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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23화 (23/150)
  • 23화

    “솔아! 다쳤어?”

    “아…… 별거 아니에요.”

    “별거 같은데요? 우리 내려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떡해……! 제가 업어 줄게요!”

    단솔이 응급 처치를 받고 있는 사이, 지수 일행도 베이스캠프에 올라왔다. 저마다 단솔을 걱정하는 소리에 최 PD가 말을 보탰다.

    “지금 내려가다가 해 저물어요. 오늘은 여기서 자는 게 더 안전해요.”

    다소 냉정한 어투에 지수가 눈을 흘겼다. 그들은 종종 아니, 자주 연예인도 그저 사람이라는 걸 잊는 듯했다.

    그들은 시청자를 핑계 삼아, 출연자들을 물건처럼 취급했다. 조명이나 마이크처럼, 연예인은 그저 방송을 위해서 존재하는 아주 비싼 도구들에 불과했다.

    지수는 이 생활에 염증이 났다. 그런 세계에 익숙했지만, 불편한 것은 여전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하고 있는 단솔이 겪기에는 꽤 잔인한 함정들이 많은 곳이었다.

    “정대수는 어디 갔어. 같이 온 거 아니야?”

    지수가 단솔이 걸터앉은 자리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붕대 위로도 퉁퉁 부은 게 여실히 느껴지는 단솔의 발을 자연스레 제 허벅지 위로 얹으며 물었다.

    민망함에 빼려던 발을 살짝 누른 지수가 뿌리는 파스를 집어 들곤 빈틈없이 단솔의 발목에 뿌려 주었다. 어찌나 손길이 섬세한지 통증에 잔뜩 긴장해 있던 단솔의 어깨가 흐물흐물, 풀어지고 있었다.

    “짐을 두고 왔어요, 저 업고 오시느라……. 그거 가지고 온다고 다시 내려가셨어요, 대수 선배님.”

    “널 업고 올라왔다고? 산길을?”

    하지만, 지수의 되물음에 단솔은 다시 움츠러들었다. 욕먹을 게 두려워 제 고집대로 산을 올라왔다. 저 때문에 또 방송을 망치는 걸까. 사람들에게 민폐로 낙인찍히는 걸까.

    다정하던 지수마저도 표정이 굳어지자, 밀려오는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네…… 죄송해요…….”

    하지만 지수는 대수가 단솔과 꽤 친밀한 스킨십을 했다는 생각에 화가 났을 뿐이었다. 단솔이 고개를 푹 숙이며 동굴을 파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쓸데없이 힘만 센 놈…….’

    내려갈 땐 꼭 자신이 업고 내려가야겠노라 다짐한 지수가 최 PD를 찾기 위해 일어났을 때였다.

    “뭐라고요? 하…… 그럼 촬영은 어떡하라고. 여기 다 기다리고 있는데…….”

    통화를 하던 최 PD가 큰 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다들 최 PD 쪽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작가들과 부쩍 친해진 태오가 지수와 단솔에게 와서 말을 해 주었다.

    “유두현 선배요, 다쳐서 중간에 하산했대요.”

    “이이연도?”

    “그런가 봐요. 단솔 씨도 다쳤는데 올라왔는데…….”

    두현을 탓하는 듯한 태오의 말에 단솔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회귀 전 단솔이 산에 오르지 못했을 때도 그들은 이런 말을 나눴을까.

    “스태프들도 이것저것 준비한 것 같은데, 작가 누나들이 이번 회차 분량 완전 망했다고 하던데요? 산꼭대기까지 올라와서 이게 뭐야…….”

    하지만 이런 단솔의 마음을 모르는 태오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두현의 갑작스러운 하산에 스태프들의 불만이 사실인 듯, 육두문자를 내뱉는 조연출들도 있었다.두현이 아니라 단솔이 될 수도 있었다.

    단솔은 그 사실에 안도하는 자신이 부끄럽고 싫었다. 그들의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사실 자신일지도 몰랐다. 운 좋게 회귀했고, 그 덕에 난처한 상황을 모면했지만, 당장 발목 상태가 내일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단솔의 정수리 위로 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친 사람을 먼저 걱정해야지…… 태오야.”

    꽤 엄한 목소리를 낸 지수를 바라본 단솔은 깜짝 놀랐다. 태오에게 말하는 지수의 얼굴이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네? 아…… 형 저는…….”

    “이번 산행 자체가 무리였어. 최 PD한테 되도록 이딴 개 같은 기획은 좀 빼라고 내가 말할 테니까, 서로 탓하지 말자.”

