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외전) (14/18)

I

태경은 도장 입구에 더플백을 내려놓았다. 퇴근 후 헬스장에 들러 운동까지 하고 왔는데도 도장은 아직 어수선했다. 그는 겉옷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조명이 꺼져 어둑어둑한 실내 중앙에 익숙한 두 남자가 쭈그려 앉은 채 얼룩을 닦고 있었다.

“예준아.”

미간을 찌푸리며 부르자, 머리를 맞대고 있던 예준과 경호원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형. 벌써 왔어?”

예준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흐트러진 도복, 피로에 젖은 눈. 내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있었는지 몸을 곧게 펴며 찡그리는 얼굴까지.

“아이 한 명이 토하는 바람에 매트 다 뜯어내고 닦는 중이야.”

예준이 옅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태경은 곧바로 다가가 경호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예준이, 내가 데리고 돌아갈 테니까 그만 퇴근해.”

경호원의 얼굴에 노골적인 화색이 비쳤다. 예준은 난감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이런 일까지 도와주실 필요 없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어요.”

손을 탈탈 털며 일어선 경호원이 씩 웃으며 정장 재킷을 집어 들었다. 지금 돌아갈 수 있는 것만 해도 행운이라는 듯, 그는 가뿐한 얼굴로 인사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일 오전에 차 대기해 놓고 있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내일 뵈어요.”

꽤 가까워졌음에도 아직 예의를 차리는 예준과 경호원이었다. 서로 인사한 뒤 마지막으로 태경과 눈을 맞춘 경호원이 도장을 빠져나갔다. 티슈와 걸레가 쌓인 광경을 눈으로 훑은 태경은 예준과 함께 무릎을 굽혀 앉았다.

“다 닦았어?”

“응. 이제 매트만 도로 끼워 넣으면 돼.”

거의 바로 직전까지 원생들에게 시달렸으리란 사실을 태경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걸레와 매트를 만지느라 빨갛게 변한 예준의 손을 응시했다. 이제는 많은 일에 능숙해진 편이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마음 쓸 곳 하나만큼은 꼭 남겨 두는 아이가 기특했다.

손을 붙잡아 어루만지자, 예준이 그제야 제 손 상태를 인지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별거 아니야.”

“더 하면 상처 나. 내가 할 테니까 허리 펴고 좀 쉬어.”

바닥의 물기가 마르면 모양에 맞춰 매트를 끼워 넣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태경은 한쪽 무릎을 굽힌 채로 매트의 형태를 가늠했다. 주저앉은 예준은 흐트러진 도복을 바로잡고 근처에 놓아둔 생수를 들이켰다.

바닥이 완벽히 건조되자, 태경이 매트를 끼워 넣으며 물었다.

“갑자기 토는 왜? 아픈 건 아니고?”

“애들은 종종 그런대.”

“어떻게 알아?”

“아버님한테 전화하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던데.”

원생들이 자주 토하는 유아들과 같을 리 없었다. 태경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매트를 원래 모양대로 되돌려 놓았다.

“워낙 격하게 놀아서 그런가 봐. 에너지가 넘치거든. 열나거나 아픈 기색은 아니어서 아버님 호출해서 돌려보냈어.”

예준이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덧붙였다. 손을 닦은 태경은 다가가 진 빠진 예준의 이마를 매만졌다.

“그러다 너까지 잡겠어.”

“육체적으로 힘들긴 하지.”

예준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태경의 앞머리 부근을 응시했다. 헬스장에서 샤워를 마친 후여서 머리카락 끝이 조금 젖어 있었다. 손을 가져가 어루만지는 손길에 태경이 나른히 눈을 감았다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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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보니까 두 시간은 족히 웨이트 했을 거 같은데. 형은 안 힘들어?”

“두 시간 섹스에 비하면….”

“보송보송하네.”

실없는 말은 가볍게 무시한 예준이 이번엔 태경의 뺨을 어루만졌다. 잡티 하나 없이 결 좋은 피부가 건조한 손바닥에 닿았다. 남자를 바라보는 미소 맺힌 얼굴은, 그러나 태경의 상태만큼이나 청결하지 못했다. 예준은 온종일 땀을 흘렸고 도장이 파한 후엔 청소까지 하느라 평소보다 더 지독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 찝찝해서 그런데 나도 여기서 씻고 가도 돼?”

“좋지.”

“뭐가?”

태경이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답했다.

“여기에 있는 샤워실이 좋거든, 난.”

“좁고 불편한데.”

“그게 핵심이지.”

겨우 샤워기 하나만 매달린 좁은 공간은 이럴 때를 대비해 만든 것이었다. 태경의 흑심을 눈치챈 예준이 몸을 일으켰다. 덩달아 일어선 태경은 곧바로 예준의 검은 띠에 손을 가져갔다.

“피곤하잖아.”

“그건 그런데.”

