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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22화 (22/150)

22화

“어⁈ 형! 다람쥐예요!”

“태오 씨, 저건 청설모예요.”

“청설모요? 그거 다람쥐 잡아먹는 나쁜 놈 아니에요? 저렇게 귀엽게 생기다니…… 반칙이네요.”

청설모에게 나뭇가지를 던지려고 주춤하는 태오의 손을 민혁이 만류했다.

“청설모는 다람쥐보다 크고 회갈색 털을 갖고 있죠. 나무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직접 열매나 견과류를 따 먹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청설모가 다람쥐를 잡아먹는다는 건 루머예요.”

“와…… 얘네들도 루머에 시달리는구나.”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삶이죠.”

“그랬구나……. 미안해 청설모야.”

태오가 손에 들었던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저를 말간 눈으로 쳐다보던 청설모에게 사과를 건넸다.

이미 기분이 상한 듯 청설모가 캬악, 소리를 내며 이빨을 보이자, 태오와 민혁 두 사람이 깜짝 놀라 주춤거리며 도망쳤다. 그 뒤를 따르던 지수가 땀에 젖은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하…… 시발……. 청설모고, 다람쥐고 싹 다 절벽으로 밀어 버릴까.”

지수는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산길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면서 갓 태어난 어린 애처럼 ‘도토리예요! 솔방울이에요! 이건 산삼인가요?’ 묻는 태오와 마치 원래부터 산에 살던 사람처럼 ‘태오 씨, 먹지 마세요. 그건 잡초예요.’ 하면서 이것저것 설명해 주는 민혁을 보며 두통을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둘 다 산길 아무 데나 버려 놓고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필이면 그들이 가는 코스는 가장 완만한 코스였고, 그만큼 정상까지 돌아가느라 산행은 더 길게 느껴졌다.

“오! 투표권!”

그렇게 빨빨거리면서 산길 여기저기를 쏘다니던 태오가 투표권 용지를 발견했다. 꼭 진짜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좋아하는 태오의 목소리가 산길에 한가득 메아리쳤다.

“윤여민도 떨어졌는데, 꽤 열심히 찾네. 또 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나 봐?”

그 모습을 본 지수가 물었다.

윤여민이 3표나 받고 떨어질 때, 단솔의 표가 태오에게 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같은 소속사라 한 작품에서 자주 엮이긴 했지만, 지수 역시 선배들에게나 아부 떨고, 후배들을 제 종처럼 여기는 여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태오가 떨어트리지 않았다면, 단솔에게 함부로 대하는 그를 따로 불러낼 생각이었다. 그런 귀찮은 일을 덜어 줬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생각하던 그때, 태오가 쑥스러운 듯 말을 꺼냈다.

“그건 아니구요……. 갚아야 할 빚이 있어서요.”

“빚?”

태오는 주섬주섬, 투표권에 묻은 솔잎을 털어 내더니 민혁에게 내밀었다.

“저…… 민혁이 형. 이 투표권 형 거예요.”

“태오 씨가 찾은 걸 왜 날 줍니까.”

“제가 사실 형 주머니에서 슬쩍했어요. 진짜 이렇게 가다간 제가 윤 선배 한 대 칠 거 같아서…… 그땐 눈에 보이는 게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태오가 민혁에게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혀 사과했다. 하지만 민혁은 태오의 투표권을 받아 들지 않았다.

“그건 내가 잃어버린 겁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했으니 태오 씨가 사과할 일도 아니죠. 받은 걸로 치겠습니다. 그 투표권은…… 단솔 씨에게 갚아 줘요.”

“선배님……!”

눈에 반짝반짝, 빛이 나는 태오를 남겨 둔 민혁이 기타를 메고 앞머리를 휘날리며 나아갔다.

꽤 비장한 그의 모습에 지수는 헛웃음을 쳤다. 다들 침낭에 먹을거리에, 산에서 잘 준비를 하느라 짐이 한가득했는데 그는 오로지 기타 하나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지수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놀고들 있네. 지금 드라마 찍으세요? 빨리 안 가!”

* * *

“선배님! 여기 투표권 있어요!”

단솔은 나무 끝에 걸린 종이를 발견했다. 종이는 누가 갖다 놓은 건지 단솔이 팔을 뻗으면 닿을 듯 말 듯한 높이에 걸려 있었다. 대수가 오기를 기다릴까 하던 찰나에 살짝 더 손을 뻗은 순간.

“으악!”

발목을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단솔이 넘어졌다. 회귀 전처럼 이끼가 낀 돌을 밟은 것도 아니고, 흙에 미끄러진 것도 아니었다.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와중에도 단솔은 공포심이 들었다. 다치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프로그램에 민폐 캐릭터로 낙인이 찍히는 일이었다.

단솔은 지난번 삶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욕먹은 적이 있었다.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게 아닌데. 제 몸보다 다른 사람들 시선을 먼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괜찮아?”

대수가 달려와 단솔의 등산화를 벗겼다. 조심스레 양말을 벗겨 내자 부어오른 발목이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살짝 접지른 정도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 죄송해요.”

단솔의 시선이 나무 끝에 걸린 투표권을 향했다.

“씨발, 어떤 새끼가 저런 데에…….”

그걸 본 대수가 욕을 짓씹더니 구길 듯이 투표권을 낚아채 단솔에게 내밀었다.

“챙겨, 내려가자.”

“네? 하지만…….”

정상까지는 채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두 시간을 올라왔는데 이제 와 다시 내려가는 것도, 그렇다고 대수에게 의지한 채 30분을 더 올라가는 것도 단솔에겐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업어 줄게, 내려가.”

