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야― 벌칙 받으랬더니 돈으로 때우는 거야 후배님?”
여민이 태오를 보곤 이죽거렸다. 그 모습을 본 단솔이 태오 대신 나섰다.
“그런 게 아니라요 선배님. 태오 씨 팬분들이 보내 주신 거래요.”
“오, 아이돌. 이야, 잘 먹을게? 근데 너도 아이돌이라며 너는 뭐 없어?”
여민이 단솔을 보며 말했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편을 먹기라도 한 모양인지 여민의 옆에 줄곧 붙어 있던 두현이 무어라 중얼거리자, 여민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그들과 가까운 곳에 서 있던 태오와 단솔은 분명히 그 말을 들었다.
“형, 쟤네 망돌이잖아요.”
‘망돌’
단솔도 모르지 않았다. 이제는 농담 삼아 제 입으로 뱉을 수 있을 만큼 무뎌진 이야기였다. 그래도…… 남의 입에서 듣는 건, 그것도 유두현의 입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꾸역꾸역 눌러 왔던 감정이 속에서 울컥, 치받는 게 느껴졌다.
카메라와 조명이 환하게 비추고 있다는 걸 아는데,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단솔은 북받치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 아니, 이젠 참을 수 없었다. 회귀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더 이상 누군가 자신을 미워하는 게 두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선배,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사과하세요.”
“뭐?”
유두현이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 역시 이연과 있었던 일로 단솔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중이었다.
“뭐야, 왜 그래?”
“왜? 뭔데.”
그들 사이에 흐르는 호전적인 분위기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회귀 전보다 이르긴 했지만, 낯설지 않은 장면이었다. 아니, 단솔에겐 이런 상황이 꽤 익숙했다.
사람들이 모이자, 두현은 갑자기 얼굴을 바꾸곤 착한 척을 했다.
“단솔 씨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혹시 나한테 뭐 서운한 거 있어요?”
역시, 연기력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오죽하면 옛날엔 단솔마저도 저 모습에 속았으니까.
“네. 선배가 저보고 ‘망돌’이라고 하셨잖아요. 윤여민 선배님한테 말하시는 거, 저 다 들었어요. 사과해 주세요.”
“……허. 단솔 씨가 잘못 들었나 보네.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뭔 돌? 그런 단어 뜻도 모르고.”
“정말 모르세요?”
“몰라요, 난. 그런 말한 적 없다니까? 선배, 제가 그렇게 말했어요?”
“어…… 아니? 잘 모르겠는데, 내가 딴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랬…… 나?”
윤여민의 아리송한 태도가 자신에게 동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두현은 오히려 더 당당하게 단솔에게 말했다.
“단솔 씨, 이런 거에 자격지심 있어요?”
“…….”
“아니, 그렇잖아요. 지금 상황이 조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헛걸 들은 게 아닌가 하고.”
분명 두현의 태도는 단솔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이었다. 대신 나서서 싸워 주기라도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던 그때, 단솔이 스태프들이 앉아 있는 곳을 가리켰다.
“오디오 감독님한테 확인해 보면 되겠네요.”
회귀 전에도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와 오디오가 단솔의 잘못이 아님을 모두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태프 중 그 누구 하나 단솔을 위해 나서 주는 사람이 없었다.
단솔은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았지만, 대신 자신의 직감을 믿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유두현이라면 분명.
“어……. 단솔 씨가 그렇게 들어서 기분 나빴다면 뭐, 애매하게 말 한 내 잘못도 있겠죠. 내 잘못인 걸로 치고, 사과하죠.”
애매한 태도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단솔의 예상이 적중했다.
둘의 싸움을 보는 최 PD의 눈이 어느새 반짝거리고 있었다. 두현의 소속사가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한들, 최 PD가 저런 표정을 지은 이상 이 장면은 방송에 그대로 나갈 확률이 높았다.
PD는 좋게 말하면 완강했고, 나쁘게 말하면 똘끼가 있는 타입이었다. 본인이 꼭 내보내야 하는 장면을 만나면 어떠한 압박이 들어와도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단솔은 회귀 전에도 여러 소속사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꽤 애를 먹는 것을 보았다.
프로듀서로서는 괜찮은 자질이었지만, 인간으로 보면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단솔의 소속사는 그런 최 PD의 방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피를 본 케이스였다.
“치는 게 아니라요. 정확히 확인해 보고 싶어요. 선배님 말씀대로 제가 잘못 들은 거라면, 진심으로 사죄드릴게요. 확인해 보시죠?”
“아니, 그냥 내가 잘못한 거로 한다니까요. 미안해요. 됐죠? 지금 단솔 씨 하나 때문에 다른 스태프들 다 기다리고 이게 뭐예요. 응?”
“그러니까요. 스태프들 다 기다리시니까, 그냥 오디오만 확인하면 되는―.”
“씨발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내가 잘못했다잖아! 그리고 야! 내가 틀린 말 했어?”
나이스. 속으로 단솔은 쾌재를 불렀다. 지난 3년간 보기 싫어도 주야장천 재방송해 주고, 커뮤니티에 다시 화제가 되는 바람에, 단솔은 모니터링을 수도 없이 해야만 했었다.
