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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Dive into you II (18/18)

13. Dive into you II

예준은 여덟 살짜리 꼬맹이에게 바짓가랑이를 붙들렸다. 도장 아이들이 대부분 떠난 뒤, 혼자 엄마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는 집에 가기 싫다며 벌써 눈꼬리에 눈물방울을 달고 있었다.

“이러다 도복 찢어져. 놓고 이야기하자. 응?”

예준이 제 바지 자락을 그러쥔 고사리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었다. 하마터면 벗겨질 뻔한 도복 하의를 정리하고,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왜. 왜 집에 가기 싫은데?”

“아, 그냥요오!”

“준아. 너 여덟 살이나 먹고 이렇게 떼써도 돼? 이번에 노란 띠 됐잖아. 노란 띠도 따 놓고 집에 가기 싫다고 울기나 하고.”

우연히도 외자인 이름이 예준의 이름 끝 자와 같았다. 곧잘 따르기에 한없이 잘해 준 게 문제였을까. 매일 도장이 파할 때마다 제일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짠하기도 해서, 가끔은 함께 저녁을 해결하기도 하는 사이였다. 칭얼거림을 한참 받아 주고 나면 퇴근 시간은 저절로 늦어졌다.

“어머니 오셨대. 내려가자, 얼른.”

바닥에 드러누워 꼼짝하지 않는 걸 보고 예준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멀리에 선 경호원이 눈살을 찌푸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매번 보았으니 진절머리가 나는 모양이다. 예준은 두툼한 패딩을 팔에 꿰어 입고 아이에게도 점퍼를 입혔다.

“저 무서운 아저씨한테 너 끌고 가라고 한다?”

협박 아닌 협박을 하자 그제야 몸을 일으킨다. 피식 웃은 예준이 아이의 손을 잡고 상가를 나섰다. 찬 바람이 매서운 12월. 복도부터 들이치는 한기는 밖으로 나오자 더 심해졌다.

“하아….”

숨을 깊게 내쉬자 하얀 입김이 나왔다. 차를 대어 놓고 아이를 기다리던 어머니가 몹시 미안한 얼굴로 예준의 두 손을 붙잡았다.

“작은 사범님 죄송해요, 정말로…. 야근 때문에 퇴근이 늦어져서…. 매번 어떡해요, 죄송해서.”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준이 배고파하는 것 같아서 빵이랑 우유 조금 먹였어요. 오늘은 저도 선약이 있어서 밥은….”

여자는 한사코 괜찮다며 예준의 두 손을 주물렀다. 따뜻한 곳에 있다 나온 탓에 그녀와 예준의 두 손이 동시에 따끔거렸다.

다행히도, 그와 동 세대나 다름없는 젊은 부모들은 예준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기색이었다. ‘오메가잖아’, ‘쟤 아버지가 그렇고 그렇잖아.’하는 수군거림을 아주 안 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제 존재 자체를 꺼리리란 걱정은 무색할 정도였다. 발현 전의 아이들만 있으니 페로몬의 영향을 받을 리도 없는 데다가, 따지자면 구설수보다는 메달리스트라는 타이틀이 더 영향력 있었다.

지혁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감히 이루지 못했을 성과였다. 하루가 좋아하는 일로 보람차게 된 지도 벌써 반년은 되었다.

“들어가세요, 어머니. 준이는 이제 울지 말고.”

“안 울었어!”

끝까지 발을 구르는 아이를 보며 예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머니가 몹시 미안한 기색으로 아이를 뒷좌석에 구겨 넣었다. 정신없는 하루였다. 드디어 고된 시간이 끝났다.

한기에 언 뺨을 매만지던 예준이 도로변을 바라보았다. 올 때가 됐는데, 생각하자마자 따뜻한 두 손이 양쪽 귀에 닿았다. 은근한 향기가 좋아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

손을 겹쳐 잡으며 묻자 태경이 답했다.

“너 내려오기 전부터. 전화할 참이었는데 보이더라고, 그 꼬맹이랑 너.”

“차 안에서 기다려도 되는데.”

“무슨 끈끈이 붙여 놓은 것처럼 달라붙던데. 보면 은근히 애 잘 다룬다니까.”

예준이 머쓱해 뒤통수를 긁었다. 잘 다룬다기보다 그냥 아이들에게는 조건 없이 잘해 주는 편이었다. 아이와 친하지 않았던 인생이기에 처음에는 무서울 정도로 어색했다. 이제는 적응이 되어 친구처럼 유치하게 노는 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매일 약속 시간 못 지켜서 미안해. 괜히 기다리게 하고. 그냥 나 일 다 끝나면 출발해도 된다니까.”

“기다리는 것도 즐거워.”

답하며 훌쩍 눈앞으로 다가온 남자는 오늘도 멋진 코트 차림이었다. 회색빛의 결 좋은 코트는 언젠가 예준이 골라 준 것이었다. 긴 목을 덮는 검은색 폴라 티가 다행히도 따뜻해 보였다.

“…팔불출.”

예준이 나지막이 핀잔을 주었다. 태경은 입매를 휘어 씩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고선 예준의 손까지 붙잡아 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팔이 겹치고 몸이 딱 붙었다. 차로 걸어가는 길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예준의 심장은 뜀박질이라도 한 사람처럼 뛰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예준은 자유로운 한 손으로 괜히 패딩 윗부분을 여몄다. 자꾸만 뺨이 상기되는 이유는 겨울의 찬 공기 탓만은 아니었다.

며칠간 고심한 이벤트를 앞두고 있었다. 이벤트라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규모지만 자꾸만 긴장되었다. 옷이라도 좀 예쁘게 입을 걸 그랬나.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예준은 그저 남자가 이끄는 대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은 자주 가던 도장 근처 한정식집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평소보다 많이 깨작거리자 태경이 물었다.

“속 안 좋아?”

“아니. 아까 준이랑 간식 먹어서 그래.”

눈치를 보며 밥알을 셌다. 이번에는 태경의 시선이 아래쪽을 향했다.

“…혹시.”

은근한 눈빛에 예준이 태경의 정강이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아픈 것도 아니고?”

“응.”

이야기가 길어지면 곧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말 터였다. 상처가 많이 아물긴 했지만, 아픈 이야기는 구태여 하지 않았다. 차분히 답하자 그가 고기 한 점을 밥 위에 올려 주었다.

“남겨도 되니까 천천히 먹어.”

“알았어.”

그러고는 먹는 걸 감상하기까지 하는 모습이 부담스러웠다. 예준은 괜히 입가에 묻힐까 봐 걱정하며 고기를 꼭꼭 씹어 넘겼다. 긴장한 와중에도 밥 절반은 비워 냈지만 맛있기로 유명한 식당인데도 맛이 기억나지 않았다.

후식으로 다과와 차가 나오자마자 태경은 예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방이 막힌 방이어서 예준은 그의 접촉을 그다지 저지하지 않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올려다보자 그가 떡을 포크로 집어 건넸다.

“오늘 형은 뭐 했어?”

“곧 착공식이라 이것저것 준비했지.”

떡을 냉큼 받아먹으며 말하자 태경이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예준도 과일을 집어 태경의 입가로 가져갔다. 저와 달리, 정갈하게 받아먹는 모습을 보면 도련님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준은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남자를 보았다. 태경은 최근 대전 일로 바빴다. 여러 날의 출장 대신 늘 당일치기만 선택했으니 피로가 쌓일 대로 쌓였을 것이다.

생각하기 무섭게 예준의 어깨 위로 남자의 턱이 내려앉았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씻고 나온 것이 분명했다. 턱에 닿는 부드러운 머릿결에서 진한 샴푸 향이 흘러나왔다.

“씻었어?”

“씻었지.”

이따금 바깥에서 만날 때면, 그는 꼭 새신랑처럼 몸을 씻고 나왔다. 의도가 빤하기는 했으나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었다.

익숙한 향기에 긴장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체격을 감당하느라 무거웠지만, 예준은 가만히 남자의 등을 토닥이기만 했다. 그가 목덜미에 입술을 비벼 대도 다 받아 주었다. 그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니까. 간지러워 웃어 주기라도 하면 덩달아 느긋이 마주 웃는 얼굴이 좋았다.

“술 한잔하고 들어가.”

한정식집을 빠져나왔을 때 예준이 말했다. 보통 술은 집에서 마시는 편이지만 모처럼의 데이트였다. 타이밍을 찾아야 했고 술의 힘이 간절한 밤이었다.

“적당히 마실 자신 없는데.”

태경이 몹시 구미가 당긴다는 듯 답했다. 적당히 마실 자신이 없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자제하기 싫다는 의미였다. 꼭 술만 자제하기 싫다는 말일 리 없었다. 예준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마시지 말까?”

“마셔. 마시자.”

어깨를 한 번에 끌어안은 남자가 차로 향했다. 보폭을 맞춰 주기에 조용히 따랐다.

다시 차에 올라 향한 곳은 집 근처 와인 바였다. 몇 번이고 온 적이 있어 입구에 선 직원이 바로 안쪽 룸으로 안내했다. 소주 한 병이 아까워 아껴 마실 때도 있었는데, 넘치는 호사였다.

이제 긴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뻣뻣이 패딩을 벗었다. 크림색 니트 차림으로 안쪽에 앉은 예준은 저번에 남겨 두고 간 와인부터 주문했다.

치즈와 과일 안주, 와인이 테이블에 놓이자마자 예준은 그것을 벌컥벌컥 따라 소주처럼 들이켰다. 연거푸 두 잔. 태경의 얼굴에 의아함이 비쳤다.

“왜 그래.”

보다 못한 태경이 예준의 곁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미끈한 남자의 골반에서 진동이 울렸다. 예준은 곁눈질로 화면에 뜬 영어 이름을 확인했다. 최근엔 영어로 하는 통화가 잦았다. 태경은 빠르게 양해를 구했다.

“이것만 받고 올 테니까 먹지 말고 기다려.”

남자가 고개를 내저으며 괜히 뺨을 툭툭 건드리고 나갔다. 예준은 몰래 두 잔을 더 원샷하고 태경을 기다렸다.

혈관이 뜨거워지는 느낌과 함께 약간의 어지럼증이 생겨났다. 취기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예준은 그제야 주섬주섬 패딩 안주머니를 뒤졌다. 얼마나 고심했는지. 몇 개월을 망설였는지…. 셀 수도 없는 밤, 눈을 감을 때마다 생각했다. 이런 사치스러운 생활이 감히 제게 어울리는지. 저 끔찍하게 완벽한 남자가 제게 가당키나 한지.

몇 번이고 자문했다. 사실은, 이제 태경 없는 미래를 그릴 수가 없었다. 자꾸만 누군가 등을 떠미는 기분이었다. 저 남자를 놓치지 말라고.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만큼 확신을 줘야 한다고.

