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점점 멀어지면서 허리를 숙여서 스트레칭 해 볼게요—.”
안나와 제인이 하나둘 숫자를 세는 사이로, 대수가 말을 걸었다. 사실, 대수의 말은 대화라기보다는 단어에 가까웠다.
“고개.”
“네?”
“숙이지 마, 목 다쳐.”
“네…….”
손끝에 만져지는 대수의 근육이 생경했다. 보여 주기 위해서 만든 근육이 아니었다. 조각조각 잘게 이어지는 단단한 살결이 단솔의 손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한편, 단솔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몸을 푸는 대수도 낯선 감각이긴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뭐가 이렇게 작아…….’
대수는 단솔의 어깨가 살짝만 쥐면 부서질 것 같은 날달걀처럼 느껴졌다.
“자, 이제 발목 돌리고, 손목 돌리고, 고관절 한 번 풀어 줄게요—. 한 사람이 개구리처럼 누우면, 다른 사람이 위에서 살짝 눌러 줄게요―.”
“먼저 누워.”
“네…….”
혼자 해도 충분한 스트레칭을 두 사람에게 함께 시키는 이유가 이것이었나 보다. 대수는 자극적인 장면을 담아내려는 제작진의 의도에 코웃음을 쳤다.
단솔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상체를 숙이자, 잠옷으로 입던 흰 티셔츠의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게다가 다리와 배꼽 부근을 바닥에 붙이자, 짧은 반바지 사이로 하얀 속살이 비쳤다.
카메라 앞에서 아랫도리라도 세우길 바라는 걸까, 아니면 단솔을 데리고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 하지만 대수는 제작진의 의도에 쉽게 놀아나지 않았다.
“잠깐 일어나 봐.”
단솔은 자신이 뭔가 잘못이라도 한 걸까 긴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하지만 대수는 말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얇은 바람막이를 건넸다.
“입어.”
“안 추운데요…….”
“안 추워도 입어.”
그 의중을 읽지 못한 단솔이 머뭇거리자, 대수는 옷을 빼앗아 들곤 단솔의 팔을 하나씩 끼워 주곤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 주었다. 대수의 옷을 단솔이 입으니 거의 원피스처럼 보였다. 대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전부 가린 소매까지 야무지게 접어 주었다.
두 사람이 다시 스트레칭을 시작하자, 대놓고 단솔의 몸을 줌인하던 몇 명의 카메라 감독들이 아쉬운 듯 침을 삼켰다. 그들은 대신 민소매 티셔츠 한 장을 걸친 대수의 상박으로 피사체를 바꾸었다.
* * *
“선배…… 혹시 운명을 믿으세요? 전 진짜…… 우리가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제가 딱 선배를 생각하고 뽑았는데, 빨간색이 딱……!”
“하…… 태오야.”
“네! 선배?”
“닥치고 요가나 하자……. 트레일러에 끌고 들어가기 전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알파들에게 언제나 말보다 주먹이 빨랐던 지수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참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태오는 그 말을 다른 뜻으로 알아들은 듯했다.
‘하……! 그럼 진도가 너무 빠른데. 근데 촬영장에서 그런 짓을……! 해도 괜찮나……. 카메라가 없으니까 상관없겠지? 역시 지수 선배! 이게 바로 어른의 연애인 걸까……?’
“오늘 미션 자세는 바로 T자 공중 자세입니다. 이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한 두 커플에게는 편안한 휴식이, 실패한 두 커플에게는 저녁 식사 당번이라는 벌칙이 주어지니까 다들 집중! 해 주시겠어요?”
제인이 멍하니 있는 태오를 저격하는 듯, ‘집중’에 힘을 주어 말했다. 뒤이어 안나가 자세를 설명했다.
“우리 상대 파트너를 마치 비행기 태워 준다고 생각하고, 한 명은 바닥에 누워서 팔과 다리를 공중을 향해 들어 올립니다. 다른 한 명은 앞에 서서 누워 있는 사람의 발을 복부에 갖다 대고 날아오를 준비를 합니다. 두 사람이 팔을 강하게 맞잡고, 서로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번 올라 볼까요?”
지수는 태오가 자신을 들어 올릴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대외적으로야 오메가로 불리긴 했지만, 지수의 키는 대수와 맞먹을 정도로 컸다. 모델 시절에야 굶는 게 일상이었으니 마르긴 했지만, 배우로 전향한 뒤로는 근육을 키워 몸무게가 꽤 나가는 편이었다.
“자! 선배님! 어서 올라오세요!”
제우스는 아이돌들 사이에서는 남성미를 강조하는 그룹이었지만, 지수의 눈에는 그저 갓 태어난 병아리 새끼일 뿐이었다.
“나 밥하기 싫어. 네가 올라와.”
“아! 무슨 소리세요, 선배님! 저만 믿으세요! 절대 밥 안 하게 해 드릴게요.”