자신이 나온 프로그램을 복습하면서 느낀 건 그토록 어렵고 높아 보였던 유두현이 고작 저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어린애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악랄하고, 영악하다. 하지만 그는 제 또래에 비해 본모습을 잘 숨길 수 있었을 뿐, 감정적이고 다혈질적인 면모가 다분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성격을 역으로 이용하면, 꽤 드라마틱 한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네 맞아요 저 망한 아이돌이에요. 근데 이건 제가 저한테 하는 소리구요. 남한테까지 그런 소리 듣고 싶지는 않아요. 저…… 그 정도로 잘 못 하고 살지는 않았거든요. 저만 이 모양이지 저희 멤버들도…… 실력 있는 애들이라 나중에 다 잘될 거예요. 그러니까 앞으로…… 함부로 말하지 말아 주세요.”
단솔은 눈치 없이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고 돌아섰다.
그 짧은 한마디를 위해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주먹 쥔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당당하게 말해 놓곤 돌아서서 벌벌, 떠는 모습이 얼마나 절박한지 아무도 단솔에게 말을 걸지 못할 정도였다. 단솔은 숙소 안에 있는 제 방 화장실까지 걸어와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 * *
그날 새벽, 조연출에게 예고편 편집을 시키곤 했던 최 PD는 오랜만에 직접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다음 주 예고편 영상에 단솔과 두현의 모습을 분할 화면에 넣고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
그러곤 두현의 ‘망돌이잖아요.’ 발언과 단솔의 ‘사과하세요.’를 붙여 음성 변조로 집어넣고 한참을 고민한 뒤 엔터를 눌렀다.
마치 시사 프로그램의 한 장면 같은 예고편이 나가고 난 뒤, 알오매치 서바이벌의 게시판은 서버가 다운되고 만다.
* * *
<알오매치 서바이벌 in 아일랜드 포털>
흰색 상의, 반바지, 신발까지 전부다 유두현이 갖고 있는 착장임.
(망돌 어그로 유두현이라는 증거.jpg)
⤷헐... 유두현 착한 줄 알았는데 개실망
⤷아니 근데 아직 밝혀진 거 아니지 않나? 그냥 어그로일수도 있고. 나올때까지 중립 지켜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뻔히 나와있는데 무슨 중립. 제작진이 한글자씩 떼어다가 편집하지 않은 이상 이건 빼박 유두현이 잘못한 거임.
⤷근데 사과하세요는 누구임? 태오임?
⤷노노 뭔가 형태가 단솔이 같음.
⤷아니 근데 단솔이면 솔직히 유두현이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지 않나.....
⤷ㅁㅈ다이노소울 솔직히 망돌 맞잖아. 주단솔 알오매치 나오기 전에 알았던 사람?
⤷본질 흐리고 자빠졌네. 망돌이면 망돌이라고 면전에서 얘기해도 댐? 망돌은 인권없냐 미친놈아.
⤷2222기적의 논리네. 인지도 없으면 막대해도 댐?
⤷그리고 지금은 망돌 아님, 알오매치 나오고 나서 다이노소울 떡상함
⤷ㅇㅈ 멤버 구성 왜 못떴는지 조카 이해안댐. 프로듀싱만 좀 잘했어도 벌써 떴을 텐데 아쉽다.
근데 유두현이 망돌이라고 한 거 태오인 거 궁예.
유두현이랑 단솔이랑 싸울 이유가 없음. 화면보면 유두현이 옆에 누구한테 귓속말로 하다가 걸린 것 같은데, 그 상대가 윤여민 같음. 윤여민이랑 태오는 줄곧 커플로 묶였는데, 케미도 안 살고 서로 좀 극혐하는 게 첫화부터 눈에 보임. 저 날 태오 서포트 들어간 날 같은데 윤여민이 조롱하고 유두현이 어시스트 한 거 아님? 그거 커버 쳐주려고 하다가 단솔이가 되레 욕먹은 걸수두?
사실 나 헤라여서 망돌이라고 한 거 우리 태오일까 봐 ㅈㄴ쫄린다...
전부터 배우들 시상식 가면 우리애들 무시하는 거 느껴져서 ㅠㅠㅠ 우리 태오한테 한 말이면 가만 안둠
⤷저거 단솔이한테 하는 소리 맞는 듯.
⤷솔직히 단솔이 아니고 태오일리가 없음. 유두현보다 태오가 인기 많은뎈ㅋㅋㅋ누가누구보고 망돌이래;;;; 벽선예술대상 유두현 팬덤 한 줌단.<<<<벽선예술대상 축하공연 보러 간 헤라.
(유두현 한줌단 헤라 비교.gif)
⤷유두현이 약처먹지 않은 이상 저건 단솔이한테 하는 소리는 맞을 거 같음.
⤷배우들 아이돌 무시하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ㅅㅂ 근데 솔이도 연기 곧잘 하던디
새벽까지 모자이크를 한 두 사람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수많은 추측 글들이 올라오던 그때였다.
자신이 알오매치 서바이벌 인 아일랜드의 스태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