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Light & Shadow Ι
무릎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예준은 남자의 집을 떠나기로 했다. 바쁜 와중에도 지극정성으로 돌봄을 받아서인지 회복이 빨랐다. 유연해진 걸음으로 태경의 차에 오른 예준이 안전띠를 당겨 맸다. 지관통과 서류 바인더를 잔뜩 챙겨 온 남자는 피로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크리스마스까진 좀 바쁠 거야. 잠깐이라도 보고 싶으니까 연락하면 나와요. 보고 싶으면 먼저 연락해도 돼.”
조금 전까지 안달을 냈으면서 순순히 집으로 보내 주어 신기했다. 예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를 기다렸다. 운전석에 오른 태경은 이미 채운 안전띠를 보고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출근 시간에 맞물린 도로 위는 꽉 막혀 트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예준은 곤란한 듯 귀를 어루만졌다. 치문에게서 정명이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으므로 마음이 바빴다. 오전 내 모든 일을 끝내고 현장 팀장님께 전화해 일하려면 하루가 빠듯했다.
서서히 뚫리기 시작하는 도로를 응시하고 있는데 코트 주머니가 진동했다. 집을 나오기 전, 잠깐 전화를 확인한다는 게 무음을 해제해 버린 모양이었다. 예준은 껄끄러운 기분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짐작 가는 사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누구야?”
언짢은 기색을 눈치챈 태경이 물었다. 상대는 아마도 윤도하일 터였고 태경 앞에서 뻔뻔하게 녀석과 통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예준은 전원을 꺼버린 뒤 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스팸이에요.”
공기가 일순 고요해졌다. 그럴듯한 변명이었기에 예준은 싸늘해진 태경의 눈빛을 인지하지 못한 채 창을 보았다. 정체로 다시 차가 느려질 때까지 높이 솟은 빌딩들에만 시선을 두었다. 언제 보아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이따금 외투를 부여잡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오늘도 몹시 추운 모양이었다.
한동안 앞으로 나아가던 차가 신호에 맞춰 멈추었다. 예준은 무심코 태경에게로 시선을 주었다가 손목을 붙잡혔다.
“누구야, 전화 건 사람.”
또렷이 묻는 목소리가 낮았다. 적당히 넘어가리라 생각했던 예준은 당황했다.
“그냥 스팸이에요….”
말끝을 조금 흐린 것도 같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은 예준이 남자의 손에서 손목을 빼내려고 했다.
“그럼 전원 켜 볼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빼앗아 가는 몰상식한 짓을 저지르진 않았으나 충분히 그러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멎은 채로 가만히 보고만 있자, 그는 위압적으로 구는 대신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안전띠를 느슨하게 한 그가 다가와 입 맞추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곧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인지하라는 듯한 어떤 함의가 느껴졌다. 진실을 털어놓길 종용하는 행위였지만 예준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로변에 즐비한 빌딩이 낮아지다가 이내 주택가가 밀집한 동네가 드러났다. 기어코 좁은 골목까지 파고든 차는 초라한 갈색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예준은 안전띠를 풀며 말했다.
“들어갈게요.”
추궁한다면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걸 알면서도 남자는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예준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예준은 자못 초조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온 남자가 부드럽게 어깨를 그러쥐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농담하는 거 아니야.”
별 의미 없는 끄덕임에도 남자는 실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괜히 속이 울렁거려, 예준은 저도 모르게 잡히지 않을 사람처럼 물러났다. 팔짱을 낀 채 한참 그를 들여다보던 남자가 시간을 확인했다.
“추우니까 옷 따뜻하게 입어요.”
이내 차를 돌아 운전석에 오르는 남자를 보며 선뜻 발을 떼지 못했다. 골목을 빠져나간 차가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예준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정명과는 통화가 되지 않았다. 치문은 뺑이 치느라 바쁘니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소식이 없었다. 현장 팀장님도 오늘은 자리가 다 찼다고 말하는 바람에 온종일 먼지가 소복이 쌓인 집을 치웠다. 짧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예준은 저물녘에 일어나 패딩에 슬리퍼 차림으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너무 추워서 따뜻한 컵라면에 삼각김밥이라도 먹을 생각이었다. 모아 온 동전으로 값을 치르고 편의점 구석에 자리한 테이블에 앉는데, 편의점 창 너머로 익숙한 무리가 보였다.
예준은 본능적으로 패딩 모자를 뒤집어썼다. 베타이니 페로몬을 알아차리진 못할 테지만 온몸에 솜털이 돋고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최악의 상황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예준은 조심스레 따뜻한 물을 컵라면 속에 채웠다.
그러나, 윤도하 무리가 편의점을 찾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스낵 몇 개를 집어 계산한 윤도하가 테이블로 걸어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머지 녀석들은 불량한 눈빛으로 예준을 쏘아보기만 한 뒤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아주 그쪽에다 살림을 차렸나 보지?”
익숙한 비아냥에 예준은 패딩 모자를 벗고 윤도하를 노려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추위에 떨던 모습이 무색하게도, 오늘의 녀석은 어딘가 의기양양했다.
“그때 알아듣게 말한 걸로 아는데.”
“용건 있어서 온 거니까 제대로 듣기나 해.”
무시한 예준이 컵라면 뚜껑을 열어 면을 뒤집었다. 아직 절반도 익지 않아 딱딱한 상태였지만, 없는 사람 취급하면 사라지겠지 싶어 바쁘게 면을 삼켰다.
체할 것 같은 기분으로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데, 최신형 핸드폰이 컵라면과 손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서방 단속 잘해야겠더라.”
코앞까지 들이민 액정 화면을 외면할 방법은 없었다. 예준은 네모 프레임에 갇힌 훤칠한 남녀를 무심하게 들여다보았다.
“…….”
예준은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저 면을 불지 않고 입에 넣은 탓에 하마터면 입 안을 델 뻔했을 뿐이다.
“이 엘리베이터, 지하는 안 가. 객실로만 올라간다고.”
“고딩이 별걸 다 아네.”
사진 속 남자는 태경이었고 여자는 안면이 없는 사람이었다. 멀리서 찍었음에도 남다른 외모인지라 태경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여자의 외모에 관심을 둔 적은 없지만, 함께 있는 알파 또한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 형질을 지닌 성인 남녀가 호텔에서 만나 무엇을 할지는 뻔했다.
예준은 윤도하가 들이대는 핸드폰 화면에 반강제로 눈을 고정했다.
“잤겠지? 딱 봐도 분위기가 그렇잖아.”
그렇다고 해도 불만을 털어놓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섹스 파트너가 되었던 때부터 그가 결혼 압박을 받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명확히 알았다. 다만, 사귀자는 말을 듣자마자 타인과의 관계를 목격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윤도하의 말처럼 정말 몸을 섞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나, 예준은 사뭇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 분위기를 감지한 윤도하가 불을 붙였다.
“소문이 자자해. 맞선은 쉬지 않고 보면서 연애나 결혼엔 그다지 관심 없고, 잠자리는 또 절대 거부 안 한다고.”
약한 면을 내보일수록 더 공격적으로 파고들 녀석이었다. 예준은 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네 서방이 여기저기 다 쑤시고 다니는데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
“대표님은 내 서방도 아니고 나만 만나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도 아니야.”
“잘나디잘난 우성 알파라서?”
“어. 그러니까 여기저기 다 쑤시고 다녀도 돼. 그게 뭐라고 여기까지 와서 호들갑이냐?”
예준은 아직 뜨거운 면발을 후후 불어 입에 넣었다. 아무리 가슴이 조여들어도 그걸 윤도하가 알아챌 도리는 없을 터였다. 부러 맛깔나게 국물까지 들이켜자 윤도하가 인상을 팍 썼다.
녀석이 사진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여자의 허리를 감싼 손이 보였다. 그가 자주 하는 스킨십이었다.
“결혼 안 해도 된다고, 한번 자기만 하자는 여자들도 많아. 이 새끼 대물이라고 소문나서.”
“뭐, 그렇겠지.”
그의 성기에 관해서라면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다. 예준이 긍정하자 윤도하가 손을 쳐들었다. 보는 눈이 있어 때리는 시늉에서 그쳤다.
“천박한 새끼.”
“너무 커서 피 볼 때도 많아.”
“씨발, 안 봐도 걸레짝 다 됐겠네.”
말버릇이 산전수전 다 겪은 형님들 못지않게 사나웠다. 천적인 짐승들처럼 으르렁대고 있으니 아르바이트생의 기척이 예민해졌다. 예준은 뒤늦게 삼각김밥을 뜯으며 말했다.
“사진 보면 알잖아.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내 주제 상기시킬 필요 없어. 지금이야 흥미 있어도 빠르게 식는 게 알파들이니까. 어차피 결혼은 다른 좋은 사람이랑 할 거라는 거 알고 있어, 나도.”
그를 스쳐 간 오메가들은 소유욕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환상적인 잠자리에, 멋진 집에, 눈부신 외모, 극도의 쾌감을 주는 페로몬까지. 밑바닥인 인생에 면역이 된 오메가라 할지라도 처지를 비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남자였다.
도무지 동요하지 않자 윤도하가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내가 먼저 봤어, 너.”
“얼마나 좋았기에 발로 까기부터 했을까.”
예준이 또렷이 눈을 맞추며 말했다. 녀석의 두 눈에 불이 들끓었다.
“그때처럼 또 뒤지게 맞아야 고분고분 굴래?”
“혼자선 어려울걸. 네 친구들 불러와야 가능하지 않겠어?”
퍽! 테이블을 내리친 윤도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바이트생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맞는 것이 딱히 두렵지 않은 예준은 다시 컵라면을 먹으려다 녀석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라면 물이라도 끼얹으면 어쩌나 했다.
그러나 녀석은 패딩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목을 타는 눈빛으로 응시하기만 했다. 씨발, 녀석의 입에서 습관적인 욕설이 터졌다. 예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어.”
“무슨 소리야.”
“다시 만났을 때, 사과부터 했으면 난 널 좀 다르게 봤을 거란 뜻이야.”
알파의 심기를 건드릴 의도였다면, 혹은 오메가의 몸이 궁금했던 거라면 그저 무력으로 제압해 굴복시키면 될 일이었다. 처음 만났던 날처럼 윤도하에겐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함께해 줄 친구들이 있었다. 집요한 관심과 종잡을 수 없는 패악질이 길어지는 데는 명확한 이유가 존재할 터였다.
“아무리 멸시받는 오메가라고 해도 결국엔 너랑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야. 첫 만남이 아무리 지옥 같았어도 네가 뭔가 바꾸려고 노력했다면 나도 이 정도로 네가 싫진 않았을 거라고. …방법이 틀려먹었어. 이런 방식으론 누구 마음도 못 얻어, 윤도하.”
정곡을 찌르자 녀석의 두 눈이 보기 좋게 흔들렸다. 턱이 떨리도록 잇새를 악물고는 욕지거릴 지껄였다.
“뭘 안다고 주제넘게…!”
손목을 놓은 녀석이 컵라면을 낚아채 음식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반이나 남았는데.”
예준이 무심하게 읊조렸다. 윤도하는 재차 욕설을 내뱉으며 예준을 노려보았다. 잠깐 눈을 마주하는 그 찰나가 몹시도 길게 느껴졌다. 결국 눈을 피하지 않자, 더 패악을 부리리라 예상했던 녀석은 유리문을 발로 뻥 걷어차고 편의점을 나가 버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예준은 고개를 숙였다. 녀석이 세게 틀어쥔 손목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멍이라도 남는다면 태경에게 변명할 거리를 마련해 놓아야 했다.
테이블 위엔 스낵 두 봉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뒹구는 의자와 엉망인 음식물 쓰레기통까지. 예준은 골치가 아파져 관자놀이를 눌렀다. 녀석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자 소름이 끼쳤다.
‘내가 먼저 봤어, 너.’
그 말이 녀석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못할 것이다.
*
남자의 집에 다시 발을 들인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늦게라도 보고 싶다는 말에 예준은 직접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모든 공간이 다 익숙했다. 예준은 내부의 훈기를 느끼자마자 가장 먼저 남자의 침실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자위란 걸 해 보았다.
뒷구멍이 다 아물었나 손가락을 넣어 봤다가 그대로 시작된 행위가 결국 끝을 보았다. 시트를 가는 것은 늘 태경이나 가사 도우미의 몫이었기에, 몰래 세탁실로 향하는 동안에는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침대에 코를 파묻고 엉덩이를 한참 들썩댄 탓인지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그래도 뭘 혼자 먹기는 애매해서 잠자코 기다렸다. 애석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늦겠다는 남자의 연락을 받았다.
열한 시가 넘어서야 차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준은 현관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다 이내 현관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그에게선 가장 먼저 술 냄새가 났다.
“오셨어요.”
인사를 건네자 낯선 페로몬이 코끝을 자극했다. 피로한 듯 눈을 감았다 뜬 그는 포옹이나 뽀뽀에 앞서 먼저 말을 뱉었다.
“씻고 올게.”
예준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에게서 나는 냄새가 알파의 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달콤한 꽃냄새와 비슷했지만 분명 향수는 아니었다. 이러한 향은 보통 여성 알파가 지닌 경우가 많았다.
오늘도 맞선을 보았을까. 그의 회사에도 알파인 직원들이 있고, 여러 사람을 만나는 직업 특성상 술자리에 참석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그만인 것을, 괜한 직감이 들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준은 욕실로 다가가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파우더 룸에 몰래 들어가 그가 벗어 놓은 셔츠를 주웠다. 후각만으로 페로몬을 느끼는 것은 아니라지만, 목이 닿는 칼라와 가슴 부분에 부러 코를 박고 냄새를 들이켰다.
“…….”
깊숙한 곳까지 페로몬이 느껴졌다. 안거나 기대지 않았다면 이런 곳에까지 페로몬이 묻지는 않았을 터였다.
예준은 조용히 파우더 룸을 빠져나왔다. 주방 스툴에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초연하게 앉아 있었다. 윤도하가 보여 주었던 사진을 떠올리며 남자의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알파에게 연애는 연애고 결혼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 정도는 진작 알고 있었다. 그가 다른 알파를 만났다고 해서 저에게 내보인 감정마저 거짓이란 증거는 없었다.
다만, 경계를 회복할 필요는 있었다. 우성 알파 곁에서 유일한 사람이 되길 바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 그 점을 온전히 이해하자 심장 박동이 잦아들었다. 덕분에 물줄기 소리가 그쳤을 때는 제법 태연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예준은 즉석 수프를 꺼내 냄비에 넣고 데웠다. 술을 먹었다면 태경은 분명 요기한 뒤일 터였다. 수프를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놓자, 편한 차림의 태경이 나타났다.
“저녁 안 먹었어?”
“먹었는데 좀 출출해서요.”
대충 둘러대고 스툴에 앉았다. 샤워 후 다가온 태경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빵도 데워 줄게. 같이 먹어요.”
그가 어깨를 끌어안은 채 뺨에 쪽 입 맞추었다. 샤워 후 불쾌한 것들이 씻겨 나가서일까. 예준은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며 물었다.
“약속 있으셨어요?”
“응. 아버지가 낀 문제라 피할 수가 없어. 일단 그러겠다고 해야 뒤탈이 없거든.”
