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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25화 (25/150)

25화

“잠깐만! 감독님! 대수 선배 안 했어요!”

조금 숙연해진 분위기를 깬 것은 태오였다. 은근슬쩍 제 차례를 넘기려고 했던 대수가 뜨끔한 듯 헛기침을 했다.

“눈썰미가 좋네.”

대수의 표정은 분명 칭찬이 아니었는데, 태오는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대수는 두 개 뽑아!”

캡슐을 하나 뽑은 지수가 대수에게 놀리듯 하나를 더 넘겼다. 약점을 잡힌 뒤라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질문지를 받아 든 대수가 영혼 없는 목소리로 질문을 읽어 내려갔다.

『지금 당신의 마음속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머리글자를 말해 주세요.』

“J.”

망설임 없이 대답한 대수가 다음 질문지를 뽑아 읽었다.

『첫 경험은 언제?』

“하…….”

하필이면 로맨틱한 질문 뒤에 이어지는 노골적인 질문에 대수는 난처한 듯 눈썹 근처를 문질렀다. 기대하는 눈빛을 뒤로한 채, 대수는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 마실게요.”

“아…… 재미없다. 대수야.”

“그럼 네가 재밌게 해 보던가.”

대수가 타박하는 지수에게 상자를 넘겼다. 대충 아무거나 뽑으려던 지수의 손에 마치 누군가 장난처럼 쥐여 준 듯 캡슐 하나가 들어왔다.

낯선 감각에 손을 뺀 지수가 멀뚱히 있자, 옆에 있던 단솔이 지수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형……!”

“어? 어…… 그래…….”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지수가 자신의 질문지를 꺼내 읽었다.

『최근에 한 가장 큰 잘못은?』

지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없었지만, 단솔과의 만남은 수년간 무뎌진 죄책감을 다시 열기에 충분했다.

억제제를 정량보다 초과해서 먹고 있긴 하지만, 한 침대를 쓰면서 불쑥불쑥, 치미는 음심은 통제가 되질 않았다. 그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장난스레 시작한 마음은 지수의 생각보다 더 깊어지고 있었다.

“흠…… 한 잔 할게요.”

“뭐야, 저도 더럽게 재미없네.”

“네네, 미안하구요. 이제 제갈, 어?”

민혁에게 상자를 넘기려던 지수는 어느새 비어 있는 제 옆자리를 발견했다.

“와…… 민혁이 형 그새 준비하러 갔나 봐요.”

“무슨 준비?”

“아까부터 노래 부른다고 막 연습했잖아요.”

“허.”

태오의 말에 벌레라도 씹은 표정의 지수가 대수를 쳐다보았다. 대수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민혁이 카메라에 한 번 더 잡혀 보겠다고 기타를 메고 산을 오를 위인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여튼, 느끼한 새끼…….’

노래나 한 곡 듣고 들어가자, 싶었던 지수의 전투력을 높인 것은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빛내던 단솔의 혼잣말이었다.

“와! 노래…… 나도 노래 좋아하는뎅…….”

‘아, 맞다. 솔이도 가수였지.’

첫날, 충격적으로 귀여웠던 무반주 공연 이후로 단솔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단솔도 가수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제 보니 제갈민혁은 제 생각보다 더 위험한 경쟁자였다.

“음음, 아아.”

자리에 남은 알파들 모두가 미묘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 기타를 멘 민혁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나왔다.

“뭐야, 저 새끼.”

“와…… 민혁이 형 대박.”

“하…….”

언제 면도기를 챙겨 온 건지, 평소와 달리 깔끔한 얼굴과 손질한 머리가 꼭 화보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작정했네.”

“저 형 저렇게 안 봤는데…… 꼬리를 아홉 개 숨기고 있던 여우였네요. 치트키를 쓰다니……!”

대수는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고, 태오는 분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이제 보니 옷차림도 아까와 달랐다. 맨손으로 온 줄 알았더니, 야무지게 준비하고 온 모양이었다.

단솔은 이미 양손을 모으곤 제갈민혁에게서 흘러나올 감미로운 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노래는…… 제가 한 사람을 생각하며 작곡했던……. 단 한 사람…… 주…….”

민혁이 준비한 멘트를 채 끝내기도 전이었다. 남을 위한 판에 들러리로 서 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지수는 실수인 척 남은 술을 모닥불이 작게 타닥거리고 있는 스토브 위로 부었다.

거의 꺼져 가던 불씨가 알코올을 만나자 갑자기 커다란 불기둥을 만들어 냈다.

“아이쿠! 불이야!”

지수는 불을 끄려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부채질을 하며 불씨를 더 크게 키웠다.

“……우와! 불이다! 불 쇼!”

그 덕분에 만취한 단솔은 금세 민혁의 노래는 잊어버리고, 지수가 만든 불구경거리에 빠져들었다.

스토브 밖으로 불길이 번지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단솔을 대피시키고, 태오와 대수가 신나게 물통과 모래를 가져와 불을 껐다. 낭만적인 분위기는 불씨와 함께 사그라지고, 갑작스레 꺼진 모닥불 덕분에 연기만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연기를 헤집고 나온 지수가 능청스레 최 PD에게 말을 했다.

“아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최 PD 다음부턴 우리 그냥 LED로 가죠?”

“……하.”

예고편에 들어갈 로맨틱한 장면을 잃어버린 그녀는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그…… 저기…….”

