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화 (1/150)
  • 프롤로그

    [제가... 공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많은 일을 겪다 보니까…….]

    우연이었다.

    그날은 차가운 편의점 김밥이 질려서 웬일로 지하철역 근처 김밥집까지 찾아 들어왔다. 겨우 이 정도도 사치였을까, 김밥집 배경 음악처럼 틀어져 있던 텔레비전에서는 옛 동료였던 우현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소아암 병동에 1억 원을 기부한 가수 최우현 씨는…….]

    ‘……내가 병원비 좀 빌려 달라 할 때는 코웃음도 안치던 놈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10년이나 묶어 놨던 소속사 사장은 분노했고, 노발대발하는 투자자들을 만나고 온 그는 미친 사람처럼 눈이 뒤집혀서 나를 폭행했다.

    하필이면 잘못 맞는 바람에 고막이 손상됐다. 그때 나는 바보같이 멤버 중 집안 형편이 가장 좋았던 우현에게 병원비를 빌리러 갔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원망과 욕설뿐이었다.

    “개고생 다 해서 이제야 빛 좀 보나 싶었는데, 형이 다 망쳐 버렸어. 근데 무슨 염치로 여기 온 거야?”

    “내가…… 정말 그랬다고 생각해?”

    “팩트가 중요한 게 아니지. 대중들은 보이는 것만 믿으니까.”

    “나도 당한 거라고……! 하, 우현아 근데 형이 지금 이럴 시간이 없거든? 정말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돈 좀…….”

    “시끄럽고, 당장 꺼져. 너한테 빌려줄 돈 같은 거 없으니까. 시발.

    “……미, 미안해……. 우현아 제발…… 내가 사정이.”

    “지랄하지 마. 누구 덕분에 전 국민한테 쓰레기 그룹으로 낙인찍혔는데……. 진짜, 형한테 양심이라는 게 있냐? 한때나마 너 같은 걸 형이라고 의지하고……. 내가 미친놈이지. 당장 꺼져, 죽여 버리기 전에.”

    결국 치료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왼쪽 청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내게 음악은 전부였다.

    어릴 적 부모님이 이혼하고 각자 가정을 꾸리는 바람에 나는 혼자가 되었다. 간간이 보내오는 약간의 생활비 외에는 사람의 온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내게 멤버들과 팬을 만들어 준 게 음악이었는데...

    이제는 음악을 할 수 없는 몸에, 제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날 선 원망까지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는 그냥 살아 있기에 살 뿐이었다. 잊히기 위해 철저하게 숨어 살아야 하는 삶.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이래서 밖에 나오기 싫었다.

    집안의 꾸준한 서포트를 받은 덕일까. 우현은 다행히 배우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다른 멤버들도 멤버 한 명 때문에 불쌍하게 해체당했다는 우현의 언론 플레이에 묻어가면서 예능이나 모델, 인터넷 방송을 하면서 제 밥벌이는 남부럽지 않게 하게 되었다.

    결국 내가 사라지자, 모두가 괜찮아졌다. 마주치기 싫어도 그들을 마주하게 될 정도로 모두 제 입지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거름 삼아 튼튼하게 자라났다.

    “김밥 한 줄 포장 나왔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도망치듯 김밥집을 나왔다. 역시 그냥 편의점에서 사 먹었어야 했다.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대로변에서 골목길로 들어서는 순간 싸한 기분이 느껴졌다. 뒤를 저벅저벅, 따라오는 발걸음.

    걸음이 빨라지면 뒤따라오는 이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걸음이 느려지면 똑같이 느려지고.

    착각인가 싶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그게 분명 저를 따라오는 발걸음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팀 해체 후 그나마 있던 팬들은 모두 나를 역적 취급했다. 팬이 안티로 돌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를 가족들보다 잘 아는 그들은 어느 지점에서 내가 가장 상처받는다는 것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던지는 돌보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이들의 돌이 더욱 아픈 건 그 때문이었다.

    그들의 테러를 견디다 못해 여러 번 이사를 하고 핸드폰 번호와 SNS 계정을 삭제해야만 했다. 그것도 모자라 경찰에 신변 보호 요청도 했다.

    대부분 철이 들어 그런 악랄한 짓을 그만두거나, 세간의 관심에서 사라진 나를 재미없어했다.

    하지만, 끝까지 날 쫓아다니던 한 놈. 이 발소리는 그놈이 분명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여긴 또 어떻게 찾아낸 걸까.

