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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5화 (15/150)

15화

일찍이 재료를 준비하러 나온 단솔은 주방 한구석에 쭈그려 앉은 태오를 발견했다. 태오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혼이 나가 있었다.

“……태오 씨?”

“…….”

“태오 씨!”

“네? 네!”

“괜찮아요? 왜 벌써 나와 있어요?”

“아……. 재료 준비 좀…… 미리 하려구요. 단솔 씨는요?”

“저도 재료 준비하러 나왔는데……. 우리 같이할까요?”

단솔이 여전히 쭈그려 앉아 있는 태오에게 손에 들고 있던 당근 하나를 내밀었다. 태오는 어딘지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조…… 좋아요!”

“야채가 많으니까 볶음밥 어때요?”

“단솔 씨는 요리 잘하나 봐요?”

“꽤 하는 것 같아요. 그냥 멤버들이 제가 해 주는 음식이 다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손맛이 있나…….”

태오의 물음에 능숙하게 야채들을 씻던 단솔이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었다. 회사에서 나오는 식대가 한정적인 데에 반해, 한창 성장기의 멤버들은 늘 배가 고팠다.

그나마 연습 나가는 날엔 장부를 끊어 놓고 먹는 회사 앞 분식집을 갈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 식당이 말도 못 하게 맛이 없는 바람에 굶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멤버들이 평가하는 단솔의 요리 실력은 상당히 후한 편이었다.

“태오 씨는…… 숙소에선 요리 같은 거 잘 안 해 드세요?”

“저희는 보통 이모님이 해 주시니까요.”

“……태오 씨 이모님이랑 같이 사시는구나…….”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단솔에 태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흡, 아뇨. 친이모님은 아니고 일해 주시는 이모님이요…….”

“네⁈ 일해 주시는 이모님이요? 설마…… 집안일을 따로 해 주시는 건가요……?”

단솔의 회사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경악스러운 단솔의 표정에 태오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요…… 저희가 앨범이 잘 돼서. 아, 죄송해요…….”

“…….”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수습하니까 더 이상해지네요…….”

제우스와 다이노소울 사이에는 빈말로도 견줄 수 없는 격차가 존재했다. 3년째 차트인도 힘들었던 다이노소울과 달리, 제우스는 1집 이후 앨범을 내는 족족, 1위에서 10위까지를 휩쓸곤 했다. 그나마 처음 차트인을 해 본 것도 단솔이 출연한 일일드라마의 ost가 전부였다.

태오는 그런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느끼는 온갖 저열한 감정을 잘 아는 편이었다. 1집 콘셉트을 잘못 잡았던 제우스 역시, 다이노소울처럼 망돌 소리를 듣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심정을 알기에 자꾸만 엇나가는 혓바닥이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단솔은 그런 걸로 자격지심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것도 적당히 인기가 없는 사람들이 느끼는 특권이었다. 스케줄도, 인기도, 없어도 너무 없었던 단솔은 지금 전지적 시청자 관점에서 제 궁금증을 해결하기에 바빴다.

“그럼…… 숙소도 엄청 넓겠네요? 혹시…… 이모님 방도 따로 있어요?”

“아……. 같이 사시는 건 아닌데, 쉴 때 쓰시는 방이 있긴 하죠……?”

“실례지만…… 몇 평이에요?”

“90평 정도……?”

“그럼 혹시…… 한강도 보이나요?”

“야…… 약간?”

단솔은 TV에서 잘나가는 아이돌을 볼 때마다 진심으로 궁금했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우와…… 장난 아니네. 나도 다시 태어나면 그런 데서 살아 보고 싶다…….”

당근을 손질하며 저도 모르게 혼잣말 말을 내뱉은 단솔은 아차 싶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태오는 단솔의 말실수를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단솔 씨…… 혹시 기분 나쁜 거 아니죠?”

“응……? 왜…… 왜요?”

“그게 저…….”

“아…… 우리 앨범 망해서요?”

“커흡……. 아…… 하지 마요……. 단솔 씨 그렇게 말하지 마요…….”