“…….”

패딩 안주머니에서 예준이 꺼낸 것은 하얀색 봉투였다. 알딸딸한 정도면 충분했는데 너무 과하게 마셨나 싶었다. 비장하게 테이블 위에 놓아둔 봉투가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졌다.

너무 어렵다. 누군가를 좋아하며 간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연애란 예준에게 무척이나 어려운 일 중 하나였다. 그가 자신을 위해 포기한 것들이 많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도 쐐기를 박아야지. 놓치기 싫으니까. 마음을 다잡은 예준이 마침 안으로 들어서는 태경을 보았다. 눈이 반쯤 풀린 것을 보고 태경은 곧장 예준 곁에 앉았다.

“예준아.”

부드러운 목소리에 허벅지 안쪽이 저릿저릿해졌다. 못내 심각한 눈빛의 태경이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없었어.”

목덜미를 감싸 쥔 그가 드러난 목에 입 맞추었다.

“그런데 왜 속도위반일까.”

“…위반.”

“너 먼저 가면 재미없는데.”

입술로 달래는 기술이 탁월했다. 예준은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뜨며 봉투에 손끝을 댔다.

“잠깐만…. 형….”

어깨가 휘청이자 태경이 마른 몸을 움켜잡았다. 왜, 그만해? 묻는 목소리가 낮았다. 스킨십으로 관심을 끌어 술을 못 마시게 할 요량인가 본데, 예준은 호락호락 당할 생각이 없었다.

“이것 좀 봐.”

태경이 입술을 떼어 냈다. 예준은 테이블 위 봉투를 탁탁 두드렸다. 그의 시선도 자연히 그리로 향했다.

“이게 뭔데?”

예준이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눈앞이 좀 어지럽긴 했지만 분명 만취한 건 아니었다. 그냥, 알딸딸에서 조금 더 간 거…. 속으로 생각한 예준이 문서를 꺼내 펼쳤다.

막상 드러내자 얼굴이 터질 듯 화끈댔다. 예준은 벌게진 눈가를 감추지 못한 채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어디 보자.”

느긋하게 턱을 괸 남자가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다급해진 예준이 먼저 선수를 쳤다. 예준의 손가락이 문서의 상단을 향했다.

“여기 이름 써….”

프러포즈에 커다란 풍선이나 꽃 같은 게 꼭 필요한가, 뭐. 대담해졌다. 담백한 고백의 결과를 마주한 태경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혼인 신고서네.”

예준은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에 시선을 고정했다. 침이 꼴깍 넘어가고 손바닥에선 진땀이 배어 나왔다. 남자가 곁눈질로 눈을 맞추었다. 저와 달리 느긋해 보여서 괜히 심통이 났다.

혹시, 원하지 않아서 저토록 차분한 걸까.

“응. 혼인 신고서야.”

발음이 꼬였지만 또렷이 답했다. 아주 좋아하리란 예상과 달리 태경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그가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좀 쓸 만해? 결혼해도 되겠다 싶어?”

“…예전부터 그랬는데.”

“언제부터?”

“그게….”

예준이 눈동자를 굴려 애꿎은 허공을 보았다. 왜 추궁당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술기운 때문에 대답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따지자면 그가 결혼하자고 말했던 때 이미 마음먹은 바였다. 모두 없던 일이 되고 말았으나 마음을 먹은 건 분명 그때였다.

“저….”

입술을 떼려던 찰나였다. 동시에 태경의 입술이 강하게 맞부딪쳤다. 훅, 뒤로 밀리는 뒤통수에 남자의 큰 손이 닿았다. 코가 눌릴 만큼 진하게 키스한 그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거칠게 입술을 깨물어 댔다.

“…우읍!”

혀가 깊게 들어와 알코올의 쓴맛을 모두 훔쳐 내었다. 허벅지를 꽉 틀어쥐는 힘 때문에 예준의 입에선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읍, 자, 잠깐…!”

힘껏 가슴을 밀어내자 남자는 밀려나지 않고 겨우 이마만 맞대었다.

“어떻게 이런 깜찍한 짓을 하지?”

거친 숨이 쏟아졌다. 그제야 활짝 웃는 얼굴을 보고 예준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놀랍게도, 그가 행복에 겨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있었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기억해 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가슴속이 터질 듯 뛰었다. 간지러운 것 같기도, 반대로 아픈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예준은 으름장을 놓듯 말했다.

“이름 쓰고… 도장 찍을 거야, 말 거야….”

태경이 애가 타도록 뜸을 들였다. 저보다 앞서가기 일쑤였던 남자가 망설이자 예준은 불안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버티지 못했다. 그가 등을 단단히 받친 채 코끝을 비볐다. 다시 입술이 맞물리고 혼이 쏙 빠질 듯한 키스가 이어졌다. 혀뿌리가 아플 때까지 살덩이를 얽고 표피가 반들반들해질 때까지 입술을 비볐다. 예준의 목에 쪽쪽 입 맞춘 태경이 또 한 번 장난을 걸었다.

“펜이 없는데.”

“코트에도?”

“응.”

“…차에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의식이 몽롱한 틈을 타 남자의 손이 허리에 닿았다. 훌쩍 시야가 높아지더니 어느새 태경의 허벅지 위였다. 너른 어깨를 가까스로 붙잡은 예준이 눈을 맞추었다.

“후우… 어지러워.”

가슴팍이 꽉 맞붙도록 끌어안고는 또 키스였다. 질척하게 섞여 드는 혀는 부드러웠으나 어디든 틀어쥐는 두 손은 너무 아팠다. 다 빨아먹고 씹어 먹을 작정인지, 그는 쉼 없이 입을 맞추는 데만 몰두했다. 그럴 때마다 예준은 고통스러울 만큼 아프고 또 간지러웠다.

“아, 혀, 형…!”

“하, 진짜 예뻐 죽겠어.”

귀가 터질 듯 뜨거워졌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으…. 이것 좀…! 우리, 얘기를…. 얘기를 해야지!”

“할 거야. 그 전에….”

예준의 뺨을 아프지 않게 깨문 태경이 덧붙였다.

“호칭 정리도 해야지.”

“…무슨 호칭?”

예준은 축축해진 뺨을 닦으며 되물었다. 태경이 달뜬 입술을 귓가에 바짝 붙였다.

“여보, 자기 중에 골라 봐.”

“아, 씨….”

“내가 여보 할까? 네가 자기 할래?”

“아니, 저…. 형….”

대표님이라고 불렀던 때도 있었다. 예준이 생각하기엔 형만 해도 충분히 친밀한 호칭이었다. 예준은 평생 누구와도 저런 낯간지러운 호칭을 쓰리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뜨거워. 이것 좀 놔….”

남자의 몸이 불덩이였다. 엉덩이 아래 닿는 단단한 느낌을 제외하고서라도 태경은 들떠 어쩔 줄 몰랐다. 어? 뭐 할래? 싫으면 네가 여보 해. 재촉하듯 달라붙는 통에 자꾸만 몸이 뒤로 밀렸다. 그 체격으로 이렇게 치대면 곤란하다.

“둘 다 싫어….”

당황해 동동거리던 예준의 입매가 결국 휘어졌다. 피식, 웃음소리를 흘리자 태경이 말간 낯을 보기 위해 눈을 맞추었다.

“뭘 웃어. 나 지금 진지해.”

그가 엄한 표정을 짓는다. 예준이 단단한 턱을 틀어쥐며 말했다.

“…이태경.”

“왜.”

“취했어?”

“아니. 술은 입에도 안 댔어.”

이래서야 계속 도돌이표일 터였다. 예준이 밭은 숨을 내뱉으며 몸을 틀었다. 두 다리가 얌전히 바닥으로 내려오고, 이번엔 가슴이 아닌 등에 남자의 몸이 닿았다.

“…빨리 이거나 적으라고.”

예준을 푹 껴안은 태경이 드디어 혼인 신고서를 제대로 들여다보았다. 그가 코트로 손을 뻗어 펜을 꺼냈다. …봐. 있으면서. 괜히 잇새를 꽉 깨문 예준이 남자의 손목을 직접 끌어당겨 문서 위에 놓았다.

“…이름부터.”

뒷덜미에 또 입술이 닿았다. 뽀뽀 귀신이라도 붙었나…. 살결 위에 몇 번이고 입술을 붙이던 그가 겨우 시선을 바로잡았다.

태경은 뒤채는 예준을 가뿐히 결박한 뒤 칸을 채워 나갔다. 나머지 칸은 예준이 이미 삐뚤빼뚤한 글씨로 채워 놓은 뒤였다. 어쩔 수 없이 터져 버린 남자의 미소를 예준은 곁눈질로 감상했다.

저와 달리, 어른스럽고 반듯한 글씨가 유려하게 문서 위에 박혔다. 예준은 태경이 펜을 그러쥐었을 때가 좋았다. 긴 손가락이 펜대를 감싼 모양이 아름다웠고, 그 손끝에서 섬세한 일들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다소 부럽기도 했다.

“이제 만족해?”

칸을 다 채운 태경이 펜의 뚜껑을 닫으며 물었다.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인 신고서를 곱게 접어 봉투 안에 넣고는 재빨리 패딩 안주머니에 꽂았다.

“만족해….”

두 뺨을 새빨갛게 붉힌 예준이 답했다. 목적을 이루고 보니 어지럼증이 덜해졌다. 알딸딸한 기분도 가셔 버려서 부끄러움을 감추기가 어려워졌다.

예준은 태경을 마구잡이로 밀어낸 뒤 다섯 뼘쯤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는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준아.”

“응.”

“안 추근거릴 테니까 가까이 와. 술 한잔하게.”

쭈뼛쭈뼛 다가간 예준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태경을 보았다. 남자는 적어도 어깨가 맞붙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이끄는 대로 다시 가까이 앉자 빈 잔을 채우는 보랏빛 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급하게 마셨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두 잔을 반쯤 채운 남자가 자신의 것을 먼저 들이켰다.

“나도 맨정신으론 못 버티겠네.”

사랑을 나누는 때야 많았다. 침대 위가 아니더라도 어디에서건 눈만 마주한다면 상대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때때로 버티기 힘든 순간들이 있었다. 예컨대, 혼인 신고서를 무사히 작성하고 서로를 응시하는 지금 같은 순간이 그러했다.

“기다렸어, 사실.”

태경이 고백했다. 그가 답답한 듯 목 폴라 부분을 늘렸다 놓았다. 목을 가다듬고 두 눈의 열감을 조금이나마 잠재운 뒤 시선을 맞추었다.

“먼저 말해 줘서 고마워.”

기특한 듯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녹록지 않은 일을 겪었으니 다시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가 부담스럽기는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저 또한 그러했기에 오늘을 맞이하기까지 여간 고민한 게 아니었다. 예준은 충분히 이해했다. 가벼운 입맞춤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태경이 기꺼운 듯 웃었다.