“아니 그게 아니라…….”

무엇보다 걱정인 건, 저 때문에 방송이 어그러지는 것이었다.

회귀 전에는 이연이 단솔을 업고 중간에 산에서 내려와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진 후였다. 단솔과 이연이 오기만을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태프들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산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도 단솔을 눈엣가시처럼 보는 건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내려와서도 위축되어 멘트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태도 논란에 휩싸여야 했다.

두 사람에겐 로맨틱한 순간이었지만, 막상 편집본을 본 단솔의 눈에도 자신은 역대급 민폐 캐릭터처럼 보였다.

이연은 연신 괜찮다며 단솔을 달랬지만, 한번 움츠러든 단솔의 어깨는 쉽게 펴지질 않았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했을까, 늘어지는 촬영 시간에 저를 비난했을까. 꼭 악몽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그날 이후의 기억이 생각나질 않았다.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지금은 이렇게 다정하기만 한 이들의 얼굴이…… 꼭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괜찮아? 왜 이렇게 땀을 흘려.”

과거의 생각으로 침잠한 단솔을 깨운 것은 대수였다. 어느새 단솔은 땀범벅이 되어 있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픈 건 발목이었는데,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는 단솔을 보며 대수는 머뭇거리지 않고 제 등을 내밀었다.

“업혀, 내려가자.”

“싫…… 싫어요. 방송…… 늦으면 안 되는데.”

“지금 방송이 문제야 네가! 네가 아프잖아…….”

대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 등을 밀어내는 단솔에게 그만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단솔의 울 것 같은 얼굴을 마주한 대수는 사과를 했다.

“미안, 화낸 게 아니라……. 내려갈 거면 지금 내려가야 해.”

산은 해가 빨리 졌다. 지금 내려가도 해 떨어지기 전에 초입에 도착할 수 있을지, 사실 대수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단솔의 다친 발목이 더 걱정이었다.

“……올라갈래요.”

“고집부리지 마. 너 지금 발목 부은 거 안 보여?”

“올라가면 선생님 있잖아요. 응급 처치만 하면…….”

안전사고에 대비해 최 PD가 부른 의료진이었다. 그래봤자, 타박상이나 근육통 정도에 쓰는 약밖에 없을 텐데 단솔은 계속 고집을 부렸다.

“뼈라도 다친 거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저는 어떻게 해요 가만히 있으면 욕…… 먹는단 말이에요.”

대수는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미 배우로서 자리를 잡은 저에겐 이 방송이 일종의 일탈일 뿐이었고,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냥 해프닝에 불과했다. 방송이 끝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영화를 찍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단솔은 달랐다. 작은 기획사, 변변찮은 앨범 성적, 듣자 하니 멤버들도 많았고, 그나마 인지도가 있는 건 단솔 한 명뿐인 듯했다. 저 작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무게감이 어떨지 감이 오질 않았다.

자신도 늘 대중 앞에 서긴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어려워했다. 제가 하는 영화마다 신랄한 비판을 하는 평론가 놈조차도, 영화제에서 대수를 만나면 그렇게 예의 바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단솔은……. 대놓고 단솔을 ‘망돌’이라고 부르던 윤여민이 떠올랐다.

왜 이렇게 작은 방송에 이토록 몰두하는, 어쩐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대수는 단솔의 앞에 다시 등을 보이고 앉았다. 애써 밀어내는 손길에도 꿈쩍하지 않은 대수가 말했다.

“내려가는 거 아니야. 올라가자.”

“네?”

“저…… 걸을 수 있어요. 나무 막대기 하나만 구해 주시면……. 여기 그리고 너무 경사가 급해서.”

이연이 저를 업고 갔던 구간과는 전혀 다른 구간이었다. 경사가 급했고, 혼자 몸으로 올라가기에도 숨이 찰 정도였다.

“들고 갈까? 업혀 갈래?”

여전히 머뭇거리는 단솔에게 대수가 살벌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조폭이나 야쿠자의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단솔의 목은 움츠러들었다.

단솔이 조심스레 대수의 목에 팔을 감자, 대수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단솔의 팔을 더 깊게 제 어깨에 두르곤 번쩍, 일어났다.

“가방에서 꼭 가져가야 하는 거 있어?”

“아…… 아니요.”

차마 제 가방까지 들어 달라고 할 수 없었던 단솔은 대수의 목덜미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후…… 저건 내가 다시 내려와서 가져올게.”

그 숨결에 대수의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말랑한 몸은 제가 생각한 것보다 가벼웠고, 귓가에 닿는 단솔의 숨은 자극적이었다. 점점 아랫도리로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단솔이 이런 제 앞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아픈 사람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다니, 그런 제가 싫었던 대수는 터치다운을 할 때처럼 경사진 산길을 뛰어 올라갔다. 단솔이 제 발로 걸어갈 때보다 빠른 속도였다.

대수의 등 뒤에 매달려 있던 단솔은 생각지 못한 빠른 속도에 꼭 뒤로 굴러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놀란 단솔이 대수의 목을 덥석, 껴안고 질끈, 눈을 감았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경사가 놀이동산에서 롤러코스터를 탈 때보다 더 아찔했다. 그러느라 대수의 목덜미에 단솔의 말랑한 볼이 닿았다.

‘아, 이건 진짜 위험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으응……!”

대수가 잠시 주춤하는 바람에 발목이 흔들린 단솔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갔다.

이내 대수는 ‘으아아‼’ 하는 함성을 지르며 더 빠르게 산길을 뛰어 올라갔다.

청설모 : 정대수 ×× 세우고 달리는 거 본 썰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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