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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30화 (30/150)
  • 30화

    “솔아! 솔아, 일어나.”

    “우음…… 왜. 오늘 스케줄 없다면서……?”

    새벽 시간에 하는 라디오 스케줄까지 끝낸 단솔을 길성이 흔들어 깨웠다. 피곤함에 절은 단솔의 얼굴이 물만두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단솔의 앞에서 길성은 제 머리만 긁적거렸다.

    “내가 말 안 했나……? 다른 애들은 없는데, 너는 있어. 오늘 화보 촬영.”

    “뭐⁈ 화보? 형…… 그런 건 미리.”

    단솔은 길성에게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

    지난밤, 다음 날 스케줄이 없다고 멤버들과 라면에 맥주까지 마시고 일어난 직후였다. 보통의 매니저들이라면 당연히 화보 스케줄은 미리미리 챙기겠지만, 길성은 자신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조차 무엇인지 까먹기 일쑤였다.

    옛날 같으면 한숨 쉬는 시늉이라도 했겠지만, 이제 와 예쁘게 나오려고 애쓰는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단솔은 지금 누리는 약간의 인기가 금방 사그라들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대충 씻고 나와.”

    “응.”

    촬영장으로 가는 길에서야 단솔은 길성에게 화보 콘셉트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그들.’

    각각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의 레트로한 무드를 연출하는 화보였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콘셉트의 옷을 입고 한 공간에서 다 같이 찍는다는 내용이 꽤 재미있는 기획이었다.

    “누구랑 같이 찍어?”

    “아, 알오매치 서바이벌 나온 오메가들이랑.”

    “뭐⁈”

    단솔은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얼떨결에 태오에게 지수의 번호를 받아 오긴 했지만, 제가 먼저 전화를 걸 용기는 나지 않았다. 막상 전화를 걸면 할 말도 마땅치 않았다.

    ‘걸리적거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지수 선배도 와?”

    “어, 당연하지. 퇴원한 지 며칠 됐다던데? 원래는 한지수가 하기 싫다고 버티는 바람에 취소됐었거든. 근데 며칠 전에 마음을 바꿔서 나도 정신이 없었어. 미안하다 솔아, 너 얼굴이 그렇게 부어서 어떡하냐. 하여튼 야식 먹지 말라니까.”

    “됐어……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얼음이라도 사다 줄까?”

    “진짜 괜찮아 형.”

    * * *

    그 시각, 이미 촬영장에 1시간 전부터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지수는 다리를 달달 떨고, 손톱을 깨무는 등.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산만하게 굴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지수의 매니저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좀 가만히 있어. 아직 안 왔다니까…….”

    “왜 아직도 안 오지? 혹시 사고라도 난 거 아니야?”

    “그야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으니까!”

    그는 지난 며칠간 한지수의 이상 행동을 통해, 지수가 단솔에게 꽤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안 되겠다. 나가 봐야지.”

    그리고 지수가 문을 벌컥, 열었을 땐, 거짓말처럼 단솔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태오가 보내 준 지수의 연락처를 들고, 단솔은 몇 번이나 고민했었다.

    “……솔아.”

    하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단솔이 살아 본 짧은 생에서 깨달은 것은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적이 되면 더 무섭다는 것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선배님.”

    단솔의 인사에 지수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졌다. 단솔은 경계심이 많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단솔이 제게 형이라 부르며 당연한 듯 옆자리를 내주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데. 자신의 실수로 또 제자리 아니, 처음보다 못한 자리로 돌아가게 생겼다.

    “솔아, 왜 또 선배님이야……. 그날은 내가.”

    “아프셨다고 들었어요. 저 진짜 괜찮아요. 그…… 그동안 죄송했어요.”

    “뭐가.”

    자꾸만 멀어지려고 하는 단솔의 말에 지수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앓고 난 뒤라 더 날카로워진 인상에 단솔의 몸이 움찔거렸다.

    “네가 뭐가 미안한 건데.”

    ‘못 견디겠으니까 당장 방 바꿔.’

    단솔은 그날 기억을 끄집어냈다. 제가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지수는 못 견디겠다는 말을 한 걸까.

    “……불편하게 한 거 같아서 제가.”

    한껏 움츠러든 어깨에 지수는 왜인지 화가 났다. 몇 번이고 사과 받아도 모자랄 상황에서도 이렇게 죄인처럼 구는 단솔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너는…… 왜.”

    왜 매번 그렇게 잘못한 사람처럼 구냐고, 왜 이렇게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지수의 물음은 뒤이어 들어온 윤여민과 유두현에 의해 막혔다.

    “일찍 왔네? 얘도 찍어?”

    제일 먼저 탈락한 주제에 윤여민이 손가락으로 단솔을 가리켰다.

    “인사 안 하냐?”

    “안녕하세요…… 선배님.”

    제대로 받아주지도 않을 인사를 시키곤 곧장 대기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여민의 뒤를 따라가던 두현이 단솔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고의를 실수로 가장하려는 척도 안 하는 모습에 지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야.”

