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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3화 (13/150)
  • 13화

    “선배님! 호박 고구마는 씻었을 때 노랗고요, 밤고구마는 자줏빛이 돌아요. 알고 계셨어요?”

    “솔아.”

    “네?”

    “안 피곤해?”

    지수는 씻고 나온 단솔을 자연스레 제 침대로 이끌었다. 고된 일을 하느라 금방 곯아떨어질 줄 알았던 단솔은 종알거리며 호박 고구마와 밤고구마 구별법이며, 청양 고추와 그냥 고추가 어떻게 다른지 아냐며 한참을 떠들었다.

    “……아. 죄송해요, 선배님. 제가 너무 시끄러웠죠. 피곤하실 텐데…….”

    “난 괜찮은데 네가 피곤할까 봐 그렇지. 오늘 데이트가 그렇게 좋았어?”

    “네! 민혁이 형이…….”

    “형?”

    피곤했던지 반쯤 감긴 눈으로 종알거리는 게 귀여워 그저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단솔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지수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아…… 민혁이 형이……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거든요.”

    “나는 선배님이고, 제갈민혁은 형이야?”

    꼬박꼬박 선배님에, 존댓말을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죽겠는데, 다른 알파 놈이랑 먼저 말을 텄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루 새에 많이 친해졌나 보네, 근데 솔아. 우리는 한 침대 쓰는 사이잖아.”

    “아…… 네……. 그렇죠.”

    “그럼, 제갈민혁보다는…… 형이랑 더 친한 거 아니야?”

    “그…… 그건…….”

    단솔은 차마 그렇다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물론 친해진 건 지수가 먼저였다. 회귀 후의 삶이 달라진 건 지수와 한방을 썼기 때문이 크다. 하지만, 지수가 민혁보다 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한방에 한 침대를 공유하면서도, 민혁을 대하면서 느꼈던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야?”

    “맞…… 맞죠.”

    특히나 저렇게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해서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면, 꼭…… 같은 오메가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위압감이 느껴졌다. 단솔은 마치 홀린 것처럼 지수가 시키는 대로 대답했다.

    “형이라고 해 봐.”

    “……형.”

    “이름도 불러 줘야지.”

    “……지수형.”

    “잘했어.”

    몸을 반쯤 일으켜 단솔을 잡아먹을 듯 쳐다보던 지수는 만족스러운 대답에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누웠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던 두 사람 사이에 색색거리는 단솔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역시나 피곤했던 모양인지 단솔은 금방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수가 단솔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정리해 주더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유순한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방 밖으로 나왔다.

    * * *

    “예수님, 부처님, 조상님, 아니 세상 모든 신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아익! 시발! 깜짝이야!”

    당장이라도 한입에 와르르, 삼키고 싶은 단솔을 옆에 두고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이 답답해 담배나 한 대 피러 나온 참이었다.

    지수는 앞마당 커다란 소나무 밑에서 무언갈 중얼중얼, 외며 돌을 쌓고 있는 남자 때문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선…… 선배님!”

    캄캄한 밤에 혼자 나와 기묘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사람은 태오였다.

    “아, 놀래라……. 뭐하냐 이 시간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지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대 피울래?”

    “아…… 아뇨. 저 아이돌이라 담배는 좀.”

    태오의 대답에 지수가 나무 위에 달린 카메라를 흘끗 쳐다보았다.

    “저 좆 같은 카메라…….”

    애초에 끝까지 프로그램을 완주할 생각이 없었던 지수는 슬슬 곳곳에 놓인 카메라가 짜증 나기 시작했다.

    지수는 주변을 둘러보다 미끈하고 단단한 돌멩이 하나를 손에 쥐었다. 그러곤 나무 위에 매달린 고성능 카메라를 향해 정확히 던졌다. 콰직―, 렌즈가 깨지는 소리가 스산한 앞마당에 조용히 들려왔다.

    지수는 그러고 나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오에게 담배를 건넸다.

    “이제 됐지?”

    “선…… 선배님……!”

    “이쪽엔 저거 하난데, 정 불안하면 하나 더 깨 주고.”

    “아…… 아뇨! 충분……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그 순간, 담배 한 개비를 받아드는 태오와 지수의 손끝이 스쳤다.

    찌릿―.

