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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9화 (19/150)

19화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긴 자유시간을 잘 보내고 계셨나요?

탈락자 선정이 임박하자, 제작진들은 출연자들 간의 미묘한 관계를 촬영하는 데에 집중했다. 말이 자유시간이었지, 정말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알오 매치 서바이벌 인 아일랜드의 첫 번째 탈락자가 나오는 날입니다.

이미 세팅이 된 앞마당에는 투표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음의 준비가 되신 분들은 오늘 저녁 6시 전까지 탈락자 투표함에 투표 용지를 넣어 주시면 됩니다.

춘몽각을 울리는 방송에 다들 말이 없어졌다. 지수와 커피를 마시고 있던 단솔은 이미 투표권을 태오에게 주고 난 뒤였지만, 어쩐지 모르게 긴장이 됐다.

“솔아, 형 누구 뽑을까?”

“네?”

“형아는 솔이가 뽑는 사람 뽑을게. 누가 제일 꼴 보기 싫어?”

“아……. 저는 근데 이미 투표권이 없어요, 형.”

“왜? 혹시 누가 훔쳐 갔어? 어떤 새끼가……!”

지수의 눈빛이 당장이라도 누굴 잡아 족칠 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아! 아니에요! 형…… 그게 아니라…… 누구 줬어요.”

“누구?”

왠지 아까보다 더 살벌해진 눈빛에 단솔은 저도 모르게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제가 투표권을 줌으로써 누가 누굴 뽑았는지 추측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태오가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그…… 그건 알려 줄 수 없어요!”

“허, 솔이, 형아한테 비밀 만드는 거야? 나 너무 서운한데?”

“그래도 안 돼요…….”

장난스레 말했지만, 요즘 지수의 심기는 영 불편한 상태였다. 태오도 단솔과 부쩍 친한 척을 하질 않나, 아침마다 몰래 어딜 다녀오질 않나.

오후가 다될 때 일어나던 애가 갑자기 아침형 인간이 되었을 리 만무한데, 단솔은 줄곧 아침 운동을 다녀온다고 변명을 하곤 했다.

미라클 모닝이라나 뭐라나, 횡설수설하길래 밤을 꼴딱 새우고 쫓아갔더니 기가 막히게도 제갈민혁과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 느끼하게 생긴 놈은 영악하게도 단솔의 순진함을 노리곤 새끼 고양이로 단솔을 유혹했다. 거슬리는 놈이 부쩍 많아져 투표권을 다 모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어떤 새끼부터 없애야 되나…….’

* * *

—투표가 종료되었습니다. 출연진들은 모두 앞마당으로 나와주세요.

저녁 여섯 시 기다렸다는 듯 방송이 나왔다. 굳어진 표정의 참가자들은 수수한 모습의 평소와 달리 깔끔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어쩌면 프로그램에서의 마지막 장면이 될지도 모르는데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추리닝 바람으로 초라한 퇴장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다 똑같았다.

오메가와 알파가 양쪽으로 나눠서 서 있었다. 괜히 무게를 잡는 분위기에 단솔이 얼어붙자, 지수가 단솔의 볼을 콕콕, 찔렀다.

“솔아, 긴장돼?”

“네…… 솔직히요.”

“왜? 떨어질까 봐?”

“모르겠어요…….”

사실 단솔은 떨어지는 것을 바라는 쪽에 가까웠다. 단솔에게 이 방송은 안 좋은 기억의 집약체였다. 애초에 섬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단솔은 통편집을 꿈꿨다. 그런데 막상 떨어지는 생각을 하니 우울하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 우리 솔이 떨어지면 형아가 책임질게.”

“……고마워요 형.”

평소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어야 할 단솔이 오늘은 유순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지수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단솔은 지수가 못 들은 줄 알고 그의 셔츠 자락을 잡으며 눈을 맞췄다.

“진심으로 감사해요. 꼭 한번 말하고 싶었는데…… 혹시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들었으니까, 예쁜 짓 적당히 하자 단솔아. 방송이고 뭐고 형아 지금 다 집어치우고 싶어지니까.”

지수는 농담처럼 제 속마음을 내뱉었다. 형식적인 룰 설명이 끝나고, 최 PD가 앞으로 나왔다.

“탈락자 투표함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호명하는 분들은 앞으로 나와주세요.”

—주단솔.

첫 번째로 호명된 자신의 이름에 단솔의 눈이 커졌다. 다른 사람들도 술렁거리는 눈치였다.

—정대수.

—유두현.

—제갈민혁.

—마태오.

—윤여민.

—위 여섯 분은 모두 한 표 이상 받은 분들입니다.

한지수 씨, 이이연 씨는 단 한 표도 받지 않고 살아남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연과 지수의 표정은 전혀 살아남은 사람들 같지 않았다. 이연의 시선은 줄곧 단솔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단솔은 철저히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단솔은 그와 다시 엮이느니 차라리 여기서 그냥 떨어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제갈민혁 씨, 그리고 정대수 씨?”

