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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41화 (41/150)

41화

“죄송해요…….”

영화가 다 끝나고서야 깨어난 단솔은 머쓱한 듯 이연에게 사과를 건넸다. 심각하게 굳어 있는 그의 표정에 단솔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일어났어? 아직 시간 좀 남았는데.”

하지만 이연은 단솔이 제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내내 잠만 잤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치 않은 듯 굳은 표정을 숨기곤 활짝 웃었다.

“한강이라도 갈까?”

이연은 불쑥 한강에 가자고 했다. 단솔은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솔아, 우리 섬에서 나가서 데이트할까?’

‘네……? 어…… 좋아요.’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저는 한강이요! SNS에서 봤는데……. 봄에요, 벚꽃 개화했을 때 가면 좋대요. 거기서 라면도 먹고 치킨도 시켜 먹고……. 아, 근데 형은 안 되겠다. 사람들이 알아보잖아요.’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밤에 차 타고 가면 아무도 몰라.’

‘진짜요?’

‘응, 진짜요. 솔아, 너 진짜 귀여운 거 알아?’

그때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그저 몹시 부끄러워했다는 것과 그날 숙소로 돌아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만 어렴풋하게 기억났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프로그램이 끝난 뒤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좋아요.”

이번엔 제가 아니라 이연이 먼저 다가왔다. 단솔은 애써 머릿속에서 과거의 기억을 밀어냈다. 제 눈앞에 있는 이연과 과거의 이연을 분리시키려고 애썼다.

* * *

“사람들 엄청 많네…….”

근처 상가에서 산 돗자리를 펼치며 이연이 말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온 초저녁의 한강은 연인, 친구, 가족들과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제작진들은 멀찍이 떨어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각도에서 두 사람을 촬영하고 있었다. 덕분에 모자를 깊게 눌러쓴 이연과 단솔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남들보다 우월한 체형과 비율 때문에 스치던 시선에도 단솔은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어차피 모자 쓰면 못 알아봐.”

“……자주 나와 보셨나 봐요?”

단솔의 물음에 이연이 웃으며 답했다.

“왜? 데이트 많이 해 봤을까 봐?”

“……아니! 그게 아니라……!”

비꼬는 마음이 없진 않았다. 이연은 다정했고, 잘생겼고 부족할 게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당연히 저와는 다르게 연애 경험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 단솔이었다.

“가까우니까, 런닝 하러 많이 왔어. 스케줄 없으면 하루에 한 10㎞ 정도 뛰어. 모자 쓰고, 선글라스 끼고 휙 지나가면 아무도 못 알아본다?”

“아…… 그렇구나.”

“괜찮으면…… 나중에 스케줄 없을 때 같이 가도 좋고.”

수줍은 듯 말하는 이연에 단솔은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부드럽게 웃는 저 얼굴에 넘어가면 안 된다며 자기 최면을 걸었다.

“근데…… 저희 숙소는 한강이랑 멀어요. 아주아주 멀어요.”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멀어서 그런 거면 내가 데리러 갈게.”

“그…… 그런 게 아니라……!”

“어? 치킨 왔나 보다. 받아 올게 여기 있어.”

차마 웃는 얼굴에 대놓고 불편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이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연은 마치 대답을 듣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픽업 장소로 향했다.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자꾸만 이연에게 말리는 것 같아, 단솔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단솔이 쭈그려 앉아 풀만 뜯고 있을 때 단솔의 앞으로 새하얀 물체가 총총 걸어왔다.

“앙!”

“……강아지?”

“앙! 앙!”

기껏해야 제 팔뚝만 한 강아지는 아직 어린 새끼 강아지인 듯했다. 야무지게 빨간색 후드티에 목줄까지 찬 강아지가 단솔의 무릎을 마치 자기 자리인 양 차지하고 앉았다.

단솔은 당황스러워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는 것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너 누구야……?응? 엄마 어디 있어?”

“앙! 앙!”

강아지의 작은 머리를 긁어 주며 물었지만, 이 강아지가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어⁈ 얘 어디 갔어!”

“그러게 네가 좀 잘 챙겼어야지!”

“나만 주인이야? 넌 뭐하고!”

그때, 10미터쯤 떨어진 돗자리에서 강아지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단솔은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강아지 여기 있어요!”

강아지가 없어져 다투는 것 같아 단솔은 조급해졌다.

“저기 있네! 가서 데려와.”

“아이 씨…… 진짜.”

여자의 핀잔을 들은 남자가 한참 얼굴을 구기며 단솔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단솔에게서 강아지를 빼앗듯 데려갔다. 남자는 단솔에게 감사 인사는커녕 되레 화를 냈다.

