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미친 변태 알파 놈……. 그러게 왜 러트 기간에 약을 빼먹어. 솔이랑 둘이 간다니까 설렜어? 혹시 흑심 품고 일부러……⁈”
다들 식사를 하는 사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텐트로 들어간 대수가 지수에게 약을 빌렸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바람막이와 알파용 억제제를 건넨 지수가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대수의 중심부를 보며 혀를 찼다.
누가 볼세라 서둘러 바람막이의 지퍼를 올린 대수가 알약을 받아서 물도 없이 씹어 삼켰다. 아드득, 알약이 으깨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렸다.
“안 빼먹었어.”
“근데 왜 그 지랄……! 사춘기야? 너 병원 가……갑자기 발정 났대도 그 정도면 질병이야.”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출연자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늘 억제제와 사이클 주기를 챙기도록 되어 있었다. 정대수처럼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 그런 걸 빼먹을 리 없었다.
“아무래도, 누가 약을 바꿔치기한 것 같아.”
설마, 이 섬에서 무슨 수로 정대수가 먹는 알약과 똑같이 생긴 억제제를 구한단 말일까, 어이없는 소리에 지수가 헛웃음을 쳤다.
“요즘 추리 소설이라도 봐?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다고…….”
“맛이 달랐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네 약이 잘못 만들어진 거 아니고?”
“그럴 리가, 여기 오기 전부터 먹던 거야.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어.”
지수가 세 사람을 떠올렸다. 민혁과 태오 그리고 단솔…… 아니지, 산에 올라오지 못한 이연과 두현까지.
그들 중 약을 바꿔치기한 사람이 있다는 걸까.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어. 일단 그거나 가라앉히고 와. 눈깔 돌아서 단솔이한테 허튼짓하면 죽여 버릴게.”
“그러시든지.”
* * *
“형! 얼른 와요!”
무엇을 보고 그리 신난 건지, 느릿느릿 걸어오는 지수를 단솔이 반겼다.
자신의 옆을 탕탕, 치며 부르는 그 모습에 마치 꼬리라도 달린 것처럼 느껴졌다. 평소보다 상기된 뺨과 귀여운 행동, 끝에서 은은한 알코올 향이 났다.
묘하게 기가 죽어 있던 모습만 보다가, 천진한 얼굴을 한 것이 또 한 번 지수의 마음을 무장 해제 시켰다. 대수나, 다른 놈들이 이 꼴을 먼저 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솔아, 술 마셨어?”
“어…… 네. 아니 이거 이따가 쓸 소품잉데…… 김 감독님이 주셔 가지고 한 잔 받아먹었어요.”
‘김선태 그 할배 새끼가 감히 누구한테…….’
지수의 손이 단솔의 양 뺨을 감싸고도 남았다. 불쑥불쑥, 들어오는 스킨십에 바짝 굳었었는데, 술 한 잔에 이렇게 흐물흐물해진 모습에 지수는 날름 단솔을 먹어 버리고 싶었다.
촬영 감독이 제멋대로 단솔에게 술을 준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지수는 당장이라도 지랄하고 싶었던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술병은 꽤 도수가 높은 양주였다. 아무리 그래도 한 잔에 이렇게 해롱거릴 정도면 단솔은 술이 약한 편이었다.
“솔아, 오늘도 형아랑 같이 잘 거지?”
“어! 우웅…… 네 그럼요. 형 애착 인형이 없으니까는…….”
“그래.”
제 어깨에 기댄 따끈한 볼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모닥불 앞에 자리하자, 조연출이 슬레이트를 쳤다.
* * *
“오늘 공지 사항이 있었긴 한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출연자 전부가 없어서 그건 내려가서 말씀드릴게요. 준비한 게임도 뭐…… 쪽수가 안 맞으니 못하게 됐고. 그래서 그냥 술 한 잔씩들 하면서 토크 진행할게요.”
