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대수는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한참 촬영을 하는 사이 지수는 ‘그릇 좀 빌려 간다.’는 문자 한 통을 남겨 둔 채 그야말로 대수의 집을 싹 털어 갔다.
아파트에 딱 두 채 있는 펜트하우스를 각각 나란히 차지한 두 사람은 이웃사촌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꽉 막힌 퇴근길 도로 위에서 제집의 CCTV를 확인한 대수를 이를 아드득 짓씹었다. 프라이팬부터 명품 접시까지 집어 담는 지수의 매니저와 코디를 경찰에 넘겨 버릴까 하다 결국 본인이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
“역시……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지. 김 실장님, 빨리 좀 밟읍시다.”
하지만, 한지수를 이번엔 기필코 혼내 주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들어간 집엔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
춘몽각에서 나온 뒤로, 대수는 늘 단솔의 생각을 했다. 최 PD가 고소를 당하고 방송 심의 규정 위원회에 불려 다니느라 프로그램 자체가 엎어진다는 소식에, 그날 아무것도 못 하고 섬에서 나온 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그러니 지수의 집 소파에서 판수를 끌어안고 있는 단솔을 봤을 땐, 단솔이 나오는 음악 방송을 하도 챙겨 봐서 이제 헛것이 보이나 했다.
“어…… 네가 왜 여기…….”
“아…… 화보 촬영 끝나고 잠깐 놀러 오라고 하셔서…… 이제 갈 거예요!”
진짜였다. 진짜 단솔이, 판수를 소파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수와 대수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단솔을 붙잡았다.
“이제 왔는데 어디 가?”
“그냥 있어, 그……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정대수, 넌 너희 집 가서 먹어.”
“여기 우리 집 주방이 다 와 있어서.”
대수가 단솔 앞에 놓인 케이크 접시와 머그잔을 흘끗 바라보았다.
“배달시켜 먹어!”
“그럼 너야말로 할 줄 아는 요리는 있고?”
스파크가 튀는 두 사람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단솔이 재차 제 가방을 챙겼다.
“그……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앉아 있어.”
“응, 앉아 있어 솔아. 정대수가 맛있는 거 해 준대. 우리는 그동안 TV나 볼까?”
단솔의 어깨에 자연스레 손을 올리는 지수를 보며 대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당장이라도 욕을 뱉을 뻔한 대수의 귀에 단솔의 미성이 들려왔다.
“대수 선배님이 요리를 하신다구요?”
단솔은 그냥 놀라웠을 뿐이었다. 실로 솥뚜껑 같은 손으로 재료를 섬세하게 다듬고 볶을 대수가 잘 상상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이미 콩깍지가 씐 대수의 눈에는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눈을 빛내는 단솔의 얼굴이 각인되어 버렸다.
“먹을 만큼은 해. 먹고 가.”
게다가 오랜만에 본 단솔은 바쁜 스케줄 탓인지 더 야위어 있었다. 대수는 주방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이질적으로 지수의 주방에 놓인 제 조리 도구들을 꺼내 들었다.
“한지수, 와인 창고 가서 와인 가져와.”
대수는 술을 즐기지 않지만 괜스레 단솔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수를 훼방 놓고 싶었다.
“솔이 와인 마실래?”
“어…… 네.”
술이 약하지만, 지수가 주는 와인은 왠지 비쌀 것 같아 단솔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집에 와인 냉장고도 아니고 창고가 따로 있다니…… 지수 형은 진짜 부자인가 봐요.”
지수가 와인 창고로 내려가 심심해진 단솔이 주방으로 슬금슬금 들어왔다. 대수는 능숙하게 칼질을 하고 있었다.
“선배님 집은 어디세요?”
“저기.”
대수가 주방 테라스로 연결된 팬트리를 가리켰다. 대수가 지수네 집 부엌에 산다는 걸까, 대수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린 단솔의 눈에 건너편 동의 펜트하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요?”
“어.”
“선배님 집에도 와인 창고가 있어요……?”
아이돌이 아니라 부동산 업자라도 된 듯 단솔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아니.”
“아…… 역시 같은 아파트라도 그런 게 다 있는 건 아니었네요.”
“난 누구처럼 술꾼이 아니라서. 오디오 룸으로 만들어 놨어.”
그러면 그렇지. 단솔은 잠깐이나마 대수의 자존심이 상할까 걱정했던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크흡. 근데…… 아까 도둑 뭐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선배님 집에 도둑 들었어요? 오디오 이런 거 엄청 비싼 거 아니에요……⁈”
“아니, 좀도둑이라 진짜 비싼 건 안 훔쳐 갔어.”
“도둑질도 보는 눈이 있어야 하나 봐요…….”
“그러게.”
대수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어려 보이는 단솔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단순히 살이 빠져서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울었어?”
“네?”
“부었는데.”
단솔은 종종 대수의 섬세함에 놀라곤 했다. 그게 평소 성격인지 저만을 향한 것인지 헷갈렸다. 이럴 때면 그는 꼭 기민한 맹수 같았다. 초식 동물의 아주 작은 떨림까지 발견해 내는.