    짜릿한 전기에 태오가 담배를 받지 못하고 떨어트렸다.

    “아이, 시발 정전기.”

    욕을 내뱉는 지수의 입술, 떨어진 담배를 후후, 털어서 전해 주는 하얗고 긴 손끝이 태오의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도 영혼을 악마에게 빼앗긴 듯, 흐리멍덩한 눈으로 탑을 쌓던 태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태오의 심장은 두방망이질 쳤다. 살면서 이렇게 박력 있는 오메가를 만날 기회가 또 올까.

    “야, 안 받고 뭐 해?”

    “아! 감사합니다! 선배님…….”

    “근데 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야밤에 누굴 놀래키려고….”

    “보름달이 떴길래 소원을 좀…….”

    그리고 그 순간, 윤여민을 탈락시키는 데에 온 힘을 다했던 직전의 소원을 취소한 태오가 속으로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한지수 선배님과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별…… 미친……. 그래, 마저 빌고 들어가라.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애 피곤한데 깨우면 혼난다 너.”

    “네? 애요?”

    “단솔이.”

    “아…… 네…….”

    태오는 그 순간, 단솔과 지수가 룸메이트인데 자신의 변심으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직전의 소원을 또 취소하곤, 새로운 소원을 빌었다.

    ‘저 때문에 지수 선배랑 단솔 씨 사이가 나빠지지 않게 해 주세요.’

    아무도 관심 없는 죄책감을 느끼며, 태오는 그날 보름달이 사라질 때까지 소원을 빌고 취소하기를 반복했다.

    * * *

    ―다들 안녕히 주무셨나요?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시간이었다. 점심이 다 되어 가는 늦은 오전이었지만, 아침잠이 많은 지수와 여민, 어제 하루 온종일 밭일을 하느라 지쳐 있던 단솔과 민혁, 그리고 밤새 소원을 빌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든 태오까지.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이었다.

    ―혹시 사랑의 열병으로 잠을 설치진 않으셨나요?

    ―사실, 간밤에 저희 제작진이 설치해 둔 카메라 한 대가 파손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실 카메라에 범인이 누구인지 선명하게 찍혀 있지만, 저희는 그 범인을 찾지 않기로 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오메가와 알파. 두 사람이 비밀리에 만나기에 저희 춘몽각에 카메라가 너무 많았나 봅니다.

    그 말에 태오는 퉁퉁 부은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지수는 애써 메인 PD인 미진의 따가운 시선을 피했다.

    ―대신, 회의 끝에, 특별한 공간을 준비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널찍한 앞마당의 문이 열리며 트레일러 한 대가 등장했다. 창문에 짙게 선팅이 되어 있는 평평한 지반에 자리를 잡고 멈춰 섰다.

    “저희가 생각하기에, 출연자분들이 자유롭게 교감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고 생각을 해서 준비했습니다. 저 트레일러 안에는 카메라와 오디오, 그 어느 것도 여러분을 통제하지 않습니다. 단 하루에 트레일러 사용 시간은 30분으로 제한됩니다.”

    “30분은 조금 부족한데…….”

    최 PD의 추가적인 설명에 지수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 말을 들은 대수의 표정이 상한 음식을 씹은 사람처럼 콰직, 찌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지수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 안에서는 무슨 일이 생겨도 된다는 말입니까?”

    대수가 물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형형한지 사람이라도 파묻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최 PD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불법은 안 됩니다……. 정대수 씨.”

    “그럴 생각 없습니다.”

    ―자, 다들 트레일러를 확인하셨으면, 수영장으로 이동해 볼까요? 아직은 어색한 여러분들의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 저희가 특별한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 * *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자다가 나온 차림으로 수영장에 도착한 사람들을 기다린 것은 요가복을 입은 두 선생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희는 오늘 여러분들을 위해 커플 요가를 알려 드리러 온 제인과 안나입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는 출연자들에게 캡슐을 하나씩 내밀었다. 단솔이 짝 피구를 뽑았을 때의 그 캡슐이었다.

    “자, 저희가 나눠 드린 캡슐 안에는 색깔 종이가 들어 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서로 같은 색깔을 고른 두 분이서 저기 수영장 위에 떠 있는 색색의 플로팅 요가 매트 위로 올라가 주시면 되겠습니다.”

