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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21화 (21/150)

21화

그날 저녁, 민혁과 고양이 밥을 주고 돌아오는 길에 단솔과 민혁은 장을 보러 다녀온 사람들과 마주쳤다. 뭘 그렇게 많이들 산 건지, 캠핑이 아니라 이사 가는 사람들 같았다. 개중에는 정말 왜 산 건지 모를 밧줄이나 도끼도 언뜻언뜻 보였다.

“솔아, 몸은 좀 괜찮아?”

궁금증에 기웃거리고 있을 때, 지수가 단솔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단솔은 그제야 지수가 저를 더 재우기 위해 거짓말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저 하나 때문에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아, 단솔은 민망해졌다.

“어…… 그게…….”

“아직 안 괜찮은 거 같네. 형이 약도 사 왔어, 들어가자.”

단솔이 버벅거리는 사이, 지수는 민혁의 옆에 있던 단솔을 빼앗듯 데리고 들어갔다.

“아니……. 형, 근데 정대수 선배님이랑은 화해하셨어요?”

“응? 아니.”

단솔은 지수가 대수와 함께 새로 산 물건이 잔뜩 담긴 박스를 내리는 것을 보았다. 대수가 죽이려 든다더니, 역시 그런 일에 금방 화해를 할 정도로 절친이었던 모양이었다. 해끔하게 웃은 단솔이 지수에게 물어보았다.

“근데 아까 분명 같이 들어오시는 거 같던데…….”

단솔의 시선이 자꾸 마당에 있는 대수 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끼자, 지수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곤 말했다.

“어…… 카메라 있어서 그래. 솔아 이건 진짜 비밀인데…… 사실 정대수 진짜 조폭이다?”

“네⁈”

“쉿! 이 사실 알고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그래서 쟤가 나한테 친한 척하는 거야. 아마 소문나면 나부터 죽이려 들걸? 우리 솔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지? 응?”

“허…… 네! 절대…… 아무한테도 안 말할게요!”

단솔은 너무 놀라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았다. 물론 대수가 좀 무서운 인상에, 말이 많지 않아 조폭의 아들이네, 야쿠자의 유일한 후계자네 하는 루머가 돌긴 했었다.

하지만 단솔이 직접 겪어 본 대수는……. 어렵긴 했지만, 그는 꽤 관찰력 좋게 사람을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특히 단솔은 그의 연기를 좋아했다. 프로그램이 끝나기 전에 꼭 한번 그와 연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한데, 그런 그의 정체가 조폭이었다니……. 단솔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뒤로 단솔은 대수를 눈에 띄게 피해 다녔다.

특히, 대수가 태오가 잘못 사 온 고기를 자르기 위해 칼을 가는 모습이나, 등산화에 끼우기 위한 끈을 손에 들고 있을 땐 단솔은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대수를 피했다.

‘티 안 나게 피했어야 했는데…… 눈치챘겠지?’

그런 단솔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할 대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저 왼쪽 눈썹을 까딱할 뿐이었다.

* * *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나요?

—어제 공지드린 대로, 오늘은 특별히 춘몽도의 자랑, 마주산으로 캠핑을 떠날 예정입니다.

—소리 질러! 와아!

“와아!”

제갈민혁 혼자만의 외침이 춘몽각을 왕왕, 울렸다. 취미에도 없는 캠핑을 하게 된 다른 출연자들은 끌려가는 사람들처럼 의욕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주산은 초보 캠핑족들이 오르기에 꽤 험난한 산이었다.

회귀 전에도 한번 그 산을 올라 본 단솔은 마주산에서 발목을 접질러 한동안 반깁스를 하고 다녔어야만 했다.

‘괜찮아?’

‘형…… 미안해요.’

‘가벼워서 업힌 줄도 모르겠어.’

그때도 단솔은 이연과 함께였다. 저를 업고 가느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힘든 줄 모르겠다던 모습이 단솔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냥 가면 알오매치 서바이벌이 아니죠?

—앞에 놓인 캡슐을 꺼내 험난한 마주산을 함께 오를 파트너를 고르도록 하겠습니다. 윤여민 씨의 탈락으로 두 명, 세 명씩 나눠 올라가겠습니다.

단솔은 프로그램이 진행될수록 자꾸만 피하고 싶은 사람만 늘어 고민이었다. 과거의 질척한 감정이 남아 있는 이연과 두현, 그리고 왠지 불편하고 무섭게 느껴지는 대수까지.