하지만 태오의 고집은 완강했다. 앞선, 지수의 말을 오해한 태오는 지금 자신의 알파미에 잔뜩 취해 버린 상태였다. 지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태오의 앞에 섰다.
그들의 매트 바로 앞에는 단솔과 대수가 있었다.
“자, 시―작!”
대수는 마치 돌덩이 같았다. 너무 안정적인 자세라 단솔은 하루 온종일도 있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대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분명 단솔을 받치고 있었지만, 제 발의 면적이 단솔의 허리보다 컸다.
10분쯤 시간이 지났을까, 여전히 안정적인 자세에 모든 제작진이 대수와 단솔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어어―!”
결국, 태오의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지수가 물에 빠졌다. 그 바람에 단솔의 매트가 뒤집어지며 대수와 단솔 모두 물에 빠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벙해 있던 제인과 안나가 빨리 진행해 달라는 최 PD의 신호를 보고 외쳤다.
지수나 대수의 표정만 보더라도, 불똥이 튀기 전에 빨리 사라지는 게 상책인 듯했다.
“블랙 팀! 화이트 팀! 승리! 다음 시간에 또 만나요!”
* * *
<알파×오메가 속마음 인터뷰>
Q : 지수 씨……. 물에 푹 젖으셨네요.
한지수 : 허허…… 허허……. 그러게요. 자고 일어나자마자 요가…… 씹……. 수영까지. 고. 맙. 습. 니. 다.
Q : 태오 씨와의 케미는 어떠셨는지…….
한지수 : 케미? 하하하……. 하하……. 인터뷰 계속해야 하나요?
Q : 태오 씨는 보송보송하시네요.
마태오 : 아 그때, 다리에 쥐가 나 가지고 하필.
Q : 지수 씨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마태오 : 아…… 그건 좋았어요. 전 확신해요. 형도 제 마음을 알고, 저도 형 마음을 알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진짜…… 운명이라는 게 이런 걸까?
Q : 서로 통했던 게 확실한가요……?
마태오 : 그럼요! 화면으로 보여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이건 진짜, 데스티니예요.
Q : 대수 씨, 정말 아쉽게 경기에서 졌어요.
정대수 : 이웃을 잘못 만난 거죠.
Q : 바랐던 파트너가 나왔나요?
정대수 : 네.
Q : 두 분의 호흡은 어땠나요? 힘든 점은 없었나요?
정대수 : 힘이 들 이유가 없었죠. 너무 가벼우니까……. 근데 요즘 아이돌들은 밥도 안 먹입니까⁈
Q : 화…… 내지 마세요…….(벌벌)
정대수 : 화내는 거! 아닙니다!
Q : 단솔 씨, 게임에 졌는데 아쉽지 않으신가요?
주단솔 : 괜찮아요! 저 밥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Q : 요리를 잘하시나요?
주단솔 : 아…… 저희 멤버들이랑 있으면 제가 밥 담당이거든요. 애들이 아직 어려서……. 불 쓰는 거나, 칼을 못 만지게 하다 보니까 제가 맡게 됐어요.
Q : 여기선 단솔 씨가 막내인데, 의외네요!
주단솔 : 제가 그래도 팀에 가면 맏형이에요!
* * *
“솔아, 감기 걸리겠다. 먼저 씻어.”
지수는 새파랗게 질린 단솔의 입술을 보며 혀를 찼다.
‘방송국 놈들……. 속마음 인터뷰 같은 거 좀 씻고 나와서 하면 덧나나.’
“괜찮아요, 형! 먼저 씻으세요!”
방 안에 욕실이 하나뿐이라, 단솔은 커다란 타올을 걸친 채 지수가 먼저 씻는 것을 기다릴 셈인 듯 보였다.
단솔의 몸이 덜덜 떨렸다. 물에 들어가기에 급격히 추워진 날씨였다. 실랑이하는 것도 시간 낭비일 것 같아 지수가 말했다.
“같이…… 씻을래?”
“아! 그럼 되겠네요!”
단솔이 웃으며 수건을 내리더니, 물에 젖어 찰싹, 달라붙은 제 옷가지들을 훌러덩훌러덩, 벗어제꼈다.
단솔을 덮고 있던 천 조각들이 하나둘 사라지며 새하얀 나신이 드러나자, 오히려 먼저 같이 씻자고 제안한 지수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말랑한 뱃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곳에, 춤 연습으로 다져진 11자 복근을 타고 올라가니, 왠지 야하게 느껴지는 분홍빛의 가슴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알파지만, 오메가로 살면서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순진하고 말간 얼굴을 한 단솔은 야해도 너무 야했다.
“아 맞다…… 이 옷! 정대수가 제일 아끼는 건데!”
“헙! 진짜요? 어떡해요……. 저 때문에 다 젖어서…….”
지수가 바닥에 놓인 대수의 바람막이를 들어 애써 제 앞을 가렸다.
“내가 가져다주고 올게. 넌 먼저 씻고 있어.”
