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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27화 (27/150)

27화

한참을 울다 지쳐, 해가 지고 나서야 돌아온 춘몽각에는 묘하게 어수선한 분위기가 풍겼다. 대문 밖은 자기의 연예인을 기다리는 매니저들의 차들과 스태프들 차량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매니저들은 평소엔 춘몽도 밖에서 대기하거나, 섬 안에 있더라도 춘몽각과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스태프 숙소에 머무르곤 했는데, 처음 보는 광경에 당황한 이연과 단솔에게 막내 조연출이 다가왔다.

“저…… 제작진들끼리 회의를 했는데, 아무래도 계속 촬영은 무리일 것 같아서요. 일주일 정도 쉬어 가는 시간을 좀 가지자는 의견이 나왔거든요. 다른 선배님들은 다 동의하셨는데…….”

우물쭈물하며 무언갈 내밀었다. 방송 시작할 때 최 PD가 거두어 개인 휴대폰이었다.

“동의 못 하겠다면, 거절할 방법은 있고?”

그 모습을 보자 기가 막힌다는 듯 이연이 일갈했다. 의사를 묻고는 있지만, 결과적으론 통보인 셈이었다. 애초에 이런 얘기를 막내 스태프를 통해 한다는 것 자체가 무례한 일이었다.

단솔에겐 익숙한 일이라 아무렇지 않았지만, 이연은 달랐다.

“최 PD 어디 있어요? 얘기 좀 하자 그래.”

“저…… 그게…….”

“화 안 낼 테니까 불러요.”

“그게 아니라…… 최 PD님 방금 서울 올라가셨어요.”

“뭐? 사람을 섬에 처박아 놓고, 스케줄 다 딜레이 시켜 놓고 어쨌다고? 아까 한지수랑 다툰 걸로 그래? 최 PD 그 정도 프로 의식도 없는 사람이었어?”

“아…… 아니요! 그건 아니구요……. 방송국에 일이 좀 생겨서…… 국장님도 올라오라고 난리치시고……. 정말 죄송합니다.”

“하, 메인 PD도 없는 마당에 그냥 때려치우자는 건가.”

잔뜩 성이 난 이연에게 손사래를 쳤다.

“최 PD님이 일주일만 시간을 주시면 전부 다 수습하시겠다고. 그동안 휴가라 생각하시고…….”

“제멋대로네 정말.”

이연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단솔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대기 중인 차량들 속 제 매니저가 타 있을 낡은 승합차는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대기하고 있는 다른 매니저들과는 달리, 다이노소울과 3인조 걸그룹을 동시에 맡고 있는 길성은 섬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11명의 스케줄을 다 합쳐 봤자 이 섬에 있는 한 명만큼도 바쁘지 않겠지만, 회사의 유일한 승합차로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길눈이 어두운 그가 몇 시쯤 도착할지는 미지수였다.

“……저는 매니저 형한테 연락해 봐야 하는데 당장 못 올 수도 있어서요. 숙소에서 기다렸다가 내일 아침에 가도 되죠?”

“아! 네 그럼요……. 저…… 단솔 씨. 최 PD님이 아까 일은 죄송하다고 하셨어요.”

“사과는 본인이 직접 해야지. 타, 데려다줄게.”

이미 소식을 들은 모양인지, 숙소를 나오던 대수였다. 하지만 단솔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괜한 오해 받기 싫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되니까, 선배님 먼저 들어가세요.”

집으로 들어가는 단솔의 발걸음이 지쳐 보였다. 대수는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자신의 벤을 타고 섬을 떠났다.

지수는 열이 들끓어 가장 먼저 섬을 나갔고, 두현 역시 그 뒤를 따라 자리를 떴다.

대수 이후로 민혁과 태오, 이연이 번갈아 가며 단솔에게 동행을 청했지만, 단솔은 모두 돌려보내곤 제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시끄럽던 춘몽각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열어 놓은 창문에서 들리는 개구리 울음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음도 없었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최 PD가 섬을 떠나 도망치듯 서울로 간 적은 없었다. 단솔이 괴롭힘을 당했던 회귀 전과는 너무도 많은 게 틀어져 버렸다.

이렇게 프로그램이 끝나는 것은, 어쩌면 단솔이 가장 바라던 시나리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주일 뒤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 괜스레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이상해……. 날 외면하고 날 괴롭히고 날…… 죽게 만든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아쉽다.”

갑자기 사무치게 느껴지는 외로움에 몸을 웅크렸다. 눈을 감자 그동안 섬에서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흩어졌다. 한참을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을 때, 마당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길성이었다.

“단솔아! 주단솔! 어우 씨…… 무서워……. 얜 어딜 간 거야…….”

지친 몸을 일으킨 단솔이 미리 싸 놓은 캐리어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핸드폰 플래시를 비추며 마당을 가로질러 오던 길성이 단솔을 반겼다.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모습이 우스웠다.

“형,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내일 와도 된다니까…….”

단솔은 내일 아침쯤에나 길성이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침까지 이곳에 있을 수 있을 줄 알았던 단솔은 왜인지 아쉬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단솔의 마음도 모른 채, 길성은 신이 난 듯 말을 했다.

“솔아, 우리 매니저 한 명 더 뽑았다? 네 첫 방 나오고 나서 애들 스케줄도 점점 늘고, 대표님이 너 데려오라고 차까지 빌려주셨어!”

대문을 열고 나가자, 정말 대표가 매번 자랑하던 외제차가 서 있었다. 10만km도 넘게 탄 중고차를 산 대표는 늘 아침마다 차를 갈고 닦았다. 무슨 바람이 들어 그런 차를 빌려준 것일까.