그는 말한 대로 추근거리지 않았다. 손등을 감싸 쥔 채 다정한 시선만 던질 뿐이었다. 예준은 조금 긴장한 채로 털어놓았다.

“월급 받기는 하지만…. 지금 낀 반지보다 더 예쁘고 좋은 건 살 자신 없었어.”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조명 아래 빛났다. 단도직입적으로 혼인 신고서를 들이대는 건 멋없음을 안다. 그래도 낯간지러운 이벤트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태경이 겹친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속수무책으로 벌어지는 입매가 시원했다. 제 덕분에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자 가슴속 어딘가가 뜨끈하게 데워지는 기분이었다.

“행복하게 살자, 우리. 그럴 수 있을 거야.”

“응.”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급히 들이켠 와인이 취기를 부추겼다. 예준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흔들자 태경이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빼앗아 갔다. 그가 축축한 입술을 닦아 주며 물었다.

“나머지 대화는 침대 위에서 하는 게 어때?”

“…음.”

이런 순서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예준이 남자의 어깨에 턱을 대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태경이 앞머리를 들추며 이마에 손을 댔다. 열감 위에 열감이 더해졌다.

“…어떤 대화?”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뜬구름 같았다.

“잘할 자신 있는데.”

부드럽게 아래로 향한 손이 뺨을 그러쥐었다. 유혹적인 눈빛을 보자 마음이 동했다. 짓씹는 아랫입술이 붉었다.

“참 새신랑다운 말이네….”

생각만 하자던 것이 그만 말로 흘러나오고 말았다. 어쨌거나, 예준은 기분 좋은 촉감에 홀려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는 길엔 뒷문을 이용했다. 종종 그런 일이 벌어졌다. 어느덧 서넛으로 늘어난 경호원들은 늘 주변 분위기를 기민하게 살폈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척을 느끼면 따로 통로를 마련해 주곤 했다. 때때로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영도에서 허리를 베였을 때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았으나, 감시하는 눈이 있다는 걸 안 지는 꽤 오래되었다.

“조심해. 미끄러우니까.”

건물 뒤편으로 나서자 소복하게 쌓인 눈이 보였다. 진눈깨비처럼 질척한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뽀득뽀득 소리를 내는 눈을 밟으며 예준은 태경과 함께 차로 향했다. 추위 속으로 나서자 드디어 열감이 식는 기분이었다. 차에 오르려던 예준이 문득 태경을 붙잡았다.

“바람 좀만 쐬다 가.”

“안 추워?”

“안 춥고…. 지금 너무 뜨거우니까.”

예준이 차디찬 창에 뺨을 대었다. 태경이 창과 뺨 사이로 얼른 손을 밀어 넣었다. 그가 동그란 머리를 바로 세우며 말했다.

“나 좀 급한데.”

“…그래도.”

차체에 등을 기대고 선 예준이 고개를 떨구었다. 후우, 내쉬는 호흡 탓에 입김이 하얗게 퍼졌다. 속수무책으로 진눈깨비를 맞는 아이를 응시하며 태경은 담배를 물었다. 후우, 그의 입가에서 더 밀도 높은 연기가 퍼졌다.

“형.”

“왜.”

다정한 대답에 예준의 입가가 휘어졌다. 정신이 빠져 차체를 닦으며 다가간 예준이 남자의 코트 속에 파고들었다. 패딩 때문에 버거웠는지 태경이 양팔을 벌렸다. 그는 미련 없이 담배를 비벼 껐다.

“내가… 행복하게 해 준다고 하면… 믿을 거야?”

어쭈…. 태경이 자신보다 한참 낮은 어깨를 감싸며 답했다.

“이미 행복한데, 여기서 뭘 더 해 주게?”

“다. 다 해 주지.”

“여보도 안 되고, 자기도 안 된다며.”

뚝, 말을 그친 예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저걸로 얼마나 사람을 들들 볶아 댈지 불 보듯 뻔했다. 차라리 반응해 주지 않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예준은 남자의 니트에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런 거 말고…. 더, 더 중요한 게 많잖아.”

나 때문에 잃은 거. 나 때문에 포기한 거.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연거푸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자, 태경이 등을 쓰다듬었다.

예준의 뜻대로 잠시간 시간을 흘려 보낸 그는 고민에 잠긴 기척이었다. 부드럽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의 어둠을 살피던 남자가 속삭였다.

“너 나한테 빚진 거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나 두고 바람만 피우지 마.”

“그럴 일… 없어….”

이대로 잠들 수도 있을 만큼 포근한 품이었다. 그럼에도 벌써 억울한 기분에 예준은 재차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행위가 태경에겐 그저 애교나 다름없었다. 더 안아 달라고 낑낑대는 강아지.

그가 웃었다. 그러고는 힘이 빠져 아래로 미끄러지는 예준을 훅 끌어 올렸다. 거리를 두고 선 경호원을 부르자 차체가 삑, 하고 울었다. 차에 올라 어깨를 내주었다. 그새 차가워진 귀를 문질러 주자 끙, 끙, 앓기 바쁘다.

뽀얀 뺨을 어루만지는 손끝이 뜨거웠다. 슬쩍 페로몬을 풀자 골목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감긴 두 눈이 바르르 뜨였다. 말갛게 바라보는 눈이 불순했다. 다분히, 태경이 의도한 바였다.

경호원이 운전대를 잡은 형편이었다. 취한 와중에도 그를 의식한 예준의 눈동자가 옆으로 굴렀다. 꽉, 손을 맞잡는 힘이 제법이었다.

“…앞에서 보여?”

백미러로 본다면 당연했다. 이미 익숙한 경호원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으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뒷좌석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응.”

“그럼… 키스….”

이어 뭐라 중얼거리던 예준이 인상을 구겼다.

“내 목소리도… 들릴까?”

“아마도.”

꼴린다면 분명 페로몬 탓이었다. 그러나 예준은 인지하지 못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다리를 꼬며 기댄 머리를 비볐다. 씩, 입꼬리를 올린 태경이 뺨을 감싸 입술을 맞대었다.

“음악 좀 틀어.”

코끝이 닿자마자 명령했다. 대답 없이 음량을 높인 경호원은 눈치껏 기척을 죽였다. 눈을 감고 입술을 벌린 예준은 쉽게 엉겨들었다. 페로몬을 더 풀었다간 곤란할 만큼 젖을 것이다. 흥을 돋우는 정도에서 멈추었는데도 예준은 얼굴을 붉힌 채 화답했다.

“…촉촉해.”

예준이 귓가에 속삭였다. 경호원이 듣기라도 할까 봐 몸을 사렸다. 고른 치아가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간지러운 숨소리가 들렸다.

“입술이?”

끄덕인다. 태경은 마냥 웃었다. 짓궂다고 예쁜 얼굴을 찌푸릴까 걱정돼 얼른 입을 맞추자, 허벅지 안쪽으로 손이 들어왔다.

탄탄한 근육을 꾹꾹 눌러 대는 손이 귀여웠다. 쪼옥, 연거푸 입 맞춘 태경은 차가 무사히 차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까지 예준을 놓아주지 않았다.

*

바깥의 인기척에 눈을 뜬 예준은 쉬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엎드려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는 끙끙대는 신음만 흘렸다. 잠들었다 깨어날 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들이쳤다. 주로 아래쪽, 다리 사이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은 허리와 어깨를 지나 목의 갈증까지 이어졌다.

“하아….”

이상하게도 안쪽이 내내 끈적거렸다. 보통은 태경이 밤사이 닦아 놓는데 오늘은 아닌 모양이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어 기척을 듣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곧 태경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 깼어?”

“응….”

겨우 대답하자 남자가 다가왔다. 침대 옆에 몸을 낮춰 앉은 남자의 손엔 커피가 들려 있었다. 그는 이미 씻은 뒤였고 머리카락도 보송보송했다. 입고 있는 얇은 니트에선 좋은 향기가 났다.

“아파?”

“죽겠어.”

억울했다. 예준은 아직 축축한 채로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과 달리 태경은 지금 당장 외출해도 이상하지 않을 차림새였다. 그가 젖은 뺨에 입 맞추며 물었다.

“아침 해 줄까.”

“응.”

그건 그렇고.

“왜 나 안 닦아 줬어…?”

태경이 도톰한 입술을 벌려 웃었다. 그의 시선이 이불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예준의 두 발로 향했다.

“가끔은 이런 것도….”

말을 끝맺지 못한 태경은 테이블에 커피를 놓아두고 예준의 발 쪽으로 향했다. 아슬아슬하게 발목에 걸려 있던 시트가 쭉 밀려 올라갔다. 순식간에 종아리와 오금, 허벅지와 엉덩이까지 훤히 드러났다. 남자가 엉덩이 양쪽을 벌리자 찔걱거리는 소음이 나며 예준의 등줄기엔 소름이 돋아났다.

“하으….”

얼마나 해 대었는지. 통증은 그렇다 하더라도 끈적한 점액질의 불쾌감은 참기가 힘들었다. 태경은 엉덩이 사이를 들여다보며 엄지로 허벅지 안쪽을 훔쳐 내었다.

“너무 부었네….”

읊조리는 목소리가 낮았다. 아찔한 감각에 예준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뭐 해.”

“벌써 닦을 필요 없어. 충분히 쉬어도 돼.”

당장 씻겨 줘도 모자랄 판국에 무슨 말인가 했다. 태경은 예준의 미끈한 다리를 매만지다가 일어섰다. 그는 침대에서 몇 걸음이나 떨어진 소파에 앉았고 여유롭게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예준은 여전히 하반신을 드러낸 채 누워 있었다.

“이러고 있으라고?”

“보기 좋아.”

“변태야?”

“맞아.”

한 치의 죄책감도 없어 보이는 얼굴이 얄미웠다. 알몸을 보이는 건 때때로 부끄럽지만, 이제 알몸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해 봐야 태경뿐이었다.

길게 한숨을 내뱉은 예준은 다시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남자는 피로에 지친 몸을 배려하지 않았다. 혼인 신고서의 여파라 할지라도 동이 틀 때까지 들쑤셔지는 건 감당이 안 되었다. 하도 못살게 굴어서 억울해 미치겠는데도 아침, 말끔한 남자의 얼굴을 보자 모든 게 다 잊혔다. 밤일을 잘해서 사랑받는 남편, 딱 그거였다.

곁눈질로 남자를 살피자 제 다리 사이에 고정된 시선이 보였다. 변태라고 핀잔을 주긴 했지만, 남자의 시선은 추잡스럽기보다 그저 온몸이 저릿하게 야할 뿐이었다. 예준은 꿀꺽 침을 삼키고 눈을 붙였다. 어차피 전부 닦아 주어야 할 사람은 그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눈을 붙였다 깨어났는데도 남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예준은 비척비척 일어나 앉았다. 다리가 벌어진 덕분에 안에 들어찬 것이 울컥 새어 나왔다. 여태, 아직도 닦아 주지 않은 것이었다.