    아침부터 운동이라니, 아직 잠에서 채 깨지도 못한 지수가 인상을 쓰고 있을 때, 대수의 혼잣말이 들렸다.

    “저 새끼 표정 왜 저래. 어딜 보는 거야.”

    대수의 시선 끝에는 태오가 있었다. 태오는 연신 이쪽을 보며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지수는 얼른 제 옆에 선 단솔의 앞에 서서 시야를 가려 버렸다.

    “하여튼……. 다들 예쁜 건 알아 가지고.”

    지수가 중얼거리며 캡슐을 열었다. 대외적으로 오메가인 지수는 단솔과 함께 요가를 할 수 없었기에 아무나 걸려도 상관이 없었다.

    “빨간색…….”

    “선배님! 저요! 저 빨간색이요!”

    단솔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던 마태오가 지수의 빨간색을 보자, 저 멀리서부터 강아지처럼 발발거리며 뛰어왔다. 지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단솔을 돌아봤다.

    “솔아, 형이랑 바꿀래?”

    “어? 네…….”

    하지만, 하늘색 색종이를 내밀며 흔쾌히 바꿔 주려던 단솔의 손목을 대수가 낚아챘다.

    “그건 안 되겠는데?”

    대수가 손에 들린 하늘색 종이를 흔들며 씨익, 웃었다. 대수의 우악스러운 힘에 끌려 단솔이 저만치 사라지고 없었다.

    지수는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겪었다. 본능적인 직감이 태오의 눈빛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지수는 손에 쥐고 있던 빨간색 색종이를 와락, 구기며 자신의 머리를 헝클었다.

    “아, 시발……. 귀찮게 됐네.”

    * * *

    대수와 단솔은 하늘색, 태오와 지수는 빨간색, 이연과 여민 민혁과 흰색 판 위에 올라갔다.

    이연은 내심 불편한 두현과 한 조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대수가 불쑥, 풀장에 뛰어들어 단솔은 들어서 옮겨 주는 꼴을 보자, 심사가 뒤틀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2인용으로 제작한 플로팅 매트는 생각보다 단단히 그들을 받쳐 주었다. 하지만 역시 물 위라 그런지 자칫 잘못하다간 수영장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았다.

    회귀 전에는 이연과 한 조였던 단솔은 그때를 떠올렸다.

    꽤 친밀한 스킨십을 요하는 자세들을 따라 하면서 가슴 설렜던 것도 사실이었다.

    멍하니 수영장 타일의 기하학적 무늬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 옆에 있던 지수와 태오의 빨간 매트가 출렁거리면서 단솔의 하늘색 매트와 부딪혔다. 그 충격에 단솔은 물속으로 빠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그때, 대수의 단단한 몸이 단솔을 잡았다.

    “조심.”

    “아,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본 지수가 소리쳤다.

    “정대수! 너무 붙어 있는 거 아냐? 우리 솔이한테 떨어져.”

    “너나 조심해. 까불다가 우리한테 부딪치지나 말고.”

    대수의 말에 태오가 마치 보디가드라도 되는 것처럼 앞으로 튀어나왔지만, 금방 대수의 기세에 물러나고 말았다.

    “왜, 뭐 할 말 있어요?”

    “아…… 아니요?”

    다행히 때맞춰 제인과 안나가 다시 등장했다.

    “자! 다들 자리 잡으신 것 같으니까 이제 준비운동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상대방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양발을 어깨 넓이로 벌려 줍니다. 이때 어깨가 너무 과도하게 올라가지 않고 수평을 유지할 수 있도록―.”

    “어어…….”

    대수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단솔은 머뭇거렸다. 20센티가 넘게 차이 나는 대수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면 단솔이 벌을 서듯 팔을 들어 올려야 했다.

    그때, 단솔의 머뭇거림을 느낀 대수가 다리를 넓게 벌리곤 높이를 낮춰 주었다.

    “됐지?”

    “네…….”

    늘 올려다보던 대수의 얼굴이 단솔의 눈높이에 와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도 아닌데,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맞추니 굴곡진 대수의 이목구비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워낙 잘생긴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정면에서 시선을 맞추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선배님들 눈에는 내가 진짜 오징어처럼 보이겠구나…….’

    쓸데없는 걱정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단솔이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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