“네?”

“네.”

“축하드립니다. 아쉬운 한 표를 받긴 했지만, 섬에 남게 되셨습니다.

PD의 말에 대수는 잘못 들었다는 듯 귀를 의심했다.

“한 표?”

“네, 두 분 다 한 표의 탈락 표를 받으셨습니다.”

“허.”

대수가 헛웃음을 지으며 지수를 쳐다보았다. 지수는 애써 딴청을 피우며 그런 대수의 시선을 멀리했다.

분명 저와 함께 제갈민혁을 뽑기로 했던 지수였다. 도대체 어떤 겁 없는 놈이 자신을 뽑았을까 고민했던 대수의 복잡한 머릿속이 명쾌해졌다.

“유두현 씨, 주단솔 씨.”

“네.”

“네…….”

두현과 단솔을 동시에 호명한 PD는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한참을 고민하다 말을 이어 나갔다. 편집의 긴장감을 살리기 위함이라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잔인한 처사였다.

“……두 분 역시 각각 한 표씩 받게 되어 섬에 남게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두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단솔에게도 들렸다. 저야, 그들의 말처럼 프로그램 하나가 소중한 망한 아이돌이라지만, 꽤 라이징한 배우인 두현은 왜 저렇게 섬에 남고 싶어 하는 걸까. 단솔은 두현이 이해되질 않았다.

“마태오 씨, 그리고 윤여민 씨.”

드디어 마지막 순서였다.

태오와 여민은 주먹다짐까지 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다. 단솔의 입장에서야 여민이 탈락하는 게 나았지만,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태오가 단솔이 준 표와 자신의 표를 여민에게 썼다면 최소 무승부였다.

“알오 매치 서바이벌 인 아일랜드의 첫 번째 탈락자는…….”

그때, 걱정스레 바라보는 단솔에게 태오가 윙크를 날렸다.

“총 3표를 받으신 윤여민 씨입니다.”

“허.”

기분 나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여민을 뒤로한 채, 태오가 섬에 남는 사람들 쪽으로 다가왔다. 태오는 알파 자리로 가지 않고, 갑작스레 단솔에게 다가와 포옹을 했다. 태오의 입술이 단솔의 귓가에 닿았다.

“고마워요, 단솔 씨.”

다른 알파들이 노려보는 건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여민을 이겼다는 기쁨에 도취되었다. 윤여민이 받은 세 표 중 한 표는 태오, 한 표는 단솔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한 표는 누구였을까.

* * *

<속마음 인터뷰>

PD : 제갈민혁 씨, 누구한테 투표하셨어요?

제갈민혁 : 아무에게도 투표하지 않았습니다.

PD : 왜죠?

제갈민혁 : 여느 때와 같이 저어기— 산 밑에 있는 바위 위에 누워서 낮잠을 자는데, 주머니에 있던 투표권을 분실했습니다.

PD : 분실이 아닌 거 같은데요? 여덟 표가 다 나왔어요.

제갈민혁 : ……아! 그러네요. 누가…… 제가 잃어버린 걸 주웠나 봅니다!

PD : 하……. 왜…… 거기서 주무시고 계셨어요?

제갈민혁 : 얼굴은 시원한데 등은 따듯해요. 물소리도 들리고.

PD : 또 거기서 주무실 예정인가요?

제갈민혁 : 네.

PD : ……예. 알겠습니다.

PD : 마태오 씨, 제갈민혁 씨한테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마태오 : 그…… 죄송하고 일단 제가 살아야 하니까……. 나중에 제가 다— 갚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선배님!

PD : 대수 씨, 한 표 받으셨는데. 혹시 짐작 가는 분 있으신지?

정대수 : 저한테 맞아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뿐이죠.

PD : 지수 씨, 정대수 씨를 뽑은 이유가 뭔가요?

한지수 : 음…… 근데 저는 정대수가 그렇게 기분 나빠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이건 제일 거슬리는 사람을 뽑는 거니까…….

PD : 근데 정대수 씨는 알파잖아요. 저희는 지수 씨랑 정대수 씨랑 모종의 썸씽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요?

한지수 : 그래요, 맞아요. 바로 그렇게 오해하시는 지점이 정대수가 가장 거슬리는 이유입니다.

PD : 윤여민 씨, 첫 번째 탈락자가 되신 소감이 어떠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윤여민 : 뭐……. 어차피 썩 마음에 드는 애들도 없었는데, 일단 떨어지니까 기분이 나쁘긴 하네요. 저런 잔챙이들 데리고…… 저 없이 어디 잘되는지 두고 봅시다. 하…… 근데 저 누가 뽑았는지 알려 주시면 안 돼요? 아, 진짜 보복 같은 거 안 할게요. 그냥 궁금해서 그래. 정 그러면 초성이나 이니셜만이라도…… 안 돼? 어…… 방송으로 확인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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