아직도 기타를 메고 멍하니 서 있던 민혁이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대수는 불을 끈다는 핑계로 그를 찍고 있는 카메라마저 막아섰다.

“이게, 잔불이 남으면 안 되니까. 밟아 줘야 돼.”

“와…… 진짜 대수 선배님 순발력 대박. 명예 소방관 하셔도 되겠어요.”

태오가 대수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세 사람의 합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오랜만에 단합된 그들의 모습에 민혁은 그저 나라 잃은 백성처럼 허망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솔아, 이제 자러 가자.”

지수는 취해서 해롱거리는 단솔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지수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던 단솔이 텐트 앞에서 들어가지 않고 버티더니, 두 사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형…… 저 알아요.”

“……뭘?”

“형의 비밀…….”

쿵.

지수의 심장이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답지 않게 손이 벌벌, 떨렸다. 전 소속사 사장에게 이야기를 듣고 온 연예부 기자 앞에서도 이렇게 떨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 비밀을 아는 것 따위, 지수에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돈만 밝히던 소속사 사장은 횡령 혐의로 감방에 보냈고, 용기가 가상한 기자는 허접한 신문사 하나는 통째로 날려 버렸다. 귀찮은 일에 분노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두려운 적은 처음이었다.

그럼, 주단솔은.

주단솔은 어떻게 해야 하지.

늘 여유롭고, 약아빠진 머리가 이렇게 돌처럼 굳어 버려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였다. 단솔이 지수의 품 안에서 중얼거렸다.

“불…… 싶어서…… 그러…….”

“……응? 뭐라고 솔아?”

“불장난…… 하고 싶어서 그런 거 다 안다고요. 형이 술 뿌리는 거 내가 다 봐써!”

“후…….”

지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더 이상 단솔을 향한 제 감정이 그저 불장난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지수는 단솔이 저를 미워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래, 형이 장난쳤어. 미안해.”

“형…… 불장난하면 오줌 싸.”

“으응…… 미안해 조심할게.”

“조심해! 오줌싸개…… 오줌싸개 한지수…….”

* * *

연신 술주정을 중얼거리는 단솔의 잠자리를 봐주고 지수는 심란한 마음에 텐트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뒷정리를 끝낸 태오와 대수가 그런 지수에게 다가왔다. 대수는 말없이 지수의 셔츠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내곤 불을 붙였다.

“형! 아니, 선배님!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저 진짜…… 민혁이 형 수염 민 거 보고 너무 멋있어서 간담이 서늘했는데. 역시…… 최고의 선배님! 완전히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태오는 아직도 호흡이 척척 맞아떨어지던 아까 전 상황에 푹 빠진 것 같았다. 하지만 세 사람이 한 팀이었던 것은 그때뿐, 지수는 태오의 장단을 맞춰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태오야.”

“넵!”

“적당히 해.”

“네…….”

“제갈민혁은 어디 갔어?”

분주하게 장비를 정리하는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그 긴 머리과 삐죽 튀어나온 큰 키가 보이지 않았다.

“술 남은 거 병나발 불더니 들어가서 잔대요. 오늘은 날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위로해 줬어요. 잘했죠, 형?”

“태오야.”

“네!”

“너도 들어가서 자라.”

“네에…….”

태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지수가 대수에게 따라오라는 턱짓을 하곤 사람이 없는 숲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귀찮은 듯 머리를 쓸어 올린 대수가 그 뒤를 따라가려고 하자, 태오가 대수를 붙잡았다.

“저기 선배……. 역시…… 지수 선배랑 뭐가 있으신 게 맞죠?”

“…….”

대수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험악해지자, 태오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손사래를 쳤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지수 형님의 섹시함에 반해서 잠깐…… 아주 잠깐. 가까운 사이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노선을 확실히 정했거든요. 두 분 사이 전 응원해요. 파이팅!”

“마태오.”

“네!”

대수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태오는 기대감에 차 대수를 바라보았다.

“오늘의 이 감정은…… 잊지 않겠다.”

얼굴이 새빨개져 관자놀이에 핏줄이 선 대수가 아드득하고 이를 짓씹고 돌아섰다.

태오는 그런 대수가 느낀 감정이 수치심과 모멸감이라는 것을 모른 채, 흐뭇하게 자신을 마음껏 예뻐해 주고 있었다.

“나한테 되게 고마우신가 보네……. 역시, 지수 형님을 포기하길 잘했어. 짜식, 나 좀 멋진 놈인걸!”

* * *

“웬만하면 따로 부르지 마. 미친놈들이 오해하잖아.”

지수의 뒤를 따라간 대수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말했다.

“오늘은 네가 날 더 찾았던 거 같은데?”

“…….”

지수의 말이 틀리지도 않았다. 오늘 하루, 지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대수는 전 국민이 보는 카메라 앞에서 개망신을 당할 뻔했으니까.

“용건이 뭐야, 범인이라도 잡았어?”

“나…… 고백하려고.”

“뭘? 하…… 역시 너지? 네가 범인이었군.”

대수는 자신의 심증이 들어맞았다는 듯, 당장이라도 지수를 때려눕힐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지수는 그런 대수가 질리는 듯 몸서리를 쳤다.

“아! 그거 말고!”

“그거 아니면 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가 들을세라 대수의 근처로 가까이 다가선 지수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솔이한테, 고백할 거야. 내가 알파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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