어떤 약속이었느냐고 묻는 것이 순서였으나 예준은 도리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하는 일에 입을 대는 것부터가 본래 자신답지 않은 일이었다. 속에서 뭔가 치미는 기분은 그와 만난 후부터 자주 느꼈다. 익숙하기에 덤덤히 눌렀다.
마침, 태경이 나란히 스툴에 앉았다.
“오늘 뭐 했어?”
부드럽게 귓가를 덧그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예준은 하마터면 그 손길을 따라 고개를 기울일 뻔했다.
“일 끝나고 바로 왔어요.”
뻔한 대답을 내어놓자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주하지 않아도 관찰하듯 와닿는 시선이 느껴졌다.
“술 많이 안 마셨어.”
“예?”
“눈을 안 마주치기에 그게 불만인가 해서.”
“그런 걸로 화 안 내요.”
“왜.”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불만이라는 투였다. 그가 낯선 알파의 페로몬이 몸에 스몄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의식하고 있음을 알면서 묻는 것이라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체할 것 같은 기분에, 예준은 수프를 반도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말은 잘하는데 눈은 왜 안 마주쳐.”
“먹느라고요.”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자 금세 동요가 일었다. 떨리는 눈동자를 감출 수 없어 당황한 예준이 부러 웃었다. 태경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고 눈빛은 다정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깊은 눈동자가 제 눈과 입술을 훑는 모습을 예준은 그저 바라보았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깨듯 빵을 넣어둔 오븐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태경은 따뜻한 빵을 꺼내 와 수프 옆에 놓았다.
“예준아.”
“네?”
“그래도 최대한 빨리 나온 거야. 네 생각 하면서.”
궁금증에 대한 답이었다. 맞선이란 단어 없이도 대강 상황을 이해했으나 위안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남자는 그의 몸에 남은 증거를 묵인하지 않았고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예준은 페로몬에 유독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타인의 흔적을 눈치챘다는 것 정도는 이미 그도 알고 있을 터였다.
“나로서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야. 맹세하건대, 아무 일도 없었어.”
단지 지금 남자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자신이 보이는 담담한 태도라는 사실을, 예준은 알지 못했다. 동의도 반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그가 선반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뒤쪽 선반에 면역제 있으니까 불쾌하면 꺼내 먹어요.”
합리적인 대처법인 동시에 냉정하게 다가오는 말이었다. 유일한 사람이 되는 것은 사치라 여기면서, 유일한 사람으로 대해 주지 않는 그가 원망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모순이다.
“오늘도 미리 말해 주지 그랬어요.”
예준은 면역제 대신 수분 없는 빵을 꼭꼭 씹어 삼키며 말했다. 차분히 가라앉는 내부에는 서로가 감지할 만큼 비상한 열감만이 맴돌 뿐이었다.
*
오랜만에 찾은 현장은 낯설 만큼 진척이 있었다. 높다랗게 쌓인 건물을 올려다보려면 고개를 꽤 많이 젖혀야 했다. 치문의 연락을 받고 간이 건물로 들어선 예준은 지하 대신 3층으로 향했다. 아무리 알파에게 기생한단 소문이 퍼졌다 할지라도 부를 때 재깍 얼굴을 비추는 편이 안전했다.
“김예준이! 얼굴 까먹겠다.”
문을 열자, 정명이 소파에서 일어서며 환대했다. 예준은 머쓱하게 허리를 굽히고는 다가오는 손을 피해 한 걸음 물러났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알파 하나 물었다며? 요새 이자 꼬박꼬박 잘 내더니, 아주 이뻐. 응?”
정명은 자꾸만 내빼려는 예준을 굳이 붙잡았다. 머리카락이나 어깨 부근에 코를 대고 킁킁대는 꼴이 볼썽사나웠다.
“진짜 알파 냄새가 나네, 이거….”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했다.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 알파를 물어 성실히 돈을 갚으면 좋은 일일 텐데 정명은 어딘가 불쾌한 표정이었다. 예준 또한 오랜만에 맡는 열성 알파의 페로몬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오고 있었다.
“볼일 있으신 거 아니에요?”
“볼일이야 있지. 잠깐 앉아 볼래?”
정명이 소파로 예준을 이끌었다. 마침 치문과 함께 정명의 따까리들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왁자지껄 떠들며 들어선 이들이 짜기라도 한 듯 모두 예준에게 시선을 주었다.
“씨발, 냄새 겁나게 좋네.”
“이쁜아. 온 김에 딸감 좀 해 주면 안 되냐? 요즘엔 통 박아 달란 소리도 안 하고. 섭섭해!”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상대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나올지 모를 사람들이었다. 힘겹게 입술을 떼려는데 치문이 형님들을 가로막고 나섰다.
“아이고, 형님들. 일단 커피 한 잔씩들 하시고요.”
무리를 몰아 구석진 소파에 앉힌 치문이 눈을 찡긋했다. 치문이 없었으면 자위를 돕는 시늉이라도 해야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예준은 괜히 목을 큼큼 다듬으며 정명을 보았다. 정명의 눈빛이 일순 매서워졌다.
“알파 좆 빠는 놈치고 헛바람 안 든 것이 없어.”
고고하게 군 것이 아니라 위기를 모면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혀끝을 찬 정명이 아니꼬운 얼굴로 팔짱을 꼈다.
“열성 알파들은 알파 취급도 못 받고 말이야.”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때깔이 다르구먼. 옷도 비싸 보인다?”
“이건 그냥 받은 거라….”
예준은 두근대는 가슴을 문지르며 정명의 시선을 회피했다. 진창에서 굴러야 마땅한 놈이 번듯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배알이 꼴리는 모양이었다.
“재우는? 소식 없어?”
늘 묻는 말이었다. 예준과 치문은 동시에 움찔했다.
“아무 소식도 없어요. 돈 빌려 달라는 문자도 요샌 통 없고.”
“그 새끼, 정선에서 나를 때 도와준 놈들이 있다는데…. 아, 같은 어깨끼리 상부상조해야지, 좆같은 놈들이 텃세 부린다고 입을 안 열어.”
“어쩌시게요.”
“대가리를 아스팔트에 확 갈아 버릴까? 아니면 밤새 어디 공터에라도 매달아 놓든가.”
정명이 분한 듯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들키는 건 시간문제라 생각했는데 토박이 조폭들이라 끝까지 입이 무거운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쁜이 너 언제까지 그 돈도 좆도 안 되는 배달 일 할 거냐?”
온종일 쉬지 않고 뛰면 벌이가 제법 쏠쏠한 일이었다. 그마저도 부족한지 정명이 덧붙였다.
“우리 가게 오메가 새끼들 외제 차에 명품에…. 아주 팔자가 났어요, 났어. 손님들한테 다리만 벌려 봐. 네 빚 일이 년이면 다 갚는다니까? 그냥 이참에 우리 가게로 들어와.”
“갑자기 왜….”
적어도 알파에게 독점당할 때만큼은 편안한 게 오메가의 삶이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외부의 학대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정명이 묵혀 두었던 가게 이야기를 꺼내는 건 예준의 나아진 처지가 보기 싫어서일 가능성이 컸다. 히트 사이클만 되면 자 달라고 울며 매달렸던 하찮은 오메가가, 우성 알파의 품으로 들어가 그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으니까. 이들에게 누군가 추락시켜 밑바닥 구르게 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었다.
“저는 그런 일 싫어요. 형님도 계속 봐주셨잖아요.”
“네가 가족이 있냐, 뭐가 있냐? 떠도는 애비야 없는 사람이나 다름없고. 너 챙기는 사람은 여기 애들이랑 나뿐인데 이제 슬슬 가족처럼 지내야지. 여기 다 가족이잖아. 우리가 하는 일도 다 가족 사업이고.”
어느 가족이 가족 구성원을 술집 접대부로 팔아넘긴단 말인가? 실소가 나왔으나 웃을 수 없었다.
“가게에서 한 이 년만 굴러. 대기업 직원보다 떳떳하게 살게 해 줄 테니까.”
“다른 건 다 할게요. 접대는 싫어요.”
“어차피 다 늘어진 구멍, 얼마나 아끼겠다고 그리 앓는 소리야?”
어떤 일이 닥치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때 아닌 긴장으로 속에 입은 티셔츠가 젖을 만큼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예준은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며 정명을 보았다. 빌기라도 하려는데, 치문이 다가와 으름장을 놓았다.
“형은 그런 일 못 해요. 차라리 죽어 버릴걸요. 이 형 비실비실해도 배짱 보통 아닌 거 알죠. 거기서 구르게 하면 형 죽어요. 아시잖아요.”
정명이 치문의 머리통을 퍽 갈겼다.
“건방진 새끼가. 형님들 이야기하는데 어디서 입을 대, 입을 대긴!”
제 덩치에 반도 안 되는 정명에게 맞아 놓고도 치문은 자존심 상한 기색조차 없었다.
“여태 빚 갚느라 똥줄 빠지게 일했는데 알파가 좀 싸고돌면 어때서 그래요. 이자 밀려서 골치 아픈 것보단 백번 낫죠. 이러다 빚도 전부 갚아 주겠다고 나설지도 모르는데요?”
채무금이 사라지면 후련한 쪽은 정명이었다. 그러나 정명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오메가 갈아 치우는 게 우성 알파들이야. 근데 뭐? 빚을 갚아 줘? 이쁜이 너 꿈도 크다.”
예준에게는 정명의 비아냥보다 그 기저에 깔린 자격지심이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채무를 전부 상환하더라도 이 지긋지긋한 조폭들 곁을 떠날 수 없다면, 목이 턱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그런 꿈 안 꿔요. 앞으로도 똥줄 빠지게 일해서 돈 갚을 거예요. 그러니까 술집 나가란 말은 하지 마세요. 치문이 말대로 그러면 저 그냥 혀 깨물고 확 죽어 버릴 거예요.”
차갑게 말하는 예준을 보며 정명은 혀를 찼다. 치문이 한마디 더 보태었다.
“스물여섯이면 그 바닥에선 늙다리죠.”
“얘 낯을 봐라. 이게 어딜 봐서 스물여섯이야? 갓 스무 살이라고 속여도 거뜬히 먹히지.”
“이래 봬도 우리 형 한때 이름 날렸던 금메달리스트라고요. 유명세 때문에라도 손님들은 절대 못 속이지. 안 그래요, 형?”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정명은 예준의 턱을 붙잡아 물건 다루듯 훑어보았다.
“VVIP만 상대하면 그만이야. 우리 가게 오는 것도 비밀로 해야 하는 높으신 분들 말이야. 얼마나 귀여워하겠어. 나름 국위 선양했다는 놈이 자기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 와서 쪽쪽 빨아 주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파가 아니라 하더라도 권력을 쥔 이들은 언제나 정복욕을 즐겼다.
“요즘 분들은 고분고분한 거 안 좋아해. 저놈 저거, 성격 반만 죽여 봐라. 아주 좋다고 침을 질질 흘릴걸.”
자존심 밟아 뭉개는 일에 약간의 반항은 오히려 흥을 돋우는 셈이었다. 높으신 분들 좆이나 빨고 뒹굴면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망가질 게 분명했다. 외제 차에 명품 두른 오메가라 할지라도 속은 사막처럼 메마른 지 오래일 테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하기 싫으면 일단 내 심부름부터 도맡아 해. 노가다한다고 쌔빠지지 말고 우리 애들 밑에서 착실히 배우라고. 어? 치문이 이 새끼처럼.”
조직에서 하는 일이라고 해 봐야 뻔했다. 타인을 해하는 일은 끔찍했다. 힘도 제대로 못 쓰는 오메가라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걸까. 예준은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말을 삼켰다. 곧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주먹을 꽉 쥐자, 치문이 달래듯 예준의 손등을 두드렸다.
“하기 싫….”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을 치문이 막아섰다.
“형님. 제가 형 잘 타일러 볼게요. 그러니까 괜히 갈구지 말고 오늘은 그냥 보내요.”
정명이 비는 시늉을 하는 치문을 노려보았다. 내키지 않는 기색이 완연했으나 정명은 곧 상체를 뒤로 물렀다. 소파에 느긋이 기댄 그가 예준과 치문을 번갈아 보았다.
“작당하지 말고 제대로 해, 제대로.”
“저만 믿으십시오, 형님.”
치문이 두툼한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답했다. 정명이 손을 휘휘 내젓자 치문은 냉큼 예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하얗게 질려 입술만 달싹이던 예준은 치문의 힘에 이끌려 겨우 소파를 벗어났다.
“또 보자, 이쁜아!”
“다음에 오면 꼭 빨아 줘야 해!”
열성 알파들이 멀어지는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차라리 눈과 귀가 멀어 버렸으면 싶었다. 그러면 저 징그러운 말과 눈빛들도 감내할 필요 없을 텐데.
“형. 가자.”
치문이 멍하게 선 예준을 강하게 당겼다. 예준은 끌려가는 내내 토기에 시달렸다.
*
“후우….”
치문의 입에서 하얀 담배 연기가 퍼졌다. 그가 건넨 담배를 받아 든 예준이 필터를 깊게 빨았다. 폐부에 연기가 들어차고 목구멍이 매캐해졌다. 담배를 두어 개 피우자 들끓었던 가슴속도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데려다주겠다는 치문을 만류하지 못했다. 예준은 치문과 함께 집 앞에 쪼그려 앉아 불량 청소년들처럼 담배를 피웠다. 꽁초가 쌓여 가고 지나는 이들의 눈총도 심해졌다. 해가 지며 부쩍 차가워진 밤공기에 뺨이 발갛게 얼어 가고 있었다.
치문은 말없이 담배만 피우는 예준의 눈치를 보았다. 녀석은 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형 놔주기 싫어서 저러는 거야. 싸구려 밥이라도 밥은 밥이거든. 밥 주던 고양이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면 빈정 상하는 법이지.”
“사라지다니. 그럴 리 없잖아.”
“그거야 형 생각이고. 정명 형님 가게도 난리야. 우성 알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오메가들 채 가거든. 사람 구실도 못 하게 돌려 먹고 내던져 버리면 두 번은 못 써. 그거 때문에 골치가 좀 아파.”
말해 놓고 치문은 괜히 입을 쓱 닦았다. 오메가인 예준이 그런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면서 실수해 버린 탓이었다. 그러나 예준은 미안함에 뒤통수를 긁어 대는 치문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응시했다.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러니까! 내 말이! 형은 형이고, 걔네는 걔넨데…. 그… 형이랑 만나는 알파가 좀 잘나 보이니까 더 그러는 거야. 채 가서 안 돌려주면 어쩌나 싶어서.”
예준은 새삼스레 진창을 구르는 기분이었다. 채 간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오메가이니만큼, 둘 사이의 관계를 연애라 정의해 준 태경에게 고마워 절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정명의 가게에서 일하는 오메가에 비하면 나은 처지인 건 확실한데, 언제든 그렇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입 안이 썼다.
“내가 카바 잘 쳐 볼게. 절대 접대는 안 해도 되게. 그래도 형님 입에서 말 나온 이상 잡일은 해야 할 거야. 딱딱하게 굴면 부러뜨릴 사람이거든. 알지, 형.”
“조폭 돈 빌려 썼다가 조폭 되게 생겼네.”
“아. 형한테는 나한테 하는 것처럼 험한 일은 안 시키지.”
