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우이씨…… 선배님 어떻게 하신 거예요?”
단솔은 과녁 근처에도 못 가는 제 총을 흔들어 보였다. 대수는 이미 정확하게 10점을 10개 맞추고 커다란 토끼 인형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왜,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내가 뽑아 줄게.”
“아니 그게 아니라…… 누구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단솔은 10발을 다 써 텅 비어 버린 총을 아쉬운 듯 만지작거렸다. 그 말에 대수의 표정이 벌레라도 씹은 듯 굳었다.
“누구.”
“네?”
“누구한테 주고 싶냐고.”
설마 질투…… 라도 하는 걸까. 단솔은 변명하듯 말했다.
“아…… 지수 형이요. 애착 인형이 있어야 한다고 늘 그러셨는데…… 이제 같이 방도 안 쓰고 하니까, 혹시 허전하실까 봐.”
단솔의 말에 대수는 속으로 크게 비웃었다. 애착 인형은커녕, 집에 뭔갈 두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집에 냄비랑 컵도 없어서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제집을 털어 갔을까.
“뭘 주고 싶은데?”
즐비하게 늘어선 허름한 인형들을 보며 물었다. 대수는 단솔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줄 기세였다. 설령 그게 제가 극도로 혐오하는 지수의 편안한 숙면을 위한 일일지라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선배님이 골라 주시면 안 돼요? 지수 형이랑…… 친하시잖아요.”
대수는 눈썹을 한번 으쓱하고선 늘어선 인형들 중 가장 흉물스럽게 생긴 것을 찾아냈다.
“사장님, 저 인형은 뭐예요?”
대수가 가리킨 인형은 갈색과 주황색 사이의 오묘한 색감과 다소 흉물스러운 모양이 그 정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디자인이었다.
커다란 원통형이 빼빼로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끝부분이 뾰족한 게 오징어 같기도 한, 도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었는지 그 의도가 궁금해지는 이상한 인형이었다.
“개불. 한 2년 전쯤에 왜, 해산물 인형이 한참 유행을 해서 고래, 해마, 문어 불티나게 나갔는데 개불 저놈만 아직도 안 나가. 비닐이 더러워져서 그렇지! 한 번도 안 열어 봐서 이렇게 깨끗하다고.”
사격장 사장은 이제야 개불 인형을 치워 버릴 적임자가 나타났다는 듯 2년 동안 열지 않은 봉인을 풀어 보이며 말했다. 새것임을 증명하듯 보송보송하니 깨끗한 개불 인형의 머리가 낡은 비닐 커버 사이로 빼꼼히 나왔다.
“지수는 저런 거 좋아해.”
역시 배우들은 다들 취향이 남다른 걸까. 단솔은 지수를 어련히 잘 아는 대수가 골랐으니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10발 주세요.”
* * *
“여기 앉아 있어, 시원한 거라도 사 올게.”
단솔을 넓은 동산 위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데려다 놓은 대수가 휘적휘적 다시 길을 내려갔다. 이제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가는 저녁 시간대라 단솔은 인형 탈을 벗어서 옆에 내려놓았다.
“토끼 세 마리에 개불 한 마리. 동물원 차려도 되겠다.”
샐쭉이 웃고 있는 토끼 탈 두 개와 대수가 사격으로 딴 새하얗고 커다란 토끼 인형, 그리고 지수에게 줄 개불 인형까지. 단솔의 주변은 포근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선배님!”
단솔이 멀리서 음료수 두 잔이 담긴 캐리어와 솜사탕을 손에 들고 오는 대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노을빛이 밝힌 대수의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보였다. 툭 불거진 눈썹 뼈과 높은 콧날, 짙은 눈썹에 다부진 턱선까지 누가 봐도 탐낼 만한 알파의 모습이었다.
단솔은 그런 그의 손에 들린 이질적인 솜사탕을 받으며 물었다.
“웬 솜사탕이에요?”
“좋아할 것 같아서, 왜? 싫어해?”
“음…….”
단솔은 솜사탕을 먹어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우선 싫고 좋고를 따지려면 먹어라도 봐야 아는 것 아닌가. 단솔은 말없이 대수의 손에 들린 솜사탕에 입을 갖다 댔다.
할짝—.
대수는 불시에 눈에 들어온 단솔의 혓바닥에 헛숨을 들이켰다. 새빨갛고 작은 혀가 슬로 모션으로 한눈에 들어왔다.
“음…… 좋아하는 거 같아요. 맛있어요 선배님.”
“화장실 좀.”
대수는 그 모습에 음료 캐리어마저 던지듯 내버려 두고 인형 탈을 얼굴에 쓴 채 냅다 동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제 얼굴보다 커다란 솜사탕을 쥔 단솔만 영문을 모르고 멀뚱멀뚱 있을 뿐이었다.
* * *
대수가 돌아온 것은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꽤 급한 용무였는지 동산을 몇 번이나 왕복한 대수는 답지 않게 지친 기색이었다.
“이제 갈까? 저녁 먹자.”
“네!”
반갑게 일어나던 단솔이 또 한 번 휘청거렸다. 대수는 순간, 기시감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단솔이 휘청거리는 걸 잡아 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립성 저혈압이라도 있는 것일까,
“주단솔.”
앞서가는 단솔의 왼편에 서 있던 대수가 여러 번 단솔을 불렀지만, 단솔은 그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걷고 있었다.
“주단솔!”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낀 대수가 큰 소리로 부르자 그제야 단솔이 뒤를 돌아봤다. 확실히 이상했다.
“네? 선배님?”
“……천천히 가, 넘어져.”