남자가 진동하는 핸드폰을 들어 귓가에 대었다. 예. 짧은 한마디 이후에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보았다. 예준은 보란 듯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갔다. 하얗게 흐른 것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예준은 남자 앞에 주저앉아 단단한 무릎에 고개를 기대었다.

머리카락을 만져 주던 태경이 다시 태블릿을 들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나 싶어 예준은 태블릿 화면을 제 쪽으로 향하게 했다.

[두화건설 김향선 사장, 사망. 향년 51세]

얼마 만에 보는 이름인가 했다. 놀라 눈을 크게 뜬 예준이 태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차분한 시선으로 상대의 말을 들었고 동요하는 기색은 없었다. 연거푸 제 머리만 쓰다듬을 뿐.

“자그마치 8개월 만의 성과군요.”

한참 후에 흘러나온 말을 듣고 예준의 어깨가 굳었다. 그도 연루된 것일까. 박정명을 죽였을 때처럼.

제 앞에서 이토록 다정한 눈빛을 보내는 남자가 한편으로 그런 짓을 벌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혐오하던 열성 알파들처럼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겠으나 가담자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그저 건실한 회사의 대표였던 사람이 이제는 세상의 추악한 면을 지나치게 많이 깨우친 처지였다. 어쩌면 그의 뿌리가 검고 축축했다는 사실을, 이석준 회장의 다른 일면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예준은 그가 저를 위해 행했던 복수가 지금의 일과는 다르다는 사실도 분명 알았다. 악성 리뷰를 남겼던 열성 알파를 응징한 일도, 박정명을 죽인 일도 보스와 관련한 일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절연의 지난한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예준은 다소 충격적인 기사를 보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인생의 불가피한 한 과정에 놓여 있었다. 예준 자신이 촉매제가 되었을지라도, 그가 원했던 것처럼 그를 판단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줄 작정이었다.

“그럼 착공식에서 보시죠.”

깔끔하게 말한 남자가 전화를 끊었다. 예준은 구태여 태경의 손을 당겼다. 뺨에 놓고 비비자 어렵지 않게 그를 웃게 할 수 있었다. 곧 겨드랑이 아래로 손이 들어와 몸을 쑥 들어 올렸다. 예준은 남자의 허벅지 위에 앉아 바지 위로 정액을 뚝뚝 흘려 대었다.

“더러워지는데.”

“나만 깨끗해서 억울한 거 아니었어?”

“맞아.”

질척한 몸마저 보드라운 니트에 기대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목덜미에 코끝을 파묻자 태경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몸속에 있는 거 다 빼내고, 씻고, 약 바르고. 그 뒤에 아침 먹자. 참을 수 있겠어?”

“배는 안 고파. 빨리 씻을래.”

예준을 가뿐히 들어 올린 태경이 침실을 나섰다. 휘적휘적, 보폭이 큰 걸음 탓에 예준의 꼬리뼈가 징, 하는 감각과 함께 통증을 일으켰다.

겨우 샤워 부스에 도착한 예준은 발을 딛자마자 푹 주저앉았다. 다리의 탈력감이 생각보다 심해서였다. 예준은 두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은 채 힘없이 말했다.

“형은 왜 이렇게 힘이 세? 그것도….”

체력뿐만 아니라 발기의 강직도도 유지력도 사람의 것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아무리 우성 알파라지만 이대로라면…. 태경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무릎을 굽혀 앉았다. 검은색 바지에 하얀 얼룩이 남아 있었다.

“예준아. 어제는….”

말을 꺼낸 남자가 눈을 접어 웃었다. 그가 어깨를 끌어안으며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우리 첫날밤이었잖아.”

예준의 얼굴에 불이 붙었다. 혼인 신고서를 같이 썼으니까 따지자면 그런 셈인가. 예준은 새빨개진 얼굴로 첫날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어떻게 참을 수 있겠어. 지금도 참느라 죽겠는데.”

“더 하면 나 죽어.”

“초야 치르고 죽으면 억울하지.”

내벽을 억지로 벌린 탓에 안에 든 것들이 쏟아졌다. 애무할 때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던 손끝이 내벽 깊은 곳을 눌렀다. 예준이 새된 신음을 쏟아 내자 태경은 달아오른 귓가에 입술을 맞붙이며 속삭였다.

“첫날밤치곤 너무 능숙하던데.”

“너도야. …꼰대.”

반박하듯 속삭이는 입술이 예뻤다.

평생, 예쁠 것이다.

*

착공식이 있는 날은 화창한 날씨였다. 예준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정원을 오가는 경호원들을 살폈다. 주방에서 태경이 구워 준 토스트를 씹고 있는데, 막 샤워를 마친 그가 눈앞을 훅 가로질러 갔다.

수건이 허리에 아슬아슬하게 둘려 있었다. 짧게 눈을 맞춘 그는 곧 드레스 룸으로 사라졌고 예준은 토스트를 다 먹자마자 스툴에서 내려왔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두 발이 드레스 룸을 향해 저절로 움직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막 셔츠를 꿰입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하루는 얌전히 집에 있는 거야.”

그가 타이를 꺼내며 말했다. 예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갔다.

“지혁이한테도 잘 말해 뒀고 딱히 갈 데도 없어.”

아침부터 묘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전 랜드마크와 관련한 사업은 태경이 꽤 공을 들이는 일 중 하나였다. LK를 나온 후엔 거의 그 일에만 몰두한 데다가 사업의 근간에는 조직의 힘이 존재한다는 걸 예준도 알고 있었다.

“도망가면 쫓아가. 지구 끝까지. 알지?”

남자의 말에 예준은 팔뚝을 문지르며 진절머리 쳤다. 씩 웃으며 코앞까지 다가가자 태경 역시 고개를 내저으며 미소 지었다.

“조심해, 형도. 알지?”

수틀리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이들이 바로 조직폭력배였다. 경호원들이 지켜 주는 집에서 머무를 저보다는 바깥에 있을 그가 더 조심하는 것이 옳았다.

능숙하게 타이를 한 번 감은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타이를 매는 중간 과정에서 잠깐 멈추었다. 배짱을 부리며 서 있기에 예준이 얼른 매듭에 손을 가져갔다. 그가 계획한 하루의 시작을 그르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 이거 아직 서툰데.”

“도와줄게.”

어설프게 움직일 때마다 태경이 손을 겹쳐 도와주었다. 그럴 거면 혼자 하지, 그런 생각이 들어도 손이 닿을 때마다 저릿저릿 달아오르는 감각은 좋았다. 이어 커프스단추를 착용한 태경이 재킷을 입었다. 마지막으로 손목시계를 고르니 단장이 완성됐다. 그가 격식 있는 차림새를 한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저녁은 집에 와서 먹을 거니까 가능한 한 먹지 말고 기다려. 너무 늦겠다 싶으면 전화할게.”

“응.”

순순히 대답한 예준은 남자를 한번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태경이 흑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깥을 흘끗거렸다. 더 놔두었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에 얼른 등을 떠밀어 버렸다.

날씨는 청명했지만, 공기는 차가운 날이었다. 그가 준비를 마치자 정원 쪽에 서 있던 경호원들이 분주해졌다. 예준은 괜히 주변 시선을 신경 쓰며 남자를 따랐다.

“다녀올게.”

현관 앞에 다다른 태경이 뺨에 뽀뽀해 주었다. 예준은 달뜬 뺨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으나 같은 행위라도 결혼한 이후의 느낌은 조금 달랐다. 더 낯부끄럽고 간지러웠다.

새삼 머쓱해하는 예준을 태경은 그저 사랑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까치집 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준 그는 더 말을 더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뺨에, 이미 사라졌어야 마땅할 온기가 남았다.

사랑의 감각이었다.

*

세단 뒷좌석에 앉은 태경이 피로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과하게 선팅된 창으로는 교외의 너른 들판이 도리어 삭막한 풍경으로 보였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은 두 명의 경호원, 뒤를 따르고 있는 다른 세단까지. 자못 숨이 막혔지만 과한 조치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긴장을 놓으면 순간을 놓치지 않을 적이 많으니까. 지난봄 이후로는 매사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었다.

“정 사장님 전홥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태경은 무미건조하게 말을 뱉었다.

“정 사장님.”

―일찍부터 현장 와 있는데 별다른 특이점은 없습니다. 수상한 자들이 보이면 우리 애들이 조용히 처리할 겁니다.

이 회장과 정 사장 조직은 물밑에서 끊임없이 마찰해 왔다. 땅따먹기처럼 서로의 영역을 장악하기도 뺏기기도 하는 와중이었다. 때로는 손쉽게, 때로는 어렵게 일을 치렀다. 지하 세계에선 하루가 멀다고 사건 사고가 터지는데 명성건설과 대전 사업에는 이렇다 할 타격이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타격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착공식에서 깽판을 놓자고 마음먹으면 못할 것도 없는 조폭들이었다. 정 사장은 깡패들 사업이라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니 오늘 착공식은 최대한 점잖게 보일 필요성이 있었다.

다만, 태경의 관심은 그쪽에 있지 않았다. 운을 떼려는데 정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명성 쪽에서 필사적으로 막고 있긴 한가 본데 곧 김향선 사장, 사실은 피살이란 기사가 뜰 겁니다. 그쪽에 우리 애들 심어 놓고 숨죽인 보람이 있지요. 녹취록이 있어서 이번엔 발뺌 못 해요. 경찰에도 제보했으니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을 겁니다.

“직접 살인도 아니고, 교사 혐의라 만족스러운 결과까진 못 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도 조직 보스가 감방행인데요. 벼르고 있던 놈들이 그 자리 먹으려고 혈안이 될 겁니다. 몇 년 살다 나오면 더는 예전의 위치가 아닐 거고요.

두화건설 김향선 사장 구속 당시, 이 회장은 잘못된 선택을 저질렀다. 수십 년을 동고동락한 김향선을 감싸는 대신 꼬리 자르기를 택한 것이다. 그 선택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 싸움으로 번졌다. 오늘의 동료가 내일의 원수가 되기는 순식간이었다. 김향선은 자신의 세력을 누르려는 이석준에게 반항했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이들끼리의 전쟁이었다.

정 사장은 음흉하게 그 틈을 파고들어 조직의 세를 키웠다. 나무줄기를 감싼 덩굴처럼 얽혀 들었고 이제 힘주어 당길 일만 남아 있었다. 곧, 우두머리가 자리를 비운다. 정 사장에게는 거대한 고목을 부러뜨릴 절호의 기회였다.