“너도 조폭인데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나야 형 맘 다 아니까….”
치문이 둔감한 성격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착한 데다 고마운 동생이지만, 예준은 치문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오메가라 더 궂은 배달 일이라 할지라도 남을 속이거나 다치게 할 필요는 없어서 좋았다. 현장 일도 마찬가지였다. 고리타분할지 몰라도 성실하고 정당하게 돈을 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나랑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어.’
얼마 전, 남자가 속삭였던 달콤한 말들이 다 꿈같았다. 구름 위에서 진창으로 뛰어내릴 때마다 얼음물에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이런 게 싫어서 무던히 선을 긋고자 노력한 것이었다. 늘 밑바닥이면 이런 형편없는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간절히 남자의 품을 떠올리다니,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준은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치문이 네 말 이해했어. 아까 좀 무섭긴 했는데… 어떻게 하란 건지 알겠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 추운데.”
“무서우면 형 집에서 자고 갈까요?”
치문이 웃지도 울지도 않는 모호한 표정으로 물었다. 녀석의 어수룩함에 예준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말고.”
“나 밥도 잘해. 알잖아, 형.”
“배 안 고파.”
“그래도 좀 걱정되는데….”
계속 치댈 기색이기에 예준은 딱 잘라 말을 내놓았다.
“그 사람 만날 거야.”
“뭐? 그 잘생긴 우성 알파?”
“어.”
이름과 직함을 알면서 태경을 늘 그리 부르는 게 우스웠다. 곰곰이 생각한 치문은 곧 마지막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녀석은 두꺼운 다리를 접은 것이 불편한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래. 그게 낫지.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보내는 게 제일 좋은 거지.”
좋아하는 사람.
별것도 아닌 말에 가슴이 뛰면, 정말 그를 좋아하는 건가 싶었다.
“낯간지러운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
“알았어요. 나 그 정도 눈치는 있어. 형은 어서 들어가서 씻든가.”
“왜 씻어?”
치문이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였다.
“함 뜨려면 씻는 게 매너잖아.”
“너 인마, 못 하는 소리가 없냐.”
예준은 저보다도 안절부절못하는 치문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여자 친구도 없는데 첫 경험은 제대로 했을까 생각하자 속이 안 좋아졌다. 그런 걸 보면, 정말 가족 같은 사람은 형님들이 아니라 치문이었다. 치문과 있으면 오메가인 자신을 망각할 수 있었다. 성적인 영역에서만큼은 절대적으로 안전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녀석이니까.
“담배 남은 거 형 줄게. 그럼 나 가요?”
“응. 가. 연락할게.”
예준이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났지만 상태는 썩 괜찮았다. 덩달아 일어선 치문은 바쁘게 손을 흔들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녀석은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달리기 위해 힘차게 발을 굴렀다. 치문은 탕탕, 아스팔트를 차는 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예준은 그새 언 손을 호호 불며 사위가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묘한 기분으로 뜸을 들이다가 내내 잠잠하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치문에게 호기롭게 말하기는 했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예준은 지금 태경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통화 목록에 남은 그의 연락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그만두었다. 묵묵히 반지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맞선은 파투 났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 일로 이 회장에게 호출당한 태경은 본가를 찾았다. 빗줄기가 거센 탓에 젖어 버린 머리카락을 털며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2층 불이 꺼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석희도 윤도하도 집을 비운 모양이었다. 가사 도우미도 보이지 않는 주방에서 태경은 물 한 잔을 비워 낸 뒤 이 회장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끼치는 페로몬이 심상치 않았다. 알파에게 다른 알파의 페로몬은 불쾌감을 자아낼 때가 있었다. 전혀 갈무리되지 않은 고약한 페로몬을 느끼며 태경은 이 회장에게로 다가갔다. 이 회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 여식이 눈물 쏟느라 방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더구나.”
고작 두 시간 남짓한 만남이었다. 교감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을뿐더러 태경은 그날 저답지 않게 냉랭히 굴었다. 알파의 권력을 아는 여자라면 보통 맞선 자리에 연연하는 법이 없었다. 울었다는 건 남달리 의욕이 있었다는 의미였다.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인데 신중해야죠.”
“그 아이 정도면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지 않아? 네가 명성을 이끌 때도 그만한 집안이면 든든할 거다. 왜 뒤늦게 하지 않던 반항이야? 이십 대면 몰라도 서른셋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만 재고 적당한 짝을 찾아.”
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풍부한 지원을 받았고 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라 온 운명이었다.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면 N 그룹과 연을 맺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 반항심이란 게 도무지 잦아들 기미가 없는 것이다. 이 회장은 본심을 감춘 태경을 빤히 주시하며 말했다.
“너는 범이야. 집안 일으키는 호랑이.”
“무당이 했던 말로 저 설득하시려는 거면 헛수고예요.”
“어디 두고 봐라. 내 말이 틀렸는가.”
이 회장은 미신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범이라 거두었다고 했던가. 태경은 자신을 그리 비범한 사람이라 여기지 않았다.
“내후년쯤 명성으로 들어와 한자리 맡도록 해.”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다만, 떠날 때까지는 직원들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영 껄끄럽다면 명성과 합병하는 쪽으로 생각해도 좋다.”
LK에는 분명한 정체성이 있었다. 명성에 흡수되면 그 정체성을 보존하기 어려웠다.
LK는 이 회장의 손이 닿지 않은 온전한 태경의 회사였다. 태생 탓에 태경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했다. 버림받을까 두려웠던 시기는 지났으나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
“천천히요. 아버지.”
빗소리가 유난히 컸다. 빛 주변으로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줄기가 보였다. 견고한 창은 하나의 프레임 같았고 그 안에 이 회장의 실루엣이 담겨 있었다. 형체가 없는 페로몬이라 할지라도, 사내의 주변으로 퍼져 나오는 그것을 외면하긴 어려웠다.
태경이 이 회장의 너른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곧 러트이신가 봐요.”
“그렇지. 억제제를 먹을 참이다.”
오메가를 좋아하지 않는 이 회장은 늘 억제제와 함께 러트를 보냈다. 혐오감으로 인해 본능마저 거부하는 그가 늘 놀라웠다. 태경은 기계적으로 제안했다.
“오메가와 함께 보내시는 것도 방법이에요.”
이 회장은 단번에 인상을 썼다. 언짢은 기색이 완연함에도 그는 너그럽게 답했다.
“생각해 보지.”
대화는 곧 마무리되었다. 태경은 이 회장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빠져나왔다. 거센 빗줄기 틈을 파고들어 차에 오르자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도로가 미끄러울 터였다. 조심하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태경은 핸드폰을 굳이 꺼내 들지 않았다.
예준은 앓게 만드는 것은 저로서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체념하는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자극이 필요했다. 더 원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맹목적으로 돌진하기보다 갈증을 유발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태경에게는 지금 타들어 가는 제 속처럼 아이를 들끓게 할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는 이내 빗속을 뚫고 나아갔다.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든 궂은 날씨처럼 내내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머지않아 집에 도착한 태경은 곧장 작업실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부는 밝아졌지만, 이제는 전에 없이 휑한 데다 필요 이상으로 고요하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한동안, 문을 열자마자 고운 얼굴을 마주했던 일은 큰 기쁨이었다.
태경은 코트만 벗은 뒤 작업실로 들어섰다. 머릿속을 비우기 위하여 일에 몰두했다. 집중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저에 관한 거라면 저를 통해 아는 게 맞지 않을까요.’
아이를 대하는 일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조심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들추어 버리면 그만인 일에 굳이 구식 방법을 택한 건 예준을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유일하게 손에 쥔 자존심을 앗아 가고 싶지 않아서. 가려진 베일을 걷어 내는 과정에선 성취감마저 느꼈다. 기다림이 길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더욱 솔직한 낯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영영 좁히지 못할 거리가 있는 기분이었다. 마주한 순간 책망을 들었다면 아이를 설득하느라 밤을 지새웠어도 상관없었다. 욕망을 감추고 체념하는 태도를 보고 있자면, 절대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은 것이다. 원하면서 원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관계는 가혹하므로.
인내하던 태경이 결국 고개를 들어 창밖을 살폈다. 비는 계속되었다. 그는 결국 주머니에 꽂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집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만 해 줘.”
주어 없이도 이해한 경호원이 간단한 대답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회신은 문자로 전달되었다.
[비에 조금 젖긴 했지만 잘 들어가셨고 불 꺼지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턱을 괸 채 액정 화면을 내려다보던 태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젖었다고…. 그 사소한 불운에도 심기가 불편하여 긴 한숨을 삼키고 말았다.
*
예준은 뻐근한 상체를 세우고 길게 기지개 켰다. 전날 내린 비로 진창인 바닥을 밟으며 일했기에 온몸이 땀과 오물로 범벅이었다. 겨우 집으로 돌아와 씻고 누우려는데 하필이면 정명에게서 연락이 왔다. 바닥 청소나 하라는 이유였지만 예준은 전에 없이 껄끄러운 기분으로 룸살롱으로 향했다.
비가 길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최소한 마른 바닥을 닦는 일은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수월했다. 금요일 밤이기에 손님의 수가 상당했다. 씻은 몸에 땀이 배어나도록 열심히 닦고 있는데 낯선 알파들이 근처를 수시로 지나쳤다.
예준은 부담스러워 어깨를 움츠렸다. 태경의 집에 있을 때 면역제를 몇 개라도 챙겨 둘 걸 그랬다.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거나 여기저기 손을 뻗는 알파들은 예사였다. 분란을 피하고자 예준은 틈틈이 구석에서 기척을 죽였다.
밀려나고 밀려나다 보니 익숙한 코너 끝 방이 나타났다. 예준은 몰래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자꾸만 머릿속을 꽉 채우는 그가 싫었다. 따지자면 싫은 것은 다른 사람의 흔적을 묻힌 그였다. 그럴싸하게 감정을 가다듬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잊고 싶은 과거의 기억처럼 이따금 나타나 기분을 망가뜨려 놓았다.
여긴 그가 드나드는 룸살롱이었다. 의도적으로 연락하지 않고 있지만 어디에서든 마주칠 수 있었다. 예준은 언젠가 자신을 지나쳤던, 페로몬을 갈무리한 알파들을 떠올렸다. 그 후로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술집까지 찾아와 그런 짓을 하는 알파들이 있을 리 만무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묘한 직감이 들었다. 그때 보았던 알파 중에 혹시 태경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뒷모습만 본 게 다인 데다 그럴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자꾸만 그라면, 하는 가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준은 뒤늦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대걸레를 밀기 시작했다. 긴 밤을 버텨야 했다. 차라리 머릿속을 텅 비우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손님이 북적북적한 복도까지 다다른 것이 불편하던 차였다. 때마침 나타난 정명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쁜이. 오늘 예행연습 한번 해 볼까?”
“예?”
턱, 손목을 붙든 정명이 예준을 잡아당겼다. 대걸레를 손에서 놓친 예준은 어느 룸 앞까지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점잖으신 분들이야. 예뻐해… 줄걸?”
알파에게 보살핌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아니꼬운 걸까. 미리 언질을 듣지는 못했지만, 정명이라면 언제고 이런 일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벗어나려고 손목을 비틀어 봤지만 애초에 비교가 되지 않는 악력이었다. 잇새를 꽉 깨문 예준은 곧 체념했다. 밀어내고 도망가 봐야 몇 발 가지도 못해 가드에게 붙잡힐 테니까.
떠밀려 안으로 들어서자 알파와 오메가 할 것 없이 경박하게 퍼진 페로몬이 느껴졌다. 열성 알파인 남자 셋과 오메가 둘이 디귿 자로 된 소파에 늘어진 채였다.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멀뚱히 선 예준을 당겼다.
“네가 그… 걔라며? 실물이 훨씬 귀엽네.”
그는 재벌 3세를 연상케 하는 인상으로 기껏해야 제 또래처럼 보였다. 낄낄대고 앉은 놈들 모두 룸살롱에 드나들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예준은 입을 꾹 닫은 채 귓가에 닿는 손길을 쳐 냈다.
“얼굴 한번 보기 더럽게 힘드네. 야, 네 주제를 알아야지. 그러고 뻗댄다고 곱게 보내 줄 것 같아?”
놈이 허리를 감싸 제 품으로 당겼다. 억지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자 예준의 다리 사이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곧바로 목덜미에 코끝을 파묻은 남자가 예준의 페로몬을 들이켰다.
“와, 이거 물건이네.”
“…….”
“씻었어? 냄새 좋다.”
저질 페로몬만으로도 열리기 시작하는 몸이 끔찍했다. 좆같은 기분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달려드는 어깨를 밀어내자 놈이 목덜미를 콱 틀어쥐었다.
“반항하면 더 꼴려. 몰라?”
친구들이 보고 있음에도 바지 버클을 푼 남자가 귓불을 날름 핥았다. 예준은 마구잡이로 남자를 밀어냈으나 오메가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야. 좀 살살 다뤄 줘라. 그래도 자존심은 지켜 줘야지. 명색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튼데.”
“그거 이미 팔아먹고 없을걸? 얘 개같이 사는 거 모르는 사람도 있냐?”
이따위 짓이 예행연습이라면 그다음엔 도대체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예준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다른 오메가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그 주변을 맴돌며 익히 봐 왔다. 이런 곳에서 아무렇게나 몸을 내어 주고 살 바에야 죽는 편이 나았다.
“아악!”
발버둥 치던 예준이 결국 발로 남자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제야 훅 밀려난 남자가 배를 부여잡자 팔에 부딪친 테이블이 쿵 하고 울었다. 예준 또한 반동으로 튕겨 나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미 술과 오물로 더러운 바닥도 접대해야 할 알파의 품보다는 나았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바지를 추스른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준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며 그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복도에서 쿵쾅거리는 발자국이 들렸다. 리듬이 불규칙하고 차는 힘은 지나치게 센 그 발걸음 소리는 예준에게 너무나 익숙했다. 예준은 본능적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달라붙는 가드를 물리친 치문이 곧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형!”
어떤 일도 그저 사나운 일진으로 그칠 수 있는 이유에는 언제나 치문이 있었다.
*
긴 골목을 오르던 예준이 중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자꾸만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이 떨린 탓이다. 골탕 먹을 때보다 그 후가 더 힘든 건 왜인가 싶었다. 분명 의연하게 치문을 달래었고 정명의 구박도 이겨 냈다. 훌훌 털어 버리면 그만인데, 오늘따라 감당해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길게 내쉰 한숨에 하얀 입김이 퍼졌다. 유흥가에서부터 걸어와 다리가 무거웠고 회복된 무릎도 다시 뻐근해 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전기담요에라도 의지하려면 어떻게든 집까지는 가야 했다.
노랗게 드리운 가로등을 따라 걷자 머지않아 갈색 빌라가 보였다. 예준은 먼 가로등 밑에 우뚝 솟은 장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번에는 윤도하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 안광이 빛났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오물을 뒤집어쓴 덕에 가게에서 씻고 나와 다행이라는 점이었다. 열성 알파들의 페로몬이 남아 있었다면 변명하기가 곤란했을 터였다. 예준은 남자 주변으로 퍼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멎었던 발걸음을 뗐다. 담배를 비벼 끈 남자가 걸어와 예준과 마주 섰다.
