…….”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은 단솔이 버튼을 눌러 직접 차 문을 열었다. 어두운 주변에, 검은 모자까지 눌러쓴 단솔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연은 보지 못했다.

“저기, 나한테 한 번만…… 미안하다고 해 주면 안 돼요?”

차에서 내린 단솔이 고개를 숙여 아직 운전석에 앉아 있는 이연에게 물었다.

“응?”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고, 진심으로 사과해 줘요. 그때는…… 내가 미안했어. 하고.”

이연은 알쏭달쏭한 소리만 하는 단솔에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단솔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연기가 업인 이연에게 그런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솔아, 그때는 내가…… 미안했어. 정말 미안해.”

단솔은 그 말에 끔찍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고마워요. 사과해 줘서.”

“잠깐만! 단솔아!”

차에서 내린 이연이 단솔을 붙잡았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가 꽤 가까워졌다. 단솔은 회귀 전 그때를 생각했다. 제게 키스하려던 이연의 얼굴을 피했을 때. 그 뒤로 두 사람은 점점 멀어졌었지.

회귀 전 이연과 지금의 이연은 달랐고, 그러나 닮아 있었다. 이연의 얼굴이 또 한 번 단솔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형은, 변한 게 없네요.”

이연이 애써 붙잡은 팔을 뿌리친 단솔이 춘몽각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솔이 왔어?”

거실에서도 PPL 장면을 찍고 있었는지 지수의 손에도 그 음료수가 들려 있었다.

“으엑, 단솔 씨 이거 먹어 봤어요? 태어나서 이렇게 끔찍한 맛은 처음이야…… 목이 타들어 가는 거 같아,!”

태오의 입맛에도 안 맞았는지 태오는 연신 얼굴을 찌푸렸다. 들어오기 전 눈물을 훔쳤던 단솔이 아무렇지 않은 척 태오를 보고 활짝 웃었다.

“난 맛있는데 다들 난리네. 솔이도 먹어 봤어 이거?”

“어…… 저는…….”

“먹을래?”

우물쭈물하는 단솔의 앞에 커다란 손이 음료수를 건넸다. 평소보다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대수였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오늘 뭐 했어? 재밌었어? 어디 갔다 왔어?”

지수는 늘 단솔이 데이트를 나갔다 오면 이렇게 한참을 묻곤 했다. 단솔은 그게 못내 좋았다. 학교 다녀오면 뭘 먹었는지, 친구들과 뭘 했는지 물어보는 엄마가 생긴 기분이었다.

“……영화 보고, 한강 갔었어요.”

“영화? 무슨 영화 봤는데? 요즘 재밌는 거 많이 나왔던데.”

“아…… 이이연 선배 영화 봤어요. 독립 영화.”

“아…… 더럽게 재미없는 거 봤겠네. 다음 주에 나가면 형이랑도 영화 볼까?”

“아…… 스케줄이…….”

“뭐 보지? 프리미엄 영화관으로 예매하라고 해야겠다. 조조나 심야도 괜찮지?”

“형! 저는요? 저도 같이 보면 안 돼요?”

“응, 넌 안 돼.”

“왜요!”

단솔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지수가 무슨 영화를 볼지 고민했다. 그 모습에 태오가 자신도 껴 달라며 달려들었다. 싫지 않은 시끄러운 소란이 일자, 단솔은 비로소 숨을 쉬는 게 편해졌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30분 뒤 투표권 획득을 위한 게임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출연자 여러분들은 모두 앞마당으로 모여 주십시오.

‘이 늦은 시간에…… 게임을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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