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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37화 (37/150)
  • 37화

    커다란 꽃밭 한편에는 조그마한 모종삽으로 직접 꽃을 심어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꽃을 심으며 체험을 즐기는 조그만 아이들 사이에서 토끼 탈을 쓴 두 사람도 함께 쪼그려 앉아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알오매치 서바이벌에 참가한 뒤로 우연찮게 두 번의 데이트를 했지만, 어째 데이트마다 매번 삽질하는 제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아이돌이 아니라 농부가 될 운명인가.

    “토끼 아저씨! 도와주세요!”

    대수는 물 조리개를 들고 어린이들에게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바빴다. 오늘만큼은 톱스타 정대수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일일 선생님이었다. 한참을 아이들의 고사리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커다란 몸을 구기던 대수가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며 단솔에게 다가왔다.

    “흙 묻었네.”

    대수가 단솔의 인형 탈에 묻은 흙을 털어 주었다.

    “아, 몰랐어요. 푸흡.”

    “왜 웃어?”단솔이 푸스스 웃으며 대수를 바라보자 대수는 의아하다는 듯 갸우뚱하더니 되물었다.

    “그냥 웃겨서요. 유치원 선생님 된 기분이에요.”

    “마음에 안 들면 그냥 갈까?”

    “아니요! 저 여기 좋아요, 선배.”

    “일어나, 다른 데도 보여 줄게.”

    대수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을 때, 순간 단솔의 몸이 휘청거렸다. 다행히 넘어지지 않게 대수가 붙잡아 주었다. 갑작스레 좁아진 거리에 단솔이 쑥스러운 듯 삐걱거리며 대수의 품을 벗어났다.

    지금 인형 탈을 쓰고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 인형 탈이 없었더라면 대수에게 빨개진 얼굴을 들킬 뻔했다.

    흙을 털고 일어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작은 놀이공원이었다. 바이킹, 자이로드롭, 롤러코스터. 작긴 해도 있을 건 다 갖춰진 모습에 단솔은 신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선배님! 우리 저거 타요!”

    초등학생 때 이후로 단솔은 놀이공원에 와서 제대로 놀아 본 기억이 없었다. 부모님께 생활비를 받는다고 해도 연습생 때는 돈이 없었고, 아이돌로 데뷔하고 나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가끔 행사 스케줄로 간 적은 있었지만, 간이 무대 위에서 잠깐 노래를 부르고 나오는 게 고작이었다.

    “으, 응…….”

    단솔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발을 옮기는 대수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혹시 무너지진 않습니까?”

    대수는 바이킹 앞에 서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저희 바이킹은 성인도 탈 수 있게 만들어져 있어서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친절한 미소로 응대하는 그를 뒤로하고 단솔이 대수를 이끌고 바이킹의 제일 뒷자리로 향했다.

    “확실히 아이용이라 그런지 두 명이서 앉았는데도 가득 차네요.”

    대수의 덩치만 해도 웬만한 성인 2명 정도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단솔은 모르는 눈치였다.

    “흡……!”

    바이킹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대수는 왠지 자신이 앉은 자리가 푹 꺼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안 그래도 작은 데다 낡기까지 한 바이킹은 끼익하고 듣기 싫은 그리고 조금은 오싹한 소음을 냈다. 아까까지 붕괴 위험은 없다며 친절하게 단언하며 안내하던 직원이 그 소음을 듣고 고개를 삐거덕 돌려 사색이 된 채 그들을 응시한 것 같았다면 기분 탓일까.

    “우와! 움직인다! 선배님! 움직여요!”

    “나도 알아…….”

    “우와아! 선배님! 손 들어 봐요!”

    “아니야 난 괜찮아…….”

    대수는 바이킹이 멈출 때까지 손잡이를 놓지 못했다. 기구가 양옆으로 흔들리는 각도가 커졌을 때는 대수와 단솔이 탄 쪽으로 바이킹이 덜컹거리는 느낌까지 받았다.

    비단 느낌만은 아니었던지 잔뜩 굳은 얼굴로 입꼬리만 겨우 끌어올린 직원은 파리한 안색으로 손에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돌려보낸 직원은 아직도 공중에 매달려있는 대수와 단솔을 뒤로한 채 ‘점검 중’이라는 팻말을 붙였다.

    기계가 멈춘 뒤 다행히 인형 탈에 가려 팻말을 보지 못한 모양인지 단솔은 여전히 신이 나서 떠들었다.

    “선배님! 혹시 놀이 기구 무서워하세요? 진짜 의외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놀이 기구는 그만 타지.”

    차마 놀이 기구가 무서운 게 아니라, 자기가 놀이 기구를 부술까 봐 무섭다고는 말하지 못한 대수는 단솔의 어깨를 반대편으로 돌린 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저기…… 가 볼까?”

    그렇게 정처 없이 걷던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온 것은 조악한 귀신의 집이었다. 단솔은 귀신을 무서워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는 소리가 싫었다. 어릴 적 시끄럽게 싸워 대던 부모님의 영향이었다. 종종 집에서 나던 큰소리는 어린 단솔을 자주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놀이 기구를 무서워하는 대수가 일부러 자신을 위해 바이킹을 타 주었다고 생각한 단솔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가…… 가요!”

    귀신의 집 문 앞에는 구미호로 변장한 직원이 서 있었다.

    “성인 두 분 맞으시죠? 깜짝 놀라서 주먹을 휘두르거나, 주저앉거나, 방향 감각을 상실할 위험이 있으니 앞사람 허리를 꼭 잡아 주시겠어요?”