“…….”
“…….”
쿵, 쿵, 뛰기 시작하는 심장 때문에 고막까지 아픈 기분이었다. 예준은 고요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연인이라 이름 붙였음에도 함부로 어리광을 부릴 수 없는 남자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저를 설득하지 않았던 그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 한편이 쿡 쑤셨다.
그러나 그에게는 머릿속에 남은 찌꺼기들마저 단숨에 상쇄시키고 마는 어떤 찰나가 있었다. 예준은 배 속을 간지럽히는 남자의 페로몬이 아니더라도 순식간에 고조되었다. 처음엔 차분하던 얼굴에 열이 오르더니 급기야는 폐부가 들썩였다. 울컥한 건 아니었다. 그저 오늘 하루가 너무 고되었기에 그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예준은 격양된 마음을 감추며 발꿈치를 들었다. 남자의 코트 깃을 당겨 잡고 입을 맞추자 그는 순순히 화답했다. 부드럽던 키스가 격정적으로 돌변한 것은 자신보다 그의 의지였다. 예준은 위태위태하게 계단으로 밀려나 집 문에 처박히듯 기대섰다.
한참이나 입술을 물고 빨던 남자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집은 냉랭하고 어두웠다. 남자가 벽으로 몰아붙이며 꺼낸 말은 의외였다.
“다른 여자 냄새나?”
머리카락 속으로 긴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예준은 남자의 셔츠를 움켜쥔 채 맨 가슴에 코끝을 비볐다.
“…아니.”
그의 우아한 페로몬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도했음에도 가슴은 터질 듯 뛰었다. 예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연락 안 했어요?”
기다렸나, 기다리지 않았나. 모르겠다. 혼란스러워 규칙적이지 못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남자가 거칠게 입술을 깨물었다. 더 밀려날 곳도 없는 와중에 예준은 한계까지 몰렸다. 벽을 짚고 있던 남자는 이내 아프게 어깨를 그러쥐고 목덜미에 코끝을 파묻었다. 살갗이 씹히자 뒤쪽에서 물이 울컥 쏟아졌다.
“그러는 넌, 왜 연락 안 했는데.”
예준은 고통스러우리만큼 강하게 몰아치는 성감에 아득히 눈을 감았다 떴다.
“왜인지, 대표님이 더 잘 알잖아요.”
달콤한 말로 연애하자고 말해 놓고 다른 여자를 만났다. 오메가의 처지를 알고, 알파와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의 사정을 존중하면서도 싫은 마음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예준은 내내 회피했던 생각을 정리하며 때 아닌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다른 여자 만난 게 싫었어?”
그는 대답을 강요하듯 입술을 덧그렸다. 고개를 끄덕이자, 한참이나 예준을 응시하던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왜 구속할 생각은 못 해.”
이해하지 못한 예준은 가물가물 감기려는 눈을 바로 떴다. 구속은 곧 통제였다. 어느 오메가가 우성 알파를 통제한단 말인가.
“…구속이요?”
단단해지는 성기와 달리 뻣뻣한 다리에선 힘이 빠졌다.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며 귓가에도 열이 올랐다. 몸의 변화를 감지한 그가 팔꿈치를 붙잡아 당기며 물었다.
“다른 사람 만나지 말라는 말, 왜 안 하냐고.”
“그 정도로 뻔뻔하지 않아요.”
또 한발 물러나자 남자가 반항적인 눈빛으로 속삭였다.
“네가 만나지 말라고 하면 안 만나.”
“그럴 리가 없….”
“다른 알파와 비교하지 말아요. 나는 그중 누구와도 같지 않으니까.”
그건 예준이 더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친절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기에 마음을 전부 내어 주는 것이 두려웠다. 현혹당했다고 여겼던 감정이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그러니까 표현해 줬으면 좋겠어. 바라는 건 그거 하나뿐이야.”
욕정 어린 남자의 눈을 바라보자 예준은 축축이 젖은 채로도 심한 갈증을 느꼈다. 먼저 다가가 입술을 비볐다. 곧 남자의 혀가 농밀하게 밀려들었다. 예준은 혀를 삼킬 듯 빨았다. 허리를 단단히 쥐는 힘이 느껴졌다.
“정말….”
“그래. 정말로.”
남자가 야살스레 속삭였다. 달콤한 속삭임에 성기가 완전히 발기하고 애액은 안쪽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페로몬이 좁은 공간을 꽉 채울 듯 짙게 퍼졌다. 예준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처지였으나 성감 덕분에 반대로 기분은 좋아졌다. 여전히 그를 믿을 수 없는데도 자연히 입가가 휘었다. 지독한 괴리였다.
“맞선은 내겐 그냥 일의 연장일 뿐이야. 아버지 설득하는 것보다 한 번 만나고 치워 버리는 게 더 간편하거든.”
왜 여자의 허리를 안고 객실까지 올라갔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윤도하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기에 예준은 침묵했다.
“그날, 그렇게 말했으면 이해했을 거예요.”
“아니. 괜찮다고, 상관없다고 말했겠지.”
태경이 으르렁대듯 반박했다. 맞닿은 눈빛이 매서웠다. 그가 더운 숨을 뱉으며 덧붙였다.
“멱살 쥐고 뺨이라도 갈겼어야지.”
“…….”
“도둑고양이처럼 셔츠 냄새는 왜 맡았어?”
뺨이 달아올랐다. 분명 물소리를 듣고 몰래 한 짓인데 어떻게 안 걸까.
“그 욕실, 반투명 유리라 그림자가 다 비쳐. 네가 내 셔츠에 무슨 짓을 하는지 봤어.”
소리 내 묻지 않아도 대답해 준 남자가 예준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노골적으로 맞닿은 성기를 비비자 예준의 입에서 탄성 같은 신음이 터졌다.
“읏…! 몰랐어요….”
그래서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은밀한 행위를 발각당해 수치스러운 것보다도 그가 자신을 몰아붙이는 이유가 더 궁금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만 보자 그가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 만나지 말라고 말해 줘요.”
가슴속에서 커다란 바위가 구르는 듯했다. 예준은 남자의 단단한 상박을 밀어내며 말했다.
“결혼하셔야 하잖아요.”
“알파랑 한다고는 안 했어. 진짜 너 기만할 거였으면 그날도 흔적 다 지우고 들어왔을 거고.”
“그런 적 있어요?”
결국엔 속내를 드러내며 묻자 남자가 만족스러운 듯 답했다.
“없어.”
그는 비로소 친절해진 손길로 귓가를 쓰다듬었다. 예준은 남자의 손길에 따라 고개를 기울였다. 길들었나, 생각하면 두려웠다. 그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으므로.
“알파들은 알파끼리 하는 섹스에 별 감흥 없어요. 페로몬을 풀어도 몸이 안 열리거든.”
“대표님한테 감흥 없을 리가 없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지.”
면역제를 먹었던 날, 페로몬 없이도 그에게 떨렸던 자신을 똑똑히 기억했다. 예준은 도저히 남자가 원하는 말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 만나지 마요.”
일순, 시간이 정지한 듯했다. 찰나의 정적이 해소되자 남자는 무서운 힘으로 달려들었다.
고작 그 한마디에 자제력을 잃다니.
손을 뻗은 남자가 점퍼와 티셔츠를 벗겼다. 손쉽게 바닥으로 떨어진 옷이 발끝에 차였다. 예준은 주저앉을 듯 휘청이다 손길에 이끌려 뒤돌아섰다. 페로몬 탓에 전희가 필요 없는 단계라는 걸 알았다. 너무 심하게 젖어 있었기에 구멍을 헤벌리는 행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버클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예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물렁물렁한 입구를 푹 벌린 성기가 단번에 안을 찌르고 들어왔다.
“하아!”
구속당하고 싶었던 거라면 그에게도 치기나 반항심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상대 때문에 여유를 잃는 기분은 낯설지 않았다. 괜찮다고, 상관없다고 말해 왔으나 늘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예준은 아픈 배를 부여잡으며 허리를 뒤로 꺾었다.
“흐으, 응, 조금만… 천천…. 읍!”
“하아….”
“읍, 으…!”
그가 어깨에 코끝을 파묻었다. 키를 맞추기 위해 까치발을 든 예준인지라, 허리를 붙잡은 남자의 힘이 아니라면 언제든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겨우 버티고 버티며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기를 받아 냈다. 도저히 신음을 참을 수 없어서 밀어내 보기도 했지만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여기, 방음 안 돼…. 다 들릴 거예요….”
쪽, 쪽, 살에 멍울이 지도록 애무하는 소리마저 노골적이었다. 자꾸만 부딪쳐 벽을 치는 소리도 막을 수 없었다. 이렇게 좁고 작은 방에서는 남자의 집에서처럼 마구 교성을 내지를 수 없었다.
“응, 읏! 침대로 가요….”
정확히는 매트리스 위로. 맥없이 사정하니 남자는 그제야 성기를 빼내었다. 그는 단번에 자신을 들고 방을 가로질렀다. 부실한 매트리스 위에 안착하자 스프링이 삐걱삐걱 울었다.
“이건 괜찮고?”
태경이 조바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예준은 곤란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엉금엉금 기어 스스로 바닥에 누웠다. 마지못해 다가온 남자가 무릎을 벌려 붙잡았다.
“이렇게 하면 아플 텐데.”
“어떻게 해도 아파요.”
예준이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저렇게 큰 성기를 받으려면 아프지 않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미 벌겋게 달아오른 몸에서 땀까지 배어나고 있었다. 예준은 손을 뻗어 남자를 당겼다. 다리 사이로 파고든 태경은 다시 망설임 없이 성기를 쑤셔 넣었다.
“으읏!”
“뭐가 이렇게, 하아…!”
좁아? 조여? 좋아? 묻고 싶었다. 그러나 머리끝까지 치민 쾌감에 사고가 정지하고 말았다.
“으읍…, 못 참겠어….”
“후우…. 내 목에 입술 묻어요.”
예준은 남자의 어깨 위에 얼굴을 묻은 채 울기 시작했다. 지나친 자극에 물기가 차오르다 귓가를 타고 흘렀다. 이를 꽉 물고 버티다가 결국 남자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기까지 했다.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던 그는 통증을 인지하지 못했다.
퍽, 퍽, 수없이 부딪친 허벅지 안쪽이 아팠다. 성기를 꽉 무는 연한 입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축축한 내장이 벌어지고 뱃가죽이 튀어 오르는 감각은 언제 느껴도 생경했다.
“응, 읏!”
“하아, 하아….”
남자가 상체를 일으켜 그제야 코트와 셔츠를 벗었다. 맨 상체가 드러나자 잔뜩 부풀어 오른 근육이 보였다. 틈 없이 짜인, 완벽한 형태를 감상하자 삽입이 느슨해졌다. 예준은 슬쩍 남자의 복근 위에 발바닥을 대었다. 발로 차듯 밀어내자 성기가 빠져나갔다. 내장이 쓸려 나가는 것처럼 밑이 아팠다.
구속당하고 싶다고 했던가.
예준은 곧 남자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거칠게 입을 맞추고 코끝을 비볐다. 눈을 맞추자 가슴이 너무 뛰어 괴로웠다. 제대로 호흡하기 위해 노력하며 남자의 어깨를 밀어 눕혔다. 올라앉은 채 성기를 쥐었다. 태경은 난감한 듯 눈을 가렸다.
“흐윽….”
귀두를 구멍에 잘 맞추어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이토록 손쉽게 성기를 삼키는 걸 보면, 정명의 말처럼 너무 닳아 구멍이 늘어져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통증을 참으며 푹 앉자 회음부에 닿는 남자의 음모가 느껴졌다. 모조리 삼켜 배꼽 부근이 불룩했다. 예준은 남자의 복근 위에 손바닥을 댄 채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태경이 눈을 맞추었다. 어둠 아래였기에 그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지는 않았다.
“으응, 읏, 하으….”
아무리 참아도 참을 수 없는 신음이 있었다. 상위 자세로는 좋은 지점을 능동적으로 자극할 수 있었다. 앞뒤로 움직이며 엉덩이를 조금씩 들었다 내리자 그의 폐부가 커졌다. 벌어진 다리를 꽉 잡아 누른 그의 잇새에서 기어코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더 세게 비벼 봐.”
소년처럼 상기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음, 으…. 이렇게?”
“하…. 읏, 더 깊이 앉아도 돼.”
남자의 입에서 숨소리보다 더 큰 신음이 터졌다. 분명 어설플 텐데도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자극에만 집중했다. 예준은 안에서 꿈틀꿈틀 경련하는 성기를 전부 느꼈다. 단단하다 못해 딱딱하게 부푼 성기는 안을 찢을 듯이 위협적인 크기였다.
“으읏! 하아, 좋, 좋아….”
무릎을 바닥에 대자 몸을 더 크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귀두가 빠져나가기 직전까지 몸을 들었다가 한 번에 푹 앉으니 허벅지까지 자극이 퍼졌다. 퍽퍽 찧어도 아프지 않은 지경에 이르자 멈출 수가 없었다.
“아응! 으! 흐, 하읏!”
성기 끝에서 흘러나온 물이 남자의 배를 적셨다. 미끈미끈하게 비벼지는 애액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난잡한 꼴이었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부끄러운데 욕구가 그 수치심을 앞서고 말았다.
“흐읏! 아아, 하…!”
또 입구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만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조하며 안이 조일 때마다 더 깊이 쳐올렸다. 좁고 깊은 곳까지 사정없이 성기를 밀어 넣거나 크게 둥글려 쾌감을 이끌었다.
태경이 무아지경에 빠진 예준의 팔을 잡아당겼다. 부드럽고 유연한 편이지만, 이토록 관능적으로 허리를 흔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훅 끌려간 예준은 엎드린 채 그와 눈을 맞추었다.
“미쳤지, 너.”
장판에 무릎이 쓸려 따가웠다. 예준은 부정하는 대신 뺨을 적신 눈물을 닦아 내며 남자의 턱을 쥐었다. 허리를 흔들며 입을 맞추었다. 숨을 쉬지 못해 기침을 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으, 으읏, 하아….”
온몸의 근육이 부풀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가까스로 움직임을 멈추자 성기를 강하게 조이는 구멍의 힘이 느껴졌다. 경련과도 비슷한 감각에 아연한 것도 잠시, 잔뜩 헐떡이는 태경이 예준의 눈에 들었다.
분명, 평소보다 빠른 사정이었다.
“…읏!”
예준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성기를 꽉 문 채 마구 조이자 그가 짐승 같은 신음을 냈다. 순간, 제 등을 꽉 끌어안은 남자가 목덜미를 짓씹었다. 붉은 피가 비쳤다. 동시에 폭발적으로 치솟는 페로몬은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농도였다.
찌르르, 소름이 퍼졌다. 예준의 동공이 커졌다. 예준은 그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우쳤다.
“……!”
알파가 오메가를 종속시키려면 페로몬을 각인하는 의식이 필요했다. 그저 말로만 들었던 행위를 본능적으로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남자가 알파의 욕망을 내비친 것만으로 예준은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발정기를 맞았더라면 분명 그에게 종속되고 말았을 터였다.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느낀 예준이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으, 읍!”
“하아…!”