옷고름처럼 끈을 당겨 풀어내고는 끈적한 예준의 목덜미에 코끝을 묻었다.

“씻겨 줄 테니까 같이 들어가.”

“형은 씻고 왔잖아….”

“그러니까 양심상 같이 하잔 말은 못하지. 그래도 젖는 건 언제든 환영이야.”

옷깃을 풀어 헤쳐 허리를 끌어안는 손이 뜨거웠다. 예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남자를 매단 채 도장 입구로 다가갔다. 잠금 상태를 확인하자 태경이 아프지 않게 살을 씹어 대며 말했다.

“철저하네.”

“덕분에.”

타박과 동시에 눈을 접어 웃는 얼굴이 예뻤다. 태경은 그 미소를 보지 못한 채 여전히 예준의 어깨 부근을 애무하고 있었다. 그가 입은 맨투맨 자락을 부여잡은 예준이 이번에는 샤워실로 걸음을 옮겼다.

도복 상의를 어깨 뒤로 넘겨 벗고,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남자를 떨쳐 내며 하의까지 벗었다. 땀 냄새가 불쾌하지도 않은지 태경은 몇 번이고 예준의 체취를 들이켰다.

“번거로우니까 형은 안 젖었으면 좋겠어.”

그제야 예준을 놓아주는 태경이었다. 그가 맨투맨 소매와 트레이닝팬츠 밑단을 접어 올렸다. 그러나 형식상 한 행동이었을 뿐, 예준을 샤워시키며 젖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노력할게.”

함께 샤워실로 들어서자 공간이 꽉 차 버렸다. 물 온도를 적당히 맞춘 태경이 샤워기를 예준의 어깨 높이로 들었다. 몸과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물을 끼얹자, 예준은 유순한 동물처럼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뽀얀 살결 위로 미끄러지는 물줄기를 감상하는 일은 늘 심장을 뛰게 했다. 핑크빛을 띠는 유두는 더 붉게 달아올랐고 봉긋하게 솟은 엉덩이는 물을 머금어 더 탱글탱글했다. 돌기와 둔덕을 자극하는 대신 큰 손으로 닦아 주기만 하자, 예준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얌전하네, 오늘.”

예준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샤워 볼에 거품을 내던 태경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얌전한 거 별로야?”

“아니. 그것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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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게 코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물기가 번질 듯했다. 멈칫한 예준은 한 걸음 물러난 채로 다시 태경에게 몸을 내어 주었다.

샤워 볼로 거품을 일으킨 태경이 양손으로 예준의 몸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어깨를 문지르다 돌기를 지날 때는 부러 손톱을 세우기도 했다. 허리와 엉덩이, 허벅지에 거품을 문지를 땐 예준의 머릿속에 위험 신호가 떴다. 그가 성기와 회음부에 이어 항문에 손끝을 비비는 순간에는 급기야 아랫배가 저릿하게 아파 왔다.

“읏….”

태경은 예준의 정직한 반응을 즐겼다. 지금 당장 무언가 하지 않더라도, 당황한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도저히 마다할 수 없는 일 중 하나였다.

그는 자세를 낮추어 예준의 무릎과 종아리, 발까지 다정하게 씻겨 내었다. 움츠린 채인 마른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다시 물을 끼얹었다. 예준이 앓는 소리를 내다 감은 눈을 파르르 떨었다.

고조될 듯 고조되지 않는 성감에 기분이 좋아져, 태경은 제 옷이 젖음에도 아랑곳없이 예준을 꽉 껴안았다. 동그란 예준의 콧등에 거품을 묻힌 그가 환하게 웃었다. 예준은 그와 겨우 눈을 맞추기는 했으나, 여전히 여유롭게 굴 수 없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가 시선을 휙 피하며 뒤돌자 새빨간 귀와 목덜미가 태경의 눈에 들었다.

“나 때문에 이래?”

은근하게 묻는 목소리가 낮았다. 예준은 젖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답했다.

“형이 문제야.”

“…….”

“늘, 형이 문제야.”

부끄러운 상황이 버겁다는 듯 예준은 연거푸 중얼거렸다. 저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태경을 문제아로 치부하고는 달아오른 귀를 감추었다. 그런 취급을 당하기는 했으나 태경도 자신이 때때로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너한테 남은 골칫거리라고 해 봐야 이태경뿐이지.”

감정을 다루기 쉽다면 사랑과 관계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목을 매는 일은 더더욱 없겠지.

“해결 못 해도 괜찮아. 그래도 계속 신경은 써 줬으면 좋겠어.”

난제처럼, 계속해서 어려워야만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 터였다. 아무렇지 않게 애정을 갈구한 태경이 예준의 몸에 남은 거품기를 말끔히 걷어 냈다.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 예준은 상기된 얼굴로 태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선을 맞춘 태경이 촉촉한 예준의 양어깨를 그러쥐었다. 큰 수건으로 상체를 감쌌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닦아 줄 때, 예준은 조금 발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태경은 성감을 더 부추기지 않았다. 페로몬은 잘 갈무리되어 있었고 예준은 곧 가라앉았다.