    “시발……!”

    결국 손에 쥔 비닐봉지를 내팽개치고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멀찍이 서 있던 남자는 갑자기 내가 달릴 것은 예상하지 못한 듯, 부리나케 쫓아 나왔다.

    “주단솔!”

    이제는 제 신분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그를 피해 코너를 돈 순간.

    끼익―.

    쾅!

    골목길을 달려 나오던 택배 트럭에 치이고 말았다. 좁은 골목길이라, 달리는 차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한 실수였다.

    부딪치면서 커다란 굉음이 났다. 가벼운 몸이 새처럼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이게 뭐지……?’

    주변이 슬로 모션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 저를 쫓아오던 안티팬의 모습을 마주했다.

    그들의 존재가 너무 무서워서 늘 도망만 다녔다. 차에 치이는 순간 직감했다. 어쩌면 오늘이 제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오늘만큼은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싶었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렇게 밉고 싫으냐고.

    늘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스스로 죽을 용기가 없어, 매일 아침 눈을 뜨지 않기를 누가 저를 죽여 주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이루어질 줄이야.

    살면서 그렇게나 바랐던 일들은 하나도 안 들어줬으면서, 죽고 싶다는 말은 잘도 들어주는 인생이라는 게 너무 허무해서 아이러니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철푸덕.

    남자의 얼굴은 너무도 평범했다. 머리에 뿔이 달리거나, 송곳니가 튀어나오거나, 새빨간 눈을 가지지도 않았다.

    너무도 평범하고, 선한 청년의 모습을 담기 위해 단솔은 눈을 감지 않았다.

    땅에 떨어진 충격 때문일까, 머리에서 끊임없이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온통 까만 옷을 입은 남자의 표정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누가 보면 그가 괴롭힘을 당한 사람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왜지....

    이제 괴롭힐 사람이 없어져서 그런가.

    늘 내가 죽길 바랐을 텐데.

    제 눈으로 보는 건 또 다른 기분이려나.

    아…… 근데 나 죽기 싫은데.

    내가 왜 죽어야 해.

    사실 죽고 싶다고 했던 건, 이렇게 살기 싫다는 말이었어.

    나도 내 인생을 정말, 잘 살고 싶었다고.

    더 이상 무거운 눈꺼풀을 견디기 힘들었다. 스르륵, 잠에 빠지듯 눈을 감았을 땐, 영화 필름처럼 인생의 순간이 떠올랐다.

    엄마 아빠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던 4살, 애물단지처럼 어른들 눈치 보며 지냈던 10살, 처음으로 오디션에 합격하고 숙소에 들어갔던 13살.

    그때는 좀 기뻤던 것 같네, 더 이상 눈칫밥은 안 먹어도 됐으니까.

    숙소를 스쳐 간 수많은 연습생과 드디어 데뷔조가 확정됐던 날, 처음 일일 드라마에 캐스팅됐던 순간과 예능에서 뚝딱거리던…….

    맞아. 젠장,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그 프로그램만 아니었어도 내가 여기서 이런 개죽음 당할 일은 없었다. 그냥 소소하게 활동을 했을 테고, 그러다가 사라졌을지언정 전 국민의 적으로 낙인이 찍히진 않았겠지.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그 거지 같은 방송 때문이야.

    ‘알오 매치 서바이벌 in 아일랜드.’

    역겨운 형질 주의자들을 섬에 가둬 놓고 짝짓기시키던 미친 프로그램.

    그 방송에서 악마의 편집만 안 당했어도 이렇게 내 인생이 꼬일 일은 없었다고.

    나도 모르게 촤르륵, 스쳐 지나가는 장면 중 하나를 손에 꽉 쥐었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담당 PD 멱살이라도 이렇게 한번 잡아 봤을 텐데.

    아니 근데 나 진짜 죽나?

    이렇게?

    1화

    “나 진짜 죽기 싫다고!”

    “죽기 싫다고! 죽기 싫어!”

    “형!”

    “죽기…….”

    “형!!”

    “어……?”

    단솔이 눈을 뜬 것은 옛날 다이노소울의 쿰쿰한 반지하 숙소였다. 좁은 방 두 칸에 2층 침대를 두 개씩 넣으면 발을 디딜 틈 없이 꽉 찼던 곳이었다.

    “형! 어디 아파?”

