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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26화 (26/150)

26화

“미쳤군.”

“안 미쳤어, 멀쩡해. 나…… 단솔이한테 진심이야.”

“웃기지 마, 넌 이번에도 장난이었어. 진심? 네가 진심 같은 걸 알긴 해? 그저 귀여워해 주는 게 네 진심이냐? 진짜 단솔이 생각했다면 너…… 한 방에서 그렇게 지내면 안 됐지. 좋은 형인 척, 같은 오메가끼리 잘 지내 보자. 하, 웃기지도 않지.”

“처음엔 그랬어…… 근데 지금은 달라.”

대수의 말이 맞다. 어쩌면 지수는 첫 단추부터 잘못 선택한 것일지도 몰랐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상대방이 감당할 수 없는 고백은 폭력이야.”

대수가 지수를 내버려 둔 채 숲을 떠나며 말했다.

* * *

‘오줌싸개…… 한지수…….’

“허억!”

단솔은 어렴풋이 남아 있는 간밤의 기억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늘 제 옆자리에 저를 소중한 인형처럼 껴안고 자고 있어야 할 지수가 보이지 않았다. 아침잠이 많아 늘 저보다 늦게 일어나던 지수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형…….”

텐트를 열고 나온 단솔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접이식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불편하게 졸고 있는 지수의 모습이었다. 아침 이슬을 고스란히 다 맞은 모양인지 지수의 머리와 바람막이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형!”

“으응…… 솔이 일어났어?”

“형! 설마 여기서 잤어요?”

“……텐트 안이 좀 덥더라고.”

그럴 리 없었다. 단솔은 새벽에 급격히 낮아진 공기에 침낭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단솔은 제가 술에 취해 지수에게 혹시 큰 실수를 한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형…… 혹시 제가 어제…… 무슨 실수라도…….”

“발목은 좀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형 있잖아요, 어제…….”

“아!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니까 상쾌하다. 솔아, 형아 여기 주변 한 바퀴 돌고 올게.”

지수는 일부러 단솔을 피하려는 듯 화제를 돌렸다. 단솔은 이런 감각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영문을 모르고 멀어지는 것 따위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에―, 에―취!”

단솔의 눈을 피해 숲으로 도망친 지수는 으슬으슬한 몸을 웅크려 양 팔뚝을 문질렀다. 상쾌하기는 개뿔, 딱 봐도 몸살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취미에도 없는 등산을 하고, 쉬지도 못하고 바깥에서 찬 이슬을 맞으며 잤다.

몇 개 되지도 않는 텐트들은 전부 알파 놈들이 득시글했다. 단솔과 함께 자겠다는 일념으로 제 몫의 텐트를 숙소에 두고 온 터라 단솔의 텐트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양심이 지수의 발목을 붙잡았다.

숙소로 돌아가게 되면, 방도 옮길 생각이었다.

“하…… 추워 시발…….”

* * *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먹고 뒷정리할 때까지 지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단솔은 지수에게 주려고 챙겨 놓은 샌드위치와 음료수만 연신 만지작거렸다.

단솔은 텐트를 정리하던 대수에게 다가갔다. 그라면 지수의 행방을 알지도 몰랐다.

“저…… 선배님. 혹시 지수 형 어디 갔는지 아세요?”

산에 올라온 뒤로 단솔과 독대한 것이 처음인 대수는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그때처럼 짐승같이 몸뚱어리가 반응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대수는 제 등산복 상의를 연신 아래로 잡아당겼다.

“몰라. 나도.”

원래도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단솔은 묘하게 쌀쌀맞다는 생각을 했다. 기분 탓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피해 의식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평소와 똑같은데, 자신이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걸지도.

“나 이거 접어야 하는데, 좀 비켜 줘.”

“아…… 도와드릴까요?”

“아니.”

“네…….”

구석에서 짐 정리를 하던 단솔은 곰곰이 어제 일을 떠올렸다. 많이 마신 건 아니었으나, 도수가 꽤 높은 술이었다.

술이 약한 단솔은 그 정도 도수의 양주를 처음 먹어 보았다. 색깔이 예쁘고 단맛이 나서 취하는 줄도 몰랐는데, 아무래도 제가 지수에게 한 말이 문제였던 것 같았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톱 배우였다. 저에게 친절하고 친근하게 군다고 해서 저도 똑같이 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단솔은 애꿎은 제 머리만 콩콩, 때렸다.

“발목 괜찮아요?”

그런 단솔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민혁이었다.

“네…….”

“내려갈 때는 나랑 태오 씨랑 내려갈 거예요.”

“네⁈ 지수형이랑…… 대수 선배님은…….”

“지수 씨는 아까 아침 일찍 내려갔고, 대수 씨도 혼자 내려가고 싶다네.”

“아…….”

단솔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비집고 나올 것 같았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자기를 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 형. 혹시 제가 어제 무슨 실수 했나요?”

“아니? 그냥 좀 취한 거 말곤? 왜?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아니다. 이미 지수 형한테는 좀 실수한 거 같아요. 그래서 형이 절 피하는 것 같아요. 저 어쩌죠?”

“금방 들어가서 자는 것 같았는데……. 무슨 실수를 했는데요?”

“그게…….”