“대표님. 뒤에 따라붙은 차가 있습니다.”

적당히 통화를 마무리한 태경이 좌석에 깊게 등을 기대었다. 직감은 언제나 옳았고 이번에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태경은 붙은 차를 따돌리자고 말하는 대신 황량한 대지를 응시했다.

“차 세워.”

“그냥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담판을 지어야 했다. 태경은 예준이 앞으로도 두려움에 떠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 삶은 자신의 통제 아래 있다 보기 어려우므로.

“세워.”

재차 말하자 경호원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워졌다. 차는 곧 너른 갓길에서 멈추었다. 태경의 두 번째 세단까지 정차하자, 제3의 차량이 그 뒤를 따랐다.

미행이 아니었다. 존재감을 노골적으로 과시하는 고급 세단이 미행일 리 없었다. 태경은 긴 다리를 뻗어 차에서 빠져나왔다. 멀리, 차량에서 내린 이석준이 자기 부하들을 저지시키는 것이 보였다. 쾅, 내리찍는 지팡이 소리를 들은 듯한 착각이 일었다.

“따라올 필요 없어.”

태경 또한 동행하는 경호원들을 만류한 채 갓길을 따라 걸었다. 황량한 대지는 사실 겨울의 메마른 갈대밭이었다. 드나드는 차량은 많으나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기묘한 길.

칼바람이 살을 긁는 듯했다. 그러나 속에 품은 열은 도리어 들끓었다. 지팡이를 짚고 절뚝절뚝 걸어오는 이 회장의 얼굴에선 명확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화가 나 보이기도, 반대로 초연해 보이기도 했다.

태경은 휘적휘적 빠른 걸음으로 그 곁으로 다가갔다. 지척에 다다랐으나 아무런 말 없이도 걸음걸이는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제법 시간을 들여 자리를 옮겼다. 모습은 보이지만 말소리는 누구도 듣지 못할 곳에서 멈추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이석준은 피로해 보였다. 아버지란 호칭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태경은 고대했던 단어를 떠올렸다.

자멸.

이 회장이 한참의 공백 끝에 입을 뗐다.

그 너머로 일제히 불빛들을 빛내며 다가오는 경찰차 행렬이 보였다.

*

손에서 놓쳐 버린 냄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사색이 된 예준이 가까스로 발을 옮겨 뜨거운 토마토소스를 피했다. 고집을 피워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를 돌려보냈기에 망친 음식 정도는 스스로 처리해야 했다.

“아…. 사십 분이나 졸인 건데….”

다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공들인 음식이 바닥에 떨어진 꼴을 보자 속이 쓰려 견딜 수 없었다.

네 시부터 준비한 저녁은 순조롭지 못했다. 태경이 조리하는 걸 별로 내켜 하지 않기도 하고 소질도 없어서 미루었던 게 화근이었다. 인터넷 동영상을 보고 똑같이 따라 하는데도 실수가 잦았다.

뒤통수를 긁적인 예준은 바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물녘이 빠른 겨울이라고는 하나 이미 여섯 시였다. 얼룩 하나 없이 닦고 일어서자 마침 오븐에서 띵 하는 알람이 울렸다. 다행히 채소구이는 성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간을 하고 올리브유를 둘러 굽기만 하면 되는 음식이었다.

다시 새 냄비를 꺼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예준은 태경이 아닌 치문의 이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어. 치문아. 저녁 먹었어?”

―아직. 아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 씨발…. 착공식 난장판이었다는데 소식 들었어?

예준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조직에서 손을 뗀 치문이 왜 그 일을 들먹이는가 싶어 미간을 좁힐 뿐이었다.

“제치문. 너 손 털었잖아. 그걸 어떻게 알아?”

―아니. 뉴스 보는데 나왔어. 조폭들끼리 싸움 났다고. 거기 이 대표도 참석하는 자린 거 그 정도는 나도 알지!

그보다는 혹시 몰라 섭외해 둔 소식통에게 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한번 조직 생활을 한 사람은 제 버릇 고치기가 힘든 법이다.

예준은 잠자코 뜸을 들였다. 기함해야 마땅할 일이나….

“형한테 전화 왔었어. 현장에 지각해서 싸움 구경도 못 했대.”

―…뭐?

태경은 영리하고 몸을 사릴 줄 알았다.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올라야만 성이 차는, 권력에 미친 알파들과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오늘만 해도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뉴스가 뜨고 그에게 전화를 받기까진 십 분 남짓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저를 안심시키는 게 가장 먼저인 남자였다. 결혼한 사이에 그런 신뢰 정도는 있어야 했다.

“털끝 하나 안 다쳤고, 집으로 오는 길이라고 연락도 받았어. 그러니까 너도 걱정 안 해도 돼.”

예준은 새 냄비에 불을 올렸다. 어차피 망칠 거였으니 미리 토마토를 씻어 놓길 잘했다. 전화기 너머로 우물쭈물하던 치문이 버릇없이 전화를 툭 끊었다. 걱정하고 있다면 위로해 줄 작정이었나 본데, 의도가 빗나가자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예준은 다시 조리를 시작하며 치문에게 문자를 남겼다.

[저녁 뭐 먹는진 모르겠지만 맛있게 먹어 조만간 보자 ^_^]

치문이 국밥을 찍어 보냈다. 국밥 한 그릇의 맞은편은 비어 있었다. 씁쓸하게 웃은 예준은 구태여 한 번 더 문자를 보냈다.

[맛있게 먹어]

치문은 아직도 국밥이 좋은 모양이다. 녀석과 지냈던 날들을 문득 떠올리자 가슴속이 울렁거렸다.

*

“…야지.”

“…준아….”

“여….”

식탁에 이마를 대고 있던 예준이 느리게 눈을 떴다. 얼마나 흘렀는진 알 수 없었으나 눈앞에 놓인 음식은 모두 식어 있었다. 이명과도 같은 음성이 또렷해지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겨우 몸을 일으키자 귓가에 바짝 입술을 댄 남자가 말했다.

“여보. 일어났어?”

“…윽.”

부러 속삭이는 듯한 말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기어코 장난을 친 태경이 소리까지 내어 가며 웃었다. 예준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밀어내고 진절머리를 쳤다. 간지럽게…. 읊조리며 귀를 벅벅 긁어 대자 나란히 앉은 그가 눈을 맞추었다.

“늦어서 미안해.”

시계를 들여다본 태경이 벌써 아홉 시네, 하고 중얼거렸다. 나갈 때와 달리 흐트러진 셔츠에 은근히 술 냄새까지 풍기고 있다. 예준은 형태가 예쁘지 않은 세 가지 음식을 내려다보다 눈을 흘겼다.

“술 마셨어?”

“응.”

“누구랑?”

“혼자.”

예준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그가 이 회장을 만났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걱정되어 경호원에게 몰래 보고를 받았으니까.

몇 개월 만의 조우인지도 까마득했다. 병원에서 만났던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보스를 마주한 적 없었다. 그가 보스를 만났다면 동요했으리란 사실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양부라 할지라도 그를 키워 준 아버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므로.

“괜찮아?”

“괜찮지.”

예준은 스툴에서 일어나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술기운 때문에 그의 페로몬은 완벽하게 갈무리되지 않았다. 심장 박동은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집으로 오기까지 감정을 눌렀다는 사실까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폭발이든 응집이든, 잘 다듬어진 그것을 예준은 쉬이 읽어 낼 수 없었지만.

태경이 마른 등을 문지르며 물었다.

“네가 한 거야?”

“응. 꼴이 좀…. 모양은 저래도 맛은 그럭저럭 괜찮아.”

민망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솜씨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려와 달리, 태경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좋은 걸 놓쳤네, 내가.”

“맞아. 술 먹을 거였으면 그냥 나랑….”

사실은, 아니었다. 온전히 혼자만의 세계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는 법이다. 예준은 태경이 겪어 온 삶의 절반도 함께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조건 없는 사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제 안에도 역시 그가 해결해 주지 못하는 응어리가 존재했다.

“데워 줄 테니까 지금이라도 먹을래?”

“좋지.”

위로하고 싶었다. 그에겐 이제 자신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예준은 분주하게 움직여 다시 오븐에 불을 밝혔다. 태경은 턱을 괸 채 어두운 정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음식을 데우며 드문드문 남자의 기척을 살폈다. 저 깊은 눈으로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상념에 잠겨 있는데 태경이 먼저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혼자 주방을 오가는 걸 가만히 지켜볼 남자가 아니었다. 예준은 저보다 훨씬 능숙하게 팬에 불을 올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법인데. 저녁 해 준다기에 기대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정성 들였을 줄은 몰랐어.”

“별거 아니야. 아주머니가 장 보는 거 도와주셨고 레시피는 인터넷에서 본 거라.”

정말 별거 아닌데. 누가 보면 대단한 선물이라도 받은 줄 알겠다. 셔츠를 걷어 올린 그가 칭찬하듯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맛있는 냄새 난다.”

뺨에 살짝 입 맞추고 물러난 남자는 평온해 보였다. 피로감이 묻어 있긴 했지만, 겉으로만 보면 낮에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예준은 못내 복잡한 심경이었으나,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남자를 따랐다.

식탁 위에 데운 음식을 놓고 곧장 태경 옆에 앉았다. 솔직히 말해 와인은 뭐가 뭔지 몰라서 냉장고 가장 앞에 있는 것을 꺼내 왔다. 태경이 자주 마시는 레드 와인이었다. 앞접시에 채소구이와 구운 소고기를 덜어 주자 흥미로운 시선이 와 닿았다. 뭔가 부끄러워서 예준은 얼른 자신의 앞접시도 두둑이 채웠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태경이 늦는 바람에 예준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예준은 더 망설이지 않고 고기를 집어 먹었다.

“먹을 만해.”

그렇게 말하고 남자의 입에도 고기를 넣어 주었다. 태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 잔에 손을 가져갔다. 단정하게 씹어 넘긴 남자가 흡족한 눈빛으로 웃었다.

“맛있는데 왜 그렇게 눈치를 봐.”

음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너무 흘끗거렸나 싶어 머쓱하게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태경이 스툴을 더 가까이 당겨 앉았다. 좁은 공간에 무릎이 교차해 맞물렸다. 긴 다리를 자기 종아리에 얽은 남자는 아래편의 노골적인 접촉에 비해 느긋하게 접시를 비웠다.

바깥의 바람 소리가 제법이었다. 음식을 다 비우자 남은 건 술뿐이었다. 태경은 연거푸 잔을 채웠다. 예준은 취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종종 혀끝만 대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데 자꾸만 가슴속 어딘가가 쿡쿡 쑤셨다. 어쩐지 눈가에도 물기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눈을 비비고는 남자가 내미는 손에 깍지를 끼웠다. 단단한 힘과 달리 그의 어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좋다. 너랑 이런 저녁 시간 보내는 거.”

