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촬영 장소가 ‘고구마밭’이라는 소식에 팀의 저연차들만 죽상을 하고 아침 일찍 떠난 B 팀 스태프들과 달리, 이이연과 유두현의 호텔 데이트가 준비되어 있던 A 팀은 룰루랄라, 콧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춘몽도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호텔의 조용한 식당에 마주 앉을 때만 해도, 그림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최 PD는 그들이 이번 회차의 진짜 주인공임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이연은 거의 자리에 앉자마자, 스태프들이 기대한 로맨스의 장르를 바꿔 버렸다.
“선배, 여기 너무 분위기 좋죠. 선배랑 꼭 한 번 와 보고 싶…….”
“돌려 말하면 좋은데. 그러면 못 알아들을 거 같아서 한 번만 말할게.”
“네?”
“두현아, 알겠지만 나는 너한테 관심 없어.”
이이연의 말을 들은 두현이 당황한 듯, 제 앞에 놓인 물컵을 드는 손을 파르르 떨었다.
“하……. 선배가 다른 사람한테 관심 있는 거 알아요. 하지만…… 우리 이제 겨우 이틀밖에 더 됐어요? 서로 조금 더 알아갈 수 있는 거잖아요.”
“너, 나랑 이 프로그램 나오기 전에 모르는 사이였어? 아니잖아.”
“그때는……! 그냥 내가 혼자 팬심으로 쫓아다닌 거잖아요……!”
두현의 반박에 이연은 오히려 헛웃음을 쳤다.
“지금은 다르고?”
“뭐가 달라요. 아니, 내가 그 애보다…….”
정곡을 찔린 두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카메라 앞이라 뱉지 못한 말은 뻔했다.
“……궁금해. 알고 싶고.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알까 봐 조바심 나.”
“하, 그러니까 선배 말은 지금 내가…… 궁금하지도 않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아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궁금해해, 너를.”
하지만 이연은 두현의 반응에도 동요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형…… 그런 말한 거 후회할 날 올 거예요.”
“희망 고문하기 싫었어, 아무리 방송이라도.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그만 시간 낭비해.”
사실 두현이 이연에게 호감을 보인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데뷔 전부터 배우 지망생이라며 소속사나 집 앞을 찾아오기도 했었고, 데뷔 후엔 이연의 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불쑥 전화 걸거나 작품 뒤풀이 자리에 찾아오곤 했었다.
우연을 가장해 나타나는 모습에, 이연의 주변 지인들은 두현을 이이연 빠돌이로 불렀다.
그저 귀엽게만 보였던 두현의 애정이 징그럽고 무섭게 느껴진 지 오래였다. 처음 프로그램 출연진의 라인업을 받았을 때부터 이번엔 확실하게 선 긋자는 결심이 선 이연이었다.
두현의 애정은 이미 애정을 넘어선 집착에 가까운 형태였다.
두현이 쿵쾅거리며 자리를 이탈하자, 수군거리는 제작진들을 정리한 것도 이연이었다.
“다들 죄송합니다. 이왕 여기까지 나온 거, 식사나 하고 가시죠. 최 PD님. 저 좀 봐요.”
건물 밖으로 나가는 이연을 따라가면서도 미진은 눈앞이 어지러웠다. 차라리 고구마밭, 아니 숙소에 있었어야 했나. 차라리 조연출이 이 자리에 있지 않고, 자신이 고구마를 캐다 달려 오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하나. 머리가 복닥복닥, 시끄러웠다.
“PD님, 죄송해요. 이건 내보내지 말죠.”
“아니……! 우리한테 언질이라도 주던가. 이연 씨 방송 하루 이틀 해요? 그런 얘기는 둘이서 미리 합의를 봤어야죠.”
“그럴 시간은 줬고요?”
열을 풀풀, 내던 미진은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연의 물음에 딱히 할 말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춘몽도와 춘몽각에는 집요하리만치 많은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그나마 출연자들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방 안에 달린 게 전부였는데, 이연과 두현이 한 방에 있을 일은 없으니 이연의 입장에서야 답답했을 것도 같았다.
“그래도……! 그…….”
최 PD는 자존심상 차마 이렇게 깽판을 칠 거면 비싼 호텔이 아니라, 고구마밭 아니, 마늘밭이나 가지 그랬냐는 말은 뱉을 수 없었다.
“오늘 장소 대여비랑 스태프들 밥값은 제가 다 책임질게요.”