다만, 고조될 듯 말 듯 한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예준과 함께 새 옷으로 갈아입은 태경이 언젠가 숨겨 둔 위스키를 꺼내 든 탓이었다. 하루의 피로를 풀기에는 그만한 게 없기에, 예준은 불만 없이 잔을 내밀었다.

“딱 한 잔만.”

운전해야 할 때 태경은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 특히, 제 손으로 예준을 케어하고 싶은 날엔 철저하게 절제했다. 위스키 한 잔이면 기분 좋게 열이 오를 터였다. 오늘, 그런 아슬아슬한 기분은 오로지 예준만의 몫이었다.

예준은 남자와 눈을 맞추며 위스키를 한 모금 삼켰다. 그의 귓불을 매만지고 있던 태경은 금세 달아오르는 체온을 감지했다.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두 눈이 자신에게로 고정되어 움직일 기색조차 없었다.

태경은 예준이 술잔을 비우자마자 엉겨들었다. 그저 어디든 맞대고 싶어 안달이 난 강아지 같은 행동이었다. 허리를 붙잡힌 예준은 제 배에 감긴 남자의 손목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형이 야근 안 해서 좋아.”

최근, 친구와 함께 새로운 건축 사무소를 오픈한 태경은 집에서 겨우 잠만 자는 형국이었다. 예준은 늘 경호원과 함께 퇴근했고, 태경이 귀가했을 땐 이미 잠든 날이 더 많았다. 그런 남자가 오늘은 여유롭게 운동까지 마치고 자신을 데리러 왔다. 타인의 기척 없이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좋아 귀가를 보채지 않았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되긴 했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바쁠 거야. 오늘은 거의 휴가 받은 셈이나 다름없지.”

“정시 퇴근이 어떻게 휴가야.”

“도장 열었을 때 생각해 봐. 네가 여기 간이침대 놓고 자겠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열 냈는지 기억 안 나?”

태경이 생각하기에 그건 도를 지나친 말이었다. 잠을 따로 자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준이 몸을 혹사시키는 꼴을 그가 가만히 두고 볼 리도 없었다.

“긴장해서 그랬지….”

예준이 자신 없는 말투로 읊조렸다. 이미 안정권에 오른 지혁의 도장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기에 초반에는 매일 악몽에 시달릴 정도로 긴장한 것도 사실이었다. 반년이 흐른 지금, 우려보다는 잘 굴러가고 있으나 지혁 없이는 편견을 완전히 상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도장 사범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란 사실은 매력적이었으나, 그 뒤에 따라붙는 ‘오메가’란 단어가 문제였다. 형질에 영향을 받지 않는 아이들일지라도 미리 경계부터 하고 보는 부모들이 대다수였다. 부모 중 형질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우려는 더 커졌다.

그런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태경이기에, 그는 위로하듯 예준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잘 하고 있잖아. 더 잘 될 거야.”

“이 정도만으로도 만족해. 나뿐만 아니라 형도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벌고 있고, 딱히 나쁜 일이라고 말할 만한 사건 사고도 없었으니까.”

사무실 책상에 걸터앉은 태경이 제 다리 사이에 예준을 가두었다.

“형이 너무 바쁜 것만 빼고 다 좋아, 나는.”

“그건 시정해야겠네.”

“어린애처럼 투정 안 해. 기다릴게.”

“그래 주면 고맙고.”

태경이 예준의 가슴팍에 코끝을 비벼 대었다. 등허리를 붙잡아 안쪽으로 당기는 힘에 예준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몸 어디든 태경보다는 작은 예준이었다. 그의 손길 안에서라면 손에 쥘 수 있는 자그마한 인형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냄새 좋다.”

남자가 뱉은 말은 가슴 부근을 떠나지도 못하고 뭉개졌다. 예준은 간지러워 상체를 들썩거리다, 태경을 떼어 내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통창 앞에 앉자, 곧장 따라온 태경이 옆자리를 차지했다. 밤 아홉 시가 넘어가는 시각이었지만 주변 빌딩들엔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었다. 태경은 다시 엉겨 붙는 대신 예준을 당겨 안았다. 남자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는가 싶던 예준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제야 이루어진 입맞춤에 예준은 태경의 허벅지 위에 놓아 둔 손을 꼭 말아 쥐었다.

혀가 비벼지고 드문드문 떼어 낸 입술 사이로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능숙하게 예준의 입술을 핥은 태경이 읊조렸다.

“신혼인데. 잠자리 횟수가 너무 적다고 생각 안 해?”

“이틀 전에 했는데.”

“욕실에서 이십 분 만에 끝낸 거 말하는 거야? 애무도 못 하고 박고 싸기만 했잖아.”