“그래도…… 저 때문에 버린 건데 제가 직접 가져다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야. 내가 어차피 정대수한테 볼일이 좀 있어. 다녀올게. 얼른 씻어 솔아.”
울상이 된 단솔이 따라 나오려 했지만, 지수는 그런 단솔을 극구 말렸다. 그러곤 거실을 지나 건너편 2층에 있는 알파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똑똑똑―.
“누구세―.”
“나야, 네 욕실 좀 쓰자.”
방금 씻은 듯, 흰 수건 한 장만 아랫도리에 걸친 대수는 갑작스러운 지수의 방문에 곧장 문을 닫으려고 했다. 닫히는 문에, 재빨리 발을 끼워 넣은 지수가 말을 이었다.
“안 빌려주면 지금 난 당장 단솔이가 샤워하고 있는 욕실로 들어가서 같이 씻을 거야.”
“맘껏 써.”
대수는 지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문을 활짝 열었다. 냉큼 방 안으로 들어온 지수가 대수에게 푹 젖은 바람막이를 던졌다.
“옜다.”
“뭐야, 이걸 왜 네가 줘.”
“네가 그거 구실로 단솔이한테 찝쩍거릴까 봐.”
“…….”
“들켰나 보네?”
“나갈래?”
“미안.”
몇 분 뒤, 지수가 허리춤에 대수처럼 흰 수건 한 장만 걸친 채 뽀얀 김을 풍기며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 모습을 본 대수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시발.”
“위대하신 대배우 정대수 씨. 혹시 남는 옷이 있다면 좀 줄 수 있겠나? 안타깝게도 내가 급하게 방을 나오느라 갈아입을 옷을 안 들고 왔네?”
“미안하지만, 너한테 빌려줄 옷은 없어 제발 꺼져.”
“하, 내가 네 방에서 나와서 알몸으로 거실을 활보하는 걸 꼭 방송으로 보고 싶어? 아니면…… 이 꼴로 방에 들어가서 내가 네 방에서 씻고 나왔다고 꼭 얘기를 해야, 웁!”
지수의 말이 길어지자 대수는 침대에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옷장에 있던 아무 옷이나 꺼내 던져 주었다.
“입고 버려.”
“맨날 똑같은 추리닝이면서 비싸게 굴기는.”
“벗고 싶냐?”
“아 뭘 또 그렇게 극단적이셔―.”
옷을 갈아입고 금방 나갈 줄 알았던 지수는 대수의 방에 놓인 소파에 드러누웠다. 왜 안 나가고 버티냐는 대수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이, 정 배우님? 탈락자 투표 때 누구 뽑으실 건가?”
“너.”
지수의 물음에 대수는 1초도 쉬지 않고 답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 동맹 맺을까?”
“아니.”
“잘 들어 봐, 네가 지금 나를 뽑아 봤자 나는 안 떨어져. 너 말고 날 뽑을 사람이 없거든.”
“허, 그걸 어떻게 확신해? 자기애가 너무 지나친 거 아냐?”
“너 좀비 영화 봤지? 거기서 누가 제일 먼저 죽는 줄 알아? 눈에 거슬리는 놈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자리에 누워 있던 지수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 나 빼고 단솔이 옆에 제일 거슬리는 게 누구야.”
“……제갈민혁?”
“그럼 제갈민혁은 누가 제일 거슬릴까? 걘 내가 오메가인 줄 알 거 아냐.”
“……나겠지.”
“이번 주는 어차피 다들 탐색전이니까 2표만 받아도 탈락 확률이 높아져. 그럼 결국 너 아니면, 제갈민혁이 위태 한 건데……. 내가 없으면 말도 잘 못 하는 우리 곰탱이가 어디서 표를 얻으시려고?”
“하…… 시발.”
대수는 지수의 말이 재수 없지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놓고 호감을 표시한 사람이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노골적으로 호감을 표시한 사람은 저와 제갈민혁, 그리고 유두현 정도. 한 사람을 두고 다투는 사람은 실질적으로 민혁과 대수뿐이었다. 지수의 말마따나 두 사람 중에 탈락자가 나올 확률이 높았다.
“싫으면 말고.”
“잠시만, 후…… 알겠어. 제갈민혁 뽑을게.”
“잘 생각했어.”
지수가 씨익, 웃으며 방을 나섰다. 달칵, 방문을 닫고 복도를 빠져나가는 지수의 뒷모습을 태오가 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요리는 못 하지만, 저녁 준비를 맡게 된 이상 지수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미리 주방으로 가 재료 손질이라도 해 놓으려고 일찍이 방을 나선 참이었는데.
커플 앞치마까지 야무지게 들고 나온 태오의 눈에 보인 것은 자신의 사이즈보다 커다란 대수의 추리닝을 입고, 웃으며 대수의 방에서 나오는 지수의 모습이었다.
서둘러 복도를 빠져나가는 지수의 뒷모습에 태오는 귀여운 토끼 두 마리가 그려진 앞치마를 툭, 하고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