그러나 그는 도리어 더 강하게 등을 끌어안았다. 온몸을 결박한 채 길게 사정했다. 내벽 깊은 곳에 정액을 잔뜩 싸지르고는 중력에 반하듯 골반을 쳐올렸다.
공포와 쾌감을 동시에 느낀 예준은 소변처럼 맥없이 정액을 흘렸다. 고조될 틈도 없이 남자의 단단한 배 위에 정액이 뿌려졌다. 사랑스럽게 비비는 행위에 첫 모양은 금세 흩어져 사라졌다.
땀처럼 미끈한 촉감과 함께 구멍에서 흐르는 태경의 정액 또한 느껴졌다. 느리게 드나들 때마다 뚝뚝 흘러내린 그것은 태경의 허벅지 안쪽에 떨어졌다. 예준은 눈물을 뚝 그친 채 하얗게 질려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그런 예준을 직시하며 몸을 뒤집었다. 역으로 예준을 깔고 엎드린 그가 여전히 속에 들어찬 성기를 깊이 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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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마요. 이거…. 이거 이상해요….”
“내가 뭘 하는데.”
눈빛을 보고 알았다. 그는 분명 알고 있었다.
“무서워요.”
“겁내지 마요.”
남자의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예준은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과 함께 아득한 상념 속으로 빨려들었다. 꽉, 들어차는 성감과 동시에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구속이 마땅한 관계를.
그는 정말로 원할까?
그렇다면 자신은?
다시 헐떡이기 시작하는 태경을 바라보며 예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달뜬 눈과 고요한 입술은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다.
*
체액으로 더러워진 몸을 씻고 나오자 마침 태경이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에서 담배를 피웠는지 그의 몸엔 옅은 담배 향이 배어 있었다.
“걸을 수 있겠어?”
“…네.”
허리와 허벅지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예준은 그런 걸로 엄살을 피울 생각은 없었다. 대답이 무색하게도 그는 등과 무릎 뒤로 손을 넣어 자신을 안아 올렸다. 내내 바닥에서 뒹굴었기에 매트리스 위는 깨끗했다. 허름한 시트가 등에 닿는 동안 예준은 벌겋게 달아오른 귀를 감추려 애썼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관계가 끝났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큼 짙었던 페로몬에 관해서는 먼저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금기도 아닌데 입에 올리기가 겁이 났다. 그 의식에 자신의 동의는 필요치 않았으리란 사실을 상기하면 아찔했다.
예준은 잔뜩 긴장한 채 좁은 품을 파고드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보송보송하게 마른 머리카락과 대조적으로 여전히 팽팽히 부푼 근육이 격렬했던 행위를 떠올리게 했다. 예준은 팔을 크게 벌려 남자의 너른 어깨를 감쌌다. 꼭 맞물리는 몸에서 무시할 수 없는 열감이 느껴졌다.
“아직 뜨거워요.”
“너 안고 있으면 계속 그럴 거야.”
예준은 애꿎은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예기치 못한 남자의 등장에 꼭꼭 숨겨 두었던 질투심을 털어놓고 말았다. 늘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맞선이나 결혼처럼, 남자의 삶에는 자신이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제가 오메가인 이상, 놓아줄 준비를 해 두는 편이 후폭풍이 덜할 테니까.
그러나 그런 그가 오히려 구속받길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경계가 모호해졌다. 허락해 주면 더 욕심내게 될 것이 뻔했다. 감정을 가둘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어서, 넘쳐흐르고 만 그것을 더는 숨길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정이 훌쩍 넘은 골목에는 발소리조차 드물었다. 곧 가로등도 꺼질 터였다. 고요히 가라앉은 방 안, 맞닿은 몸과 몸 사이는 아직 소란스러웠다. 예준은 목덜미에 닿는 따뜻한 입술을 느끼며 아득히 눈을 감았다 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예준을 보며 태경이 말했다.
“아무리 몸매가 훌륭해도 남자 몸에 이렇게까지 환장하게 될 줄은 몰랐어.”
“죄송해요. 괜히.”
남자의 몸에는 흥미조차 없던 사람을 괜히 딴 세상에 끌어들인 격이었다. 예준은 불편한 죄책감에 몸을 뒤척였다. 역으로 예준을 품에 가둔 태경이 웃었다.
“무슨 생각을 했기에 이 타이밍에 사과가 튀어나와?”
“괜히 나쁜 물 들인 것 같아서요.”
“네 몸 좋아하는 게 나쁜 물 든 거나 다름없다면…. 계속 나쁘게 살고 싶은데.”
태경이 구겨진 이불을 끌어 올려 덮었다. 곧이어 이불 속으로 파고든 손이 예준의 허리와 둔부를 쓰다듬었다. 귓가에 달뜬 입술이 닿았다.
“내 위에서 할 때 미치는 줄 알았어.”
야릇한 목소리에 예준은 발끝이 곱아들었다. 처음도 아닌데 유난스러웠다.
“자주 그렇게 해 줘. 네 아래에 있는 거 기분 좋거든….”
그 포지션에서도 삽입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인가 했다. 예준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지만, 남자의 품 안이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때, 촉촉한 혀가 목덜미의 상처 위를 스쳤다. 태경이 노골적으로 상처를 건드렸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예준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태경과 눈을 마주했다.
“아파?”
따끔했지만 아프다고 할 만큼은 아니었다. 예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처가 화두가 되는 것이 두려웠기에 입을 다문 채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이게 뭔 줄 알아?”
태경이 물었다. 부정해 봤자 어차피 티가 날 터였다. 예준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힘이 들어가자 입 안이 바짝 탔다. 언제 버려져도 이상하지 않을 처지에, 한 사람에게 영원히 종속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각인하면 내 페로몬에만 반응하게 돼.”
“…알고 있어요.”
태경 이후에 다른 사람을 만나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혹시라도 그런 날이 왔을 때 무감각한 몸이 되긴 싫었다.
“그러면 대표님이랑만 제대로 섹스할 수 있게 되는 건데.”
어느새 허벅지를 쥐고 있던 태경의 손이 근육을 아프게 눌렀다.
“다른 사람 만나지 말라는 건 나한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야. 누구랑 섹스하게.”
아마도 그는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당장에야 그가 아니라면 누구와도 섹스할 생각이 없지만.
“그게 아니라요. 헤어지면 어떡해요.”
“뭐?”
“대표님이랑 헤어지고 나서 말이에요. 다시 알파랑 사랑에 빠져도 불감증이나 다름없는 몸이 되잖아요. 그건 좀 그렇….”
단숨에 올라탄 태경이 무게로 예준의 몸을 짓눌렀다. 답답함에 몸부림치던 예준은 태경의 눈이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 능숙하게 다리를 열고 파고든 그는 마주한 눈을 집요하게 들여다보았다.
“사랑에 빠졌어? 나랑?”
대답 없이도 남자는 확신하는 눈치였다. 그가 부드럽게 이마를 쓰다듬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고 동그란 굴곡을 따라 매만지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가라앉았던 눈빛에 다시 애정이 번지는 게 신기했다.
“그런데 왜 다른 알파를 생각하지?”
화답하듯 내려앉은 입술이 먼저 아랫입술을 포근히 감쌌다. 뒤통수로 들어온 손이 목을 쓰다듬자 자연히 입술이 벌어졌다. 녹일 듯 부드럽게 파고든 혀를 가까스로 얽었다. 타액으로 흠뻑 적셔진 입술을 떼어 내자, 다음으로 남자가 향한 곳은 다시 상처 부근이었다.
“아아….”
잘근잘근 씹어 댄 탓에 이번에는 몹시 아팠다. 연이은 쪽 소리와 함께 키스 마크까지 생겨 목 부근이 엉망이 되었을 터였다. 페로몬이 퍼져 나오기 전에 예준은 다급히 남자의 어깨를 밀어냈다. 꿈쩍도 안 할 듯 고정되었던 어깨가 제 손길 한 번에 느슨히 움직였다.
시선을 마주한 남자가 이마에 쪽 입 맞추었다. 눈동자를 스친 입술이 뺨에 내려앉았다. 귓불을 물었다가 끈질기게 목으로 향하는 입술은 짓궂다 못해 집요했다.
“난 단 한 번도 갖고 싶은 걸 놓친 적이 없어요.”
그가 본색을 드러냈다. 예준은 몹시 긴장한 채 남자를 응시했다.
“그게 이 상처에 대한 답이야.”
그것이 알파의 본능이라면 오메가는 순응해야 마땅했다. 다가온 태경이 입을 맞추었다. 발끝까지 저릿한 촉감에도 예준은 쉬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
간밤,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남자를 두고 작은 오해를 했다. 예준은 제 곁을 떠나려던 태경을 당겨 저도 모르게 ‘가지 마.’ 하고 속삭였다. 남자는 조급한 눈빛과 반대로 느긋하게 말했다.
‘담배 피우고 올게.’
장난스럽게 담배를 들어 보이는 그를 보자 부끄러워 죽고 싶었다. 담배를 피우고 양치까지 하고 온 남자가 뽀뽀 세례를 퍼부으며 자고 가겠다고 말했어도 수치심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저답지 않은 짓을 반복할 때마다 예준은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아무리 능숙하게 굴고 싶어도 결국은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답답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을 때는 깊은 새벽이었다. 다시 눈을 뜨자 바로 보인 것은, 이제 막 뜨기 시작한 해가 뿜어내는 주황색 빛이었다.
도로 위로 난 손바닥만 한 창이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태경은 정말 가지 않았다. 제 옆에서 곤히 잠든 남자는 규칙적으로 숨만 들이마셨다 내쉴 뿐이었다. 도저히 다시 잠들 수 없었던 예준은 정확히 일곱 시 반에 태경을 깨웠다.
“대표님. 출근하셔야죠.”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어깨를 흔들자 태경이 눈을 떴다. 그의 품속으로 끌려가 몇 분을 더 허비해야 했지만 싫지 않았다. 격렬했던 지난밤이 무색하게도 가뿐히 매트리스를 빠져나온 그는 예상치 못한 말을 내놓았다.
“오늘 같이 있자.”
더 깊이, 더 진득한 어둠 속으로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남자의 제안에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언제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했으나, 남자가 곧바로 결근 사실을 회사에 알렸기에 해가 질 때까지는 함께 있을 수 있겠다고 단정했다.
비좁은 욕실에서 한 차례 몸을 섞은 후엔 늘 그랬던 것처럼 연고를 바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출장에 대비해 차에 상비해 둔 옷을 가져와 입었다. 도톰한 후드에 트레이닝팬츠 차림인데도 슈트를 갖춰 입었을 때처럼 귀티가 나는 게 신기했다.
예준은 남자와 다르지 않은 옷차림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상한 우유와 즉석 밥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전날 저녁도 굶었기에 허기가 상당했다. 어쩔 수 없이 뒤통수만 긁자 매트리스 위를 정리한 태경이 다가왔다.
“웬만하면 존중해 주고 싶었는데 더는 안 되겠어.”
“뭘요?”
“이 집 말이야.”
한 번도 불만을 토로한 적 없는 사항이었기에 예준은 의아한 듯 눈을 고쳐 떴다.
“너무 좁고 불편해. 내 애인이 살기에는 무척이나 부적절한 집이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궐 같은 집에 사는 그가 이런 닭장 같은 단칸방을 마음에 들어 할 리 없었다. 다만, 이미 몇 년이나 이곳에서 산 예준은 불편을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적응한 상태였다.
“불편하시면 다음부터는 제가 대표님 집으로 갈게요.”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가 텅 빈 냉장고를 한 번 더 살폈다. 도마 하나 올리기도 버거운 싱크대와 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차 버리는 욕실, 빛이 잘 들지 않는 내부까지.
“삶을 영위하는 데는 생활 방식이 생각보다 중요해. 이런 곳에서는 내가 인생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어. 집은 그냥 잠만 자는 곳이 아니니까.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
그거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하루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바깥에서 보내는 예준에게 집은 춥지 않게 몸을 뉠 수 있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저는 집에서 거의 잠밖에 안 자서….”
태경이 예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뒤이어 예준의 허리를 감싼 그가 말했다.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는 기분은 어떠냐고 전에 물었었지.”
“네.”
“꼭 커리어와 관련한 일이 아니더라도, 집이 자신의 통제 아래 있다면 그 기분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어.”
“내 뜻대로 되는 느낌이요?”
“응. 그거.”
태경이 예준을 돌려세워 양어깨를 붙잡았다. 상체를 기울인 그가 기꺼이 눈높이를 맞추었다.
“제대로 자고, 제대로 먹고,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여기에도 있을 건 다 있어요.”
“아파트 구해 줄게. 이사하는 게 어때요?”
태경이 갑작스레 본론을 내놓았다. 훅 들어온 제안에 예준은 애꿎은 입술만 벙긋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내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싶지만, 거기에서 네가 어땠는지 알아. 안전하고 아름답지만 공허하지. 오로지 이태경만을 위해 지어진 곳이니까.”
예준은 숨죽여 보낸 시간을 떠올렸다. 그의 흔적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건 기쁜 일이었으나, 따지자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낭비한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니까 온전히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어. 잘 갖춰진 곳에서 안전하게. 적어도 비밀번호를 자기 생일로 만드는 실수는 안 했으면 좋겠고.”
태경이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온화한 미소에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대표님 명의로 된 아파트에, 대표님이 사 준 것들만 가득하고, 오로지 대표님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어도요?”
“완벽하게 들리는데.”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사랑스러웠다. 예준은 소리 없이 웃었다.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얼마나?”
“당장 환경이 바뀌는 건 좀 낯설 것 같아서요.”
“잘 생각해 봐요. 나쁜 제안은 아닐 테니까.”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격차를 좁히기위해선 타협점을 찾는 데 익숙해져야 했다. 완강한 거부가 답은 아니었다. 모호하게 답하며 안기자 그가 어깨를 힘주어 당겼다.
“너 배에서 꼬르륵 소리나.”
“배고파요. 아침에도 했잖아요.”
“오늘은 집 데이트니까 같이 마트 가자.”
출근해도 모자랄 판에 마트라니.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 한가함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럴 때 쓰려고 대표 직함 단 거야.”
밀어내도 이제 와 회사로 갈 태경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데이트라곤 영화관에 간 일밖에 없었기에 예준도 가슴이 뛰었다. 기대감이 어린 눈을 보며 태경이 웃었다. 그는 예준 너머, 고이 잠든 핸드폰에 한동안 시선을 두었다.
*
막상 차에 타자 묘한 긴장이 맴돌았다. 마지막으로 태경의 차에 올랐던 때를 떠올리면 예준은 가슴이 저릿했다. 윤도하에게 걸려 온 전화를 추궁했던 그와, 무작정 숨기려 했던 저 사이에 흘렀던 냉랭한 기운이 아직 선명했다.
그림자처럼 남은 질문을 남자는 굳이 꺼내 놓지 않았다.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지도 않았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착했다. 다행인가 싶으면서도 예준은 괜히 껄끄러운 기분에 조용히 창밖만 내다보았다.
대형 마트에서 제대로 장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예준은 태경과 함께 카트를 밀며 어색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같이 밤을 보내고 같이 식사하기 위해 장을 본다는 게 어쩐지 무척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먹고 싶은 거 있어?”
“대표님은요?”
뒤통수를 긁적이며 묻자 태경은 유난스럽지 않게 답했다.