정확히 말하자면 예준은 양치를, 태경은 면도를 하고 있었다. 출근 시간이 촉박하게 남은 상황에, 거울 속에서 마주한 시선만으로 불이 붙었다.

예준이 입을 헹구고 태경이 쉐이빙 크림을 닦아 내었을 때는 잔뜩 발기한 성기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지만 내리고 교접했다. 넣고, 박고, 싸고. 그게 끝이었다. 밑만 씻고 출근하는 차 안에서 태경은 예준에게 미안하단 문자를 남겼다. 예준이 그 상황을 즐겼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페로몬을 안 풀어서 좀 다쳤어. 안쪽.”

“다음엔 부드럽게 할게.”

태경이 속삭이며 다시 입을 맞추었다. 부쩍 짙어진 농도에 예준은 금세 얼굴을 붉혔다. 남자의 허벅지를 주무르며 화답하자 점점 가빠지는 숨소리가 전해졌다. 입 주변을 벗어나 턱과 목덜미에 이른 남자의 입술이 격정적으로 벌어졌다.

예준이 아득한 기분으로 물었다.

“…그 다음이, 지금은 아니지?”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나 여기서 또 물이라도 싸면…, 매트 다 뜯어내야 된다는 거 알고 있는 거지?”

순간, 입술을 떼어 낸 태경이 눈을 맞추었다.

“예준아. 내가 하는 일을 생각해 봐. 아귀가 딱 맞는 걸 제자리에 맞춰 끼우는 거, 변태적일 만큼 좋아해. 그러니까….”

태경이 혀끝을 예준의 귓구멍 속으로 둥글렸다. 뒤통수를 틀어쥐는 손아귀에 그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다른 변명은 없어?”

대답하기도 전에 예준의 등이 바닥에 닿았다. 자연히 벌어진 무릎 사이로 남자는 손쉽게 자리 잡았다.

“마지막 기횐데.”

과하지 않게 맺힌 미소가 매혹적이었다. 피로한 눈가를 비빈 예준이 이미 타액으로 범벅인 입술을 훔쳐 냈다. 아이들이 뛰노는 바닥에서, 바깥이 훤히 보이는 통창 앞에서 벌이기에는 난잡할 테고, 질척일 테고….

머리로는 아는데 눈에 보이는 남자가 너무 잘생긴 데다가, 운동까지 마치고 와서인지 옷 위로 드러나는 굴곡마저 심상치 않았다. 몸에 있는 구멍에서 온갖 걸 다 쏟아 내어도 말끔히 치워 주리란 확신도 있었다.

곧이어 배 근처에 닿은 손이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예준은 배꼽이 드러난 것보다 앞섶을 솟아오르게 만든 성기가 더 부끄러웠다.

“내일은 도복 안에 꼭 갖춰 입고 수업해.”

그가 명령조로 말했다. 아마도 수없는 흔적이 남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배 위로 남자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조급증 없는 부드러운 손길에 예준은 차라리 두 눈을 감아 버렸다. 허벅지가 바짝 조여 들며, 그저 기분 좋은 수준에 그쳤던 성감이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곧 페로몬이 밀려와 온몸의 근육이 풀렸다. 울컥, 쏟아진 애액이 속옷을 적셨다. 음란한 냄새를 감지한 남자가 속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단단한 손이 말랑한 살덩이를 움켜쥐었다. 간지러워 몸을 떤 예준이 남자의 상체를 힘껏 끌어안았다.

“좋아….”

습관처럼 읊조렸다. 젖은 뺨에 입술을 묻은 태경이 웃었다.

*

막 해가 져 내부가 어두웠다. 도장 안 소파에 앉은 예준은 제 무릎에 고개를 기댄 채 잠든 준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떼를 쓰다 잠든 아이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뭐라도 먹이면 좋겠지만, 눈을 뜨면 또 칭얼거릴 게 뻔해 그대로 두려던 차였다.

똑똑-.

누군가 도장 문을 두드렸다. 사무실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나서 문을 열었다. 안으로 성큼 들어선 사람은 서른 후반의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사범님. 저 준이 아빱니다.”

경호원이 경계 어린 눈초리로 남자를 살폈다. 그가 준의 아버지이면서 또한 알파이기 때문이었다. 태경을 제외한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감지할 수 없는 예준은 오로지 본능으로 그가 알파임을 알아챘다. 그의 손에 들린 도시락에서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예준이라고 합니다.”

예준은 조심스레 준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파라고 해도, 원생의 부모에게 실례를 범할 수는 없어 조용히 경호원을 저지시켰다. 예준의 손짓에 한 걸음 물러난 경호원은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잡은 채 그 자리에 섰다. 그를 흘끗 곁눈질한 남자가 거리낌 없이 예준에게로 다가왔다.

“영광이네요. 이렇게 뵙는 게.”

예전이었다면 두려워 마주하기 어려웠을 알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예준은 손을 내민 그와 악수했다.