그렇게 단솔이 눈을 질끈 감고 뽑은 캡슐에는 검은색 종이가 들어 있었다.

—한지수, 마태오, 제갈민혁.

—이이연, 유두현.

—그리고 주단솔, 정대수 씨가 함께 산을 오르도록 하겠습니다.

—세 팀의 출발 포인트는 각각 다르며, 최상급 코스부터 동네 뒷산 수준의 난이도까지. 코스별로 난이도는 랜덤입니다.

단솔은 검은 종이를 손에 든 채로 서 있었다. 검은 종이가 제 앞날을 의미할 줄이야.

지수 역시 조를 확인하고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이연과 두현은 말할 것도 없이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아! 산을 올라가는 곳곳 저희 스태프들이 투표권을 숨겨 놓았으니, 어릴 적 보물찾기하는 기분으로 투표권을 획득하시면 됩니다!

“자, 각자 짐 챙겨서 팀별로 차에 타 주세요! 시간 안에 정상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하니까 빨리빨리 움직일게요!”

최 PD의 목소리가 촬영장을 울렸지만, 단솔은 제자리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솔아, 다치지 말고 정상에서 보자. 저 자식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고.”

지수가 아쉬운 듯 단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수의 배낭에라도 숨어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형…….”

“카메라 앞에서 때리진 않을 거야. 개인 카메라 잘 챙기고, 알겠지?”

“네…….”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인 단솔의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갑자기 어두컴컴해진 시야에, 날씨가 안 좋아진 건가 싶어 단솔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살벌하게 잘생긴 대수의 얼굴이 단솔의 코앞에 보였다.

“커흡……. 서, 선배님.”

“가지.”

대수는 단솔이 들고 있던 짐가방을 자신의 어깨에 휙, 매달곤 차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졸지에 짐 보따리는 빼앗긴 단솔은 우물쭈물하며 차에 올라탔다.

섬 안에 있는 산이라 그런지 초입까지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수와의 어색한 공기에 단솔은 10분이 100년처럼 느껴졌다.

“내려.”

“네…….”

최 PD는 유난히 카메라가 따라붙어서 찍는 작위적인 장면을 좋아하지 않았다. 덕분에 출연자들의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많았고, 널뛰는 감정선은 악의적인 편집의 좋은 재료가 되곤 했다.

“어쩌죠……. 사실 여기 코스가 제일 짧긴 한데, 제일 험해요. 저희 카메라 팀은 초입에서만 따라붙고, 정상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장비가 무거워서 산세가 험해지면 촬영이 어렵거든요.”

조연출이 궁색한 변명을 덧붙이며 단솔과 대수에게 각각 카메라 한 대씩 나눠 주었다. 배낭을 메고, 목에 걸 수 있게 되어 있는 카메라를 들자, 진짜 등산이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솔은 어색한 등산화를 땅에 툭툭, 쳐 보았다. 회귀 전에는 이끼가 낀 바위를 잘못 밟아 넘어졌었다. 두 번 실수는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단솔이 올라가자고 턱짓하는 대수를 따라 산을 올랐다.

* * *

“허억…… 헉…….”

조연출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초입부터 시작된 경사가 점점 급해지는 것 같았다. 대수와 어떤 말을 나누어야 할지 한참 고민했던 단솔은 차라리 대화를 나눌 여력도 없는 지금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대수는 동네 뒷산을 오르는 사람처럼 평온했고, 일부러 느린 단솔의 걸음에 발을 맞춰 주는 것 같았다.

“좀 쉬자.”

“허어…… 네!”

산에 오르기 시작한 지 30분 만에 땀범벅이 된 단솔에게 대수가 이온 음료 한 병을 건넸다. 단솔은 불쑥 내민 손에 깜짝 놀라 눈을 도로록, 굴렸다. 젖은 이마와 발갛게 익은 볼이 어쩔 줄 몰라 우물거렸다.

“감…… 감사합니다!”

“한지수가 그래?”

“우읍?”

“나 조폭이라고.”

푸악! 단솔은 그만 입에 잔뜩 머금고 있던 이온 음료를 뿜어 버렸다.

주변을 돌아보았을 땐, 어느새 뒤따라오던 제작진들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멀리서 까마귀 우는 소리까지 들리자, 조금 전까지 평범한 등산로라고 생각했던 산길이 스산하게 느껴졌다.