“너 먹고 싶은 거.”
“그럼 전, 대표님 먹고 싶은 거요.”
그러고 보면, 예준은 대부분의 선택을 태경에게 맡기는 편이었다. 원하는 바가 분명한 사람인데다가 그의 세계가 저보다 훨씬 넓은 탓이기도 했다. 하다못해 점심 메뉴조차도 제 좁은 머릿속을 굴리는 것보다야 남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그럼 우선 여기 손 넣어요.”
태경이 팔꿈치를 접으며 말했다. 예준은 비교적 한산한 마트를 둘러보곤 우물쭈물 팔짱을 꼈다.
“정말 이러고 싶으신 거 맞아요?”
“사실은 손잡고 싶어.”
“…예?”
알파와 오메가의 연애에는 관대한 세상이라지만, 남자끼리 붙어 있는 모습을 보이긴 부끄러웠다.
“그보다 더한 짓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이런 말 할 때마다 토끼 눈 되는 것도 신기해.”
예준은 멋쩍게 웃었다. 세팅하지 않은 그의 보송보송한 머리카락을 올려다보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편으론 내가 처음인 것 같아서 좋기도 하고.”
그는 어수룩한 자신을 능숙하게 달래었다. 따뜻하게 와닿는 시선에는 좀처럼 면역이 되지 않았다. 예준은 남자와 나란히 발을 맞추며 시선을 피했다. 어쩔 수 없이 모여드는 이목을 느끼고는, 온몸을 간지럽히는 단 기운을 숨기기 위해 부러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예준은 인스턴트식품에 익숙한 편이었다. 그 사실을 간파한 태경이 시식 코너 앞에 다다를 때마다 걸음을 멈추었다. 예준은 바삭하게 튀긴 돈가스를 응시하다가 태경의 눈치를 보았다.
“먹어도 돼. 먹여 줄까?”
눈을 빛내는 아주머니 앞에서 그는 아무렇지 않게 돈가스를 집어 입 속에 넣어 주었다. 얼떨결에 돈가스를 맛본 예준은 부지런히 턱을 움직였다.
“부부예요?”
시식 코너 아주머니가 물었다. 페로몬을 느끼지 못할 텐데도 그와 저를 부부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니 신기했다. 예준은 헛웃음 지었다.
“아니면 동생이에요? 이렇게 귀여운 동생이 있어?”
태경이 시원하게 입매를 열어 웃었다. 명확하게 해명하지 않았기에 아주머니의 두 눈에 물음표가 비쳤다. 예준은 돈가스를 삼킨 후에 주변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형제가 아니라고? 부부가 아니라고?”
태경이 아프지 않게 예준의 입을 막고 나섰다.
“당연히 부부죠. 눈썰미 보통 아니신데요.”
뻔뻔하게 아주머니를 홀린 태경은 예준이 더 반항하기 전에 시식 코너 앞을 벗어났다.
예준은 난감한 눈빛으로 저보다 한발 앞선 태경의 등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농담이어도 부부라니, 가당치 않았다. 그래도 쓸데없이 목소리가 커지는 게 싫어서 예준은 입을 꾹 다문 채 남자를 따랐다. 태경은 찌개에 사용할 법한 두부와 채소를 담는가 싶더니 파스타 면과 소스, 각종 과일, 스낵, 집기, 생필품을 가리지 않고 카트에 쏟아 넣었다. 일일이 가격을 확인하는 예준과 달리, 그가 확인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상품의 질밖에 없었다.
“다 못 먹어요. 그리고 이런 것까진 필요 없어요.”
“알아요.”
“냉장고 작아서 다 안 들어가요.”
“예준아.”
“응?”
“토마토소스가 좋아, 크림소스가 좋아?”
말문을 막는 딴소리에 예준은 골몰한 얼굴을 했다.
“토마토.”
잔소리에도 아랑곳없이 토마토소스를 하나 더 집어 든 태경이 걸음을 옮겼다. 카트가 가득 찰 즈음이 되자 예준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김예준 아니야?”
“태권도?”
“오메가 됐다던 애. 옆은 누구지?”
귀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속삭이는 말들이 정확히 들렸다. 난감해진 예준이 태경 뒤로 몸을 숨겼다. 누군가 인터넷에서 떠들 만한 가십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메가로 변했다더니 외모가 어떻더라. 아버지 사건은 어떻게 마무리된 거냐. 언젠가 이름 한 번 검색해 보았다가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절대 검색창에 제 이름을 검색해 보는 실수 따위를 저지르지 않았다.
“보면 모르나. 애인이지.”
태경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사람들에게 들릴 만한 거리는 아니었으나, 예준은 사색이 되어 그의 손목을 당겼다.
“쉬. 조용히 해요.”
태경은 사람들을 등진 채 예준을 더 깊숙한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저런 말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어.”
“인터넷에 자꾸 이상한 이야기가 뜨니까.”
“끄면 없는 세상인데 뭐 어때.”
등에 진열대가 닿았다. 태경이 체격으로 가두고 나서자 예준의 몸은 완전히 가려 보이지 않았다.
“네가 아직 인기 많다는 걸 간과했네. 대회에서도 방에 찾아올 정도면 그때 인기도 보통 아니었다는 건데.”
“아직도 기억해요?”
“네가 한 말은 다 기억하지.”
유명세의 좋은 점만 언급하는 그를 보자 두근거리던 심장 박동도 차차 가라앉았다.
“사람들이 자주 알아봐?”
“그렇진 않아요.”
일할 때는 주로 헬멧이나 마스크를 낀 상태여서 상관없었다. 생활 반경도 무척이나 좁은 편이고, 새로운 사람보다는 늘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편이기에 유명세가 거추장스럽지는 않았다. 그다지 불편하지 않던 시선이 불편해진 건 확실히 태경 때문이었다.
“이런데 나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
태경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작 마트였다.
“괜히 대표님까지 나쁜 소리 들으면 안 되잖아요.”
“별걱정을 다해.”
친하게 지내던 선수들과 연락이 잘 닿지 않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영 틀린 말은 아닌데 남자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들도 끝에는 다 잘생겼다, 예쁘다, 귀엽다, 그렇게 써 놨던데.”
예준은 태경의 말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검색해 봤어요?”
“늘 하지.”
남자가 바쁜 데는 그런 쓸데없는 일들도 한몫하나 싶었다. 예준은 코앞까지 다가온 태경을 올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하마터면 눈을 감을 뻔했다. 괜히 목을 큼큼 다듬고는 단단한 가슴을 밀어냈다.
관심은 곧 멀어졌다. 주변의 인기척이 눈에 띄게 사그라지자 그는 순순히 자신을 놓아주었다.
“살 만한 건 다 산 것 같으니까 이제 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예준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으론 카트를, 한 손으론 예준의 어깨를 감싼 태경이 계산대로 향했다.
드문드문 형질을 갖춘 이들의 페로몬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선망의 눈빛과 경멸의 눈빛이 동시에 곁을 스쳤다. 예준은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성 알파와 함께 있을 때는 갑작스레 발길질을 당하거나 노골적인 폭언을 들을 일이 없으므로.
“많이 불편해?”
자꾸만 코끝을 만지는 예준을 보며 태경이 물었다. 외박으로 그 또한 면역제를 먹지 못했을 터였다. 불편한 사람은 저뿐만이 아닐 텐데도, 그의 눈은 시종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괜찮아요.”
말한 예준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슬쩍 남자의 등에 달라붙어 익숙한 페로몬을 들이켰다. 배가 간지러웠지만 잘 갈무리되었기에 견딜 만했다. 더 큰 세상에서는 그를 방패막이 삼을 수 있다는 것이 내심 좋았는지도 모른다.
태경은 노골적으로 안기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떨어지지도 않는 예준을 제품으로 끌어당겼다. 뜨거운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자 예준은 고개를 파묻은 채 미동하지 않았다.
*
히트 사이클이 다가오고 있었다. 태경을 만난 이후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찾아오는 형국이었다. 이틀간 몸이 좋지 않았기에, 현장 일은 고사하고 내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래도 하루만 더 버티면 약속한 크리스마스였다. 예준은 혹여 태경의 업무에 방해가 될까 봐 미리 언질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정명의 연락을 받았다. 듣기로는 대수롭지 않은 잔심부름이었는데, 룸살롱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차마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 편을 든 치문까지 고생시킬 것 같아 고분고분 그러겠다고 답했다. 어쨌거나 조폭들 하는 일에 가담하는 꼴이니 예준은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볼캡을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나타나자 열성 알파 형님들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정명의 따까리들인데 이름까지는 다 알지 못했다. 예준은 꾸벅 인사하고 담배 연기가 뿌옇게 피어나는 골목 어귀로 다가갔다.
“뭐 하는지 대충 들었지?”
“예. 운전이요.”
가까이 다가온 형님이 코끝을 비비적거렸다. 야릇하게 눈동자를 위아래로 굴리는 걸 보면 히트 사이클을 감지한 게 분명했다.
“발정이 났으면 미리 연락하지.”
희롱하는 남자를 다른 조직원이 말렸다.
“야. 일부터 해, 일부터.”
입맛을 다신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턱을 치든 그가 괜히 핀잔을 주었다.
“애들 단속하는 건 우리가 할 테니까 넌 운전만 제대로 하면 돼. 비실비실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운전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됐고. 차에 타기나 해.”
정명은 업소로 출근하는 오메가와 여자들을 차로 데려다주라고 명령했다. 출퇴근 중에 도망치는 경우가 많아 골치가 아프단 소리를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늘 덩치들을 대동하고 나섰는데, 운전은 따지자면 그중 가장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잔뜩 골이 났을 테니 적당히 맞춰 주는 편이 현명했다.
시동을 걸자 외투를 입은 오메가와 여자까지 모두 일곱 명이 연립 주택에서 걸어 나왔다. 명품을 두르고 외제 차를 몰고 다니는 접대부들도 있다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예준은 차 안으로 들이치는 향수 냄새에 코를 막았다.
백미러로 흘끗 들여다보자 치장한 남성 오메가들도 보였다. 자신처럼 호리호리한 몸매에 유난히 결 좋은 피부를 가진 남자들이었다. 크게 다른 처지라 여기지는 않았으나 괜한 긴장으로 예준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출발!”
뻔한 동네기에 예준은 익숙하게 차를 몰았다. 차 안의 오메가들은 침울한 낯으로 창밖만 바라보았다. 예준은 답답함에 애써 정면에만 시선을 고정하려 노력했다. 누군가의 치부를 발견한 듯 식은땀이 배어나고 속이 메스꺼웠다.
업소가 있는 강남까지는 십오 분 남짓이 걸렸다. 창부들은 형님들을 따라 단 한마디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유흥가가 몰린 강남 뒷골목의 한낮은 낯설었다.
“김예준이.”
“예.”
“정명 형님이 내일 낮에 좀 보자신다.”
“저를요?”
조직원 중 하나가 예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내일은 크리스마스이브였고 태경과의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언제요?”
“아무것도 먹지 말고 열두 시까지 현장 사무실로 오라던데.”
“…왜요?”
“일이지, 뭐긴 뭐야. 한두 시간만 뺑이 치면 다음 달 이자 빵이래, 빵. 다 깎아 주신단다.”
오늘처럼 잡일만 하고 이자를 탕감받는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예준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탈탈 턴 남자가 그런 예준의 마스크를 굳이 벗겼다.
“눈요기 좀 하게 이딴 건 좀 치워라.”
남자가 씨익 웃었다. 예준은 치미는 토기를 애써 감추며 미소를 지었다. 상황을 무마하려 했을 뿐인데 마주한 열성 알파의 눈이 이글거렸다.
“너 나랑 잔 적은 없지.”
“예.”
예전이었으면 곧 히트 사이클이니 도와 달라 말했을지도 모른다. 찝쩍거리는 열성 알파들은 늘 추잡스러웠으나 발정 앞에서는 그걸 핑계 삼을 여력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때가 무색하게도 예준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거부감이 들어서였다.
“안 자요. 형님이랑.”
“왜? 지금 시간 있어? 조금만 놀까?”
“아뇨.”
손바닥이 날아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었다. 질끈 눈을 감는데, 업소에 들렀다 나온 다른 형님이 어깨를 들이밀었다.
“내일 정명 형님한테 보내는 거면 손 안 대는 게 좋을 거다.”
예준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위험을 모면한 것만 해도 다행이기에 기회 삼아 바쁘게 인사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남자가 퉤 침을 뱉었다. 바쁘게 담배를 찾는 얼굴에서 수치심이 엿보였다. 입맛을 다시는 남자들을 뒤로한 채 예준은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내 뒤돌아 달리자 곧 대로변에 다다랐다.
목을 한참 꺾어야 끝을 볼 수 있는 빌딩들 사이에서 예준은 바쁘게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하얗게 퍼지는 입김, 서서히 흐려지는 하늘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예고하고 있었다.
*
현장 안으로 덤프트럭이 들어섰다. 희뿌옇게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간 통에 예준은 콜록콜록 기침했다. 오전부터 눈이 시작되었다. 눈이 오면 기온이 올라가기 마련인데, 올해 크리스마스는 유난히 춥고 궂은 날씨였다.
예준은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55분. 약속 시간까지 오 분 정도 남아 있었다. 컨테이너 근처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는 불이 켜진 건물 3층을 올려다보았다. 정명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현장에 왜 저를 불러들인 것인지 궁금했다. 예준은 다시 준비해 태경에게 갈 여유만 주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3층엔 정명 홀로 있었다. 예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 왔냐?”
“일 시키시려고요?”
“건수 하나 물어서 딱 너 시키면 되겠다 싶었지.”
“무슨 일인데요?”
예준이 정명과 마주 앉았다. 히트 사이클의 유난한 페로몬을 감지한 그가 입맛을 다셨다.
“그새 발정이 났어.”
씩 웃는 얼굴이 영 꺼림칙했다. 예준은 갈무리하지 않은 정명의 페로몬을 감당하기가 고통스러웠다. 두 다리에 바짝 힘을 주며 버티자 입꼬리를 올려 웃은 그가 물었다.
“밥은?”
“안 먹었어요.”
“샤워는 했고?”
“예.”
샤워는 매일 하는 일인데 특별히 묻는 게 이상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차 여러 대가 거친 아스팔트를 지나며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기에 예준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보스….”
예준이 중얼대듯 내뱉은 말에 정명이 답했다.
“러트시란다.”
“예?”
일전, 그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갈무리하지 않은 페로몬 때문에 머리까지 아팠다. 알파들이 모인 방에서 수치를 당한 일은 두말할 것도 없었고, 그때의 일로 보스가 오메가를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예준은 그런 그의 러트가 저와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그런데요?”
“이번에는 오메가랑 보내시겠대.”
순간, 예준의 숨이 멎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오메가라고는 오로지 저 하나뿐이었다.
“네가 제격이다 싶었지. 상대가 발정 난 오메가라는 거 알면 보스가 꽤 좋아하시겠어.”
성욕이 혐오감과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는 건 떡볶이집 문제로 속을 썩였던 열성 알파를 통해 알았다. 다만, 예준은 이제 발정기를 함께 보낼 알파가 있었고 다른 이와의 잠자리가 필요치 않은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보스를 상대하는 일은 명백한 접대였다. 어린놈들 상대하라고 룸으로 밀어 넣은 만행은 정말 오늘의 예행연습이었던 걸까. 예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짝 굳은 채로 물었다.
