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도대체 저한테 왜 그러세요…….”
“왜 그러냐니? 몰라서 물어?”
“최종 선택은 이연 선배가 하는 거잖아요. 유치하게 정말……!”
회귀 전, 두현은 종종 단솔을 카메라가 없는 촬영장 뒤편 언덕길이나, 춘몽각의 테라스로 데려가곤 했다.
“유치해?”
“……그게 아니라 제 말은.”
“네 눈엔 이게 유치해 보일 수 있겠구나. 그 마음 하나 얻겠다고 여기까지 쫓아온 내가. 너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얻었는데. 그렇지?”
그날도 어김없이 두현의 패악질이 이어졌다.
“근데, 궁금하지 않아? 이이연이 너를 어디까지 믿어 줄지 말이야.”
두현이 단솔을 점점 난간 가까이 밀어붙였다.
그렇게 높진 않았지만, 그래도 떨어지면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를 높이였다. 단솔은 제 등 너머로 보이는 앞마당에 발바닥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단솔의 불안한 시선이 난간 너머를 향하고 있는 사이, 두현이 단솔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일이 벌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찔한 비명을 지르며 단솔은 몸을 웅크렸다.
“왜…….”
“아악!”
하지만 그때 난간에 매달린 것은 두현이었다. 단솔은 두현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아악! 단솔아! 살려 줘!”
두현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에 힘을 줘 자꾸만 단솔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급기야 단솔의 손은 두현의 손톱에 긁혀 피가 흐를 지경이 됐다.
“왜 이래요! 정말!”
“궁금하잖아 너도, 이이연이 네 편을 들어 줄지. 궁금하면 이 손을 놔.”
후드득 눈물이 떨어져 시야가 흐렸다. 소리를 듣고 온 사람들이 난간 밖에 있던 두현을 끌어 올렸다. 그제야 단솔은 거친 숨을 내쉬며 두현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두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떨어 댔다. 난간을 넘은 것도, 떨어지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것도 자신이었으면서.
“단솔아…… 왜…… 왜 날 밀었어?”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단솔을 향해 꽂혔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단솔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연이었다.
“네가…… 정말 밀었어?”
모두가 단솔을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아팠던 것은 믿었던 이연의 의심. 아니라고 해 봤자, 믿어 줄까. 어린 단솔은 갑자기 처한 상황에 어쩔 줄을 몰랐다.
“아…… 아니야…… 아니라고!”
* * *
“허억.”
“괜찮아? 악몽이라도 꿨어?”
단솔이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난 곳은 이연이 운전하는 차 안이었다. 이미 도착한 지 한참 됐는지 차는 주차장에 서 있었고, 단솔의 의자는 뒤로 누워 있었다.
“아…… 도착한 줄 몰랐어요…… 깨우시지.”
“괜찮아, 자고 있는 거 구경만 해도 좋았어 난. 근데……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 그냥 다음에.”
“아뇨, 오늘 가요. 여기 어디예요? 내리면 돼요?”
꿈속에서의 일은 분명 회귀 전이었다. 그럼에도 단솔은 자꾸만 이연에게 날 선 말투가 튀어 나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너 컨디션 안 좋잖아. 안 괜찮으면 안 괜찮다고 해도 돼. 다음에 와도―.”
“괜찮다니까요!”
단솔은 자꾸만 저를 생각해 주는 척하는 이연의 말투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아 맞다, 카메라.’
잠결에 예민하게 반응을 하곤, 그제야 제 앞에 놓인 카메라의 빨간 불빛이 들어왔다. 이연을 보기 거북한 건 사실이었지만, 대중들은 선배 연예인들에게 깍듯한 주단솔을 더 좋아하니 이런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죄송해요…… 근데 저 정말 괜찮아요. 자고 일어나면 원래 얼굴 하얘져요.”
단솔은 시무룩해진 이연의 얼굴에 궁색한 변명을 덧붙였다. 지금의 이연은 회귀 전 상황을 모르니 단솔의 반응이 갑작스럽게 느껴질 터였다.
“하…… 다음으로 미루고 싶지 않은 거지.”
단솔은 꼭 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입술을 짓씹었다. 아니라면, 거짓말이고, 맞다고 하면 그가 상처받을 게 뻔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날 멀리하려고 한다는 것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어.”
“…….”
“그렇다고 너를 해치면서까지 내 마음 강요할 생각 없어. 데이트가 힘들면 그냥 쉬다가 가자, 촬영 이런 거 아무 생각 없이.”
회귀 전, 그와 데이트할 때면 운동을 하거나, 뭔가를 배우거나. 이연은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단솔은 활동적인 것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가 좋아하는 것 같아 늘 맞춰 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단솔도 처음 보는 곳이었다. 회귀 전에도 와 본 적 없는 장소에 단솔이 주춤거렸다.
“여기는…… 어딘데요?”
“가 보면 알아.”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프리미엄 영화관이었다. VVIP들을 대상으로 대여하는 곳이라, 좌석도 커다란 리클라이너 침대로 만든 좌석 6개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이연이 전부 빌린 듯 극장 안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샴페인과 탄산수, 간단한 음식들까지. 호텔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서비스에 단솔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화관에 침대가 있네요…….”
“가끔 이런 곳에 오면 좋더라고.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뭐야?”
“……로봇 용사 타무스?”
“그런…… 영화도 있어?”
“……저희가 OST 불렀거든요. 극장에서 들어 봐야 한다고 대표님이 예매해 주셨어요.”
이연이 그런 단솔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단솔은 그의 시선을 알고 있었다. 잠에서 깨서부터 줄곧, 아니 사실 그의 눈은 항상 단솔을 향해 있었다.
