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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20화 (20/150)

20화

윤여민이 떠난 춘몽각은 왜인지 평화롭게 느껴졌다. 아군을 제일 먼저 잃은 유두현은 ‘망돌 발언’의 후폭풍을 확인한 모양인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고 있었다.

“아, 단솔 씨! 방 아직 안 옮겼어? 비어 있던데?”

“저…… 그게 아직…….”

여민이 떠나고 난 뒤, 최 PD는 여러 번 단솔에게 방을 옮길 것을 제안했지만, 단솔은 짐을 싸지 못했다. 아니, 짐을 싸긴 했지만, 방 밖으로 짐을 갖고 나오지 못했다.

단솔이 여민의 방으로 짐을 하나씩 갖다 놓을 때마다 공포 영화처럼 짐 가방이 금세 돌아와 있곤 했다. 착각인 줄 알고 다시 갖다 놓으면 와 있고, 와 있고, 또 와 있고.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정도였다. 어느새 또 제자리에 와 있는 자신의 캐리어를 보고 단솔은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런 단솔의 등 뒤로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솔아…… 진짜 방 옮길 거야?”

“아! 깜짝이야!”

너무 놀란 나머지 단솔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지수는 그런 단솔을 아랑곳하지 않고, 단솔을 부축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거의 안기다시피 침대로 걸어간 단솔은 우는 소리를 내었다.

“아 형……! 놀랐잖아요! 캐리어 옮겨 놓은 거 형이에요? 아니…… 아니어도 그렇다고 해 줘요. 네?”

“솔이 겁이 많네. 형이 모르고 그랬어, 미안.”

“아…… 다행이다.”

“근데…… 진짜 방 옮길 거야? 형이 솔이한테 뭐 서운하게 한 거 있어?”

단솔은 침대에 앉혀놓고 지수는 침대 아래 바닥에 앉아 단솔의 무릎에 기댔다. 자세만 보면 꼭 단솔의 용서라도 비는 것 같았다.

단솔이 옅은 기침만 해도 생강차며 꿀물이며 어떻게 구했는지 모를 감기약과 영양제를 갖다 바치는 지수였다. 제 매니저보다도 저를 더 챙기는 지수에게 서운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형이랑 있으니까…… 아무래도…… 제 손과 발이 제 기능을 잃는 것 같아요.”

“손이랑 발이랑 다 예쁘게 잘 붙어 있는데 무슨 소리야, 솔아. 하…… 어떻게 하면 손도 발도 이렇게 예쁠 수 있지?”

처음엔 그냥 다정한 사람인 줄 알았다. 문을 열어 주고, 무거운 짐을 들어 주고, 팔베개도 해 주고, 가끔 아침에 못 일어날 때면 욕실까지 업어 주고, 깨워 주고, 양치도 해 주고……. 아침밥을 방으로 갖고 와 떠먹여 주는 것까지…….

집안일만 해 주시는 이모님이 있다던 태오도 이만큼 편하게 사는 걸까?

다인원의 그룹을 제 손으로 먹이고 입히던 단솔은 이런 호사가 제 몫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졌다간, 다시 반지하 곰팡이 숙소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솔아, 형이 싫어? 싫으면 가도 돼.”

지수가 단솔의 손등 위에 자신의 얼굴을 얹었다. 생전에 트러블이라곤 한 번도 안 나 봤을 법한 매끄럽고, 서늘한 피부의 감촉이 싫지 않았다.

문제는 또 있었다.

함께 살면서 너무 자연스러워진 스킨십이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애착 인형을 놓고 왔다는 말에 한 침대를 쓰다 보니, 민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날은 눈을 떠 보니 자신이 지수의 맨가슴을 베개처럼 베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아찔한 포인트에 아침잠이 많은 단솔은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 좋았다. 자신을 향한 애정 어린 손길과 체온이.

부모님에게도 느껴 보지 못한 종류의 감정에 머리가 복잡해진 단솔은 지수의 손을 내려놓곤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게 아니라!”

“솔아, 어디가? 같이 가. 갑자기 정대수가 나 죽이러 오면 어떡해? 형아 무서워.”

게다가, 지수는 탈락자 발표 이후, 분리 불안이 생겼다. 그는 대수가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며 단솔과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럴 거면 굳이 왜 탈락자로 대수를 뽑은 건지. 처음에, 둘 사이에 썸씽이 있다고 생각했던 게 민망할 정도로 지수는 대수를 무서워했다.

“근데…… 정대수 선배님이 그러실 분은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소리야 솔아, 너 지금 그 곰 새끼 편드는 거야? 아…… 걔 팔뚝 봤잖아. 솔아, 곰은 사람을 찢어……! 형아가 갈기갈기 찢겨도 솔이는 괜찮아?”

지수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매달렸다. 단솔은 잘생긴 얼굴에 약했다.

“아…… 안 가요. 안 갈게요, 형이 싫은 게 아니라…… 제가 너무 편해질까 봐 그런 거예요.”

“편하면 안 돼?”

“네……? 안 되죠.”

“왜 안 되는데?”

“어…… 그야…….”

그러게. 사실 단솔은 프로그램이야 어떻게 되든, 평범한 삶만 되찾고 싶었다. 애초에 연예인으로 잘해 볼 생각이 없는데, 단솔은 무의식적으로 멤버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잘해야 팀이 산다. 네가 망하면 팀도 망한다.’