하지만, 대수는 섣불리 아는 척하지 않았다. 무언가 몸에 이상이 있고, 제가 알아차릴 정도라면, 단솔이 모르지 않을 텐데. 단솔이 치료를 받기 위해 섬을 나가거나, 약을 먹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부러 말하지 않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아, 네! 저희 저녁은 뭐 먹어요?”
“네가 좋아하는 거.”
* * *
<이모네 메기 매운탕>
단솔은 문득 그들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이이연에게 철벽을 치려고 했던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문을 열자마자 맛집의 상징인 연예인 사인이 즐비한 벽이 나오자 대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근처에 있더라고.”
단솔은 난처했다.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었지만, 사실 메기 매운탕은 먹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흔해 빠진 솜사탕조차도 먹어 볼 기회가 없었는데, 외곽지에나 있는 매운탕집을 와 봤을 리 없었다.
“뭐 먹을래?”
메기 매운탕과 민물 매운탕, 우럭 매운탕으로 가득한 메뉴판을 보며 대수가 형식적으로 물었다.
“……함박 스테이크요.”
“……어?”
“사실 제가…… 매운탕을 안 먹어 봐서…….”
“그럼 그때는 왜…….”
그제야 대수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이연을 멀리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뱉었을 줄은 몰랐는데, 그 말에 기껏 얻은 데이트권으로 아저씨들이나 올 법한 식당에 온 제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허.”
“죄송해요…….”
“아니야. 뭐…… 나도 매운탕 같은 건 잘 안 먹어 봐서.”
대수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으며 주문을 했다.
“사장님, 함박 스테이크 두 개랑요…… 매운탕은…… 1인분은 안 되나요?”
“아유! 매운탕이 1인분이 어디 있어! 사람 수대로 시켜야지! 딱 봐도 한 솥은 먹게 생겼구먼!”
“예…… 그럼 메기 매운탕 2인분 주세요.”
생선을 별로 즐기지 않는 터라, 함박 스테이크만 시키기 민망했던 대수가 물어봤지만, 돌아온 것은 매운탕보다도 매운 사장님의 등짝 스매시였다.
호호호 하고 웃던 그녀가 ‘쐬주는 안 필요하셔?’ 하고 물었지만, 대수는 차를 가져왔다며 손사래를 쳤다.
수다스러운 사장님이 사라지고 나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두 사람의 어색한 적막이 이어졌다.
“미안.”
“아뇨 제가 죄송하죠.”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던 사이, 알록달록 어린애들이나 좋아할 것 같은 접시에 담긴 함박 스테이크가 두 사람 앞에 놓였다. 오렌지 주스까지 야무지게 놓아 둔 사장님이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 사이, 대수는 또 한 번 이마를 짚었다.
“하, 진짜 미안. 이런 데서 스테이크를 먹을 줄이야…….”
동그란 함박 스테이크를 바라보는 단솔의 모습에서 대수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좋은 것만 해 줘도 모자란 지금,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바보 같은 선택으로 놓쳐 버린 아쉬움이 컸다.
“선배! 이거 진짜 맛있어요!”
하지만, 또와 분식이 길들인 단솔의 입맛엔 어린이용 함박 스테이크는 호텔 식당 부럽지 않은 맛이었다.
“……그래?”
“하이고! 예쁜이가 뭘 좀 아네! 그거 내가 다 일일이 양파 다지고 고기 다져서 만든 거라 다들 맛있다고 해! 모자라면 더 줄게!”
그때, 메기 매운탕을 가져오던 사장이 단솔의 말을 듣고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가스버너 위에 내려놓은 묵직한 냄비엔 한가득 매운탕 재료가 들어 있었다.
“우와…….”
“보글보글 끓으면 먹어요—.”
참담한 대수의 기분과 다르게, 단솔은 신이 난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선배님 저 오늘 진짜 감사해요. 이렇게 나온 거 거의 처음인 것 같아요.”
“열세 살 때부터 연습생 생활했댔나?”
아직 덜 익은 생선 위에 뜨거운 국물을 끼얹으며 대수가 물었다.
“네, 맞아요.”
“부모님은? 반대는 안 하셨어?”
“어…… 선배님은요? 공부도 엄청 잘하셨다면서요. 그럼 부모님이 반대하셨을 거 같은데.”
대수는 단솔이 대답하길 꺼린다는 걸 알아차렸다. 굳이 또 한 번 물어본다면야, 저 말랑한 성격에 결국 대답해 주겠지만, 단솔이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걸 반대라고 할 수 있나, 아주 잠깐 서운해는 하셨어. 진작 말했다면, 영학이 아니라 연극학으로 진학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그게 다야.”
“아아…… 그렇구나.”
단솔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어…… 그건 아니고…… 이거 혹시 편집해 주실 수 있나요?”
단솔이 계속 자신을 찍고 있던 PD에게 물어보았다. 최 PD와 달리 꽤 말이 통하는 성격의 B 팀 PD는 카메라는 켜 놓는 대신 오디오만 끄는 것을 제안했다.
“네, 좋아요. 사실은 부모님이 어릴 때 이혼하셨거든요. 근데…… 각자 가정을 꾸리셔서 방송에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조금 조심스러워요.”
“아…….”
어쩐지, 숙소나 멤버들 이야기는 곧잘 하던 단솔이 가족들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꾹 다문 게 그제야 이해가 됐다.
“그래서 반대…… 뭐 그런 것도 없었어요.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야 해서…… 회사에 들어가니까 오히려 좋아하셨죠. 집에서도 나오고, 돌봐 줄 사람도 있고.”
아직 중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 놓고 발을 뻗고 자는 부모는 어떤 사람들일지. 테이블 밑에 있던 대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