    “네?”

    “안 해?”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아니 나 말고. 방금 솔이 치고 지나갔잖아, 너. 사과 안 하냐고.”

    지수의 말에 두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당황한 단솔이 손사래를 쳤다.

    “저…… 저! 괜찮은데요. 제가 여기 서 있어서……. 그…… 죄송합니다.”

    “어, 나도 미안해요.”

    지수에게서 불퉁한 시선을 떼지 않은 두현이 쌩하니 자리를 떠났다. 단솔과 지수 사이에 불편한 공기가 흘렀다.

    “또 사과…… 넌 사과가 그렇게 쉬워?”

    지수가 혼잣말 같은 질문을 했다.

    “단솔 씨!”

    메이크업 실장이 단솔을 불렀다. 지수는 일찍 와 이미 거의 모든 세팅이 끝났지만, 단솔은 퉁퉁 부은 얼굴 그대로였다. 단솔은 부러 지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저…… 그럼 가 볼게요. 준비해야 해서요.”

    “이따 끝나고 봐.”

    “매니저 형한테 스케줄 없는지 물어봐야 해요…….”

    지수는 연신 불안해하는 단솔을 보자 마음이 시큰거렸다. 꼭 제가 단솔을 괴롭히는 악당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 물어보고 이따 알려 줘, 솔아.”

    평소처럼 다정한 모습으로 돌아온 지수의 목소리에 단솔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거리곤 대기실로 들어갔다.

    * * *

    90년대 터프 가이 스타일의 가죽옷을 입은 지수가 개인 컷을 촬영하곤 가죽 재킷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뜨거운 조명에 두꺼운 재킷까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선풍기 여러 대를 켜 두고 눈을 감고 있을 때, 짧게 노크를 한 윤여민이 지수의 대기실로 들어왔다.

    하이웨이스트 바지에 화려한 패턴의 셔츠와 스카프를 매치한 걸 보니 여민은 70년대 스타일인 듯했다.

    “왜 왔어.”

    지수가 여민이 귀찮다는 듯 한쪽 눈만 슬며시 뜨고 쳐다본 뒤 다시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형, 진짜 이럴 거야?”

    “뭐가.”

    “같은 소속사 식구 좀 챙겨, 주단솔만 끼고돌지 말고.”

    “같은 소속사? 네가 아직도 챙김 받을 나이야?”

    “나 말고 유두현. 아까 대기실 와서 징징거리던데, 한지수가 자기 싫어한다고.”

    “걔가 같은 회사였나.”

    워낙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없기도 했고, 그나마도 요즘엔 모든 신경이 단솔에게 쏠린 지수였다.

    “하, 네가 언제부터 선배 후배 챙겼다고. 위아래도 없는 놈이.”

    “무슨 소리야! 내가 형한테 얼마나 잘하는데.”

    “어린 애들 괴롭히지나 말어. 그리고 자꾸 어디 가서 소속사 식구들 대놓고 챙기고 그러지 마. 김 대표랑 붙어먹는 거 다 들켜.”

    “……형!”

    윤여민이 소속사 대표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 제 나름의 내조를 하는 건 알겠으나, 지수는 그에 장단을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처음 회사와 계약할 때, 알파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매니저부터 코디까지 전 스태프를 제 사람들로만 채우는 게 계약 조건이었다. 좋은 회사들을 두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작은 회사를 고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수의 존재로 회사가 커지긴 했지만, 재계약 의사는 없었다.

    지수는 점점 자신을 속이는 삶이 귀찮고, 버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단체 컷 들어갈게요―.”

    * * *

    단체 컷 촬영을 위해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온 지수의 눈에 들어온 것은 2000년대 스타일로 꾸민 단솔이었다.

    카고 바지와 힙합씬에서 볼 법한 커다란 티셔츠, 스냅백에 보드화까지 야무지게 신은 모습이 절로 웃음이 날 정도로 귀여웠다. 살짝 부어 있던 얼굴이 안 그래도 어린 단솔을 더 어려 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신기한 듯 제 목에 걸린 목걸이형 지갑을 만지작거리던 단솔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지수와 눈이 마주쳤다.

    “귀엽네.”

    “아…… 선배님도. 멋있어요.”

    “아직도 화 많이 났어? 계속 선배님이네.”

    “어…… 그게 아니라…….”

    “네 매니저한테 물어보니까 오늘 이거 말고 스케줄 없다고 하던데?”

    대출 스케줄 핑계를 대고 빠져나갈 퇴로를 차단당한 단솔이 당황한 듯, 눈만 굴리고 있었다.

    “이따가 화 풀어 줄게. 형이랑 가자.”

    “…….”

    윤여민과 유두현이 느릿느릿, 다가오는데도 대답이 없자, 지수는 다시 한번 단솔에게 물었다.

    “그럼 그냥 여기서 무릎 꿇을까?”

    “아! 아니요! 그건…….”

    “같이 갈 거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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