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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34화 (34/150)
  • 34화

    군대를 갔다 온 지 얼마 안 된 듯 짧은 머리의 앳된 티가 나는 FD는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방 없다며.”

    “아…… 그게 쉬는 동안 저희가 구조 변경을 좀 했지 말입니다!”

    FD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전에는 없었던 방문 하나가 더 있었다.

    “바…… 방을 좀 쪼개서 만든 거라 작긴 한데, 있을 건 다 있지 말입니다!”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지수와 단솔이 쓰던 방 사이에 벽을 만들어 작은 방을 하나 만든 모양이었다.

    작은 방은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지만, 단솔의 반지하 숙소에 비하면 채광이 좋았고, 무엇보다 고즈넉한 창밖 풍경이 다 보이는 제법 근사한 곳이었다.

    “허, 이게 뭐야. 너 나랑 장난하냐?”

    그 방이 꽤 마음에 들었던 단솔과 달리, 급조해서 만든 기색이 가득한 방의 모습에 잔뜩 예민해진 지수는 이성이 끊어졌다.

    “그…… 오해하지 마십쇼! 한지수 선배님이 큰 방을 쓰시고 단솔…… 씨가…….”

    하지만 눈치 없는 FD는 지수가 화난 이유를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어, 당연하죠! 제가 작은 방 쓸게요!”

    화가 난 지수는 금방이라도 FD의 멱살을 잡을 것 같았다.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에 단솔도 먼저 작은 방을 쓰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지수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야, 방 따로 달랬지 누가 고시원 차려 달라고 했어?”

    “그…… 저희 장비 방으로 쓰던 방이랑 튼 거라 선배님 방은 사이즈가 그렇게 많이 줄지는……!”

    “지금 그 얘길 하는 게 아니잖아! 이놈의 동네는 왜 시간이 지나도 오메가 대접이 이따위야. 너, 나랑 단솔이가 알파였어도 이렇게 푸대접했을 거야? 새로 오는 알파 새끼한테는 멀쩡한 침실 주면서, 오메가한테는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가는 이런 방 주면 얼씨구나 고맙다고 할 줄 알았어⁈”

    지수가 윤여민이 나가고 난 방에 제 짐을 들여놓은 민성이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분명 벽을 넘어서 지수의 고함이 들렸을 테지만, 그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젠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방송국엔 아직도 오메가 연예인들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지수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어린 FD는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기실, 따지고 보면 어린 FD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에게 이 난처한 상황을 전하라고 떠맡긴 높은 사람들의 무책임함이 문제였지.

    “형! 저 진짜 괜찮아요! 여기 채광도 좋고…… 그리고 사실 이분 잘못도 아니잖아요. 제가 작은 방 쓸게요. 네?”

    “하……. 솔아, 네가 이렇게 물러 터지니까. 됐다, 내가 작은 방 쓸게.”

    단솔의 유순한 태도에 결국 꼬리를 내린 지수가 제가 작은 방을 쓰겠노라, 짐 가방을 들었다. 하지만 단솔은 방문 입구를 막고 버티고 섰다.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새로 만든 작은 방은 지수네 집 화장실보다도 작았다.

    그에게 이런 작은 방을 내주고, 저는 큰 방에서 두 다리 뻗고 잠들 자신이 없었다.

    “형이 작은 방 쓰시면 사람들이 저 욕해요! 연차로 보나 나이로 보나, 제가 여길 쓰는 게 맞아요. 혹시…… 제가 악플 세례받는 걸 원하시는 건 아니죠?”

    해바라기 씨라도 빼앗긴 햄스터처럼 단호하게 제 앞을 막아서는 단솔에 지수는 하는 수 없이 원래 제 방의 문을 열었다.

    잔뜩 긴장해서 벽에 붙어 있던 FD는 이때를 틈타 슬금슬금 그 자릴 벗어나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얘기해. 벽을 뚫든 건물을 부숴 버리든, 너 편한 대로 바꿔 줄 테니까. 그렇지?”

    계단을 반쯤 내려간 FD에게 지수의 싸늘한 시선이 꽂히자,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 그…… 그럼요! 단솔 씨! 불편하면 언제든지 이야기하십쇼!”

    “네에…….”

    * * *

    “여전하네, 까칠한 건.”

    저녁 식사 시간까지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자신을 따라붙던 카메라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지수가 뒷마당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였다.

    “형이야말로 여전하네. 아직도 나 쫓아다녀?”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지수가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대수와 함께 찍은 독립 영화가 이례적으로 화제가 된 덕분에, 운 좋게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상업 영화 감독에게 캐스팅될 수 있었다.

    그 역할은 하민성의 상대 역이었다. 통속적이기 그지없는 로맨틱 코미디. 딱히 꿈도 없고, 연예계 생활을 오래 할 의지도 없었던 지수에게 딱 맞는 역할이었다. 매사에 심드렁하고, 사람을 잘 믿지 않는.