“아닙니다. 준이 데리러 오신 거죠?”

“네. 매번 민폐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당분간은 제가 데리러 올 겁니다. 요즘 준이 엄마가 바쁘다고 해서요.”

예준을 늘 데리러 왔던 준의 엄마는 남편과 별거 중이라는 사실을 조심스레 언급한 적이 있었다.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어 매번 늦는다는 해명을 했지만 예준은 개의치 않았다. 준이 지혁의 도장을 떠나면서까지 제게 온 것이 고마워서였다.

“그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준이가 아직 저녁을 못 먹었어요. 댁으로 돌아가시면 꼭 요기부터….”

남자가 손에 들린 도시락을 들어 보였다.

“사범님도 못 드셨겠죠? 아마.”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긴요. 그럴 것 같아서 일부러 사 왔어요. 꽤 맛있는 집이니까 같이 드시는 게 어때요?”

예준은 저와 달리, 남자가 제 페로몬을 느끼고 있으리란 사실이 불편했다. 경호원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표정이 구겨졌다. 예준은 18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준이랑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한 예준이 소파로 되돌아가 준의 어깨를 흔들었다.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깨우자 준이 두 눈을 비비며 예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 앞으로 데려가니, 준은 깜짝 선물이라도 받은 양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 댔다.

“아빠!”

도시락을 내려놓고 준을 안아 든 남자는 다정한 성격 같았다. 질이 나쁜 알파들과는 다른, 태경과 결이 비슷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사람이 준의 아빠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예준은 옅게 미소 지었다. 칭얼대는 것도 잊고 반색한 준이 도시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주려고 사 왔어요?”

“응. 사범님 것도 있어.”

“우와! 사범님 우리 다 같이 먹어요!”

악의는 없겠으나 예준은 곤란했다. 남자의 권유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지만, 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늘, 태경도 늦는다고 했으니 저녁을 먹고 돌아가도 별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요. 그냥 저녁 한 끼인데 뭐 어때요.”

남자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가 한 발자국 다가와 예준의 귓가 근처에 속삭였다.

“형질 같은 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저 그런 사람 아니니까.”

예준은 남자가 다가온 만큼 물러나 고개를 끄덕였다. 준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신빙성이 있는 말이지만, 타고난 경계심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그깟 저녁이 뭐라고. 결국, 망설이는 것도 우습다고 결론지은 예준이 부자를 사무실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와서 드시죠.”

남자가 사무실 테이블 위에 도시락을 펼쳐 놓았다. 멀찍이 서 있던 경호원까지 불러들이며.

“같이 먹어요. 넉넉하니까.”

예준에겐 정색하는 경호원의 얼굴이 익숙했다. 태경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 그의 일이므로, 준의 아버지 또한 예외는 아닐 터였다. 어쨌거나, 그의 입장에서는 사무실에 알파와 오메가만 두는 것보다 불편한 식사에 동석하는 편이 나았다. 마지못해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경호원이 큼큼 헛기침했다.

남자가 사 온 음식은 초밥과 튀김이었다. 딱 봐도 고급 식당에서 포장해 온 것처럼 보였다. 질 좋은 음식을 보자 예준의 부담이 배로 커졌다.

“제가 셰프라고 얘기하던가요? 준이 엄마가.”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고개를 가로저으니, 남자가 너른 어깨를 곧게 펴며 덧붙였다.

“제 식당에서 가져온 건 아니지만, 드실 만하실 겁니다. 언제 한 번 들르시죠. 잘 대접할 테니까.”

남자의 눈이 예준의 결혼반지로 향했다.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에서 예준의 결혼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예준은 원생의 부모와 사적으로 얽히는 게 마땅치 않아서 형식적으로 답했다.

“바쁘지 않을 때, 형이랑 이야기해 볼게요.”

말해 놓고, 남자 앞에서 태경을 형이라 칭한 게 너무 격 없었나 싶었다. 예준은 괜히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일회용 젓가락을 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보다 못한 경호원이 아이를 번쩍 들어 남자 옆에 앉혔다.

“아…. 준이 아빠는 전데 너무 사범님한테 의존했던 것 같네요.”

“아닙니다. 저도 워낙 습관이 되어서….”

애들 뒤치다꺼리가 일의 절반이다 보니 그리 되었다. 작은 입을 벌려 초밥을 욱여넣는 아이를 보다 예준은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도시락을 반쯤 비웠을 때였다. 누군가 도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기척에 경호원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예준은 의아한 얼굴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불편해 잘 먹지 못했는데, 그보다도 더 아찔한 직감에 등줄기에서 소름이 돋아났다.

“저녁은?”

경호원에게 묻는, 낮은 목소리가 익숙했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태경을 마주하자 예준은 명치가 꽉 막혀 버린 기분이었다.

태경은 출근할 때처럼 정장 차림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흰색 상자는 당연히 자신을 위한 저녁거리일 터였다.