    태오도 그걸 알고는 자신의 실수에 아차 싶은 표정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서 있는 태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지수가 다시 평소처럼 다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솔아, 너도.”

    “네?”

    “다치고 싶어서 다친 거 아니니까, 그렇게 죄인처럼 있지 말라고.”

    “어…….”

    “형아랑 텐트 들어가서 좀 쉴까?”

    “저는……!”

    애초부터 단솔의 대답 따윈 상관없었다는 듯, 지수가 자기 멋대로 단솔을 불쑥, 일으켜 안아 들었다.

    정신없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같은 오메가에게 덥석, 안겨 있는 자신이 너무 창피해 지수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곤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지수에게 그건 그냥 앙탈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 * *

    사실, 지수는 다친 다리로 스태프들 눈치만 보고 있는 단솔이 걱정됐을 뿐이었다. 지수는 단솔을 텐트 안에서 쉬게끔 두고 밖으로 나왔다.

    지수가 밖으로 나오자, 여전히 눈치 보고 있던 태오가 우물쭈물 다가왔다.

    “저…… 형 아니, 선배님. 죄송해요. 아까는 제가…….”

    “알아, 무슨 말인지. 나한테 죄송할 건 없지”

    “그래도…….!”

    “태오야, 우리가 어차피 방송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긴 한데, 거기에 잡아먹힐 필요는 없어.”

    “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잔뜩 풀이 죽은 태오에게 평소처럼 말을 걸었다.

    “제갈민혁이랑 정대수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안 보여? 조난된 거 아냐?”

    “대수 선배님은 아까 짐 들고 올라오셨다가, 또 운동 가신다고……. 민혁이 형은 단솔 씨한테 들려줄 노래가 있다면서 연습하러 숲에 들어갔어요.”

    “허, 미친놈들 파티네 이거…….”

    단솔과 산을 올라오면서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코빼기도 안 보이는 대수를 찾기 위해 지수가 직접 주변을 돌아보고 있을 때였다.

    뜻밖에 대수는 가까운 숲길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지수는 멀리 가지 않아 그의 커다란 등짝을 발견했다.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대수의 몸에선 연기처럼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미친놈……. 나 몰래 산삼이라도 캐 먹었어? 도대체 뭐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혹시 단솔이랑 아까 무슨 일이라도.”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던 대수의 근처로 다가간 지수의 눈에 들어온 것은, 회색 추리닝 바지를 뚫고 나올 듯한 중심부였다.

    “미…… 미친…… 개변태 새끼가!”

    “조용히 해!”

    “너……! 너…….!”

    “아니라고! 아니야, 뭘 생각하는지 아는데,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는 다 아니야.”

    무방비 상태로 지수에게 제 모습을 들킨 대수는 무릎을 끌어안고, 최대한 자신의 분신을 숨기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그래봤자 커다란 덩치가 가려질 리는 만무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데?”

    “몰라, 무슨 생각 하는데?”

    “나 보고 세운 거야 설마?”

    “씨발……‼ 하, 그런 거 아니라고!”

    “더러운 알파 놈 같으니…….”

    “아니라니까!”

    대수와 지수가 서로 하고 싶은 말만 메아리처럼 하고 있을 때였다.

    “지수 형? 대수 선배님……? 여기서 다들 뭐 하세요? 저…… 이제 식사한다고 모이라는데…….”

    단솔이 사라진 두 사람을 찾으러 뒤따라온 것이었다.

    “악!”

    “솔아! 오지 마! 여기 더러운 거 있어!”

    “에? 어려운 거요?”

    멀리 있어서 지수의 말을 잘 못 들은 단솔이 더 가까이 다가오기 위해 절뚝거리는 다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제발 말하지 마. 제발 부탁할게. 지수 형 제발요…….”

    아까보다 더 필사적으로 공처럼 몸을 웅크린 대수가 지수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염불처럼 말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순간 지수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정대수를 한 방에 보내느냐, 약점을 잡고 계속 써먹느냐. 선택은 당연히 후자였다. 자신의 유리함을 위해서 단솔의 눈에 차마 저 험악한 꼴을 보일 수 없었다.

    빠르게 바위를 내려온 지수가 단솔을 얼른 부축했다.

    “혹시 무슨 일…….”

    “솔이는 형아랑 들어가자. 쟤는 좀 혼자 있고 싶대. 산에 오니까 센치해지나 봐.”

    “아…… 선배님, 괜찮으세요?”

    “어…… 괜찮아.”

    단솔은 물기 어린 대수의 목소리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자기만 모르는 일이 있는 것 같아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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