단솔이 무심히 뱉은 말에 태오는 저도 모르게 카메라를 보며 벌벌, 떨었다. 단솔은 그런 태오의 표정을 보자, 재밌는 걸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살벌한 농담을 이어 나갔다.

“아니면……. 다이노소울 숙소가 반지하에, 방 두 개짜린데 8명씩 우글우글 살고 있어서요?”

“아악! 하지 마요! 안 돼!”

“혹시 태오 씨 숙소엔 곰팡이 같은 건 안 피겠죠……? 저희는 사실 곰팡이랑 함께라…… 120인조 그룹이에요. 허! 설마…… 태오 씨네 숙소엔 방마다 공기 청정기가 있나요?”

“아악! 제발요. 제가 잘못했어요.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한참이나 태오만 고통받는 장난을 치던 그들은 전보다 꽤 가까워져 있었다.

엿듣는 사람도 없는데, 태오는 목소리를 낮춰 단솔에게 물었다.

“크흡, 단솔 씨.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혹시 이번에 누구한테 투표할지 정했어요?”

“네?”

“누구 떨어트리고 싶냐구요.”

“어…….”

불과 얼마 뒤면 첫 번째 탈락자가 나올 텐데, 단솔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민혁과의 데이트 이후 너무 안일해진 탓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투표를 하고 이곳을 떠날 생각도 잠깐 했지만, 알오매치 서바이벌은 자기 자신에게 투표를 하면 무효표 처리를 하곤 했다.

최대한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고 하면, 유두현을 뽑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이연에게 노골적인 호감을 드러내는 그를 떨어트린다면, 이이연에게 호감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잘해 주는 이들을 탈락자로 뽑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굳이 한 명을 골라야 한다면, 최대한 친분이 없고, 납득이 될 만한 사람이어야 했다.

“……태오 씨는요?”

“저야…… 뭐. 간절히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이 있긴 한데, 너무 많아서 문제죠.”

“누굴…….”

태오가 누굴 염두에 두고 있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지수와 대수가 함께 주방으로 들어왔다.

“솔아, 같이 하지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아, 지수형! 그냥요. 미리 해 두면 좋잖아요.”

지수는 마치 태오가 없는 것처럼 단솔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잠깐 씻고 나왔더니 그새 단솔의 옆에 또 다른 알파가 붙어 있는 게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태오의 애교 있는 말에 지수는 일부러 눈을 홉뜨곤 정색을 하며 말했다. 단솔을 부를 때면 늘 노래를 부르는 듯 리드미컬했던 말투도 높낮이가 없는 단조로운 말투로 바뀌었다.

“저도 같이했어요, 형!”

“누가 형이야?”

“네? 아……. 단솔 씨가 형이라고 부르길래.”

“선배라고 해, 넌. 아니 그냥 부르지 마. 되도록.”

전날, 민혁에게만 형 소리를 한다고 서운해하던 지수는 태오에게는 냉랭하게 철벽을 쌓았다.

지수의 확연히 다른 태도에 놀란 토끼 눈이 된 단솔은 태오의 눈치를 살폈다. 지수의 말에 한껏 풀 죽은 모습이 가엾게 느껴졌다. 처지는 다르지만, 그래도 나이도 비슷한 데다가 아이돌인 태오를 챙겨 주고 싶어 괜스레 화제를 돌렸다.

“형은 혹시 정하셨어요?”

“응? 뭘?”

“탈락자로 누구 뽑을지요…….”

“아, 그거……?”

지수는 대수를 바라보았다. 대수는 단솔이 들고 있던 칼을 빼앗아 들고는 양파를 다지고 있었다. 그러곤 음흉한 미소를 짓고는 태오에게도 흘깃, 시선을 던졌다.

“그 얘기 하고 있었구나……? 둘이.”

“아……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궁금해서요.”

“글쎄…… 난 우리 솔이가 뽑는 사람으로 뽑아야겠다. 형아한테만 살짝 알려 주면 형도 그 사람 뽑을게.”

“히익! 저는 없어요!…….”