“이게….”

태경이 테이블을 쭉 둘러보며 읊조렸다. 거칠게 짓씹은 잇새, 싸늘한 눈을 보니 얼마나 나쁜 타이밍인지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형.”

예준이 태경에게 다가가던 찰나였다. 먼저 어깨를 들이민 준의 아버지가 태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사범님이 저희 애 때문에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 이것저것 좀 대접하던 참입니다.”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남자의 태도와 달리 태경의 미간은 불쾌하게 구겨졌다. 낯선 알파와 예준이 함께 식사하는 꼴을 두 눈으로 보리라곤 상상조차 한 적 없으므로. 어이없게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단란한 가족처럼 보일 만한 풍경이지 않은가.

“이태경입니다.”

기계적으로 말한 태경은 성의 없이 악수한 뒤 예준을 보았다. 뒤이어 경호원을 쏘아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꼭 내가 불청객이 된 것 같은 기분이군요.”

태경의 말에 고개를 숙이는 경호원을 보니 이런 상황까진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예준은 체할 것 같은 기분으로 태경의 팔꿈치를 당겼다.

“형. 잠시 이야기 좀 해.”

태경은 순순히 끌려왔다. 도시락의 익숙한 로고를 확인한 예준이 태경과 함께 도장 밖 복도로 나섰다. 다른 상가는 이미 파한 빌딩은 어둡고 조용했다. 복도 끝으로 가자마자 예준은 태경의 품속으로 빨려 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예준아.”

예준의 목덜미에 코를 묻은 태경이 페로몬의 흔적을 찾았다. 어떤 흔적이 스며 있든 예준은 느끼지 못하는데도 그는 불쾌한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다른 알파랑, 심지어 애까지 끼고 밥을 먹어?”

“거절하기가 뭐해서 그랬어. 불편해도, 나 때문에 도장 옮기기까지 한 준인데 마냥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형 늦는다는 연락 받았으니까 차라리 먹고 들어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고.”

변명이 아닌 해명이었다. 준의 아버지가 알파라는 사실은 예준에게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도 않을뿐더러, 해를 끼치는 알파 정도는 가뿐히 물리쳐 줄 경호원이 내내 상주하는 상황이니까.

예준의 목덜미를 샅샅이 탐색한 태경이 눈을 맞추었다. 뺨을 그러쥐는 손이 뜨거웠다.

“저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까?”

“…응?”

“알파니까 다 느낄 거 아냐. 네가 얼마나….”

향기로운지, 달콤한지. 하얀 살결 위에 혀끝을 대면 얼마나 부드럽고 아릿한지.

구체적으로 상상한 태경의 눈매가 더 싸늘히 식었다. 알파에게 오메가는 성욕을 자극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어떻게 위장하고 있든, 기저에 자리한 욕망은 다 똑같았다. 태경은 안달 난 짐승 앞에서 초연한 예준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일방적인 각인의 대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형.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할게. 나한텐 실랑이하느니 그냥 빨리 해치워 버리는 게 나은 일이었어. 그래서 그런 거야.”

“예준아.”

“이만 돌아가시라고 할게. 준이도 어느 정도 요기했고….”

다정하게 준을 언급하는 예준을 보며 태경은 처음으로 욕설을 읊조렸다.

“그 정도면 보모를 구해야지.”

“어차피 나도 늦게까지 도장에 있으니까 괜찮아.”

“네가 괜찮아도 그건 경우가 아니야. 이 기회에 확실히 하는 게 좋겠어.”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법이다. 태경은 이성적으로 해결할 작정이었는데, 예준의 얼굴이 별안간 하얗게 질렸다.

“형, 많이 화났어?”

“화났으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이후 첫 다툼이었다. 태경은 명백히 예준의 우위에 있었지만, 늘 져 주는 편이었다. 화를 내는 일은 아예 없었을뿐더러, 항상 다정했으며 예외 없이 따뜻하게 예준을 돌봐 주었다. 화난 그를 달래 줄 방법을 아예 모른다는 사실에 예준은 조바심이 일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예준을 응시하며, 태경이 말했다.

“그래도 너한테 화풀이 안 해. 그럴 일은 평생 없을 거야.”

“…형.”

태경이 재킷을 벗어 예준에게 입혀 주었다. 예준은 아직 도복 차림이었고 도장에서 애용하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한기가 드는지 어깨를 떨기에 태경은 부러 나긋나긋하게 타일렀다.

“곤란하다면 강하게 거절해도 돼. 상대방 기분까지 네가 감당해야 할 몫은 아니니까. 일하느라 체력 소모도 보통이 아니고 살도 계속 빠지잖아. 고마운 일이라고 해서 희생이 당연한 건 아니야. 이만 선 긋자.”