여유롭고 조용했다. 매일같이 저녁을 먹지만, 오늘의 감각은 조금 다를 것이다. 어쩌면 내일은 더 새로울 수도 있었다. 같은 일상이 매일 다르게 느껴졌다. 그런 사소한 변화가 삶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나도.”

예준은 다가오는 남자에게 제 어깨를 내어 주었다. 태경은 거의 안다시피 기대어 어깨에 턱을 대었다. 취기 어린 숨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즈음 예준은 조금씩 걱정을 내려놓았다.

“형. 오늘 많이 힘들었어?”

“뭐, 조금.”

별일 아니란 듯이 치부한 남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목덜미에 닿는 날렵한 코끝을 감당하며 예준은 고개를 기울였다. 무언가 원하듯이 살결 위에 입술을 비비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다 잊고, 새로 시작해.”

무턱대고 던진 말이었다. 앞과 뒤가 툭 잘린, 마디 한 마디를 태경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뿐만 아니라, 형도 다 잊고 새로 시작해. 아무리 어른이어도 다 괜찮은 사람은 없잖아. 그냥 괜찮아지려고 노력하는 거지. 그러니까 아프게 하는 것들은 다 잊어요. 나는 벌써 많이 잊었어. 형 덕분에.”

버린 것들의 빈자리는 새로운 온기로 채우면 그만이다. 예준은 제 기억 사이사이에 스민 그의 존재처럼, 그의 기억 또한 자신의 존재로 채울 수 있다고 믿었다. 대단한 일들만이 치유의 힘을 가진 것은 아니니까.

“기특해.”

태경이 나지막이 웃었다. 예준은 붉어진 귀를 감추려 그를 꼭 끌어안았다.

“앞으로 저녁 약속엔 안 늦는다고 약속해.”

“안 늦을게.”

“혼자서 술도 마시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꼭 얘기하고.”

쪽쪽, 소리와 함께 목덜미가 촉촉해졌다.

“여보가 하는 말은 무조건 듣지.”

몸을 떼어 내며 눈을 맞추었다. 의외로 남자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묻어 있지 않았다. 핀잔을 주려다가 도리어 당황한 예준의 두 눈이 커졌다. 기습적으로 전해진 야릇한 시선을 마주하자 다리 사이가 끈적거리는 기분이었다.

“혼자 술 마시는 거 쓸데없는 짓이었어. 더 빨리 와서 너랑 같이 있었어야 해.”

닿기만 해도 이렇게 좋은데. 덧붙여 속삭이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로서도 처음 겪는 감정일 것이므로 지각을 더 문제 삼을 이유는 없었다.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온 손이 매끈한 안쪽을 어루만졌다. 예준의 얼굴이 상기될수록 태경의 눈빛은 도리어 더 도전적으로 변했다. 예준은 상상했다. 그가 또 어떤 말을 내놓을지.

“같이 목욕할까.”

어느 누가 저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걸로 행복하다면 더 할 말은 없다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예준은 잠시간 고민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저 눈빛이야말로 폭주의 전조다. 제동을 걸어야 했다.

“그럼 목욕물 받으면서 같이 설거지할까?”

부러 웃으며 묻자 태경이 반격했다.

“좋지. 대신 네 뒤에 서는 거 허락해 줘.”

“내 뒤?”

“너 안고 하면 좋은 냄새 나거든.”

그러면서 엉덩이도 좀 괴롭히겠다는 의미였다. 목덜미도 씹어 대고 앞섶도 비벼 대면서 사람을 못살게 구는 설거지엔 이미 익숙했다.

“알았어.”

먼저 일어난 예준이 빈 그릇을 싱크대에 놓았다. 욕조에 물을 틀고 돌아온 남자가 나머지 그릇들을 한 번에 옮겨 주었다. 예준은 흐트러진 남자의 셔츠로 손을 뻗었다. 이미 두 개 열려 있던 단추를 하나만 더 풀고 돌아섰다.

바로 몸을 밀착한 태경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꼬리뼈에 단단한 성기가 닿았다. 예준은 뜨거운 목덜미를 모른 척하며 물을 틀었다. 스펀지에 거품을 낸 그가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저를 안고도 무리 없이 설거지해 내는 게 늘 신기했다.

덕분에 예준이 할 일이라곤 그저 싱크대를 짚고 서 있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 채로 남자가 건네는 전희를 받아 내면 되었다.

“시도 때도 없어.”

툭 털어놓은 핀잔에 태경은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서 사랑받잖아.”

말이나 못 하면.

속으로 내뱉는 투정과 달리, 예준의 입가는 호선을 그렸다.

*

느지막이 일어난 예준은 태경이 소파에 앉은 모습을 보며 침실을 빠져나왔다. 테이블엔 식은 커피가 놓여 있었다. 때맞춰 거실 테이블에 놓인 태블릿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두화건설 김향선 사장의 사망 원인이 피살로 밝혀진 가운데, 명성건설 이석준 회장이 살인 교사 혐의로 구속되었….]

예준의 눈이 커졌다. 익숙한 이름을 듣자 가슴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태경이 이 회장을 만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김향선 사장의 죽음은 정 사장과 태경의 합작인 줄로 짐작하지 않았던가.

살인 교사라니. 조직 내에선 같은 편에게 칼끝을 겨누는 경우가 흔했다. 우두머리의 위치에 있는 자들도 예외는 아닐 터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상치 못한 뉴스였다. 예준은 가까스로 당혹감을 감춘 채 태경 곁으로 다가갔다.

아직 오전이어서 태경은 편안한 차림이었다.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자신을 보았다.

“일어났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묻기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준은 남자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이 회장과 관련한 사건은 전체 뉴스의 일부일 뿐이었지만, 뉴스가 지나가고도 한동안은 정적만 맴돌았다.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예준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뉴스의 내용과 달리, 본능적인 안도감이 든 탓이었다. 멍하니 허공만 보고 있는데 태경이 어깨를 당겨 안았다. 예준은 태경의 보드라운 니트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이제부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경호원 수도 줄일 거고 미행 붙는 일도 없을 거고.”

믿기지 않았다. 드디어 보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다니.

“사실은 어제….”

태경이 못내 뜸을 들였다. 예준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알고 있어. 그 사람 만났다는 거.”

“어떻게 알아?”

“착공식 때문에 걱정돼서 경호원한테 물어봤어.”

태경은 질책하지 않았다. 다만, 어제 들었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는 기색이었다.

마지막 기억 속의 보스는 제 앞에 무릎 꿇은 채였다. 누군가 굴복시키는 일은 적어도 예준에겐 유쾌한 행위가 아니었다. 겪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사죄하면 모든 고통이 씻겨 나갈 줄 알았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상기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옥죄어 드는 기분이었다.

건재한 그를 지켜보는 것은 또 어떠했는가. 그 밤 이후, 다시 승자의 자리로 돌아간 보스 아래에서 웅크린 채 살았다. 늘 경호원과 동행했으므로 언제 어디에 있든 그의 존재감을 느껴야 했다.

“다시 재기하긴 힘들 거야. 서서히 몰락하게 되겠지.”

건조하게 읊조리는 그에게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보스와 조직원들에게 고통받았던 때를 떠올려 보면 환영할 일이지만, 예준은 동시에 양부를 저버린 그를 위로해야 하는 모순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겨우 입술만 달싹이는 저를 태경은 가만히 쓰다듬기만 할 뿐이었다. ‘8개월 만의 성과’라는 것이 사실은 긴 기다림의 결과였음을 예준이 알아챌 방법은 없었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어?”

“애석하게도 사과는 없었어. 반대로 협박도 없었고. 단지….”

듣기조차 거북했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어릴 때 이야기만 주고받았는데 그걸로 아버지도 뭔가 느끼는 바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뭔가 더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그럴듯한 마무리였어.”

이 회장이 자신의 구속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가 아들과의 관계를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건 그의 위치가 더는 견고하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드디어 끝났다고 믿어도 되는 걸까.

믿고 싶었다. 더는 가진 자들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예준은 그저 차분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태경의 품 안에서 거세게 뛰는 심장 박동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태블릿에서 더는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 태경이 부드럽게 몸을 떼어 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돼?”

빠르게 현실로 끌려 나온 예준은 자연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연말이었다. 아이들은 방학에 돌입했고 해가 바뀔 때까지는 도장도 텅 빌 터였다.

“도장 들러서 대청소하기로 했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예준 차례였다.

“형은?”

“시카고에서 친구가 올 거야. 아마 저녁 전엔 마무리할 거 같은데, 상황 봐서 도장으로든 집으로든 데리러 갈게.”

“알았어. 전화 줘.”

무게 없이 주고받는 대화가 기꺼웠다. 예준은 꼭 1년 전, 제게 벌어졌던 끔찍한 일을 되짚었다. 무뎌진 마음으로도 견디기 쉽지 않았던 그 진창에서 결국엔 벗어났다. 모두 태경 덕분이지만, 그의 살점을 도려낸 듯한 부채감에서 벗어나긴 어려웠다.

“미리 말하는데 선물은 필요 없어.”

태경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이번에는 그와의 약속을 방해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야.”

예준은 오늘, 주문해 둔 케이크를 찾아 태경과 저녁 데이트를 할 예정이었다. 예전처럼 참담한 기분으로 욕심을 내려놓거나 기껏 산 케이크를 바닥에 나뒹굴게 할 필요가 없었다. 두근거림을 만끽하고 좋은 시간을 보낼 자격이 있었다.

“씻겨 줄게.”

일어선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잡은 예준은 곧 남자의 품 안으로 훅 딸려 갔다. 반쯤 안겨 욕실로 향하는 길에는 고른 심장 박동만이 느껴졌다. 더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완벽한 구원이었다.

*

머리 위로 눈이 쏟아졌다. 제법 거센 눈발이었다. 예준은 소복한 눈을 밟으며 대로변으로 향했다. 손에는 선물을 담은 종이 가방과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도로 정체가 제법이었을 텐데도 태경은 제시간에 도착했다. 예준은 창을 내리며 정차한 차로 다가갔다. 올라타자, 머리카락과 어깨에 내려앉은 눈송이가 후드득 떨어졌다.

“시트 버리겠다.”

“괜찮아.”

태경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눈송이를 털어 줄 뿐이었다. 대강 정돈하고 뒷좌석에 선물을 놓아두려는데, 이미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선물 안 바란다며.”

“내 쪽에서 준비 안 하겠단 말은 안 했잖아.”

그렇게 따지면 예준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준은 그 상자보다 훨씬 작은 제 것을 옆에 놓아두며 답했다.

“준비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거 내 거야?”

“당연히 형 거지.”

예준은 케이크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이건 같이 먹을 거.”

