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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39화 (39/150)
  • 39화

    “형! 봤어요?”

    “뭘?”

    “하민성 선배님 두현이 형이랑 같이 카라반 들어갔어요.”

    데이트권을 얻지 못한 민혁과 지수가 테라스에서 한가로이 누워 있을 때, 태오가 호들갑을 떨며 들어왔다. 선배에서 형으로 은근히 호칭을 바꿔도 이제는 화낼 기운도 없는 지수였다.

    “그게 뭐?”

    “안에 들어가서 뭐 하는 거 아니냐구요!”

    “아…… 아쉽다.”

    덤덤한 지수와 달리 더 아쉬운 건 민혁인 듯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불 켜진 카라반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혁이 형 단솔 씨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혹시 변심?”

    태오가 기대감에 차 물었지만, 민혁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아니라…… 아무도 안 쓰길래 고양이 집으로 쓸까 했죠. 날이 추워지잖아요.”

    “하, 시바……. 이게 연애 예능이야 동물 농장이야. 정 안타까우면 네가 데리고 살던가!”

    “그래도 돼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섬 주인한테 물어봐야지.”

    “아 그렇지…….”

    기대한 반응과 달리 바보 같은 대화들이 오가자 태오는 영 재미를 잃은 듯 민혁에게 중얼거렸다.

    “근데…… 민성 선배님은 약간 싸가지 없는 오메가가 이상형이신 것 같아요. 어떻게 저렇게 소나무 취향.”

    태오의 말에 지수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태오야.”

    “네…….”

    “형 안 잔다.”

    “네…… 네⁈ 형! 저 이제 진짜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네? 지수 형?”

    지수는 저도 모르게 말실수한 것을 후회했다. 그 이야길 듣자마자 태오는 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형을 찾아 댔다.

    “아! 알았으니까 한 번만 더 형 소리 하면 너 여기서 밀어 버릴 거야.”

    “네! 형!”

    “하…… 시발…….”

    “형! 근데 저 궁금한 거 있는데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민성이 형이랑 왜 헤어지셨어요?”

    그 과감한 질문에 늘 한결같던,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던 민혁마저도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라 생각했지만, 곧이어 유두현과 하민성이 카라반을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생각이 바뀌었다.

    “태오야, 그게 궁금해?”

    한껏 목소리를 낮춘 지수에 덩달아 긴장한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민혁도 지수의 가까이에 와 앉아 있었다.

    지수는 한껏 목소리를 낮춰 그들에게만 들릴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민성, 안 서.”

    “헤엑!”

    “오…… 우…… 와…….”

    “너희만 알고 있어.”

    지수의 말에 태오와 민혁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 * *

    지수가 테라스에서 내려갔을 땐, 외출을 하고 돌아온 단솔과 대수도 막 춘몽각에 돌아온 찰나였다. 대수의 옆구리엔 하얀 토끼 인형이, 단솔의 품에는 흉물스러운 모양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인형이 안겨 있었다.

    “이제 제가 들고 갈게요. 주세요오 선배님.”

    단솔은 처음 먹어 보는 메기 매운탕 맛에 매료되어 이미 소주를 몇 잔 마신 뒤였다. 알딸딸하게 취한 단솔의 혀가 귀여운 소리를 냈다.

    대수가 단솔에게 토끼를 건네자, 단솔의 품이 버겁도록 인형이 가득 차 있었다.

    “인형의 집이라도 다녀왔어?”

    “아! 지수 형! 이건 형 거예요!”

    “으…… 응?”

    “대수 선배님이 사격장에서 1등 해서 받은 거예요.”

    “얘가 뭔데?”

    닿기도 싫은 듯 찝찝한 표정의 지수가 대수에게 물었다.

    “개불. 너 개불 좋아하잖아.”

    그건 술안주일 때 얘기지. 지수는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형…… 별로예요?”

    대수가 애써 뽑아 준 정성이 수포로 돌아갈까 봐 단솔이 큰 눈을 반짝였다. 단솔에게는 한없이 약한 지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개불 인형을 받아 들었다.

    “아니, 그럴 리가. 우리 솔이가 주는 건 형아는 뭐든 좋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안 그래도 제가 없어져서 형 애착 인형은 어쩌나 했거든요.”

    “……그래…… 고마워 솔아.”

    수치스러움에 휩싸인 지수가 인형을 들고 서둘러 들어가려 할 때, 마침 태오와 민혁이 위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지수 형! 그거 뭐예요? 너무 야해요! 저 아이돌인데!”

    “설마 그곳을 형상화……⁈”

    “자…….”

    인형을 보고 한마디씩 덧붙이는 말에 취기가 오른 단솔이 지수의 앞을 막아섰다.

    “다들 놀리지 마쉐여! 이거 지수 형 애착 인형이라구요!”

    “아니…… 솔아 그게 나는…….”

    “와…… 그랬군요…….”

    당황하는 지수와 입을 떡 벌린 태오, 왜인지 모르게 감탄하는 민혁 사이로 제 방에 있던 이연과 바깥에 있던 민성, 두현이 차례로 들어왔다.