“…….”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저녁 식사도 마찬가지야.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말 안 했는데, 앞으로 나 없이 다른 알파와 동석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통제. 명백한 통제였다. 예준은 그의 눈과 귀나 다름없는 경호원을 달고 다니는 것까지는 받아들였지만, 태경이 알파의 권위로 자신을 통제하는 일에는 종종 거부감을 느꼈다. 그가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직전의 저녁 식사가 다른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적어도 예준이 생각하기론 그랬다.

“형 말도 이해는 하는데. 오늘 일은 몰라도, 준이 일은 딱히 선 그을 거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둔 거야. 어린아이 일인데 희생이라고 말하긴 좀 과해.”

“내 눈엔 너도 어린아이나 다름없어.”

“형, 내 말은.”

“너 지치고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어른이든 어린아이든 신경 안 써. 오늘은 둘 다겠지만. 참고로, 내가 알파라서 그런 거 아니야. 네 남편이고, 네 보호자고, 널 끔찍하게 아껴서 이러는 거지.”

태경이 예준의 서늘한 목덜미로 손을 뻗었다. 다시 예준을 당겨 안고 덧붙였다.

“네 세상에, 이제 알파는 나밖에 없는데. 다른 알파들 세상에는 여전히 너라는 오메가가 있다는 게 좆같아, 정말로.”

결혼이란 제도가 있음에도, 각인이라는 명백한 영역 표시가 있는데도. 알파들은 그것의 가치를 때때로 무시했다. 예준을 향한 타인의 욕망은 여전히 존재했고, 태경을 향한 욕망도 분명 존재했다. 페로몬은 강력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니까. 예준을 온전히 가지고도 여전히 태경이 불안한 이유였다. 제 것으로 만들고 보니, 그것만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태경의 호소에 예준은 그제야 그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했다. 형질을 지닌 모든 이가 딜레마에 빠져 있지 않은가. 욕망과 애정을 분리했다가도 때로는 그것을 따로 놓지 못하고, 혼란을 느끼고, 상대를 구속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고.

예준은 태경의 품에 안겨 시선을 들었다. 언짢은 기색이 완연한 태경의 두 눈을 들여다보자, 한편으로 가슴속 어딘가가 간질거려 견딜 수 없었다.

“형.”

“왜.”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요즘엔 잘 하지 않던 존댓말까지 더하는 예준이었다. 태경의 시선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예준의 두 눈으로 향했다. 피로 탓에 눈두덩이 무거운 와중에도 불편한 자리에서 버틸 생각을 하다니. 쓸데없이 착한 게 문제다.

“차 키 줄 테니까 차에 가 있어.”

“아직 제대로 마감 못 했어. 설마, 준이 아버님한테 노골적으로 말할 생각이라면….”

“그런 거 아니야. 네가 다른 알파와 한 공간에 있는 게 껄끄러워서일 뿐이니까 미리 걱정할 필요 없어.”

태경이 부드럽게 예준의 머리카락을 흩뜨려 놓았다. 잠시간 곰곰이 생각한 예준은 태경보다 앞서 그의 바지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더듬더듬, 차 키를 꺼내 흔들어 보이자 태경은 만족한 얼굴이었다. 짧은 접촉만으로도 열에 들뜬 눈빛이 기꺼웠다.

“사고 치지 마.”

“뒷좌석에 담요 있으니까 덮어.”

동문서답이었다. 그러나 예준은 눈을 가늘게 뜰 뿐, 태경을 나무라지 않았다. 태경은 곧이어 감정을 갈무리하듯 호흡했다. 재킷을 걷어 내며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섰다. 가라앉히려 노력 중인 것이다. 발정기도 아니니, 제 일이라면 쉽게 흥분하는 그라 할지라도 굳이 단속까진 필요치 않을 듯했다.

타인에게 무례를 범하더라도 예준은 항상 한 침대 쓰는 남자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했다. 그의 기분이, 그의 애정이, 그와의 약속이 늘 최우선이었다. 마지막 남은 한 톨의 의심까지는 거두지 못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태경이 에스코트했다.

“형, 제발.”

예준이 태경의 팔꿈치를 흔들며 졸랐다. 태경은 고요한 얼굴로 예준의 뺨에 뽀뽀하고 물러날 뿐이었다.

*

남자가 태경의 경고를 무시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예준은 거의 매일 준의 아버지인 영훈의 연락을 받고 있었다. 밥을 먹자거나, 차를 마시자거나,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말을 담은 문자는 대체로 예준이 도장에 있는 시간에만 발송되었다.

그의 점잖은 태도 때문에 더 곤란했다. 차라리 열성 알파들처럼 대놓고 추근거리는 게 물리치기 더 쉬웠다. 직접 손을 대려 했다면 경호원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고, 문자에 음란한 말을 섞었다면 바로 경찰에 신고라도 할 작정이었으니까.

위협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가 무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배우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심지어 그 배우자가 남들이 갖지 못해 안달인 우성 알파라는 사실을 알고도 어필해 온다는 건 오랜만에 겪는 상식 밖의 일이었다. 여러모로 소름이 돋아 견딜 수 없었다.