“오늘 볼 영화는 뭐예요?”
딱히 당기지도 않는 음식만 포크로 헤집던 단솔이 화제를 돌렸다.
“이이연 컬렉션.”
이연이 장난스레 대답하자, 사위가 어두워지고 스크린에 영화가 떠올랐다.
이이연은 독립 영화계의 황태자라 불렸다. 독립 영화계에서 유명한 스타인 그가 상업 영화로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탄탄한 연기력의 바탕이 된 저 외모 덕분이 컸다.
“이 영화들의 최대 장점이 뭔 줄 알아?”
“……뭔데요?”
“졸려.”
둘밖에 없는데도 소곤소곤 작게 속삭이자 단솔은 숨죽여 웃었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10분 남짓한 영화 세 편 만에 단솔은 잠에 빠져들었다. 어제 잔뜩 술을 마신 데다가 뜻하지 않게 눈이 일찍 뜨인 탓이었다.
영화관을 선택한 건 유독 피곤해 보이는 단솔을 위한 이연의 배려였다. 사방에 카메라가 깔려 있어, 조금만 방심해도 나쁜 놈으로 몰리기 십상인 게 예능판이었다.
이연은 잠든 단솔의 앞머리를 넘겨주고 한참 동안 그 얼굴을 쳐다보다 자신도 함께 누웠다.
이연 역시 피로감이 어마어마했다. 최근 들어 유두현의 집착이 더 심해진 탓이었다.
유두현이 저와 붙어 있기 위해 주변 사람들은 물론, 자신까지 이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산행에서 부상 때문에 먼저 내려온 날, 이연은 두현의 부상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미안한 마음에 약이라도 챙겨 오메가 숙소 쪽으로 향했을 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던 두현이 두 발을 다 땅에 딛고 멀쩡히 서 있었다.
이연을 발견한 두현은 당황한 듯 다친 발이 아닌 반대편 발을 절뚝거렸다.
시청자들한테 욕을 먹을 걸 감수해 가면서까지 이연에게 집착하는 모습에 이연은 두현이 점점 두려워졌다.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섬에서 나가자마자 이연은 소속사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너 애매하게 한지수랑 정대수 들러리만 설 거야? 네 방송 분량 찾아야지. 연애 프로그램 나와서 진짜로 사귀고 뜬 애들 얼마나 많아. 이거 절대 손해 아니다?
“그래서요.”
—유두현 소속사 사장이 내 친한 후배인데, 걔랑 다 얘기된 거야. 너 어디 이런 기회 흔한 줄 알아?
“진짜 어이가 없네, 사장님. 여태까진 좀 귀엽게 봐 줬다고 쳐도 결국 유두현은 그냥 내 스토커예요. 소속사 대표면 대표답게 꼬이는 날파리들이나 치워요. 내 연애 상대 정해 줄 시간에 사장님 연애나 하시고. 시집 안 가냐는 소리 듣기 싫어서 본가에도 안 가신다면서.”
—하, 야! 나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니야.
“나도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니에요. 연애 프로그램 나와서 진짜 연애? 할 수도 있지. 근데 그 상대는 내가 정해요. 유두현은 아니야. 사장님도 알잖아 걔 우리 소속사 앞에 죽치고 있던 앤 거.”
—그러니까! 팬이었다가 진짜 사귀면, 그만한 스토리 라인이 어디 있어? 너 진짜 유두현한테 마음 없어? 1퍼센트도?”
“내가 변태인 줄 알아요? 스토커 새끼한테 마음을 주게. 됐고, 걔네 소속사랑도 그거…… 짜고 치는 거 그만 좀 해요. 걔 대표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놈일 수도 있어.”
—허, 그래 봤자 이제 데뷔한 지 3년 좀 넘은 애가 뭘 그렇게 무섭다고. 이연아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긴 전쟁터야.”
다음 주 분량도 한지수와 정대수한테 밀리면 진짜 쫓아가겠다는 엄포를 끝으로 대표는 전화를 끊었다.
이연은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때, 스크린에서 어린 이연이 대사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때는 곧잘 한다는 칭찬을 들었던 터라 몰랐는데, 이제 보니 발성도 감정도 엉망이었다. 그저 풋풋함과 혈기 왕성함으로 밀어붙이던 때였다.
“저게…….”
개중에는 스크린이 없어, 극장 상영이 한 번도 되지 않은 작품도 여럿 있었다. 게다가 이연 역시 자신의 작품을 다시 보지 않는 편이라 오랜만에 보는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카페에 앉아 대사를 치는 이연의 뒤에 익숙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허…….”
유두현이었다. 오래전이지만 알 수 있었다. 아주 초기작부터 상업 영화 데뷔 직전까지. 이연은 준비한 10편의 영화가 다 지나가는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영화를 보았다. 아니, 영화 속 두현을 찾아보았다.
두현은 거의 모든 영화에 아주 작은 행인부터 대사가 있는 조연까지 어설프게 그리고 분명하게 흔적을 남겼다. 독립 영화라 스태프와 배우를 다 해 봐야 모두 몇 명 없었는데 왜 그때는 두현의 존재감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어쩌면 두현의 집착은 제 생각보다 더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연은 알오매치 서바이벌에 출연하기 전까지만 해도, 두현의 노골적인 호감이 이렇게까지 싫지는 않았다. 워낙 관심받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이게 직업이다 보니, 가끔은 재밌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저 팬심으로 치부했던 그 애정 때문에 자꾸만 단솔과 멀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되니 자연스레 어느 순간부터 점점 두현의 애정에 불쾌감이 피어올랐다.
이연은 그렇게 불 꺼진 극장에서 한참 동안이나,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