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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1화 (11/150)
  • 11화

    “단솔 씨, 힘들지 않아요? 좀 쉬어요.”

    불도저처럼 밭을 갈다가도 5분에 한 번씩 단솔에게 괜찮냐고 물어 왔다. 의자부터 선크림, 모자, 물, 간식. 심지어는 선풍기와 라디오까지, 올 때마다 민혁이 가져다준 것들로 단솔의 주변이 어수선했다.

    “민혁 씨, 저 괜찮아요. 아직 한 줄도 못 끝냈는데……. 민혁 씨야말로 좀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단솔은 민혁이 헤집어 놓은 밭을 보며 말했다. 단솔이 한 줄을 겨우 할 동안 민혁은 세 고랑을 캤다. 의외로 농사일이 꽤 익숙한 모양이었다.

    “저……. 그럼 여기서 단솔 씨랑 같이 작업해도 돼요?”

    “그…… 여기 민혁 씨 밭이잖아요. 저한테 안 물어보셔도 될 것 같은데.”

    민혁의 수줍은 물음에 단솔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혁은 단솔 앞에 냉큼 앉았다.

    “단솔 씨. 제가 왜 단솔 씨를 여기 데려온 줄 아세요?”

    “음…… 일손이 부족해서요?”

    민혁의 짐짓 비장한 물음에 단솔은 무심하게 답했다. 단솔의 손은 쉬지 않고 고구마를 캐고 있었다. 하다 보니 의욕이 생겨 어쩐지 집중하게 되는 일이었다.

    “아니요. 생각이 많아 보여서요.”

    “어…….”

    정곡을 찔린 듯 헛손질하는 단솔을 보며 민혁이 말을 이어 나갔다.

    “잡생각이 많을 때 오는 곳이에요. 고구마가 다치지 않게 캐내고, 저쪽 뒤로 가면 방울토마토랑 고추밭도 있거든요. 걔네 따고 그러면…… 막 뒤엉켜 있던 생각이 심플해져요.”

    민혁은 생각보다 섬세한 사람이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열심히 고구마를 캐다 보니, 단솔을 괴롭히던 잡생각들이 사라졌다. 단솔은 그에게 제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어쩐지 쑥스러웠다.

    “제가…… 생각이 많아 보여요?”

    “네, 뭐……. 보려고 본 건 아닌데, 단솔 씨 보면 꼭 어릴 적 내 모습 같아요.”

    “민혁 씨요……?”

    단솔이 되묻자, 민혁은 형식적으로나마 들고 있던 호미를 멀찍이 내팽개치곤 푹신한 흙이 침대라도 되는 것처럼 팔 한쪽을 괴고 벌렁, 누워 버렸다.

    “나 운동 그만두고 나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내가 운동선수로 성공하는 게 우리 아버지 꿈이었는데, 그래서 한동안…… 생각이 엄청 복잡해졌죠. 난 이제 뭘 먹고 살아야 하나…… 앞으로 뭘 해야 하나. 그때 찾은 게 이 밭이에요. 이 밭이 원래 우리 아버지 거거든요. 와서 잡초 다 뽑고, 밭 갈고, 고구마도 심고, 무도 심고, 꽃도 심고 그러다 보니 생각 정리가 됐어요.”

    “……그랬구나.”

    단솔은 그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속내를 말해 준 민혁에게 고마웠다.

    그의 말이 맞았다. 갑자기 회귀를 했고, 또다시 프로그램에 뛰어들면서 숨 한 번 크게 내쉬질 못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저 욕먹지 않고,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찰나의 순간조차도 몇 번의 시뮬레이션을 해야만 했던 단솔은, 어느 날 갑자기 집안의 가장이 되어 버린 어린 날 민혁과 닮아 있었다.

    회귀를 해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미 아픔을 겪어 본 사람 눈에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민혁은 아마도, 단솔에게서 보이는 그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민혁 씨는 그때 어떤 결론을 냈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하자.”

    단솔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해서 뮤지션으로 성공했으니, 답을 찾은 셈이었다.

    민혁이 그런 단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그게 해답이 아닌 걸 알아요. 난 운이 좋은 케이스였죠. 누구나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단솔 씨한테 쉴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어요. 몸이 아니라 머리가 쉴 수 있는 시간.”

    “고마워요. 저…… 진짜 즐거워요. 오늘.”

    단솔이 호미로 고구마에 묻은 흙을 툭툭, 쳐내며 웃자, 민혁은 쑥스러운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장난스레 말했다.