“…보스랑 자라고요?”
정명이 코웃음 쳤다.
“자긴. 보스는 오메가 몸에 손대는 거 끔찍하게 싫어하셔.”
그렇다면 자신은 쓸모가 없을 터였다. 의문이 무색하게도 정명은 예준의 용도를 정확히 짚어 주었다.
“그냥 딸감이나 하라 그거지.”
알파 시중이나 들어야 하는 처지인데 둘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 싶었다. 평정을 가장하긴 했지만 예준의 어깨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오메가를 혐오하는 우성 알파를 상대하라니. 그의 눈요기가 되어 주라니.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예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하기 싫어요.”
“보스 도착한 거 못 들었어?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말씀드렸잖아요. 이런 일은 못 한다고. 룸에 들어가자마자 사고 치는 거 보셨잖아요.”
“너 예전엔 보는 알파마다 자 달라고 사정사정하더니 왜 요즘엔 일언반구도 없어?”
정명이 버럭 성을 냈다. 추측대로 우성 알파가 싸고도는 것이 아니꼬운 게 맞았다. 그게 아니라면 접대에 능숙한 오메가를 데려 놓아도 모자란 일에 자신을 들이밀었을 리 없었다.
“우성 알파한테 가랑이 벌리느라 바쁘다더니 눈에 뵈는 게 없지?”
“안 좋아하실 거예요. 다른 알파랑 하는 거.”
예준은 저도 모르게 흔적이 남은 목을 매만졌다. 태경은 여느 우성 알파처럼 소유욕이 상당했다. 아무리 친절하다고 해도 타인과의 관계를 이해해 줄 사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 아니고 보스야. 기라면 기는 거지, 잔말이 많아.”
머뭇거리는 예준을 향해 정명은 쐐기를 박았다. 그러자 곧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가까워졌다. 러트에 직면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낯설기에 예준의 동공이 커졌다. 히트 사이클의 전조 증상으로 아릿아릿하던 배의 간지러움이 더할 나위 없이 심해졌다.
“좋은가 보네. 벌써 느끼는 거 보니.”
정명의 비아냥처럼 언제라도 몸이 열릴 듯 아래가 젖어 들었다. 어쩔 줄 몰라 주먹만 꽉 말아 쥔 채 버티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정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보스보다 먼저 안으로 들어선 따까리들이 일렬로 섰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형님. 진짜 하기 싫어요. 저 그런 일 못 해요!”
“뒤 대 주라는 것도 아니고 딸 치는 거 보고 있기만 하라는 건데 그걸 못해? 이자 다 까 준다니까!”
대강 눈치를 살핀 따까리들이 예준의 양 손목을 하나씩 붙잡았다. 예준은 조직원들이 이끄는 힘에 강제로 몸을 일으켰다. 열린 회의실 문틈으로 커다란 소파가 보였다. 정명의 따까리들은 그곳으로 예준을 이끌었다. 소파 위로 쓰러지자 정명이 명령했다.
“손발 묶고 눈 가려.”
열성 알파에다 장정 셋이었다. 도망치려고 해 봤자 다 잡힌 물고기나 다름없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상황을 모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준은 무력감에 휩싸여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페로몬 탓에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되살아났다. 아래가 뻣뻣해질 만큼 야릇한 향이었으나 반갑지 않았다. 토기가 일어 구역질을 했다. 먹은 게 없어 뱉어 낼 것도 없었다.
“보스 앞에서 그 지랄 하기만 해. 확 좆대가리를 목구멍에 처넣어 줄 테니까!”
정명이 으름장을 놓았다. 격렬하게 떨리는 몸과 반대로 머리는 둔감해졌다. 예준은 형님들과 뒹굴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의 습관대로 인격을 죽이기 위해 눈을 감았다. 싸구려 밧줄을 가져온 따까리들이 그런 예준의 손목과 발목을 모아 뒤로 묶었다. 곧 까만 천을 가져온 정명이 두 눈마저 가려 버렸다. 예준은 정명이 매듭을 묶자마자 고급 가죽 소파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곧, 여러 개의 구둣발 소리와 함께 보스가 나타났다.
“형님 오셨습니까!”
준비는 모두 끝났다. 그는 지팡이로 바닥을 팡팡 내리치며 혀끝을 찼다.
“쯧.”
바지 버클이 성급하게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씨근덕거리는 호흡이 예사롭지 않았다. 러트를 맞은 알파는 통제하기 어려웠다. 멋쩍은 듯 헛기침한 다른 알파들이 방을 빠져나갔다. 그 빈자리를 정명이 메웠다.
“형님. 좋은 시간 되십시오. 그때 보셔서 아시겠지만, 얘 반반해서 할 맛 나실 겁니다.”
“딸랑거리지 말고 얼른 꺼져!”
거친 호흡, 침이 그득한 입 안. 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
보스의 페로몬은 태경과 비슷하지만 결이 달랐다. 조금 더 공격적이고 무거운 데다 사나웠다. 태경이 다시 러트에 이른다면 그처럼 강하고 농도 짙은 페로몬을 뿜게 될까. 벌벌 떠는 와중에도 오메가의 본능이 가감 없이 발휘되었다. 예준은 태경의 젖은 나신을 떠올리며 허벅지에 바짝 힘을 주었다.
“천한 것….”
공포와 성감으로 아래가 더욱 흠뻑 젖었다. 보스의 버클이 완전히 열리자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그가 불쑥 손을 대는 바람에 예준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
눈가리개가 벗겨졌다. 머리가 하얗게 센 사내가 보였다. 노쇠한 나이에도 권력을 쥐었기에 힘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을 굴복시키는 자들의 우두머리였다. 사채를 가지고 노는 사람은 정명이라지만, 그 돈의 주인은 결국 이 보스였다.
몇 년간 원금의 배로 불어난 사채 때문에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다.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데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유린당할 위기에 처하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급기야 예준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화가 나 견딜 수가 없는데도 손발이 묶인 터라 꼼짝할 수 없었다.
보스가 예준의 가는 턱을 움켜쥐었다.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보는 눈이 매서웠다. 예준은 그의 기운에 압도당했다.
“쯧….”
무력감이 온몸을 장악했다. 전신에서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다시 한번 혀를 찬 사내가 거친 손바닥으로 예준의 뺨을 쓸었다.
“입 벌려.”
거부하자 강제로 입술이 벌어졌다. 그가 눈가리개를 재갈처럼 입에 물렸다.
“소리 내지 마라. 오메가들 앓는 소리 질색이니까.”
그가 검붉은 성기를 내어놓으며 말했다.
“내 좆에서 눈 떼지 말고.”
예준은 상체를 낮추는 보스를 주시했다. 그가 눈알을 더듬듯 거칠게 눈가를 짓이겼다. 눈을 감으면 손바닥이 날아왔기에 예준은 내내 헐떡이는 그를 직시해야만 했다.
*
빈속에 신물을 다 게워 내고도 구역질을 멈출 수 없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욕실로 직행한 예준은 사십 분째 변기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유린당하고 굴복당하는 일이야 익숙한데, 왜 이번만 이토록 유난인지 알 길이 없었다.
예준은 토기가 잦아들고 난 후에야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맞은 뺨은 추운 날씨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지만, 눈이 잔뜩 충혈되어 며칠 밤을 새운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문제였다.
정명이 용돈이라며 돈 오십만 원을 손에 쥐여 주었다. 만족스럽게 일을 치른 보스가 준 대가이기에 받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주머니에 쑤셔 넣어 준 돈을 길바닥에 버릴 용기조차 없다니. 스스로가 역겨워 견딜 수 없었다.
뜨거운 물 아래에서 온몸이 벌게지도록 박박 씻었다. 마지막엔 보스의 정액을 뒤집어썼기에 얼굴 주변이 끈끈했다. 비누칠을 몇 번이나 한 뒤 몸을 씻어 내렸다. 예준은 몸을 말리는 것도 잊은 채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탈진해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열까지 오르고 있었다.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스스로 주문을 외웠던 게 언제인가. 까마득했다. 보스를 접대했다고 해서 제 인생이 무너질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타는 듯한 응어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금세 지워 버렸을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반복 재생되었다.
누군가 죽었던 감각을 깨웠기 때문일까. 상처가 덧나고 겹쳐 박인 굳은살처럼, 둔감하다고 믿었던 마음이 좀처럼 평정을 되찾지 못했다. 그래도 저녁 약속을 지키려면 방전된 체력을 충전해야 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연기할 준비도 마쳐야 한다.
그 전에, 예준은 조금 눈을 붙이고 싶었다. 전원을 껐다 켜야만 제대로 작동하는 기계처럼 의도적으로 의식을 잠재웠다. 대부분은 그러면 나아졌다. 이번에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
“손님. 어떤 걸로 드릴까요?”
케이크 진열대 앞을 서성이는 예준에게 점원이 물었다. 예준은 뒤통수를 긁었다.
“여기서 제일 비싼 거요.”
케이크가 비싸 봤자 얼마이겠느냐마는, 태경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면 거금을 써야 했다. 예준은 보스에게 받은 돈 대신, 자신이 번 돈으로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가장 비싼 케이크를 샀다. 가게를 나서자 눈이 발목까지 쌓여 거리가 혼잡했다. 빽빽한 사람들 속에 섞이니 낮의 일도 점차 희미해졌다.
괜찮아지길 바랐고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늘 있었던 일이니, 상대가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해서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었다. 몸에 페로몬이 남지 않도록 깨끗하게 씻었고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옷을 꺼내 입었다. 태경이 좋아하는 밝은색 니트와 코트를 걸치고 드러난 목을 감추기 위해 목도리를 둘렀다. 몇 번이나 점검해도 그가 보스의 흔적을 발견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좋지 않은 도로 상황으로 태경이 보낸 차가 늦어지고 있었다. 예준은 집과 가까운 대로변 버스 정류장에 앉아 도착할 차를 기다렸다. 손에 들린 케이크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작 케이크일 뿐이지만, 발현 이후로는 누군가를 위해 이런 걸 사 본 기억이 없었다.
계속되는 폭설로 운동화가 젖었다. 삼십 분쯤 찬 바람을 쏘이자 그저 미열이던 체온이 높아졌다. 삽시간에 피로가 몰려들었다. 모두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걸 예준은 인지하지 못했다.
급격히 눈앞이 흐려졌다. 눈두덩이 무겁고 속이 메스꺼웠다. 얼마간 버티던 예준이 훅 이는 토기에 버스 정류장 뒤편으로 뛰어갔다.
“우욱….”
주저앉아 신물을 게워 내자 찡하니 눈물이 고였다. 측은한 시선이 여러 번 등에 박혔으나 손을 내미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예준은 코트를 여민 채 잠시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잊고 있었던 낮의 일이 또 한 번 떠올랐다. 눈을 세게 감으면 감을수록 잔상이 더 짙어졌다. 괴로웠다. 이런 상태라면 그와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없을 터였다.
예준은 고민 끝에 핸드폰을 꺼냈다. 수화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았는데 통화가 연결되었다.
―예준아. 오고 있어?
다정한 목소리에 가슴속이 와르르 무너졌다. 예준은 이를 꽉 깨물고 심호흡했다. 어떤 핑계가 그럴듯할까.
“저 대표님…. 치문이한테 급한 일이 생겨서….”
―급한 일?
“네. 그래서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같이 있어 줘야 할 것 같아요.”
태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크리스마스를 고대해 왔다는 걸 알기에 예준은 서툰 변명을 하는 것이 몹시 괴로웠다. 다만,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들끓는 열만 해소되면 바로 그에게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무슨 일 있어?
태경이 물었다. 약속 시간 직전에 취소라니, 저답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예준은 부은 목을 가다듬고 부러 밝게 답했다.
“아니에요. 치문이도 가족이 없어서, 도와줄 사람이 저뿐이라 그래요. 우린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까 해 바뀌기 전에 제가 갈게요. 그러니까 오늘은 좀 봐주세요.”
―내가 도울 일은 없어?
“없어요. 정리되면 연락할게요. 죄송해요….”
옅은 한숨이 들렸다. 남자는 화를 내는 대신 침묵했다. 예준은 눈 쌓인 보도블록을 툭툭 두드리며 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어.
그늘 없이 밝은 그의 삶에 파고들 자격이 없었다. 애초에 엮이지 않는 편이 나았을 터였다. 예준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동정심에 약하다는 걸 알지만, 제 처지를 구제해 달라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를 만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예준은 쓰린 속을 부여잡은 채 웃었다. 눈이 부셔 뒷걸음질 치는 형국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곧 만나요. 오늘은 못 가서 진짜 죄송해요.”
예준은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갔다. 누군가 의자에 놓아 둔 케이크를 바닥에 내팽개쳐 둔 것이 보였다. 복잡한 곳에 사람 대신 음식이 있었으니 그럴 만했다. 예준은 찌그러진 케이크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갈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 잘 보내세요.”
예준은 언 손을 호호 불었다. 태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
뒤늦게 사실을 안 치문은 길길이 날뛰었다. 크리스마스 연휴에 치문은 충청도 어딘가로 짧게 출장을 다녀왔다고 했다. 말은 출장이라 했지만 형님들과 같이 채무자들을 실컷 괴롭힌 게 다일 터였다.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예준은 비어 있던 치문의 집에서 지냈다. 아무런 자극도 없는 좁은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니 머리가 맑아졌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더럽게 느껴졌던 몸도 점차 회복되고 있었다.
“씨발, 분명히 형한테 그러려고 나 출장 보낸 거야. 박정명 그 새끼 그냥 확 조져 버렸어야 하는데.”
치문의 집은 연립 주택이긴 하지만 예준의 반지하 방이나 다름없는 단칸방이었다. 그 좁은 곳에서 덩치 큰 놈이 뛰어 대니 골까지 둥둥 울렸다. 예준은 이마에 얹어 두었던 차가운 수건을 뒤집으며 말했다.
“너 있었어도 별수 없었어. 그냥 형님들도 아니고 보스잖아.”
“그러니까, 많고 많은 오메가 중에 왜 하필 형이냐고!”
“그동안 행실 잘못한 내 죄지, 뭐.”
“형이 뭔 행실을 잘못했는데!”
열이 가라앉고 있었다. 예준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자 달라고 조르고, 하자면 그냥 하고….”
세상 만만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권력을 눈곱만큼이라도 쥔 열성 알파라면 고분고분한 사람에게 더 자비 없이 굴었다. 긴장과 구토 때문에 몸이 이 지경이 되긴 했어도, 그런 일을 당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좌절한 건 아니었다.
다만, 접대가 반복된다면 그땐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보스조차 자위가 지겨워지면 뒤까지 대 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발정기의 알파는 믿을 수 없었다. 예준은 잠시간 뜸을 들였다.
“또 부르면 어떡하냐.”
업소에서 실컷 돌려 먹다 버려지는 오메가가 떠올랐다. 생각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어떡하긴 어떡해. 그런 자리에 형 한 번만 더 불러내면 내가 박정명 그 새끼 가만 안 둘 거예요.”
“그런다고 될 일 아니잖아.”
“아, 그럼 어쩌라고. 내가 보스라도 될까!”