“야식 먹고 잤어요. 오늘…… 스케줄 있다는 소리를 못 들어서.”
혹시라도 아직 서투른 신인처럼 보일까 싶어 덧붙인 말에 대수가 쯧 하고 혀를 찼다.
“회사는 괜찮아? 요즘 아이돌들 노예 계약시켜 놓고 착취하는 쓰레기 같은 회사들도 많다던데.”
단솔은 ‘그 회사가 바로 이 회사입니다.’ 하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아직은 대표가 진짜 쓰레기 같은 게 뭔지 보여 주기 전이었다. 아직까지는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는 회사를 부러 바깥에다 안 좋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때마침 지수가 와인 창고를 다 털어 온 것처럼 양손에 한가득 와인 병을 들고 돌아왔다.
“그걸 다 마시게?”
“왜?”
* * *
대수의 걱정과 달리 지수가 가져온 술병들은 어느새 모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단솔의 걱정과 달리 대수의 요리는 수준급이었고, 맛있는 저녁 메뉴와 함께한 술자리는 꽤 길게 이어졌다.
“아이 진짜…… 비싼 술이라 그런지…… 취항지도 모르게써여…….”
“그르게, 우리 솔이가 아직두 안 취행네…….”
“너희 둘 다 취했어.”
탄산수만 홀짝이고 있던 대수는 제 앞에 해롱거리는 취객 두 명을 보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단솔은 그런 대수의 옆으로 다가가 연신 코를 킁킁거렸다.
“여기도 난다…… 성공의 냄새…….”
“뭐? 무슨 냄새?”
“솔아, 아까부터 무슨 냄새가 자꾸 난다고 그래에…….”
“이거언…… 성공의 냄새예요. 몇 번이나 정상에 오른 고된 셰르파의 안주머니에 고이 담긴 그의 어머니가 주신 허브향…… 이라고 홍보하는, 백화점에서 제일 비싼 브랜드의 향수 냄새라고요!”
“우리 솔이가…… 향에 민감한가 부다…… 갖고 싶은 거 있어? 형아가…… 줄게. 따라와.”
자리에서 일어나 메이크업 룸으로 향하려던 지수가 발이 꼬인 듯 카펫 위에 널브러졌다. 단솔은 그 모습을 보더니 울먹였다.
“소용없다구요! 장마철 반지하의 냄새는…… 그런 나약한 명품 향수로 가려지지 않능다구여…… 저에게 필요한 건…… 너무나도 강력한 향균 탈취…….”
“형아가 다 해 줄게…… 웅엉…….”
어느샌가 말 같지도 않은 대화를 이어 가고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대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단솔, 일어나. 데려다줄게.”
“우어…… 잘 놀았숩니다…….”
단솔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아직도 카펫에 누워 뒤척거리는 지수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지수는 취한 와중에도 대수의 손에 끌려가는 단솔이 못마땅한 듯 대수의 발목을 턱 하고 잡았다.
“으에…… 내가…… 내가 데려다…….”
“취한 놈이 뭘 데려다줘.”
대수는 가볍게 그 손을 쳐 내곤 현관 앞 서랍을 열어 여러 개의 차 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 * *
“집이 어디야?”
“우응…… 마포구…… 푸흐…….”
조수석에 단솔을 태운 대수는 자꾸만 몸을 뒤척이는 단솔을 묶어 놓기 위해서라도 안전벨트를 채워 줘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술에 취한 몸이 부드러운 가죽 시트에 자꾸만 주르륵하고 미끄러졌다.
대수가 단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단솔에 의해 두 사람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서로의 숨이 입술을 간지럽힐 정도였다. 단솔의 숨에서 달콤한 스파클링 와인의 향기가 났다.
“……선배님.”
어디서 난 용기였을까, 대수가 고개를 틀어 단솔의 입술에 더 가까이 다가려고 한 순간, 띠링― 하고 울린 문제 메시지 알림에 단솔이 얼굴을 돌렸다.
대수가 민망한 듯 상체를 물렸다.
“선배님…… 이거…….”
띠링―.
단체 문자라도 되는지 텀을 조금 두고 대수의 핸드폰에도 알람이 울렸다.
최미진 PD
오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오매치 서바이벌 in 아일랜드>의 촬영이 이틀 후 월요일부터 재개될 예정입니다. 바뀐 룰과 새로운 멤버는 당일에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푹 쉬시고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허, 새 멤버? 룰 바뀌는 거 알고 있.”
대수가 단솔에게 말을 걸었을 땐 이미 단솔은 색색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대수는 허탈한 듯 핸들에 고개를 잠시 묻고는 단솔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단솔 씨 매니저분? 저 정대수입니다. 단솔 씨가 너무 취해서, 집에 데려다주려고 하는데 숙소 주소가……. 아, 아닙니다. 제가 데려다주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전화를 건 것은 단솔의 매니저였다. 극구 데리러 오겠다는 그를 만류한 대수가 단솔을 한번 흘깃 본 뒤에 차를 출발시켰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최대 시속 300㎞의 슈퍼카는 마치 아기라도 태운 것처럼 조용하고 부드럽게 과속 방지턱을 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