“남의 강아지를 데려가면 어떡해요⁈”

“어…… 제가 데려온 게 아닌데요.”

적반하장의 태도에 단솔도 기분이 상해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하, 참. 강아지가 제 발로 갔어도, 주인을 찾아 줘야지. 막말로 내가 안 찾아왔으면, 그냥 데리고 갔을 거잖아.”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 왜 그래, 왜 안 와.”

자리에 앉아 상황을 살피던 여자가 근처로 다가왔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단솔을 알아본 듯 목소리가 커졌다.

“어⁈ 어!”

“뭔데…….”

“아, 있잖아! 우리 며칠 전에 봤던 예능!”

“뭐? 아…… 맞다! 그…… 그!”

두 사람은 방송을 보고도 단솔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듯했다. 단솔은 그냥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 뭐지. 나 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나네. 아이돌!”

“제우스?”

“아니! 말고 망한 아이돌 있잖아 왜! 하여튼 그거 맞죠?”

그들은 무례하게 단솔을 앞에 세워 놓고 ‘망한 아이돌’을 운운했다. 그들은 제 앞에 서 있는 단솔 역시 사이버 세계의 캐릭터가 아니라,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잠시만요.”

그때, 배달 음식을 받으러 갔던 이연이 돌아왔다. 이연은 두 사람에게 취조받듯 서 있는 단솔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어……! 이…… 이이…….”

그들은 이이연의 이름은 확실히 아는 듯했다. 이연은 그런 반응에 익숙하다는 듯 싱긋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저희 데이트 중인데, 비밀 좀 지켜 주시겠어요? 여기 보는 눈이 좀 많아서.”

일부러 더 어두운 곳에 자리를 잡아 아직 그들을 알아본 사람들은 없지만, 그들의 소란에 이쪽을 쳐다보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고 있었다.

“아유, 그럼요. 제가 이이연 씨 팬입니다!”

“저도요, 저도요!”

단솔에게 무례하게 굴던 두 사람은 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이연에게 굽실거렸다. 이제 적응이 될 만도 한데,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투명 인간이 된 듯한 기묘한 감각은 도통 적응이 되질 않았다.

“알오매치 서바이벌도 잘 보고 있어요. 저희 죄송한데 사진 한 장만…….”

“그럼요. 근데 이거 방송이라 스포하시면 안 돼요.”

“당연하죠!”

단솔은 불쑥 내민 핸드폰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이연은 그들과 사각 앵글 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단솔은 사진을 몇 장 찍어 준 뒤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아무래도 주변이 신경 쓰였는지, 이연은 돗자리를 접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건 차에 가서 먹자. 괜찮지?”

그때까지도 우두커니 서 있던 단솔에게 그제야 이연이 말을 걸었다. 하지만 단솔은 방금 사진을 찍어 간 커플의 말소리를 듣느라 이연이 자신을 부르는 게 들리지 않았다.

“아, 근데 저, 같이 데이트하는 아이돌이랑도 찍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왜 이렇게 이름이 생각이 안 나냐…… 꽤 귀엽던데.”

“야야, 그래 봤자 저런 애들은 그냥 반짝하고 말아. 이이연이랑 찍었으면 됐어. 우리 메리 덕분에 완전 횡재했네.”

모자를 깊게 눌러 써 단솔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던 이연이 그제야 허리를 숙여 캡 모자에 가려진 단솔의 얼굴을 확인했다.

“솔아……!”

단솔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어 봐도, 이미 단솔의 얼굴은 푹 젖어 있었다.

“왜 그래? 일단…… 일단 차에 들어가자.”

이연은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듯, 단솔을 데리고 서둘러 차로 향했다.

“솔아…… 응?”

영문을 모르는 이연이 몇 번이나 물어봐도 단솔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저도 제가 왜 이렇게까지 서러운지 모르니 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가요, 돌아가고 싶어요.”

“아까 그 사람들 때문에 그래? 그런 거 일일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응? 우리 일이 원래 그렇잖아.”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개도둑이라는 오해를 받은 것도, 면전에 대고 망돌 소리를 들은 것도 다 괜찮았다. 그 정도 일은 이제 단솔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솔을 또 한 번 상처받게 만든 건 이연의 태도였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는 정말이지 회귀 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한쪽 귀가 어두운 단솔의 귀에도 똑똑히 들리는 말을 이연은 애써 못 들은 척했다.

그는 늘 한결같이 다정했고, 친절했다. 그건 단솔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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