예준이 헛웃음을 흘렸다. 가난한 데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베타가 무슨 수로 조직의 우두머리가 된단 말인가.
“마음만으로도 고맙다.”
치문에게 받은 도움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아버지를 찾으러 정선에 간 일도 그렇고, 제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녀석이었다. 정말 도와 달라 말한 것은 아닌데 치문의 낯에 그늘이 졌다.
“우울하게 있지 말고 케이크나 먹어.”
“다 찌그러진 거 버려 버리지 그랬어요.”
“그래도 맛은 그대로던데. 잘라 뒀으니까 먹어.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한 해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가뜩이나 해가 잘 들지 않는 방인데 눈도 쏟아져, 늦은 오후임에도 방이 어두컴컴했다. 불은 켜지 않았다. 정오부터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었기에 형광등 불빛은 지나친 자극이었다.
아직 초기인 데다 주변에 형질을 지닌 사람이 없었기에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다. 예준은 늘 그랬던 것처럼 이불 속에 파고들어 꼼짝하지 않았다. 치문도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발정기엔 늘 끙끙 앓았으므로 그런 예준의 모습이 익숙한 탓이었다.
“알파한테 안 가?”
“가야지. 걱정할 텐데.”
“가서 함 뜨면 나아지잖아. 여기서 궁상떨지 말고 가요. 데려다줘?”
“그 전에.”
예준은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치문이 오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부재중 통화만 스무 통이 넘었다. 다시 통화 목록을 확인하자 아침부터 계속된 전화가 벌써 사십 통에 이르고 있었다.
“얘부터 어떻게 좀 하자.”
윤도하였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영영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사촌지간이라면 그가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더 깊어지기 전에 처리할 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빌라 주인한테 받은 영상이랑 스쿠터 잘 가지고 있지?”
“응. 왜? 신고하게?”
“어. 하게.”
무엇 하나 제 뜻대로 되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런 처지에 윤도하를 단죄하는 것은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태경의 반응이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발정만 끝나면 학교에도 알리고 신고할 거야. 제대로 보상받아서 스쿠터도 새로 사고 다시 일할래.”
신고해도 제대로 된 조치 없이 풀려날 가능성이 컸다. 고작해야 태경이 해 주었던 보상이나 재차 받는 정도일까. 일이 이 지경이 되기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걱정이었다. 도움이 필요할 땐 그를 찾으라고 했었다. 그러나 히트 사이클이 아니라면 그에게 그 어떤 도움도 청할 수가 없었다.
왜인가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했다. 그를 향한 감정 때문이었다.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구질구질한 치부를 더 들키고 싶지 않은 법이다. 윤도하에게 괴롭힘당한 일이나 보스를 접대한 일 같은 건 가능한 끝까지 비밀에 부쳐 두고만 싶었다.
“형이 숨긴 거 알면 그 사람 빡돌 것 같은데…. 아, 나라도 부추겼어야 했는데. 재깍 일러바치라고.”
솔직히 말하면 이해해 줄까? 알 수 없었다. 고열도 잡았고 이제는 히트 사이클이 원인인 미열만 남아 있었다. 몸과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슬렀으니 그를 만나 양해를 구할 생각이었다. 연애하기엔 까다로운 오메가라는 사실을 이해시켜야 했다. 부유하고 고상하게 살아온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질퍽하게 몸을 섞고 나면 흔적 없이 부스러져 버릴 문제일지도 모른다.
“돌봐줘서 고맙다, 치문아.”
“눈 좀 잦아들면 가요.”
“어.”
예준은 반투명 유리문 너머 회색빛 눈발을 응시했다.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 눈이 버거웠다.
*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순간, 누군가 등 뒤를 덮쳤다. 한겨울에도 진득한 땀 냄새를 풍기는 거구의 남자 둘이었다. 예준은 손목을 결박하는 투박한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낯이 보였다. 윤도하와 늘 함께 다니는 덩치들이었다.
이어 향수 냄새가 끼쳤다. 주인공처럼 맨 마지막에 등장한 윤도하가 말했다.
“하다 하다 이제 그 조폭 새끼랑도 놀아나냐?”
덩치들이 예준의 몸을 돌려세워 윤도하와 마주 보게 했다. 크리스마스 동안 치문의 집에 있었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안 건지, 마주한 녀석의 얼굴이 벌써 시뻘겠다. 녀석의 꼭지를 돌게 하는 일이야 많았다. 이번에는 녀석과 다를 바 없는 베타와 놀아난 게 위협할 핑계가 된 모양이었다.
“놀아났으면.”
발정기에 이른 예준의 뺨은 보기 좋게 상기되어 있었다. 피부에선 눈에 띄게 윤이 났고 눈가는 촉촉이 젖었다. 알파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오메가는 대개 그러했는데, 애석하게도 오메가에 관심이 많은 윤도하는 그런 변화를 일찌감치 눈치챈 모양이었다.
윤도하가 다가와 예준의 턱을 붙잡았다.
“왜 또 이렇게….”
녀석은 뒷말을 삼켰다. 덩치들이 너무 세게 손목을 쥔 탓에 예준의 잇새에서 한숨 같은 신음이 샜다. 팔을 뒤로 붙잡아 고정한 덩치들의 입가에 천연덕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해가 바뀌면 열아홉 살이 되는 철부지들이었다. 예준은 고작 그런 놈들에게 붙잡혀 옴짝달싹 못 했다.
더한 무력감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힘껏 발을 차 한 녀석의 무릎에 격통을 가했다. 푹 고꾸라졌던 녀석은 스프링처럼 다시 튀어 올랐다. 퍽, 머리통을 후려치기에 예준은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했다.
낄낄 웃는 덩치들을 윤도하는 매섭게 노려보았다.
“먼저 건드리지 말랬지.”
으르렁대는 윤도하를 덩치들은 의아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중 한 녀석이 별안간 고르지 않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알아, 알아. 따먹는 건 네가 먼저지. 새끼 가오 잡긴….”
매서운 추위에 온몸이 얼었다. 걸어오는 내내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기에 컨디션은 그야말로 바닥이었다. 갈증이 일고 배가 너무 간지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윤도하가 알파였다면 반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씨발. 넌 대체 발정이 몇 번이나 오는데? 따먹어 달라고 아주 광고를 하지 그래?”
윤도하가 비아냥거렸다. 맞는 말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너 같은 파리들이 꼬이나 봐.”
발정기의 오메가에게는 여러 별명이 뒤따랐다. 오메가와 관계하는 사람들은 육고기를 품평하듯 부드럽고 연하다는 말을 자주 덧붙였다. 씹을수록 풍미 좋은 육즙이 분비되는 것처럼 아래도 잘 젖어서 러브 젤이 따로 필요 없다고. 베타와의 성관계엔 별다른 감흥이 없는 오메가와 달리, 오메가의 구멍을 드나드는 베타들은 매우 쉽게 절정에 오르곤 했다.
“오냐오냐해 줬더니 막 기어오르지. 오늘 여기 있는 새끼들 다 네 구멍에 쑤실 거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적어도 오늘은, 소년처럼 서툴게 굴었던 녀석을 기대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했던 말이 녀석의 신경을 긁었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낮은 빌라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녀석과 처음 만난 날처럼, 이대로 어딘가로 끌려간다 해도 도움의 손길은 받지 못할 게 분명했다.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던져져 녀석들에게 굴욕을 당하긴 싫었다. 예준은 도망칠 생각이었다.
“머리 굴려 봤자 어디 못 가.”
윤도하가 말했다. 예준은 손목에 힘을 주어 벗어나려 했다. 소리를 지르는 대신 죽을힘을 다해 이를 악물었다. 선수 시절의 기술은 소용없었다. 팔꿈치로 덩치들의 복부를 마구 때리고 되는대로 발길질했다.
“이거!”
“가만히 안 있냐? 이 씹새끼, 쪼끄만 게 주먹 존나게 맵네!”
급소를 맞은 덩치 하나가 잠시 손을 떼는가 싶더니 결국 윤도하까지 달려들어 예준은 세 명의 장정에게 압박당했다. 윤도하에게 연속으로 뺨을 얻어맞자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그래도 미친 듯 반항했다.
팔을 부러뜨릴 듯 꺾은 덩치들이 이내 예준의 전신을 딱딱한 벽으로 몰아세웠다. 입 안이 찢어져 입술과 턱 주변이 피로 얼룩졌다. 그대로 안면을 벽에 짓이기는데 너무 아파 악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몇 분간 실랑이한 예준은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곧 기절할 듯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늘어진 몸을 덩치들이 고쳐 잡았다.
“그러니까. 고분고분하면 좀 좋아?”
윤도하가 씨근덕대며 말했다. 녀석은 잔뜩 구겨진 패딩을 탈탈 털며 물러났다. 욕지거릴 내뱉은 덩치들은 그때까지도 예준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탁-!
그때, 허름한 빌라 현관에 불이 켜졌다. 파랗게 저물던 하늘은 이내 깜깜해졌다. 쌓인 눈 때문에 사람이 드나든 현관은 진창이었다.
인기척에 윤도하와 덩치들의 시선이 현관을 향했다. 천장에 닿을 듯 우뚝 선 장신은 반지하 방 앞의 광경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예준만이 그의 비범한 페로몬을 느꼈다. 갈무리되지 않은 채 날뛰는 우성 알파의 그것은 그와 만난 이래 가장 짙은 농도였다. 페로몬을 푸는 것만으로 기절하는 오메가들도 있다고 했다. 예준은 고꾸라져 잇새로 침을 흘렸다. 러트를 맞은 그의 페로몬은 상상 이상이었고, 저를 둘러싼 베타들은 그 위압감을 다른 방식으로 감지했다.
태경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수화음이 들리고 상대방이 응답했다. 그는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윤도하, 단속하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낮은 음성이 내부에 울렸다. 그 목소리에 응집된 분노를,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인지했다.
“언제까지 도하가 오메가 강간하게 내버려 둘 겁니까, 조 비서.”
상대방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태경은 예준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회장님 핑계 대지 마세요.”
그가 계단을 밟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이번에는 예준의 방 앞 조명이 깜빡였다. 덩치들이 출구를 가로막고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씨발, 만만한가 본데.”
통화 상대에게 하는지 예준을 붙든 덩치들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태경을 우러러보는 덩치들의 손아귀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예준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맞추자마자 태경은 주머니에 꽂혀 있던 한쪽 손을 빼내어 손짓했다.
“이리 와.”
열기가 들끓는 알파의 명령에는 누구든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덩치들은 예준이 먼저 발을 떼기도 전에 마른 몸을 남자의 품으로 던졌다. 예준은 단숨에 남자의 품에 파묻혔다. 살았다. 그 순간, 남자가 책임을 물으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었다.
발정기의 페로몬이 섞이자 남자의 숨이 들떴다. 당장 배를 맞추기에는 관객이 지나치게 많았다.
태경은 상대의 답을 더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싸늘한 내부에 정적이 흘렀다. 그는 이어 멀찌감치 선 윤도하를 주시했다.
“경고 아니라고 했을 텐데.”
“씨발, 뭐.”
“좋게 말했으면 알아 처먹어야 할 거 아냐, 개좆같은 새끼야.”
거친 언사와 달리 예준을 지탱하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예준이 바로 서기 위해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자 그 손길은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로 향했다. 뻣뻣이 긴장한 목 뒷부분을 큰 손이 조심스레 감쌌다.
질식할 듯 강한 페로몬에 예준의 복부가 아프도록 조여들었다. 예준은 꽃물처럼 붉게 상기된 얼굴을 남자의 코트에 묻어 감추었다.
윤도하가 한발 다가와 읊조렸다.
“굴러먹는 게 일인 오메가한테 왜 그렇게 열성이실까.”
“그러는 넌. 아무 오메가와 뒹굴어도 될 거, 왜 하필이면 이 아인데.”
태경이 정곡을 찌르자 녀석이 패악을 부리기 시작했다. 발을 구르고 소리치는 모습을 싸늘한 얼굴로 응시한 태경은, 그러나 부드럽게 예준의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주문에 따라 고개를 든 예준의 얼굴은 피로 엉망이었다.
“차에 가 있어. 혼자 갈 수 있겠어?”
몸에서 힘이 빠지긴 했으나 어차피 강타당한 부위는 안면이었다.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젖은 날씨에 곰팡내가 나는 이곳에 있는 것보다야 남자의 차가 나을 터였다.
예준은 남자의 품을 벗어나 난간을 짚었다. 차가 현관 바로 앞에 주차되어 있었기에 그의 시야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아도 되었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조수석에 오르자, 더 안쪽으로 들어서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가려 안의 상황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예준은 끔찍한 성감에 휩싸인 채 피를 닦을 만한 것을 찾았다. 겨우 물티슈를 찾아내 얼굴을 문질렀다. 닦아도 닦아도 자꾸 묻어 나오는 통에 물티슈를 쥔 손이 쉴 새 없이 떨렸다.
퍽-!
겨우 몸을 녹이고 있는데 무언가 강타당하는 듯한 타격음이 들렸다. 예준은 반지하 계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명이 깜빡이며 켜질 때마다 산발적으로 뒤엉킨 실루엣이 드러났다.
제집 현관문에 처박힌 윤도하와 그런 녀석의 얼굴을 후려치는 남자가 보였다. 너른 등이 쉴 새 없이 들썩이고 타격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예준의 두 눈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싸늘하게 얼굴을 굳힌 채, 어린 사촌을 벼랑 끝으로 모는 태경은 먹이사슬 가장 꼭대기의 우성 알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퍽, 퍽-!
그는 처음 만난 경찰서에서처럼 느긋하거나 우아하지 않았다. 그때와 달리 완전히 자제력을 잃은 듯했다. 덩치들조차 범접할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이었다.
상대가 저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감지할 수 있는 법이다. 무력보다 강한 권력에 압도당한 덩치들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느낄 굴욕감이나 반항심에 동정표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준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공포감이 일어 더 지켜볼 수 없었다. 상대를 굴복시키겠다 마음먹은 그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눈으로 확인한 기분이었다. 그가, 저 또한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가지려 들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태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름한 현관을 빠져나왔다. 차체를 돌아 운전석으로 향하는 실루엣이 격양되어 있었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안의 상황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혼란이었다.
남자가 문을 열자 페로몬이 들이닥쳤다. 예준은 성감 탓에 눈물을 매단 채 남자를 보았다. 벌겋게 터진 손등보다 금방이라도 휘돌 듯한 남자의 눈빛에 더 미칠 것만 같았다.
“저 아이가 나한테 늘 하는 말이 있거든.”
그가 씨근덕거리자 옅게 맺힌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렀다. 두려우나, 예준은 그 달콤한 체액을 핥고 싶었다.
“더럽고 근본 없는 피라고.”
예준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발정기의 우성 알파는 강했다. 쉽게 조종당하도록 약해지는 오메가와 달리, 육체와 의식 모두 상대를 범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날뛰었다. 예준은 숨을 삼켰다. 아래가 속수무책으로 젖었다.
“그래서 내가 이 꼴인가 보지.”
조소가 뒤따랐다. 핸들을 붙잡은 그는 예고 없이 강하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몸이 훅 뒤로 밀리며 충격이 가해졌다. 예준은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목적지를 알지 못했다.
< 4권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