오랜 세월 겪어 온 가스라이팅의 흔적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단솔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멤버들은 저를 외면하던 잔인한 멤버들의 모습이 아니라, 고생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은 어린 멤버들의 모습이었다.

“먹여 살릴 식구가 많으니까요……?”

“우리 솔이 외동이라며.”

“그게…… 멤버들이요. 제가 잘 돼야 멤버들이 잘되니까. 저는 그래도 애들보다 나이가 많잖아요. 제가 편하면 안 될 거 같았어요.”

“지금은?”

“네? 아…… 솔직히 편하니까 좋긴 좋죠. 형이랑 있으면 저 진짜 손도 까딱 안 하는 거 같아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벌써 돌아갈 일이 막막해지는걸요……?”

“돌아가지 않으면 되지?”

“에이…… 어떻게 그래요. 아…… 햇빛 따듯하다.”

어느새 지수에게 붙잡힌 단솔이 걸터앉은 침대에 그대로 대자로 누워 버렸다. 바스락거리는 이불이 햇빛의 따사로움으로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반지하는 진짜 싫은데…… 계속 이런 데서 살고 싶다.”

단솔의 중얼거림을 들은 지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눈을 감고 있는 단솔은 모르는 표정이었다. 지수는 금세 다정했던 그 얼굴로 돌아가 이불 위에서 이불과 일체가 된 단솔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 * *

단솔이 눈을 뜬 것은 늦은 오후였다. 깜빡 잠들었는지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대수가 자신을 죽이러 온다며 단솔을 방 안에 묶어 놓은 지수는 정작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다들 어디 갔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온 단솔이 마주한 것은 씻은 듯이 조용한 춘몽각이었다. 슬쩍 내려다보니 해안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아, 단솔은 등산로로 향했다. 등산로 옆에는 계곡이 있었는데, 민혁이 자주 찾는 낮잠 장소였다.

역시나, 민혁은 평평한 바위 위에서 수영복 한 장만을 입고, 마치 내 집 안방처럼 누워 있었다. 그의 옆에는 분신 같은 기타도 함께였다.

“형, 민혁이 형.”

단솔이 민혁을 톡톡, 건드렸다.

“단솔 씨 왔어요?”

“다들 어디 갔어요? 집이 텅텅 비었던데.”

“내일 캠핑 미션 때문에 다들 장 보러 갔어요.”

“허……! 근데 왜 날 안 깨웠지? 형은 왜 안 갔어요?”

“단솔 씨는 아파서 잔다고 지수 씨가 거짓말했고, 저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굳이 안 부르길래 안 내려갔어요.”

어쩐지 민혁은 춘몽도에서 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연인이 되어 가는 듯했다. 이렇게 자연과 교감하다가 프로그램이 끝날 때쯤 민혁의 몸에서 나무뿌리가 자라는 건 아닐까? 단솔은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단솔은 민혁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긴 또 왜 올라갔어요. ……발에 이 점은 뭐예요? 형 피부병 생겼어요?”

“아아…… 그거 슬리퍼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리에서 일어난 민혁은 옆에 가지런히 벗어 놓은 슬리퍼를 보여 주었다. 그의 발 모양대로 구멍이 송송, 뚫린 신발이었다.

세상에 이런 연예인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의 얼굴을 보면 이해가 됐다. 슬리퍼를 들고 있는 모습이 유명한 명품 화보 같아서 더 짜증 났다.

발등뿐만이 아니었다. 팔은 반팔 모양으로, 다리는 반바지 모양 그대로 타투한 것처럼 까맣게 타 있었다.

“형! 제발 선크림 좀 바르고 다녀요.”

단솔은 저도 모르게 반팔 자국이 나 있는 민혁의 팔뚝을 찰싹, 하고 때렸다. 도대체 이 몸과 이 얼굴을 왜 이렇게 쓰는 걸까. 도토리묵 같은 팔에 착착, 소리가 나게 맞았음에도 민혁은 그저 실실, 웃기만 했다.

“단솔 씨, 그거 알아요? 오늘이 이 바위에 누워 잘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에요. 어서 누워 봐요.”

단솔에게 목 베개를 양보한 민혁이 베개 대신 자신의 팔을 베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단솔도 그의 옆에 따라 누웠다.

“왜 오늘이 마지막 날이에요?”

“비가 온대요.”

“비 그치면 또 오면 되잖아요…….”

“비가 그치면 추워져요. 지금은 따듯하잖아요.”

그의 말마따나 한낮의 햇빛을 잔뜩 머금은 바위는 따듯했다. 하지만 덥진 않았다. 계곡과 산에서 부는 바람이 단솔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구름이 그들의 눈앞을 휙휙 지나갔다.

“나는 겨울에도 내 발등을 보면서 단솔 씨랑 여기 누워 있던 지금을 생각할게요. 한 계절이 지나도, 그 계절을 추억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에요.”

민혁의 잔잔한 목소리가 구름을 타고 단솔을 스쳐 지나갔다. 나른한 오후였다.

“형.”

“네?”

“선크림 바르기 귀찮죠.”

“네…….”

* * *

<예고편 : 대수, 지수 장 보기 브이로그>

한지수 : 저희가 내일 캠핑을 가기로 해서 지금 시내로 나왔는데……. 사실 전 캠핑을 안 좋아해서 뭘 사야 할지 모르겠거든요.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대수 씨는 캠핑 가 보셨나요?

정대수 : 캠핑을 즐기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아마 삽이랑, 도끼. 밧줄……. 뭐 이런 게 필요할 거 같네요.

한지수 :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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