    “그…… 생각을 더 줄여 줘야 하는데 미안해요. 나도 단솔 씨 욕심나서 이제 내 진짜 매력 어필을 좀 해야겠어요. 앞으로 다른 생각은 줄이고, 내 생각은 좀 많이 해 줘요.”

    차가 있는 곳으로 뛰어간 민혁이 기타를 메고 돌아왔다. 일바지에 레트로한 틴티드 선글라스를 끼고 온 그의 모습을 보자, 단솔은 웃음이 터졌다. 지잉―, 하고 밭 한가운데서 기타를 튕긴 민혁이 말했다.

    “내가 여기 와서, 처음 만든 곡이에요. 단솔 씨도 가수니까 알죠? 첫 곡이 얼마나 창피한지……. 창피해서 아무 데서도 안 불렀는데, 단솔 씨는 특별하니까 들려줄게요.”

    이미 방송 첫 등장부터 그 부끄러운 곡을 무반주로 부른 단솔은 왠지 머쓱해져 얼굴을 긁었다.

    이내, 민혁의 기타 연주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어.

    난 집에 돌아가는 법도 모르겠어.

    사실 집이 어딘지도 모르겠어.

    난 실수하고 싶지 않아.

    무너지고 싶지 않아.

    어린 애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울고 싶지만 울고 싶지 않아.

    울고 싶지만 우는 걸 들키고 싶진 않아.

    밝은 기타 반주와 달리, 민혁의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가사가 꼭 단솔에게 하는 말 같이 들렸다. 단솔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카메라에 우는 모습을 들키기 싫은 단솔이 땀을 닦는 척 연신 눈물을 훔쳤지만, 한 번 터져 버린 눈물은 금세 멈추질 않았다.

    민혁은 진작부터 단솔이 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기타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짧은 습작 같은 노래는 이미 끝난 지 오래였지만, 그는 단솔에게 가 있는 카메라를 뺏어 오듯, 괜히 더 화려한 연주를 이어 나갔다.

    가끔은 달래 주고, 위로해 주는 것보다, 모르는 척해 주는 편이 더 고마울 때가 있는 법이었다.

    “뭔…… 밭에서 지랄……. 미친놈…… 염병을 하네!”

    제갈민혁의 데뷔 이래 가장 소박한 무대는 털털거리며 경운기를 끌고 다시 등장한 이장님의 외침으로 끝이 났다.

    “새참 먹어!”

    “우와! 새참!”

    그제야 단솔도 눈물을 멈추고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이장님은 새참이 아니라 출장 뷔페라도 차린 듯, 경운기 뒷자리 한가득 음식을 싸 들고 왔다.

    “오……! 이장님! 이게 다 뭐래? 뭘 이렇게 많이 싸 왔대?”

    기타를 한편에 벗어 놓은 민혁이 다가오자, 이장은 또 민혁의 등짝을 퍽퍽, 쳐 댔다.

    “너만 입이냐! 여기 사람이 얼만데! 그리고 너어는! 애기한테 밭일 다 맡겨 놓고 노래나 하고 염병 떨고 자빠졌어!”

    “아유, 내가 그랬겠어요? 일 다 하고 잠깐 쉬는 건데 그걸 못 참고…….”

    “체력이 남아도냐! 남아돌아?”

    “남아요, 남아. 남아돌아서 이장님 댁 일도 봐주고 갈 테니까 어여, 빨리 새참이나 내놔 봐요.”

    “맡겨 놨냐?”

    능글거리는 민혁과 늘 화를 내지만,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이장의 대화에 단솔이 미소 지었다. 회귀한 뒤로 한 번도 편하질 않던 마음이 처음으로 편해지는 순간이었다.

    * * *

    “시간 더럽게 안가네.”

    “그러게.”

    단솔이 민혁과 고구마밭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동안,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지수와 대수, 그리고 여민은 춘몽각 안에 있는 풀장에서 웃통을 벗고 선베드 위에 누워 태닝을 하는 중이었다.

    그림만 보면 누가 데이트를 가고, 누가 숙소에 남았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대선배들 사이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있는 태오만이 입을 삐쭉거렸다.

    “우리 팀 가면 내가 리던데…….”

    “아, 맞다. 너도 아이돌이었지.”

    “네…….”

    6주 연속 1위를 하고, 신인상을 휩쓴 것도 모자라, 너튜브 뮤직비디오 조회 수로 1억 뷰까지 찍은 괴물 그룹, 제우스의 리더인 태오는 어이가 없었다.