    식은땀을 흘리는 단솔의 이마에 맺힌 땀을 막내인 민재가 닦아 주었다.

    “내가 왜 여기……? 혹시…… 민재 너도 죽었어? 여기가 지옥인가…….”

    “무슨 소리야? 꿈꿨어? 죽긴 누가 죽어?”

    “아니……. 분명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단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좌우를 살피자, 민재가 말했다.

    “어제부터 긴장된다고 수면 유도제까지 먹고 잤잖아. 형 이제 그 약 먹지 마. 부작용으로 사람이 좀 이상해진 거 같아.”

    정말 민재의 말처럼 약간 몽롱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이게 꿈인 걸까, 아니 그러기엔 몇 년간의 기억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그럼 혹시 지금 이 무의식 같은 게 아닐까.

    단솔은 이 순간이 꿈이라는 확신에 벽에 머리를 쾅쾅, 박았다.

    “으악! 으아!”

    “형! 미쳤어⁈ 우현이 형! 형 왔어? 이리로 좀 와 봐!”

    단솔이 벽에 이마를 박고 있는 동안 우현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민재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으악!”

    단솔이 우현을 보자 귀신이라도 본 듯 경기를 일으켰다.

    “형? 왜 그래…….”

    “으악! 이거 놔! 이게 진짜 꿈이 아닌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갑자기 단솔이 벌레 보듯 우현을 쳐다보았다. 구석으로 가 혼자 무언갈 중얼거리는 단솔의 행동에 그를 잡으려던 우현의 손이 민망해졌다.

    “형……?”

    웅크린 단솔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게 꿈일 리 없다. 단솔은 확신했다. 여전히 고장 난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벽에 박은 이마가 욱신거렸다. 지금도 꿈이 아니라면, 혹시 내가…… 설마…… 돌아오기라도 한 건가.

    단솔은 무릎에 파묻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의아한 얼굴로 서 있는 우현이 들고 있는 가방을 쳐다보았다.

    방송에 나가기 전날, 단솔은 우현에게 선물을 받았다. 그 일이 있기 전만 하더라도 우현은 멤버 중 단솔을 가장 잘 따랐다.

    “너…… 그 가방 안에 혹시 나 주려고 옷 가져온 거야?”

    “어……⁈ 형 어떻게 알았어?”

    “와……. 나 진짜 돌아왔구나.”

    “어딜? 어딜 돌아가? 근데 형, 진짜 내가 옷 가져온 거 어떻게 알았냐니까?”

    제가 기억을 못 할 리 없었다.

    오메가 출연자 중에 단솔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으니까.

    첫 만남부터 신경전으로 그려진 편집은 종영할 때까지도 내내 그 사람과 단솔을 라이벌 구도로 만들었다.

    “그냥 어쩌다 알게 됐어. 마음은 고마운데…… 난 그런 거 없어도 돼.”

    묘하게 쌀쌀맞아진 단솔의 반응에 금세 우현이 시무룩해졌다.

    “아, 왜! 내가 형 주려고 일부러 사 온 거데…….”

    “난 됐어, 너무 화려해……. 그런 거 나한테 안 어울려. 근데…… 나 꼭 그 프로그램 출연해야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미쳤어?”

    “형 왜 그래!”

    혹시나 하고 뱉어 본 말에, 다른 방에 있던 윤성까지 달려와 합창처럼 대답했다. 멤버들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말도 안 되는 말인 걸 알지만, 되돌린다면 소속사 사장의 멱살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그런 방송에 나가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했었다.

    원래도 형질로 사람을 나누는 그따위 프로그램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사기꾼 같은 사장 놈의 말을 들은 게 잘못이었다.

    하지만 사장님까지 가기도 전에 멤버들에게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워낙 인지도가 없으니 단솔의 개인 스케줄임에도 다들 고무된 분위기였다.

    멤버들 간의 시기 질투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음악 방송 외에 다이노소울로서 스케줄을 잡아 오는 건 단솔이 유일했다.

    잠시 뒤 정신을 차리려고 단솔이 세수를 하고 나왔을 땐,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단솔의 방문 앞을 지켰다.

    “야…… 나 도망 안 가. 그러고 안 지켜도 돼……!”

    도망갈 타이밍을 재던 단솔은 속을 들킨 것 같은 민망함에 되레 큰소리를 쳤다.

    “형 원래 쉬는 날 안 씻잖아. 엄청나게 수상해.”