단솔은 최 PD의 태도에서 묘하게 자리에 없는 사람을 탓하는 듯한 뉘앙스를 느꼈다. 역시, 자신은 운 좋게 비난을 피해 갔을 뿐이었다.
“앞에 놓인 상자 안에는 우리 막내들이 만든 질문지가 들어 있습니다. 시청자들이 보낸 질문도 있고, 저희 제작진이 쓴 질문도 있어요. 돌아가면서 한 장씩 뽑으시고, 답변 못 하면 앞에 있는 술 한 잔씩 드시면 돼요.”
그러면 그렇지, 출연자 두 사람이 없다고 마냥 편하게 둘 PD가 아니었다. 단솔은 술김에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제일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
“저! 저부터 할래요!”
“솔아, 그렇게 하고 싶었어?”
웬일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 귀여운 듯 민혁과 태오,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온 대수가 웃고 있었다. 지수는 그런 단솔에 장단을 맞춰 주듯 말을 걸었다.
“네! 저 하고 싶었어여!”
“그래, 가서 뽑으세요!”
“넹!”
단솔은 동그란 입구에 손을 넣고 한번 스윽, 휘저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캡슐의 모양이 손끝에 느껴졌다. 하나의 캡슐을 잡은 단솔이 뚜껑을 따자,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긴 종이가 들어 있었다.
『알오매치 서바이벌 인 아일랜드’의 출연자 중 마음에 드는 출연자가 있습니까?』
느려진 눈을 끔뻑거리던 단솔이 질문을 읽었다.
첫 질문부터 민감한 질문에 알파들 모두 단솔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네…… 있어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 단솔은 대답을 해 놓고 질문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 질문지를 읽자마자, 떠오른 사람을 생각했다. 모호했던 감정이 조금씩 선명하게 덧그려졌다.
“다음은 내 차롄가.”
대답을 하곤 배시시 웃는 단솔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지수가 입을 열었다. 지수는 망설임 없이 제 앞에 놓인 상자에 손을 넣었다.
『마지막 연애는 언제?』
지수의 머릿속으로 여러 명이 스쳐 지나갔다. 연애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볍게 만난 상대였다. 소문 때문에 국내에서는 끝까지 가지도 못했고, 대부분 해외에서 만난 하룻밤 상대들.
몇 개의 영화가 해외에서 큰 상을 받은 뒤로는 저를 알아보는 이들 때문에 그마저도 끊은 지 오래라, 지수는 대충 대답을 뱉었다.
“3년 전.”
“이거 거짓말해도 한 잔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그냥 넘어가 줄 리 없는 대수가 습관처럼 태클을 걸었다.
건수를 잡았다는 듯 최 PD의 눈이 빛났다.
“뭐 알고 계신 정보가 있나 보죠?”
하지만 이미 대수의 약점을 잡은 지수의 시선이 대수의 중심부로 향하자, 대수가 궁색한 변명을 덧붙였다.
“아니…… 그…… 혹시나 룰을 물어보는 거예요. 한지수가 거짓말을 한다는 게 아니고.”
“아…… 근거가 있으면 벌칙이죠, 당연히.”
“3년 전 맞아요. 제가 압니다.”
씨익, 웃는 지수를 보며 대수가 침울하게 말을 덧붙였다.
“이제 민혁 씨 차례.”
지수가 상자를 민혁에게 내밀었다. 민혁은 한참의 고민 끝에 캡슐 하나를 뽑아 들었다.
『찬스 : 출연자 중 한 사람에게 질문하기.』
“와, 저 찬스 뽑았어요! 음…… 뭘로 할까…….”
고민하는 척을 하던 민혁이 단솔에게 질문지를 넘겼다.
“아까…… 마음에 있다던 그 사람, 누구예요?”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궁금해 할 질문이었다. 제 순서가 아니라 긴장을 풀고 있던 단솔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는, 알파들은 물론이고 스태프들까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저…….”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이미 회귀 전, 이연에게 너무 쉽게 빨리 빠져 버린 탓에 데어 본 단솔이었다. 혼자만 품고 있기에도 창피할 정도로 서툰 마음이었다.