    그런 지수의 눈길 한 번이라도 받아 보겠다고 민성은 지겹도록 지수를 쫓아다녔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떼어 내 보겠다고 지수는 오죽하면 자신이 알파라는 것까지 밝혔었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네가 알파든, 오메가든 상관없어. 내가 좋아하는 건 오메가 한지수가 아니라 그냥 한지수니까.’

    지수는 갑자기 밀려오는 토기에 멘솔 향이 나는 담배를 볼이 홀쭉해질 때까지 쭉 빨아들였다.

    “자의식 과잉이 지나치네. 세상에 연애할 사람이 없어서 같은 알파 새끼 쫓아서 여기까지 왔을까.”

    사실, 민성은 지수의 연애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알파였다. 별 마음이 없었지만, 민성이 쫓아다니는 사진이 스포츠 뉴스 1면에 나는 바람에 그와 열애 인정을 해 버렸고. 지수는 그를 연인보다는 전략적 M&A 상대로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연애는 스위트 룸에서 민성의 페로몬 향을 맡은 지수가 토악질을 하면서 3개월 만에 끝이 났다.

    “그럼 뭐야? 남우주연상 뺏긴 거 복수?”

    그렇게 완전히 끝난 줄 알았던 그들의 악연은 번번이 같은 시기 극장에서 맞붙으며 그해 시상식까지 이어졌다. 신인상부터 남우주연상, 작품상에 해외 시상식까지. 결과는 지수의 백전백승.

    “그럴 리가, 내가 언제 상 같은 거 욕심내는 거 봤어?”

    대역전을 노리고 오디션까지 봐 가며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례적으로 글로벌한 인기를 얻은 지수의 영화 덕분에 작품성과 완성도, 상업성까지 모든 면에서 완패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귀국한 찰나였다.

    심지어 민성의 평생 꿈이었던 해외 시상식의 남우주연상까지 지수가 휩쓸며, 민성은 ‘네티즌이 선정한 씁쓸한 박수상.’이라는 오명까지 얻어야 했다.

    “그러게, 욕심이 없어도 너무 없어. 아니 어떻게…… 연기 시작한 지가 몇 년짼데 아직도 남우주연상이 하나도 없어. 내가 한 해 쉴 테니까 형이 받아.”

    급기야 민성은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 한 명을 고르라면 단연코 한지수를 꼽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말이 심하네, 한지수. 내가 너 봐주고 있는 거야. 알아?”

    “그럼 봐주지 말던가. 언제까지 봐주려고?”

    “하, 알파 새끼가 오메가 흉내나 내는 주제에. 지수야, 너는 내가 이거 언론에 퍼트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해. 알아?”

    지수는 거들먹거리며 말하는 민성에 뻐근해진 목뒤를 이리저리 주무르며 말했다.

    “그 오메가 흉내 내는 알파 새끼한테 매달리던 게 누군데. 퍼트리려면 퍼트려 봐. 난 뭐, 형이 뭐 하고 다니는지 모를 줄 알고?”

    그러나 지수 역시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허, 한마디를 안 지네. 싸우자고 온 거 아니니까 이쯤 하자.”

    그럼 그렇지, 애초에 사생활이 더럽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뭐라도 알고 있는 척하는 지수에 찔린 듯 먼저 굽히고 들어온 것은 민성이었다.

    “그러시던지.”

    * * *

    —새로운 멤버가 온 만큼 저희 제작진도 준비를 많이 했는데요, 저녁 식사 메뉴를 걸고 간단한 게임을 준비했습니다.

    —2인 1조로 팀을 이룰 텐데, 처음이니까 하민성 씨에게 먼저 팀원을 고를 기회를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좋아요.”

    식사를 위해 단솔이 주방으로 갔을 땐, 식탁 위에 한가득 음식이 펼쳐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영롱한 한우부터 김과 밥, 김치가 전부인 밥상까지.

    무슨 게임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단솔의 관심사는 누가 민성과 한 팀을 이루느냐였다. 제대로 인사도 못 해 봤지만 단솔은 민성과 한 팀을 이룰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네, 그럼 하민성 씨? 혹시 같이 팀을 이루고 싶은 분이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 말을 하곤 웃는 민성을 보며 단솔은 어린 시절 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두현 씨요.”

    두방망이질 치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단솔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건너편을 보니, 태오도 저와 마찬가지로 실망한 눈치인 듯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네, 좋습니다. 다른 분들은 기존 룰 대로 제비뽑기를 통해 팀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단솔은 터덜터덜 걸어가 캡슐을 뽑았다. 저와 같은 색깔 종이를 뽑은 것은 태오였다.

    —주단솔 씨, 마태오 씨.

    —이이연 씨, 정대수 씨.

    —제갈민혁 씨, 한지수 씨.

    —그리고 하민성 씨, 유두현 씨가 한 팀이 되었습니다.

    —오늘 저녁 식사 미션은 저녁 메뉴뿐만 아니라 데이트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처럼 앉아 있던 단솔과 태오는 그제야 눈을 반짝였다. 어쩌면, 데이트를 핑계로 민성과 일 대 일 팬미팅을 해 볼 수도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저녁 식사와 데이트권이 걸린 오늘의 게임은 바로, 퀴즈 대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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