    “형, 제우스 알지? 걔네 센터도 가출했었대 너무 힘들어서. 대가족 먹여 살리는 소년 가장 멤버한테는 종종 있는 일이라니까. 근데 가출할 때 하더라도 알오매치 서바이벌은 나가 주면 안 될까?”

    “하…… 윤성아……. 제우스 걔는 그때 드라마랑 영화랑 예능까지 찍으면서 음악 방송도 뛰었다며……. 나는 스케줄이 없어 너무너무 편해. 저거 봐 달력 텅텅 비어 있잖아. 어제도 13시간 잤다니까?”

    단솔이 가리킨 거실의 화이트보드에는 당당하게 ‘다이노소울 스케줄표’라고 적혀 있었지만, 스케줄이 있는 날이라고는 빨갛게 표시된 공휴일 개수보다도 적었다.

    “그건 그렇지만……. 형, 우현이가 주는 선물도 거절했다며! 형처럼 물욕 넘치는 사람이 그럴 리가 없잖아! 뭔가 수상한데.”

    내가 그랬었나. 윤성의 말에 자신을 돌아보게 된 단솔이었다. 화려한 옷이나, 액세서리를 좋아하긴 했었다. 수년간 은둔하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입는 게 익숙해져 잊고 있었다.

    “그…… 그건! 스타일이 바뀌어서 그래…….”

    “형도 배우병…… 걸린 건가?”

    윤성의 말에 설거지하던 민재가 고무장갑도 벗지 않은 채 달려왔다.

    “형아, 벌써 그러면 안 돼! 아무리 형이 하루아침에 4050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지만, 어차피 다음 연속극이 나오면 형은 찬밥 신세야.”

    “우리 막내가 시장 분석을 열심히 했구나…….”

    “맨날 집에만 있다 보니까 할 일이 없어서…….”

    민재는 칭찬이라 생각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사이 윤성이 단솔의 손을 잡았다.

    “형! 형아! 꼭 잘하고 와야 해? 나 맛간 아이돌 꼭 나가보고 싶단 말이야…….”

    “나도, 나도! 나는 엔딩 요정 해 보고 싶어! 포즈도 준비했어. 볼래?”

    민재가 잔뜩 끼를 부리며 숨을 헐떡거리자, 윤성이 지지 않고 매달렸다.

    “10초 동안 하는 그거? 야,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내가 먼저 할래!”

    “야, 시끄러워. 형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는데 너희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면 피부 상해.”

    한참이나 정신없이 하고 싶은 걸 얘기하던 윤성과 민재는 우현의 잔소리를 듣고서야 물러났다.

    당연하겠지만 단솔에게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우현과 달리, 단솔은 우현을 볼 때마다 흠칫거리며 놀라곤 했다.

    더욱 불편한 것은 우현과 단솔은 연습생 때부터 같은 방을 써 왔다는 사실이었다. 민재와 윤성이 나가고 난 뒤 좁은 방 안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다…… 다른 애들은?”

    “현우, 지웅이, 연규는 단기 아르바이트 뛰러. 제이콥은 영어 과외.”

    “아…… 그렇구나.”

    생활이 궁핍하다 보니 소속사 몰래 아르바이트를 뛰는 애들이 꽤 있었다. 민재나 윤성은 미성년자였고, 우현은 아르바이트를 안 해도 될 정도로 집이 잘사는 편이었다.

    단솔 역시 일일 드라마를 찍기 전에는 다른 멤버들처럼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녔었다.

    “저……. 형, 미안해.”

    “응? 뭐가?”

    “옷 말이야……. 형도 취향이 있는데 내가 너무 내 마음대로 사서……. 취향이 바뀐 줄 몰랐지.”

    단솔은 뜻밖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지난 몇 년간 단솔의 머릿속에 남은 우현의 모습은 마지막 그 순간뿐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우현이 기부하는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치지 않았던가.

    혹시 원래는 이렇게 착했던 아이를 제가 그렇게 악하게 만든 게 아닐까.

    “아, 아니야……. 너도 아무리 집에서 도와주신다고 해도 돈도 없을 텐데 미안해서 그러지 내가.”

    여유가 있다고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건 아니었다.

    “나도…… 형만 고생하니까 미안해서 그러지. 형, 그럼 이건 받아 주라. 새로 산 거 아니고 내가 입으려고 했는데 작아서 못 입은 거야.”

    우현이 건넨 것은 평범한 까만 트레이닝복이었다.