방송에 최대한 안 보이고 싶어 숨어 다니기까지 한 단솔은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반응이 좋다는 거야?”

“무슨 소리야 그렇게 활약을 해 놓고! 이 여우 같은 놈! 얼른 타, 집에 가서 파티하게! 애들이 다 너만 기다려!”

길성의 손에 이끌려 차에 탄 단솔은 정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누가 무슨 활약을 했다는 거야 도대체…….”

“무반주 라이브에 춤까지 춰 놓고 모른 척하기야? 실시간 급상승 동영상에 올라와서 나도 기절하는 줄 알았다. 네 덕분에 우리 100위 안에 들었어, 인마. 볼래? 오늘 89위!”

“이…… 이게…… 무슨…….”

길성은 음악 차트 스크롤을 주르륵 내려서 89위에 안착한 다이노소울의 ‘Follow me’를 보여 주었다.

“더보기 누르면 120위에 ‘체인지 러브’도 있다? 대박이지.”

“내가 춤춘 게 방송에 나갔단 말이야?”

눈치 없는 길성이 신이 난 사이에 단솔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래! 그렇다니까! 봐 봐, 이렇게 안 보이는 데서도 열심히 하면 다들 알아준다니까? 너 등장할 때도 무슨 이온 음료 광고인 줄 알았어!”

“하…… 진짜…….”

“짜식…… 감동받았나 보네. 진짜 잘됐지? 넌 진짜 될 놈이라니까. 스케줄 막 밀려드는데 다 거절하기 아까웠거든. 근데 딱 이렇게 휴가를 다 주시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형! 스케줄이 왜 밀려들어? 우리 스케줄 두 개밖에 없잖아.”

“무슨 소리야! 화보 촬영에, CF, 드라마까지. 요즘 너 엄청 찾아. 뜨기 전에 잡겠다 이거지. 이거 봐 봐.”

길성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의 핸드폰에는 잡지사 기자, 드라마 PD, 예능 PD 등등 수많은 관계자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단솔은 머리가 하얘졌다. 당연히 존재감 없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망했다…….’

* * *

“아…… 머리야.”

지수는 자정이 넘어서야 자신의 펜트하우스 침대 위에서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의사가 다녀간 모양인지, 뻐근한 손등에는 수액이 꽂혀 있었다.

“일어났어?”

“아…… 내가 왜 여기…….”

“너 열이 펄펄 끓어서 죽을 뻔했어. 40도도 넘더라, 도대체 거기서 뭘 시킨 거야? 내가 최 PD 멱살이라도 잡을까 하다가.”

“단솔이는?”

“뭐? 무슨 술?”

“하…… 씹. 방송은. 촬영은 어쩌고 내가 여기 있냐고!”

지수는 제 팔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주사액을 빼고는 침대 옆 협탁에 있는 티슈를 몇 장 뽑아 지혈을 하고 일어섰다.

“누가 보면 방송에 꽤 진심인 줄 알겠어…….”

“헛소리하지 말고,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아! 설명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지난 시즌에 출연했던 아이돌 있잖아. 찰스인가 걔가 최 PD랑 방송국 고소하고, 자살 소동하고 난리, 난리.”

“뭐?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일단 최 PD는 일주일 안에 정리한다고는 하는데, 제가 무슨 수로……. 여차하면 엎어지게 생겼으니까 너도 체력 관리나 해. 새 작품 들어가게.”

어차피 망할 프로그램에 뭣하러 버티고 있었냐며 핀잔 주는 매니저를 집 밖으로 쫓아낸 지수는 협탁 위에 있던 제 핸드폰을 뒤졌다.

그러고 보니, 단솔과 저는 핸드폰 번호도 모르는 사이였다. 상처받은 단솔의 눈이 어른거려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던 지수는 핸드폰을 들어 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알아.

대놓고 쌀쌀맞은 대수의 목소리에 지수가 열이 오른 눈 주변을 꾹꾹 눌렀다.

“뭐 하나만 묻자.”

―뭐?

“단솔이 핸드폰 번호 좀 알려 줘.”

―끊는다.

“아, 잠깐만! 잠깐! 진짜 이러기야? 안 그래도 아픈 사람한테?”

―나도 몰라. 근데 알아도 안 줬을 거야.

“야! 내가 그러니까 사과를!”

―뚝.

지수가 채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겨 버렸다. 편협하고, 사람을 가리던 성격이 원망스러웠던 순간이 있었을까.

띠링.

빙글빙글, 도는 머리만 부여잡고 있을 때, 메시지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울보대수

매니저가 없어서 아침까지 섬에 있을 거래. 사과하려면 직접 보고 해

지수는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외투를 집어 들었다. 약효가 좋았는지, 알파 특유의 회복력 덕분인지 몰라도, 땀이 식은 몸은 오히려 개운하게 느껴졌다.

카메라도, 방해꾼도 없이 오롯이 단솔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춘몽도로 향하는 내내, 지수는 두근거렸다.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헷갈렸지만, 그 길 끝에 단솔이 있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속도를 냈다.

뺨을 치면 뺨을 맞고, 무릎을 꿇으라면 꿇어야지.

감히 오메가인 척을 하고 속였다며 욕을 하고 침을 뱉으면 그조차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수가 도착한 춘몽각은 아무도 없는 빈집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쓰던 방에도, 거실에도, 단솔의 흔적은 아무 데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야무지게도 짐을 싸서 나간 모양새에 지수는 텅 빈 소파에 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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