이연이 자신의 개인 지갑에서 꺼낸 블랙카드에 최 PD는 하고 싶은 말을 애써 꾹꾹, 눌러 담았다.
“그나저나…… 유두현 씨 저대로 그냥 안 찍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영악해서 짜증 날 정도로 자기한테 손해 되는 일은 안 하는 친구예요. 적당히 가라앉으면 돌아올 테니 걱정 마세요.”
이연의 말마따나 두현은 자신의 이미지를 챙기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이연에게 확신을 준 것은 두현의 이연을 향한 집착이었다.
차마 최 PD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없는 이연의 속도 엉망진창이었다.
평소라면, 두현의 애정 공세에도 그저 사이좋은 선후배인 척 넘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오전에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던 중, 제갈민혁과 단솔이 차를 타고 함께 나가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이연은 심사가 뒤틀려 있었다.
두현이 없었다면 단솔의 옆자리가 제자리가 될 수도 있었다. 초반부터 지나친 두현의 대시에 저는 이미 단솔에게서 열외의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이연은 단솔이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두현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 * *
“다녀왔습니다……?”
데이트권은 저녁 7시까지 유효했다. 원래는 2시까지였지만, 중간에 최 PD의 전화를 받은 조연출이 급하게 촬영 시간을 7시까지로 변경했다. 덕분에 새참으로 나온 막걸리까지 야무지게 마신 두 사람은 알코올의 힘으로 고구마를 전부 캐고도, 이장님네 과수원 일까지 도와주고 돌아올 수 있었다.
사람들과 나눠 먹을 과일까지 양손 가득 받아온 단솔은 기쁘게 춘몽각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두현은 이연과 데이트를 나갔다 온 뒤로 제 방에 틀어박혀 버렸고, 이연 역시 기분이 저기압인 듯 머리가 지끈거린다며 방문을 걸어 잠갔다.
여민에게 당한 게 서러웠던 태오는 훌쩍거리다 잠이 들었고, 대수와 지수는 갑작스럽게 제작진들 마음대로 늘려 버린 데이트 시간에 항의하며 제작진과 다툰 뒤였다.
가장 먼저, 단솔의 목소리를 듣고 나온 것은 지수였다.
“솔아, 왔어? 오늘 어땠어. 갑자기 촬영 시간 길어져서 힘들진 않았고?……근데 너 꼴이 이게 뭐야?”
장화에 일바지, 밀짚모자까지. 하나둘씩 가져다준 아이템을 장착한 단솔의 모양새는 전형적인 농부의 모습 그 자체였다. 흙먼지를 주렁주렁, 매단 두더지 같은 단솔은 지수를 향해 양손 가득 담긴 바구니를 내밀었다.
“형! 이거 보세요! 제가 땄어요!”
민혁이 들어 주겠다는 것도 만류하고, 예쁘고 실한 놈들만 골라 담은 바구니엔 고구마와 토마토, 사과며 파프리카까지 들어 있었다. 일해 준 게 고맙고 기특하다며 이장님이 잔뜩 선물한 것들이었다.
“데이트…… 한 거 아니었어?”
지수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제갈민혁을 바라보았다. 흙구덩이에 빠졌다가 나온 듯한 단솔과 달리, 민혁은 꽤 멀쩡한 모양새였다.
제 금쪽같은 단솔을 데려가 뭘 한 건지 설명해 보라는 눈초리에, 민혁은 딴청을 피우며 트렁크에 실었던 고구마 박스를 날랐다.
“이따 야식으로 군고구마 해 먹어요, 단솔 씨. 양이 워낙 많아서 우리 스태프들도 다 먹을 수 있을 거예요.”
민혁의 말마따나 어마어마한 고구마 양에 제작진들이 하나둘 나서서 박스를 나르기 시작하자, 소란을 들은 출연자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방금 씻고 나온 모양인지 네이비색 샤워 가운을 걸친 대수도 단솔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솔아…… 너 참지 말고 똑바로 말해야 해. 저놈이 너 데려가서 뭐 했어? 막 부려 먹고 그랬어?”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저 오늘 진짜 재밌었어요. 헤헤.”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지수를 지나쳐, 단솔이 바구니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당장 먹을 것들만 우선 손질하려고 들어가는 단솔의 뒤를 대수가 따랐다.
“단솔 씨.”
“아! 선배님, 이것 좀 보세요. 엄청 예쁘죠.”
단솔은 제 자식이라도 되는 양, 대수에게도 지수에게 했던 것처럼 오늘의 수확물들을 자랑했다.