    춘몽도에 들어온 뒤로 100위권에도 들어오지 못하는 다이노소울의 단솔에게 밀려, 저는 찬밥 아니, 쉰밥 신세였다.

    그렇다고 해서 단솔이 미운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같은 아이돌임을 핑계 삼아 단솔에게 다가갈 시간조차 주지 않는 윤여민에게 더 불만이 많았다.

    ‘사사건건 저 꼰대랑 엮이는 바람에 단솔 씨랑 데이트도 못 가고…….’

    “너희 노래 유명한 거 뭐 있냐? 노래해 봐.”

    태오가 타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 빨아들인 여민이 다리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야, 윤여민. 적당히 좀 해.”

    “좀 앉아요.”

    자존심이 상한 듯 제자리에 굳어 있자, 보다 못한 지수와 대수가 여민을 만류했다. 하지만 말린다고 해서 말려질 여민이 아니었다.

    “어? 안 해? 하나, 둘, 셋, 넷!”

    “아이 씨!”

    참다못한 태오가 주먹을 꽉 쥔 채 외쳤다. 갑작스러운 태오의 외침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건수 하나 잡았다며 웃고 있던 제작진들도 태오의 행동에 카메라를 꺼야 하나, 우왕좌왕하느라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때였다.

    “I see……. 네가 보여 오 마이 러브! 난 너 하나밖에 없는걸! 영원한 내 사랑!”

    태오가 눈을 질끈 감고 안무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감정을 억누른 듯 염소처럼 떨리는 바이브레이션이 끝나자 짝짝짝―, 여민의 박수 소리가 공허한 춘몽각에 울려 퍼져 메아리쳤다.

    “야, 이씨……. 댄스 담당이면 말을 하지 그랬어. 노래는 안 하는 게 나을 뻔했다. 미안.”

    * * *

    <알파×오메가 속마음 인터뷰>

    Q : 태오 씨 괜찮으세요?

    마태오 : 하…… 잠시만요. 제가 속상해서 우는 게 아니라, 흡……. 열 받아서 우는 거예요. 후…… 열 받으면 이렇게…… 눈물이……. 끄흡, 팬들한테 미안하고오……. 후……. 제가 메인 보컬이그든요……. 더 잘 부를 수 있었는데, 이게 감정적으로 막 화가 나니까……. 근데 또 거기서 잘 불러서 뭐 하겠어요.

    Q : 윤여민 씨, 제우스 팬들이 무섭지는 않으세요?

    윤여민 : 왜요? 내가 분량 챙겨 준 건데. 저 아니면 걔 한 컷도 못 나온다니까요?

    Q : 한지수 씨, 아까 수영장에서 줄곧 정대수 씨와 붙어 계시던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한지수 : 저희 그런 사이 아닌데요. 근데, 데이트 나간 사람들은 왜 아직도 안 들어옵니까? 무슨 사고라도 난 거 아니에요?

    Q : 아직 오전 11시 반밖에 안 됐는데요…….

    Q : 정대수 씨, 아까 수영장에서 한지수 씨와 무슨 이야길 나누셨나요?

    정대수 : 마태오 씨랑 윤여민 씨가 주먹다짐으로 싸우면 누가 이길까 내기를 걸었습니다.

    Q : 정대수 씨는 누구한테 거셨나요?

    정대수 : 윤여민이요.

    Q : 왜죠?

    정대수 : 마태오랑 주먹으로 싸우면……. 윤여민은 칼 들고 나오는 사람이라, 그쪽에 걸었습니다.

    Q : 그럼 한지수 씨는 마태오 씨 쪽에 거셨나요?

    정대수 : 아뇨.

    Q : 단솔 씨, 데이트가 즐거우셨나 보네요?

    주단솔 : 네, 엄청요!

    Q : 볼에 흙이 묻었어요.

    주단솔 : 헉! 진짜요? 헤헤……. 언제 묻었지……

    Q : 이번 데이트를 계기로, 단솔 씨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좀 선명해질까요?

    주단솔 : 어…… 잘 모르겠어요. 제 선택이 뭐…… 중요한가요?

    Q : 제갈민혁 씨, 고구마밭 데이트…… 제작진도 놀랐습니다.

    제갈민혁 : 그런가요? 아마…… 주단솔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냥 평범한 데이트를 했을 겁니다.

    Q : 단솔 씨와의 데이트는 어떠셨나요?

    제갈민혁 : 생각만큼, 아니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Q : 다시 커플 선정을 한다면, 또 주단솔 씨를 택하실 건가요?

    제갈민혁 : 저는 그렇지만……. 아마 단솔 씨 선택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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