    그 어설픈 분장에도 잔뜩 겁에 질린 단솔이 직원이 이끄는 대로 대수의 허리춤을 꽉 붙잡았다. 옷 위를 잡았는데도, 천 조각 아래의 단단한 근육들이 느껴졌다. 그것만으로도 단솔은 왠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자, 준비되셨고요. 야광으로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 이동해 주시면 출구가 나옵니다. 자 출발—.”

    * * *

    치이익―.

    “으아아악! 앞이 안 보여!”

    단솔과 대수의 출발과 동시에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하얀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인형 탈의 얼굴이 돌아가는 바람에 단솔의 시야는 암흑천지였다. 깜짝 놀란 단솔은 입구에서부터 대수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저…….”

    “으아아아악! 선배님 죄송해요! 근데 잠깐만 좀 붙들고 있으면 안 될까요? 너무 어두워서 앞이 안 보여요!”

    “그게 아니라…….”

    “으아아아‼ 잠깐만요 잠깐만! 떨어지지 말라고요!”

    단솔은 애써 제 팔을 떼어 내려는 대수의 몸짓에 그 두꺼운 상체를 애써 더 끈질기게 붙들었다.

    “그게 아니라, 이제 벗어도 된다고.”

    대수는 한숨을 푹 내쉬곤 제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분홍 토끼의 인형 탈을 벗겼다. 정전기에 단솔의 머리카락이 민들레 홀씨처럼 나풀거렸다.

    “으아아! 귀신! 귀신이에요 선배님!”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보인 기괴한 장치들에 단솔이 놀란 듯 급기야 대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주단솔.”

    “네에……?”

    “눈 떠.”

    단솔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쥔 대수가 눈을 맞췄다.

    “어…….”

    너무도 가까이에 있는 대수의 얼굴에 단솔은 그만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숨 쉬어.”

    “네…….”

    “천천히. 그리고 내 허리 잡고 따라와.”

    맥없이 축 처진 인형 탈 두 개의 귀를 한 손에 그러쥔 대수가 나머지 한 손으로 단솔을 감싸 안았다.

    단솔은 어느새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대수의 허리춤을 꼭 붙잡고 있었다. 너무도 연인 같은 모습에 흐뭇해진 대수는 미소 지었지만, 단솔은 아직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귀신 인형에 놀라기 바빴다.

    “으아악! 선배님! 해골! 해골 있어요!”

    “미라! 미라예요!”

    “으아악! 처녀 귀신!”

    단솔이 관 뚜껑을 열고 나오는 귀신을 볼 때마다 소리를 지르면 대수는 그들을 물리적인 방법으로 제압했다.

    간혹 그들을 놀라게 할 준비를 하고 있는 귀신 아르바이트생들과 눈이 마주치면 대수는 그들을 조용히 다시 앉혔다. 아르바이트생들은 낡은 귀신의 집에 들어온 연예인을 신기해하면서도 눈빛만으로 기가 죽어 조용히 관 뚜껑을 닫곤 했다.

    “다 왔어, 눈 떠.”

    실눈을 뜨고 거의 기어서 귀신의 집을 나온 단솔은 바깥의 밝은 빛이 보이자 그제야 굽어진 허리를 펼 수 있었다.

    단솔의 보송한 이마는 어느새 식은땀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대수가 자연스레 동그란 이마에 맺힌 땀을 제 손으로 훔쳤다.

    “아…… 하나도 안 무섭네.”

    밝은 곳에서 카메라를 보자 허세를 부리는 단솔이 귀여운 듯 대수가 피식 웃었다. 그 의도를 알아차린 단솔의 얼굴이 빨개지자 대수는 다시 핑크색 인형 탈을 씌워 주곤 정수리를 두어 번 두드렸다.

    “이제 또 놀러 가야지.”

    이제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그들 앞에는 오래된 게임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솔은 사격 게임장 앞에 걸린 거대한 토끼 인형에 눈이 팔렸다.

    “선배님! 저거 봐요! 우리랑 똑같이 생겼어요!”

    “갖고 싶어?”

    글쎄. 단솔은 딱히 인형을 선호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가끔 팬들이 선물한 인형은 특별한 것이니 비좁은 공간에 자리를 겨우 만들어 침대맡에 두긴 했지만, 좁아터진 싱글 사이즈 침대에 놓기에 저 토끼 인형은 꽤 부담스러운 사이즈였다. 침대맡이든 어디든 자리를 만들려면 제가 바닥에서 자고 저 인형이 침대에서 자는 방법뿐일 것이다.

    “어…… 그냥 신기하다고 얘기한 건데…….”

    하지만 이미 대수는 장난감 총을 들어 영점을 조절하고 있었다. 토끼 인형이 걸리적거리는 듯 그가 인형 탈을 벗어 옆에 내려 두자, 심드렁하던 주인의 시선이 무심하게 대수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이내 대수의 얼굴을 보더니 눈이 커져서 대수의 이름을 뱉을 듯 말 듯 말을 더듬었다.

    “어⁈ 저…… 정…….”

    “쉿.”이곳에서 큰소리로 대수의 이름을 불렀다간 이번에는 유치원 선생님 체험이 아니라, 팬 사인회 체험이 시작될 것이다.

    그것을 안 대수가 조용히 해 달라는 듯 검지 손가락을 입에다 가져다 대며 주인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마법이라도 있는 걸까, 대수의 단호한 눈빛에 목청 큰 아저씨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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