눈을 접어 웃자 미소로 화답하는 태경이었다. 구태여 볼을 꼬집고 나서야 운전대를 잡은 그가 부드럽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목적지는 근처의 한 호텔이었다.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 화려하게 꾸며진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였다. 실제로 보긴 오랜만이어서 트리를 바라보는 예준의 눈동자가 빛났다. 아이처럼 시선을 빼앗겨 버렸는데, 태경이 무례하지 않게 팔꿈치를 당겼다.

“사 줄까?”

“…저거?”

“응. 트리.”

딱히 갖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예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태경과 손을 맞잡았다.

“그냥 예뻐서 본 거야.”

“그럴 거면 그냥 나를 봐.”

속삭이는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태경과 트리는 예쁨의 종류가 달랐다.

“얼른 가기나 해.”

바로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서 예약한 자리까지 안내받았다. 친구를 만났다더니 코트를 벗는 태경은 편안한 차림이었다. 건장한 상체를 감싼 니트는 비교적 얇았다. 치장의 정도는 무의미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을 잘 알았다.

예준은 제 테이블이 시선을 끄는 이유가 유명세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형질이나 스캔들을 배제하고서라도 태경은 쉽게 눈길을 끌었다. 부담스럽게 날아와 닿는 시선들에는 노골적인 욕망이 배어 있었다. 예준은 조용히 물컵을 들어 목을 축였다.

“친구는 왜 만난 거야?”

운을 떼자 주문을 마친 태경이 눈을 맞추었다. 원형 테이블 맞은편에 있던 그는 구태여 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준은 거부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내가 하는 일 중에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그러고 보면 일에 관해서는 아직 모르는 게 많았다. 그가 주로 대형 건물들만 설계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지만, 어떤 건물을 설계하는 걸 가장 좋아하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집 짓는 거.”

예준은 그의 활기찬 대답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의 아름다운 주택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집 짓는 일에 애정이 없는 사람은 그런 주택을 지을 수 없을 터였다. 험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보호받는 곳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공간이니까.

“그것 때문에 만났어. 주선영처럼 시카고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군데, 이번에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왔거든.”

예준은 애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에 자연스레 포크를 댔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마 선영이는 마음에 안 들어 하겠지만, 그 친구랑 적당한 규모로 동업 시작할 생각이야. 어떤 세력의 영향도 받고 싶지 않다는 데 그 친구도 동의하거든. 적어도 몇 년간은 집만 짓고 살 거고.”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가 자신의 본질로 되돌아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겠다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아.”

예준이 웃으며 답했다. 태경의 두 눈이 빛났기에 마냥 좋은 일이었다. 그는 들뜬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예준은 괜히 들떴다. 그가 그려 낼 아름다운 선들을 떠올리면 괜히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연말 지나면 소개해 줄게.”

예준은 자신의 질문이 유치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친구란 분은… 남자분이시고?”

“남자고, 베타야.”

정작 중요한 질문은 삼켰는데 원하던 대답이 되돌아왔다. 각인까지 해 놓고도 조금 긴장이 되어서였다. 예준은 머쓱한 얼굴로 와인에 입을 댔다. 태경의 큰 손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한 번에 덮었다.

“술은 적당히.”

마지막으로 취했을 때를 떠올려 보면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것이 옳았다. 저만큼이나 뜨거운 체온이 느껴져서 예준은 다시 찬물을 삼켰다.

곧, 메인 요리가 나왔다. 예준은 태경이 썰어 주는 스테이크를 잠자코 기다렸다.

“그럼 LK로는 안 돌아가?”

저보다도 선영이 아쉬운 소릴 할 것 같았다. 보스의 위협에서 벗어나면 당연히 그곳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가 다른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선영도 알고 있을까.

“언젠간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향후 몇 년 동안은 아닐 거야.”

“선영 씨도 알아?”

“알아. 언제 다시 상황이 바뀔지 모르니까 회사에 누가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결과라면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예준은 무조건 동의했다.

“형이 하는 일이라면 난 다 좋아.”

깔끔하게 먹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태경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가 어딘가 생글생글한 미소로 자꾸만 눈을 맞추었다. 예준은 제 말 덕분에 그가 행복해한다는 걸 알았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배가 적당히 불렀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준은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남자를 따랐다. 고층에 있는 스위트룸에 들어서자 차에 놓아둔 선물이 어느새 옮겨져 있었다.

곧바로 엉겨 붙는 남자를 밀어내며 선물 가까이 가 앉았다. 그만큼 달라붙던 태경이 그런 예준을 보며 말했다.

“열어 볼까? 기대되는데.”

예준은 카펫에 주저앉아 태경이 준비한 상자에 손을 댔다. 선물을 받아 설렌다기보다는 그 안에 들었을 물건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무릎을 굽혀 앉은 남자는 예준이 준비한 선물에 먼저 손을 댔다. 예준은 남자의 편안한 차림새를 살피다 중얼거렸다.

“이제 필요 없으려나….”

태경이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은색의 심플한 커프스단추가 담겨 있었다. 회사 대표일 때는 자주 착용한 물건이지만, 앞으로는 슈트를 완벽히 갖춰 입는 일이 드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태경의 입은 귀에 걸리고도 남았다. 그가 장난스레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점원이 골라 줬어?”

“…응.”

예준은 자신의 안목을 믿지 못했다. 모은 돈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가장 값비싸고 잘나간다는 상품을 골랐을 뿐.

“선물은 마음이 중요한 건데.”

민망해하자 이마에 입술이 쪽 붙었다 떨어졌다. 귀여워 죽겠어, 하여간…. 중얼거린 남자는 뺨까지 이어 뽀뽀하며 고맙다고 여러 번 말해 주었다.

그제야 코트를 벗었다. 스위트룸 내부는 바깥과 달리 훈훈했다. 태경은 손목시계를 풀어 테이블에 두고 니트마저 벗었다. 반소매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붉었다. 예준은 그렇게 덥지 않아서 그런 남자를 지켜보며 계속 기다렸다.

제 선물도 얼른 개봉하기를. 그러나 남자의 손이 닿은 곳은 제 허리춤이었다. 예준은 하마터면 밀려날 뻔했다. 덥석 안으려 드는 걸 얼른 밀어내고 상자를 두드렸다.

“형. 나 궁금한데.”

흥분하고도 페로몬까지는 흘리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태경은 곤란한 얼굴로 예준을 들어 소파 위에 앉혔다. 예준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자 테이블 위에 선물이 놓였다. 위로 여는 상자가 아니라 케이크처럼 옆으로 물건을 꺼내는 형식이었다.

“빨리.”

“기다려. 하고 있어.”

괜히 으름장을 놓은 남자가 드디어 안에 든 것을 꺼내 놓았다. 예준은 그의 작업실에서 자주 보곤 했던 모형이 드러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사람의 직감은 놀라워서, 그저 그런 모형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집이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집.

지금의 집처럼 너른 정원을 갖춘 단층 주택이었다. 삼면이 통창으로 이루어져 안의 구조가 훤히 보였다. 직선의 형태가 강조된, 한눈에 보기에도 세련된 집이었는데 예준으로서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외국 영화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구태여 발품을 팔아 찾아가야 하는 개인 소유의 갤러리 같기도 했다.

“마음에 들어?”

“응.”

기계적으로 답한 예준은 주택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었다. 결국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 통창 안에 갖추어진 구조까지 살피게 되었다. 너른 침실이 하나, 방은 여러 개였다. 어떤 방을 골라도 마음에 들 것 같았다.

“어떤 집이야?”

알면서도 묻자, 태경이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답했다.

“우리 집.”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귀로 옮겨 간 손끝이 간지러웠다. 예준은 움찔거리며 태경과 시선을 마주했다.

“처음부터 너랑 살 생각으로 설계한 집.”

“…….”

“태초부터 네가 있는 집.”

어떤 의미일까 생각했다. 집이라면 지금 사는 곳도 한 점 부족한 부분이 없었다. 그런 그가 굳이 새집을 설계한 건 현재의 주택이 불완전하다는 뜻이었다.

마주한 시선에 의문을 담자, 그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말했듯이, 지금 사는 집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 만든 곳이잖아. 한마디로 내 집에 네가 들어와 사는 건데, 그걸로는 만족스럽지 않아. 계단도 제법이고 동선도 길어서 무릎에 무리도 많이 갈 거고.”

“그렇게까지 안 좋은 건 아니야. 무릎….”

무의미한 변명에 태경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단순히 집을 짓겠다는 데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너와 같이 살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집을 짓고 싶었다는 의미야.”

가슴속이 통증이 일 때처럼 울렁거렸다. 와르르 쏟아져 내리듯 저미는 감각이었다.

“내 집에 사는 너는 타인일지도 모르지만, 이 집에 사는 너는 그렇지 않을 거야. 다 네 거거든. 어디에든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묻어 있을….”

예준은 태경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너른 품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한 남자는 밀려나지 않았으나 달려드는 힘에 앓는 소리를 냈다. 예준은 차마 고맙다는 말도 내뱉지 못했다. 목구멍이 꽉 조여 숨쉬기도 버거웠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완벽히 하나가 돼. 그래서 집을 짓는 게 좋아. 집이라는 게 바람과 비만 막으면 그만인 곳은 아니니까.”

그 또한 이 회장의 집에서 끝내 타인이었을까. 그의 사정을 아는 예준으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가 무의식에서라도 자신을 불완전한 존재처럼 느꼈다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형.”

예준은 가까스로 태경을 불렀다. 선물만 해도 그는 제 생각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런 격차가 좋았지만, 가끔은 따라잡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이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거야.”

어른스럽게 표현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너무 멋지고 너무 아름다워.”

바보처럼 말했는데도 태경은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예준은 남자의 품 안에서 눈을 감은 채 완성될 집을 상상했다. 도시 한가운데 지어진다고 하더라도, 마치 숲속처럼 은밀한 신비감에 사로잡힐 듯한 집을.

예준이 상체를 바로 세워 니트를 쥐었다. 예준은 니트에서 멈추지 않았다. 속에 입은 티셔츠도, 바지와 속옷도 몽땅 벗은 채 태경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남자의 티셔츠를 그러쥔 채 뺨에 입 맞추자 페로몬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농도 짙은 페로몬이 덩어리져 밀려왔다. 순식간에 배 속이 아릿해졌다.

“선물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내일 줄게.”

태경이 키스를 받으며 말했다. 예준은 그의 턱을 감싼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를 맞대고 코끝을 비비고 입술을 할짝댔다. 꿀도 이보다는 달지 않을 것이다. 어찌나 다디단지 자꾸만 빨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다리 사이로 들어온 태경의 손이 능숙하게 움직였다. 예준은 남자의 뺨에 뺨을 기댄 채 비벼 대었다. 단단한 목덜미에도 입술을 대어 흥을 돋우었다. 곧, 몸이 허공 위로 붕 떠올랐다. 예준은 남자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았다.