“어…… 그러네.”
사실 대수는 파프리카 따위가 어디가 예쁜지 전혀 공감하지 못했지만, 활짝 웃는 단솔을 보며 대답했다. 단솔은 눈치채지 못한 듯, 등을 돌려 흐르는 물에 야채들을 담갔다.
“예쁘네.”
“이따가 구워 먹어요. 저녁은 드셨어요?”
“이런 거…… 좋아하나 봐.”
수줍게 묻는 대수의 물음에 단솔이 고구마를 닦으며 말했다.
“네, 저도 몰랐는데. 좋아하는 것 같아요.”
“……참고하지.”
“네? 어, 응? 선배님! 어디 가셨지…….”
물을 세게 틀어서 대수의 답을 듣지 못한 단솔이 되물었지만, 그때는 이미 무언가 결심한 표정의 대수가 주방을 나간 후였다.
* * *
―춘몽각의 알파, 오메가 여러분 오늘 하루도 즐거우셨나요?
―즐거운 데이트를 즐긴 사람도 있겠지만, 외롭게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신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쉬워하긴 이릅니다. 이제 겨우 알오 매치 서바이벌 인 아일랜드의 여정이 시작된 것일 뿐이니까요. 앞으로도 많은 데이트의 기회가 주어져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 여정을 모두가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시겠죠?
―저희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우리는 서바이벌 경쟁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늘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이번 주, 저희 알오 매치 서바이벌 인 아일랜드의 첫 번째 탈락자가 발생합니다.
여느 때처럼 앞마당에 불을 피우고 앉아, 오늘 단솔과 민혁이 캐 온 고구마를 먹고 있을 때였다.
민혁과 시간을 보내며, 회귀 후 삶을 떨쳐 내려 애썼던 보람이 없이, 단솔은 또 서바이벌 한복판에 내던져져 있었다.
회귀 전에도 첫 번째 주부터 탈락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각 출연진에게 주어지는 탈락자 선정 투표권은 한 장입니다.
―이 투표권으로 여러분은 알파, 오메가를 가리지 않고 딱 한 사람만 지목하여 탈락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하실 점은, 저희 알오매치 서바이벌에서는 투표권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자신과 한 명의 사람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상대가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의 투표권을 쟁취하십시오. 저희 알오매치 서바이벌의 제작진은 이 투표권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여러분들을 비난하거나, 제지하지 않겠습니다.
―사랑으로 행해진 일은 언제나 선과 악을 초월하는 법이니까요.
‘웃기고 있네.’
단솔은 좋아졌던 기분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진창을 구르는 듯했다.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 말은 결국 투표권을 얻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를 카메라로 담아서 전국적인 아니, 글로벌한 쓰레기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단솔에게 투표권은 악의 근원이었다. 두현과 함께 방을 쓸 때, 사라진 제 투표권을 찾겠다고 방을 뒤지는 장면이 악의적으로 편집되어 두현의 물건을 훔친 도둑으로 몰렸었다. 허무하게도 단솔의 투표권은 몇 번이고 뒤졌던 외투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단솔의 투표권을 숨긴 뒤 다시 넣어 놓은 게 분명했지만, 단솔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당해야만 했다.
두현과 한방을 쓰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방송이 편할 수 있다니, 괜히 지수에게 고마워진 단솔은 제 정수리에 턱을 괴고 있는 지수를 한번 올려다보았다.
‘왜.’
지수가 입 모양으로 묻자, 단솔이 배시시, 웃었다.
‘아니에요.’
그 모양이 귀여워 방금 씻고 나와 보송보송한 단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는 알파들의 눈이 여기저기서 날카롭게 빛났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장 빛난 것은 투표권의 존재를 알게 된 마태오의 눈빛이었다. 저녁 내내 운 모양인지 퉁퉁 부은 그의 얼굴에서 살기 등등한 눈빛만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사슴을 쫓는 사자는 전력을 다하지 않지만, 사자에게 쫓기는 사슴은 죽을힘을 다하는 법.
윤여민이라는 사자에게 쫓기고, 쫓기던 태오는 급기야 알오매치 전 시즌 통틀어 최초로 오메가를 떨어트리는 알파가 되기로 결심한다.
* * *
<예고편>
늦은 밤, 춘몽각의 앞마당 커다란 소나무 밑에 선 남자가 연신 돌탑을 쌓으며 중얼거린다.
“×××…… 너를 이 섬에서 가장 먼저 없애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