“그냥 한 잔 마실래요.”
‘이번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야.’
그냥 좋은 추억으로 간직한 채, 프로그램이 끝나면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갈 작정인 단솔은 쓰고 독한 양주 한 잔으로 제 마음을 삼켜 버렸다.
아쉬움 가득한 민혁의 순서를 지나쳐, 상자는 태오의 앞으로 갔다.
“하쿠나마타타 얍!”
태오는 이상한 주문을 외며 캡슐 하나를 뽑았다.
『하룻밤 최대 몇 번?』
“으아악!”
질문을 읽은 태오가 별안간 비명을 질렀다. 그것도 모자라, 더러운 걸 집는 것처럼 질문지를 엄지와 검지로 겨우 들고 있다가 던져 버리기까지 했다.
“이거 질문한 거 누구야? 감독님! 저 아이돌이에요!”
“그거 저 아니에요.”
“딱 봐도 질문이 감독님 취향인데요⁈”
“……너한테 한 질문 아니야. 술이나 먹자.”
태오의 예상이 맞았던지, 최 PD는 민망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태오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입술을 삐쭉거리던 태오가 술잔을 비우고 단솔에게 상자를 가져다주었다.
“단솔 씨 차례.”
“내 차례는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걸까요…….”
아까 마신 술로 조금 더 취기가 오른 단솔의 아랫입술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평소라면 그저 헤헤거리며 시키는 대로 했을 텐데 술이 들어가자 솔직한 마음이 입 밖으로 쏟아졌다. 삐진 병아리 같은 모습에 다들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맨날 나만…….”
“솔아, 형아가 대신해 줄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모습에 지수가 흑기사를 자청했지만, 단솔은 굽히지 않았다.
“아니요…… 아니에여…….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해야죠. 그래야 멋진 어른. 난 멋진 어른이다!”
용기가 안 날 때마다 혼자 마음속으로만 뱉던 말을 술주정하듯 꺼낸 단솔이 하늘을 향해 정권 찌르기를 했다. 캡슐 하나를 꺼내 또박또박, 읽었지만 이미 무뎌진 혀는 뭉툭한 발음을 뱉어 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지와 그 이유.』
이미 돌아왔는데 또 돌아가라고?
취기가 잔뜩 올라 발갛게 익은 볼을 두어 번 두드린 단솔이 고민스러운 듯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아무래도 더 이상 술을 먹는 건 무리였다. 푸우, 하고 긴 숨을 내뱉은 단솔이 대답을 시작했다.
“열세 살 때요.”
생각보다 너무 어린 나이였다. 다른 사람들이 고장이라도 난 듯,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연습생이 됐거든요. 그래서 돌아가면, 그냥…… 연예인 같은 거 꿈꾸지 말고 평범하게 다른 친구들처럼 살아 보고 싶어요.”
그 말을 곰곰이 듣던 민혁이 단솔에게 물었다.
“혹시, 해 주고 싶은 말 있어요? 열세 살 단솔이에게.”
민혁의 질문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자신의 운명이 바뀌었던 순간, 다들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평범하고 평온한 삶은 너무도 멀어져 버렸다. 그리고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택한 걸 뼈저리게 후회했던 날이 있다.
이유 없는 모욕과 비난을 견디고,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일을 겪어도 웃으며 연기를 해야 하는, 남들에겐 무척 당연한 일이 그들에겐 아주 특별한 일탈이 되어 버리는 그런 날.
내가 왜 이런 걸 하고 싶다고 했을까? 치기 어린 과거를 사무치게 후회했던 날.
그런 날이 단솔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한 번쯤 있었다.
술기운을 빌어, 단솔은 너무 일찍 철이 들어 제대로 울어 보지도 못한 어린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
“너무 빨리 철들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들……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니까 너무 빨리 어른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말해 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