대놓고 단솔의 의중을 떠보는 지수의 말에 단솔이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머릿속으로는 유두현의 얼굴이 지나갔지만, 막상 표를 던졌는데, 상대방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의 후폭풍까지 생각하면 유두현은 좋은 수가 아니었다.

“진짜? 나중에라도 생기면 말해. 형이 도와줄게.”

“아…… 안 도와주셔도 돼요! 저어! 밥은 제가 볶을게요!”

끝까지 빙글빙글, 웃으며 놀려 먹는 지수 덕분에 단솔은 서둘러 가스레인지로 달려가 웍을 꺼내곤 밥을 볶기 시작했다.

요리에 자신을 보였던 단솔은 준비된 재료를 모두 한꺼번에 투하하곤 마구 비벼 댔다. 볶는다는 것보다는 문지르는 행위에 가까웠다. 갓 지은 밥을 김도 빼지 않고 넣는 바람에 흡사 볶음이 아니라 죽 같은 비주얼의 요리가 나오고 있었다. 야채 역시 수분을 머금고 있는 데다가, 익히는 속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 질퍽질퍽한 소리가 났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치고는 너무 서툰 솜씨에 대수가 단솔의 웍을 빼앗아 들려고 했지만, 단솔은 지금 대령 숙수만큼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남에게 자신의 웍을 넘기지 않았다.

사실 단솔은 요리를 하는 자신을 좋아할 뿐, 솜씨가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회사 앞 분식집이 식당을 하면 안 될 정도로 극악의 맛을 자랑하는 것과 동시에 무쇠도 씹어 먹을 나이의 멤버들이 우글거린다는 것이 단솔의 요리 자아를 잘못된 방향으로 비대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손목이 아작 나기 딱 좋은 자세로 밥을 볶고 있던 단솔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이들이 결국 포기를 한 듯 상을 세팅하고 있을 때였다. 웬만해선 숙소 일에 개입하지 않는 최 PD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아, 식사 준비 일찍 하고 계셨구나. 어쩌죠? 저희 오늘 식사 준비 안 해도 될 뻔했는데.”

“네?”

* * *

최 PD를 따라 나간 앞마당에, 커다란 밥 차 두 대와 커피 차, 간식 차까지 온갖 트럭이 줄을 이어 들어오고 있었다. 개중에는 호텔에서 나온 케이터링 서비스도 있었다.

사랑스러운 색감으로 만든 현수막이며, 엑스 배너가 이 화려한 조공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해 주고 있었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어요, 맛있게 먹고 우리 태오 잘 봐주세요. ―헤라 올림―]

“원래 일정 맞춰서 오는데, 조연출이 날짜를 잘못 말했대요. 식사 준비 다됐던데……. 어쩌죠?”

태오의 얼굴이 그려진 스티커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촬영장에서 이골이 난 스태프들도 감탄을 할 정도였다. 태오는 본의 아니게 단솔에게 자꾸 실수를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심란한 것은 단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일 드라마 촬영장에서도 아이돌이랑 작업하면 간식이 안 끊긴다던데, 너는 왜 그런 것도 없냐며 종종 농담 섞인 핀잔을 들었었다.

그때는 장난인 줄 알았지만, 지금은 그게 장난처럼 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단솔이었다. 태오와는 웃으면서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가슴 한편이 씁쓸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난 안에서 먹을게요. 볶음밥이 취향이라서.”

입술을 짓씹는 단솔을 보고 있던 대수가 말했다. 급기야 지수는 한술 더 떠서 최 PD를 압박했다.

“갖고 나와서 같이 먹으면 되겠네. 우리 솔이가 고생,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최 PD 설마 통편집할 생각은 아니겠지?”

문짝만 한 알파(한 명은 대외적으로 오메가지만) 두 명에게 둘러싸인 최 PD는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단솔의 볶음밥을 어떻게든 사수하려는 지수와 대수도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제우스의 대형 팬덤을 등질 수는 없었다.

그때, 숙소 안에서 휴식을 취하던 여민과 두현이 시끄러운 소리에 앞마당으로 나왔다.

“이야― 벌칙 받으랬더니 돈으로 때우는 거야 후배님?”

여민이 태오를 보곤 이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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