“얼마나 좋으면 열이 다 날까.”

태경은 예준을 안아 든 채 호텔의 통창으로 향했다. 달아올라 터질 듯 뜨거웠던 예준의 등이 차디찬 유리에 닿았다. 벌어진 잇새에서 나른한 숨이 쏟아졌다.

예준은 남자의 목을 끌어안은 채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느긋한 속도를 기꺼이 맞춰 주던 남자는 점점 인내심을 잃었다. 옅게 얽히던 혀가 강한 힘에 이끌렸다. 그저 비비던 입술을 깨물렸다.

“예준아. 아직 안 한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남자가 덧붙였다.

“원하기 전에 해 줘.”

떠오르는 말은 분명했다. 그러나 예준은 남자를 보며 수줍게 미소 짓기만 할 뿐이었다. 입맞춤을 멈추고 눈을 맞추자 점점 열감이 번지는 남자의 눈동자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달아오르고, 갈증을 느끼고, 욕망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두 눈이 좋았다.

가끔은 두렵기까지 한 감정이 느껴졌다. 감염되는 세포처럼 속수무책이었다. 다정하기만 하던 두 눈은 어느새 반항적인 기색을 띠었다.

“응?”

예준은 끝내 남자의 귀에 속삭였다. 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였다. 그제야 만족한 남자가 예준을 내려놓았다. 그가 허리를 잡아 돌리자 예준은 어느새 통창을 마주하고 선 채였다.

검은 유리 위로 티셔츠를 끌어 올리는 남자가 비쳤다. 예준은 이미 축축한 입술을 깨물며 삽입을 기다렸다. 바지 버클이 열리는 소리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유리에 비친 서로를 바라보았다. 순간, 등 뒤를 덮는 몸이 놀라울 만큼 뜨거웠다. 배를 감싸는 남자의 손등과 팔뚝에 혈관이 도드라져 있었다. 예준은 그 위로 제 손을 겹치며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곧, 침입하는 감각이 선명히 느껴졌다. 굵고 단단한 성기가 안을 푹 찌르자마자 예준은 그대로 사정해 버렸다.

*

아침 겸 점심 식사는 룸서비스로 대신했다. 수프로 속을 달래자 위스키의 취기도 가시고 속 쓰림도 편해졌다. 어제 산 케이크를 디저트로 먹고 조금 더 시간을 보낸 후에 방을 빠져나왔다.

나란히 손을 맞잡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마침 느지막이 체크아웃하는 한 커플과 마주쳤다. 예준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안도했다. 여느 커플과 다를 바 없는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냈다는 사실에.

그건 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예준은 귓가에 소리 없이 닿는 입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잘 마른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도 좋았다. 연인을 넘어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어딘가 낯간지럽긴 했지만, 자신 역시 그의 유일한 보호자가 되어 뿌듯하기도 했다.

밤이 지나는 동안 눈은 비로 바뀌어 있었다. 차창을 때리는 거센 비 때문에 도로는 혼잡했다. 태경은 조용히 운전만 했다. 그 침묵이 기대감을 부추겼다.

“힌트라도 줘.”

“그건 안 되겠어.”

“왜?”

“네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을 때 관대해진다는 걸 이제는 잘 알거든.”

그 관대함이라는 것이 어젯밤 잠자리를 말하는 거라면 역시 통찰력이 탁월했다. 완벽한 한 쌍으로 함께하는 미래에 관해 들으며 발기했으니까. 너를 위한다는 말에 쉽게 마음을 빼앗겼으니까.

가는 길이 험난하긴 했지만, 예준은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처럼 설레고 긴장되었다. 그런 예준을 가만히 지켜보던 태경이 핸들을 두드리며 말했다.

“뽀뽀해 주면 조금은 말해 줄 수도 있어.”

“됐어.”

기분 좋은 실랑이가 오갔다. 뽀뽀해 주지 않자, 불쑥 다가온 그가 먼저 입 맞추었다.

“아쉬운 사람이 해야지.”

“양심 없는 사람이 하는 거 아니고?”

아직도 입술이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아팠다. 낮게 소리 내 웃은 그는 결국 뺨까지 만지작거리다 물러났다.

곧, 길이 뚫리기 시작했다. 차는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낯선 동네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신축으로 보이는 상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입주한 업체도 몇 없어, 지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침 비가 그쳤기에 지상 주차장에 차를 대어 놓고 빌딩 안으로 향했다.

예준은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들이는 사람처럼 주눅 들어 있었다. 낯선 기분이 늘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눈치를 보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자 태경이 눈을 맞추며 말했다.

“누가 보면 내가 겁주는 줄 알겠어.”

“여기 어디야?”

“무서우면 안아 줘?”

“농담하지 말고.”

태경이 씩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3층에서 내린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와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추었다. 태경이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은 쉽게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예준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생각보다 아주 너른 공간이 눈앞에 있었다. 흐린 날씨 탓에 잿빛인 내부는 적요했다. 아직 새 건물 냄새도 가시지 않은 곳이었다. 예준은 자연스레 태경을 올려다보았다.

“뭐야?”

“네 도장.”

“…어?”

도장이라면 이미 지혁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일은 즐거웠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예준은 제 귀를 의심하며 재차 물었다.

“내 도장?”

“이제 차지혁, 그 선수한테 충분히 배우지 않았어?”

태경이 느긋하게 물었다. 8개월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지혁에게 배운 것이 많았다.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이나 도장을 운영하는 법은 이미 능숙하게 체화된 지 오래였다.

“그것 때문에 지혁이랑 일하게 한 거야?”

“네 첫사랑인 거 알면서도….”

“형.”

그가 멋쩍게 귓불을 매만졌다.

“무턱대고 시작하면 어려울 테니까. 지금이 적기야. 이제 준비가 됐다고 생각해.”

어미 품을 떠나는 아기 새가 되란 의미일까.

“그러니까, 정말…. 내 거라고?”

“다 네 거야.”

“내 도장을 만들라고?”

“맞아.”

예준의 입가가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예준은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 너른 공간 한가운데로 천천히 진입했다. 아빠가 자신에게 해 주고 싶었던 선물이 바로 이런 공간이지 않았을까. 복잡한 마음이었지만, 예준은 우울한 생각은 금세 접어 두었다. 두 번째 선물 역시 첫 번째 선물만큼이나 완벽했다.

산책하듯 공간을 거닐다 돌아간 곳은 다시 태경의 품이었다.

“막막한데.”

“잘할 수 있을 거야.”

“고마워. 그렇게 말해 줘서.”

“예준아. 나는 항상 그렇게 말할 거야. 때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그렇다 한들 고마운 마음을 삼키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도 고마워.”

“…….”

“사랑하기도 하고.”

얼굴을 붉힌 예준이 뒤돌아섰다. 민망함에 괜히 창밖만 응시하자 태경이 작은 몸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을 거야. 뭘 원하는지만 잘 생각하면 돼.”

기시감이 드는 말이었다. 때로는 가지는 것보다 무엇을 원하는지 가려내는 것이 더 힘들었다. 차라리 단념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더 쉬울 때도 많았다.

“뭘 원하는지….”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도장을 운영하는 일은 적성에 맞고, 저 또한 완벽히 준비되었다는 것을.

“나는 잘 쓰지도 못할 선물 줬는데, 형은….”

자책하기 시작하자 태경이 불쑥 몸을 돌려세웠다. 그의 품으로 손쉽게 빨려 들어간 예준은 처음부터 깊게 침입하는 혀 때문에 하려던 말을 잊었다. 너른 공간에 쪽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뜬 숨이 섞였다.

“자격 있어. 그러니 마음 놓고 누리기만 해.”

단정한 남자가 다시 입술을 겹쳤다. 울컥울컥 자꾸만 무언가 치미는 통에 예준은 그와의 기꺼운 키스를 이어 갈 정신이 없었다. 눈치챈 남자는 더 거칠게 몸을 붙잡았다. 벽으로 밀어붙여 놓고 아프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나쁜 생각은 차차 잦아들었다. 격양되었던 감정은 소거되고 바쁘게 오가는 숨만 남았다. 길든 예준은 살기 위해 숨 쉴 타이밍을 찾았다. 그가 건넨 숨을 들이마시고 바쁘게 내뱉는 동안, 아득한 어딘가에서 시작된 빗줄기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시 비가 쏟아졌다.

*

상가 입구에서 거센 빗줄기를 확인한 태경이 난감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덩달아 새카만 구름을 응시하던 예준은, 그러나 조금도 불편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냥 있어. 그칠 때까지 기다리자.”

나태한 마음으로 권유했다. 그는 흔쾌히 화답했다.

“좋지.”

그래서,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 비를 기다리기로 했다. 주차장까진 몇 발 되지 않는 데다 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비를 맞아 줄 남자라는 걸 알지만, 예준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결 좋은 머리카락과 어깨가 젖는 게 싫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에게 우산을 준비할 기회를 주지 않으리라는 것도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기다렸다.

비가 그치기를.

사실은 이 순간조차 즐겁다는 사실을 그는 알까. 따지자면, 비가 그치든 그치지 않든 상관없었다. 예준은 묘한 기분으로 저보다 넓은 어깨를, 저보다 높은 시선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도 역시 초조함은 묻어 있지 않았다. 입가에 걸린 느슨한 미소가 저처럼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원하는 게 뭔데.”

노골적인 시선을 참다못한 남자가 물었다. 예준은 고민 없이 답했다.

“형이랑 같이 비 보는 거.”

거센 빗줄기가 이미 축축한 땅 위를 두드리는 모습을 보는 것.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더 오래 잡고 있는 것.

“그런데 좀 추워.”

무심한 말에 태경의 눈가가 휘어졌다. 그는 대답 없이 다가가 예준을 끌어안았다. 옅은 한숨 소리가 느긋한 이유는 비가 빨리 그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탓이다.

“감기 걸려.”

“열 좀 나는 건 괜찮아.”

이러다 앓는 건 사랑의 열병이지, 감기가 아닐 것이다.

다정하게 우려를 내비치는 태경에 비해 예준은 편안했다. 말끔히 씻겨 나가는 주변과 습한 전경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아마도 그의 품 안이기에 더.

과거와 미래를 잊고 순간을 즐겼다. 한기를 내쫓는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정지한 듯 반복되는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 이런 날 만난 거 기억해? 묻고 싶은 마음은 삼켰다.

그땐 비 맞은 생쥐 꼴이었으나 지금은 솜털 하나 젖지 않았으므로.

태경이 다정하게 읊조렸다.

“벌써 좀 나는 것 같은데, 열.”

예준은 손을 내어 빗방울을 맞았다.

그렇다면, 그저 사랑의 열병에 정복당한 것일 뿐이다.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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