단솔은 차마 제가 지수에게 ‘오줌싸개’라고 했다는 사실을 내뱉지 못했다. 이미 그 말로 상처받았는데,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고 다니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단솔은 지수가 왜 화가 난 건지 정확하게 짐작이 되질 않았다.

“아니에요. 제가 이따 내려가서 지수 형이랑 말해 볼게요.”

* * *

하지만.

숙소에 가자마자 지수에게 사과를 하려 했던 단솔이 대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것은 최 PD와 다투고 있는 지수의 모습이었다.

“방이 왜 없어. 윤여민 나갔는데.”

“아, 그게…… 저희 룰이 바뀌는 바람에…… 새 멤버가…….”

“뭐? 최 PD, 우리 계약서 쓰고 이 프로그램 나왔어요. 무슨 룰이 어떻게 바뀐다는 건데. 출연자한테 말도 없이 이렇게 제멋대로 바꾸는 게 당신 방식이야? 씨발…… 카메라 안 꺼?”

저에게 마냥 다정하던 지수는 온데간데없고, 급기야 화를 참지 못한 듯 욕을 내뱉는 모습은 살벌하기까지 했다.

“무리하게 일정 잡아서 애들 다치게 만들고, 이제 갑자기 룰을 바꾼다고? 새 멤버? 하, 최소한 출연자들한테 미리 설명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산에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유두현 씨가 다치는 바람에…….!”

“그러니까 애초에 왜 산행을……! 하……. 됐고, 난 오늘부터 무조건 방 혼자 써야겠으니까 그런 줄 알아요.”

“한지수 씨! 갑자기 이러시면…….!”

“프로그램 초창기부터 오메가 4명 올 거 알았잖아, 당신. 일부러 한 방에서 유치하게 싸우는 꼴 보겠다고 3개만 만들어 놓은 거 아니냐고. 못 견디겠으니까 당장 방 바꿔.”

뭐라 더 말을 하려던 지수의 눈에 단솔이 들어왔다. 대문 앞에서 차마 들어오지도 못하고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던 단솔은 손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가 부끄러웠다.

저렇게 화를 낼 정도로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당황한 것은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몸살 기운에 추한 꼴을 보일까 싶어, 카메라도 없이 먼저 산에서 내려온 길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단솔에게 방을 옮기라고 했던 최 PD가 슬슬 눈치를 보면서 말을 돌렸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이야기를 해 봐도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았다.

다른 멤버들이 오면 의논해 보자.

왜 자신이 빈방으로 옮겨 가는 걸 다른 놈들이랑 상의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상스럽게 욕을 하고 화를 내고서야 최 PD는 새 멤버가 온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계약서에도 없는 내용에 화를 내던 순간, 단솔이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단언컨대 지수는 단솔과 한방을 쓰면서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자신이 못 견디게 참을 수 없는 건 자꾸만 커져 가는 마음이었다.

오해하기 딱 좋은 말에 상처받은 단솔의 눈이 보였다. 눈물을 한가득 품고도 참아 내려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이런 꼴을 보여 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지수가 단솔에게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단솔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돌아섰다.

“솔아……!”

하필이면 내내 들끓던 열에 지수의 몸이 휘청거렸다. 갑작스러운 어지러움에 지수가 주춤거리는 사이, 단솔은 이미 춘몽각을 빠져나간 뒤였다.

* * *

단솔이 춘몽각을 벗어나 섬에서 갈 곳은 몇 군데 없었다. 민혁이 게으름 피우던 산 아래 나무 밑까지 달려온 단솔은 그제야 주저앉아 눈물을 훔쳤다.

사람에겐 기대할 것이 없는 걸 알면서, 뭘 기대한 것일까. 바보같이 또 속았구나 싶어 펑펑, 눈물을 흘리던 단솔의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민혁이 키우던 단탄지의 엄마 고양이었다.

늘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이곳이 녀석의 아지트인 듯했다. 새끼들을 품고 있을 땐 곁을 내주는 법이 없던 놈이, 단솔의 기분을 달래 주려는 것처럼 발치에서 얼굴을 부볐다.

야옹―.

“이번 생도 이렇게 끝나는 걸까……. 난 정말 구제 불능인가 봐, 무서워.”

단솔은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을 만져 주며 중얼거렸다.

“여기 있었네.”

단솔의 앞에 나타난 것은 숨을 헐떡거리는 이연이었다. 한참을 뜀박질한 듯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한참 찾았어.”

일찍이 숙소에 있던 그는 본의 아니게 지수와 최 PD의 언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게 되었다. 2층에서 내려다보이는 광경이 지루해질 때쯤, 단솔이 대문을 열었다.

말릴 새도 없이 단솔에게 상처가 될 말들이 지수의 입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도망치는 뒷모습만 봐도 가슴이 욱신거려 도저히 방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옆자리 한번 내준 적 없는 이에게 왜 이토록 끌리는 걸까.

“끄흡…… 저를 왜요.”

책망하는 미운 말투마저도 제게 말을 걸어 주는 모습이라 기뻤다. 이 정도면 제가 생각해도 중증이었다.

“울고 있을 것 같아서.”

눈물을 참으려 턱에 힘을 잔뜩 주고 있던 단솔은 이연의 말에 저도 모르게 아이처럼 엉엉, 울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회귀까지 해 놓고 도무지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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