    단솔은 그제야 자신이 소속사 사장만큼이나 우현을 미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분이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울컥한 단솔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우현이 쑥스러운 듯 단솔의 손에 옷을 쥐여 주었다.

    “거기 가면 미션 같은 것도 할 텐데……. 코디 누나가 협찬받은 옷은 막 입지 말라고 했다며. 형 트레이닝복은 연습할 때 입던 거라 다 구멍 나고, 무릎 튀어나왔잖아. 그런 거 입고가면 무시당해.”

    차마 단솔은 우현에게 제가 뭘 입든 무시당하는 위치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멤버들한테나 대단해 보이지, 톱 배우들과 인기 아이돌들이 모인 그곳에서 단솔은 물어뜯기 좋은 장난감에 불과했다. 동생들은 그것도 모르고 과분하게 단솔을 응원하고 있었다.

    ‘어쩌지……. 하필이면 방송 나가기 전날로 돌아올 게 뭐람. 아예 연습생 되기 전으로 되돌려 주지.’

    일찍 나가야 한다는 핑계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이렇게나 기대하는 멤버들을 두고 차마 도망칠 순 없었다.

    ‘그래, 일단 프로그램은 나가자……. 통편집 당하면 당장은 실망하겠지만, 애들도 받아들이겠지. 욕먹고 해체하는 것보단 낫잖아?’

    어릴 적, 부모님의 부재로 사랑이 고팠던 단솔은 사람들의 관심이 좋아 아이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저주에 가까운 악플과 칼날 같은 시선을 겪으며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세상 사람들이 저를 잊어버리는 것.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어쩌면 저를 너무 불쌍히 여긴 신이 선물을 준 게 아닐까 생각했다. 멤버들에겐 미안하지만, 단솔은 전처럼 서바이벌에서 꾸역꾸역 살아남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밤새 잠을 뒤척인 단솔을 매니저 형이 흔들어 깨웠다. 새벽부터 나가서 미용실을 들렀다 가야 메이크업과 헤어를 할 수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풀 세팅을 끝내고 숍에서 나온 시간은 아침 7시.

    회귀 전, 단솔은 첫 촬영부터 매니저가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30분 지각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제작진들 눈 밖에 났던 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5분 전까지만 들어가자.’

    단솔은 매니저가 헤맸던 지점에서 눈을 번쩍 떴다.

    “형, 직진 아니고 오른쪽 길로 빠져야 해.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네비 업데이트 좀 하면 안 돼?”

    “어…… 그런가? 허허허, 내가 바빠서 업데이트를 못 했네.”

    길성은 사람은 좋은데 매니저로서는 영 꽝이었다. 그나마 저 둥글둥글한 성격 때문에 단솔이 가장 마지막까지 연락을 끊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했지만, 답답한 구석이 있었다.

    “여기 초행길이라 헷갈렸네, 미안. 근데 단솔이 너는 여기 와 봤어? 무인도밖에 없어서 올 일 없을 텐데…….”

    “그…… 예전에 와 봤어요. 사전 답사…… 랄까?”

    “하하, 관심 없는 척하더니 사전 답사까지 왔어? 대표님 좋아하시겠다.”

    “아! 대표님한테는 말하지 마요!”

    단솔은 룸미러로 저를 쳐다보는 길성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소속사 사장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굳은 모습을 길성은 그저 쑥스러워서 그런 거라 치부했다.

    창밖을 바라보는 단솔의 눈에 ‘알오매치 서바이벌 인 아일랜드’의 배경이 되는 섬이 눈에 들어왔다. 육지와 연륙교로 이어진 섬의 입구에는 과거 화려했던 관광지였음을 증명하듯 영어로 된 간판이 함께 붙어 있었다.

    서해 끝자락에 위치한 춘몽도. 청량한 바다가 넓게 펼쳐진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그림 같은 섬이었다. 이전에는 나름 관광거리도 있고 거주민도 있었으나, 각자의 이유로 섬을 떠나 지금은 심심한 낚시꾼만이 들르는 무인도가 되고 말았다. 방송 이후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지만, 이제 단솔에게는 두 번 다시 쳐다도 보기 싫은 곳이었다.

    ‘젠장, 운도 지지리 없지. 죽기 전에 회귀씩이나 해 놓고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단솔은 차 창문에 콩콩, 제 머리를 박았다. 어제 벽에 부딪힌 자리가 욱신거리며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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