    그들은 지수의 손에 들린 흉물스러운 개불 인형을 보곤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대수는 그 상황이 마냥 웃긴 듯 이제 자리를 잡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자지 아니에요! 자지처럼 생겼지만, 개불이라고요! 2년 동안 안 나간 개불! 지수 형 애착 인형이니까 놀리는 사람은 나한테 혼날 줄 알아여…….”

    단솔이 단단히 화가 난 듯 지수를 놀리는 태오와 민혁에게 경고를 하고선 토끼 인형을 들고 2층으로 쿵쾅거리며 올라갔다. 대수는 이 상황이 너무 웃긴 나머지 거의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지수는 이제 자포자기한 듯 개불 인형을 끌어안았다.

    * * *

    간밤의 개불 사태를 만든 단솔이 눈을 떴을 땐 묘하게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햇살이 한가득 창문으로 들어오는 그 나른한 느낌에 침대에 몸을 조금 더 부비적거렸다. 아침 7시 30분, 그리고 이연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10시였다. 왜 하필 이런 날은 늦잠조차 자지 않는 건지.

    하지만 단솔은 방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저 문을 열고 나가면, 과거의 일들이 다시 펼쳐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결국,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단솔은 부랴부랴 추리닝에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갔다.

    단솔이 이연을 찾아 마당으로 나오자, 이연은 고양이 단탄지에게 간식을 주고 있었다.

    “이…… 일찍 나오셨네요?”

    먼저 나온 이연을 보고 당황한 단솔을 다독이듯, 이연이 계단 위로 올라와 단솔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어제 술 많이 마신 것 같던데, 컨디션 괜찮아?”

    “어…… 네. 괜찮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연에게는 약점 잡히고 싶지 않았는데, 단솔은 시작부터 꼬인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얼굴이 창백한데 다음에 갈까?”

    그는 자기 관리에 철저했고, 상대방도 그에 맞추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결벽증까지 있는 사람이 이렇게 제대로 씻지도 않은 제 모습을 좋아할 리가.

    “눈에 뭐 묻었다.”

    단솔이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이연이 단솔에 눈에 붙어 있던 눈곱을 제 손으로 떼어 주었다. 이연의 손이 다가오기 전에 피하지 못한 단솔의 굳은 얼굴에 그의 손길이 닿았다.

    단언컨대 단솔은 회귀 전에도 이연에게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성격에 맞게 완벽해 보이려고 노력을 했지.

    “어…… 어디 갈지 몰라서. 준비를……. 아니, 조금 다시 씻고 나올게요…….”

    “왜? 지금도 예쁜데?”

    “어…….”

    회귀했다고, 사람이 달라지나. 전에도 그를 좋아하긴 했지만, 지금보다는 더 어려운 사이였다. 설레는 만큼 어색했고, 잘 보이려 할수록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예의를 차리는 거라고 생각했던 그 거리감이, 결국 나중에는 서로를 불신하고 멀어지게 만든 원흉이 됐지만.

    “그럼…… 그냥 가요.”

    단솔은 더 이상 그에게 잘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완벽하게 세팅된 주단솔이 아니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그가 기다리고 있어도 초조하지 않고, 그에게 허술한 모습을 보여도 자책하지 않는 이유.

    ‘형 마음이 이젠 훤히 들여다보여.’

    그때는 헷갈려서 전전긍긍하며 애태우기도 했던 이연의 마음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이제는 단솔에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 회귀 전의 단솔은 이연의 관심을 원했지만, 지금의 단솔은 그와의 거리를 원했기 때문이다.

    단솔은 이제야 이연이 저와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사랑 앞에서 서툴고, 본인 감정을 유하게 다루지 못해 실수할까 걱정하기도 하는 그냥, 다 자라지 않은 사람.

    그는 지금 단솔에게 향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연의 몸은 앞이 아니라, 옆에 있는 단솔에게로 기울어 있었고, 마치 물음표 살인마라도 된 것처럼 대화가 끊길까 봐 전전긍긍하며 질문을 쏟아 냈다.

    “점심부터 먹을까? 배고프지? 숙취는 없어?”

    “괜찮아요. 어제 술 그렇게 많이 마신 것도 아니라서.”

    “술 좋아해? 나랑도 마셔 주면 안 돼?”

    “근데, 어…… 운전하셔야죠.”

    “아, 그러네…….”

    대화는 함께 주고받아야 하는 법, 하지만 단솔은 대화를 이어나갈 의지가 없었다. 한쪽에서는 일방적으로 말을 붙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대화를 끊어 내기 위해 말을 아끼는 촌극이 이어졌다. 늘 자신에게 말을 붙이려는 사람만 있었지,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노력해 본 경험이 없던 이연은 이런 류의 대화에 재주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차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이어졌다. 소재가 떨어진 탓에 이연의 질문이 끊기자, 단솔은 창밖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차는 춘몽도를 벗어나, 서울 시내로 향했다.

    회귀 전, 이이연에게 설렘을 품었었던 어느 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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