등산화 끈을 다시 조이는 대수의 팔뚝이 울퉁불퉁했다.

“그…… 그걸 어떻게…….”

“그 자식 원래 맨날 그래.”

“네?”

신발 끈을 리본 모양으로 가지런히 묶은 대수가 천천히 다가왔다. 한숨을 푹, 내쉰 그가 단솔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단솔의 등산화 끈도 새로 묶어 주며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마다, 그 얘기 한다고.”

단솔의 뇌는 정지 화면이 된 듯 멈춰 버렸다. 지수가 저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보다도, 대수가 저에게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칭한 게 더 뜻밖이었다.

자기 신발을 묶을 때처럼 묶은 대수가 한 번 더 탄탄하게 매듭을 짓더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미덥지 않은 눈초리로 대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단솔에게 대수가 눈을 맞췄다.

“조폭 아니야, 야쿠자 아들도 아니야. 태평 정 씨 34대손, 영어 이름은 보통 대니라고 불러. 학교 다닐 때 미식축구 했었어. 대학도 나왔고, 전공은 경영학. 가족들은 다 미국에 있고, 부모님은 그냥 조그만 회사 하셔, 여동생은 피아니스트인데 내 악플러로 활동하고 있어. 혹시 나랑 같이 나온 기사에 욕 같은 거 쓰여 있어도 신경 쓰지 마.”

“에?”

“말실수할까 봐 말은 많이 안 하는데, 들어 주는 건 잘할 수 있어. 누구 욕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불러, 무조건 그 새끼가 잘못했다고 할게.”

“서…… 선배님?”

“벌어 놓은 돈도 꽤 있고, 그래도 1년에 작품 두세 개씩은 꼬박꼬박하니까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돼. 또…….”

“아니…… 잠깐만요! 잠깐만요 선배님!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단솔은 갑작스럽게 TMI를 내뱉는 대수가 이해되질 않았다. 그는 프로그램 시작 이후 했던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미안……. 네가 한지수에 대해 아는 것보다, 나에 대해서 아는 게 더 많았으면 좋겠어.”

대수는 민망한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어느새 그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자식이 또 거짓말해서 날 오해할까 봐. 부담스러웠으면 미안.”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것은 대수도 마찬가지였다. 지수의 장난으로 오해를 산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사람 욕심이 없기도 했고, 그런 루머에 저를 싫어할 사람이라면 옆에 두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한 대수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는 자신을 방어하기보다는, 지수가 알파에 환장한다는 소문을 흘려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쪽이 훨씬 재밌었다. 서로의 연애 사업을 이간질하는 것은 그들에겐 일종의 스포츠였다.

두 사람의 취향이 겹쳐 생긴 일이긴 했지만, 정작 두 사람이 한 사람을 두고 진지하게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이럴까 봐, 말을 많이 안 해. 근데 벌써 해 버렸네, 실수.”

하지만 이번엔 다르게 느껴졌다. 대수는 지수가 단솔을 두고 그런 짓을 벌이는 꼴을 보자, 저답지 않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안 그래도 두 사람이 같은 방을 쓴 뒤 부쩍 친해져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는데 무슨 거짓말을 한 건지 어젯밤부터 자신을 슬금슬금 피하는 단솔에 조바심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올라가자.”

잔뜩 풀이 죽은 대수가 다시 배낭을 어깨에 둘렀다.

언제 옮겨 놓았는지, 단솔의 가방에 묶여 있던 자잘한 짐들이 대수의 가방에 묶여 있었다. 조폭이 아니라는 걸 알자, 단솔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벌하게 무서웠던 그가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저보다 한참이나 커다란 그를 귀여워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어…… 저…… 선배님.”

“…….”

“감사해요.”

공으로 단솔의 얼굴을 때렸을 때만큼이나 낙담해 있던 대수를 보며 단솔이 환하게 웃었다.

“저 진짜 선배님이 조폭일까 봐 엄청 무서웠는데, 먼저 말해 주셔서 감사해요.”

* * *

주단솔 : 선배님, 그럼 문신도 없어요?

정대수 : 없어.

주단솔 : 와…… 저는 등이나 엉덩이 같은 데 하셔서 숨기고 다니는 줄 알았어요. 그럼 사람 한 번도 안 때려 보신 거예요?

정대수 : 경기장이랑 촬영장 밖에서는……?

주단솔 : …….

정대수 : ……라커룸은 한 번.

주단솔 : …….

정대수 : 두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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