예준은 하루에 한 번, 아이들의 모습을 찍어 부모들에게 보냈다. 도장에 머무르는 두 시간 남짓 동안 아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어떤 성과를 냈는지 궁금해하는 부모가 많아서였다. 준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의 요청으로 최근, 준의 사진은 아버지에게 전송했다. 예준은 준의 사진을 보내려다가, 자신의 답장 없이도 길게 이어진 남자의 메시지에 멈칫했다.

기계적으로 준의 사진을 전송하자, 곧바로 답신이 날아왔다.

[오늘도 제가 준이 데리러 갑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지난 일주일간, 영훈이 준을 데리러 오기는 했지만 그가 나타나면 예준은 아이를 경호원 손에 돌려보냈다. 태경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고 마주쳐서 좋을 게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알파가 오메가에게 끊임없이 연락해 오는 이유가 뭐겠는가. 알파의 양심이나 도덕성이 일반인에게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은 진작 깨닫고도 남았다.

예준은 골치가 아파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쉬는 시간을 틈타, 이번 달에 입금된 수업료를 정산했다. 책상에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자 경호원이 흘끗 눈길을 주었다.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영훈이 도장을 찾았다. 예준은 태경과의 저녁 약속을 위해 샤워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였다. 이번엔 경호원의 무릎을 베고 초저녁잠을 자고 있던 준이 인기척에 먼저 눈을 떴다. 예준은 하필, 사무실에서 나오던 타이밍에 영훈과 마주쳤다.

“사범님!”

멀끔한 낯을 보자, 속이 불편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경호원을 저지한 채 예준은 사무실을 가리켰다.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저녁은 드셨어요?”

“약속이 있어서요.”

능글거리는 남자를 빠르게 차단한 예준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멈추었다. 경호원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 곳에 서서 남자에게 경고했다.

“아버님. 저한테 계속 연락하시는 거 그만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영훈은 마른 얼굴을 쓸다가 표정을 바꾸었다. 냉랭한 눈빛으로 예준을 바라보며 답했다.

“안 하면 안 만나 주실 거잖아요.”

“제가 준이 아버님을 왜 만나겠어요.”

“오메가니까 파트너가 여럿이어도 좋으실 거고….”

눈을 내리뜬 남자가 노골적으로 입맛을 다셨다. 공기에 스민 오메가의 페로몬을 감지하듯 코끝을 훔치기도 했다. 어쨌거나, 예준의 파트너는 배우자인 태경뿐이었다. 짐짓 불쾌한 표정을 짓자, 영훈이 말했다.

“그날, 너무 점잖게 말씀하셔서 잘 이야기됐을 줄 알았는데요.”

“누가요? 형이요?”

“네.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파트너 두는 커플은 많으니까…. 제 와이프도 그 정도는 이해해 주고 있고요.”

주먹질이라도 오가면 어쩌나 했던 걱정이 무색했다. 태경이라면 제 부탁을 들어줬을 테고, 실제로 그날 밤 이후 영훈에게서도, 준의 어머니에게서도 따로 항의가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태경의 행동을 이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라면 모를까.

“저희는 그런 사람들 이해 못 해요. 형도 저도, 서로만 보고 있고….”

태경을 떠올린 예준의 낯빛이 상기되었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타인에게 태경에 관해 말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준은 열에 들뜬 목덜미를 문지르다 두 손을 말아 쥐었다. 짧게 호흡하며 뒤늦게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가 반쯤 풀린 눈빛으로 읊조렸다.

“와, 진짜 예쁘시네요. 부끄러워하니까 더….”

달갑지 않은 말을 무시하고 예준은 경호원의 기척을 살폈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으나, 제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언제든지 달려올 기세였다.

“그러지 말고… 좀, …예?”

예준은 거리를 좁히려 드는 남자의 어깨를 힘주어 밀어냈다. 러트가 가까워진 시기인 건지, 찰나 이성을 잃은 남자가 자꾸만 품 안으로 자신을 가두려 했다.

쾅-!

그때였다. 경호원이 준을 한쪽에 두며 일어남과 동시에 도장 문이 거칠게 열렸다. 예준은 그쪽을 보지 않고도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다. 화가 났는지, 익숙한 페로몬이 갈무리되지 않은 채 날뛰고 있었다.

태경이 아니었더라도 예준은 최근 단련한 기술로 남자를 물리칠 수 있었다. 힘에서는 딸린다 한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는데 이번에도 구출을 먼저 자처하고 나선 쪽은 역시 태경이었다.

“어엇…!”

예준과 눈을 마주하기도 전에, 태경이 영훈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잡았다. 키도, 체격도, 뿜어 나오는 아우라도 영훈은 태경에게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실제로, 태경은 그 점이 가장 언짢았다.

“주제에 어딜 들이대, 씨발….”

약속을 위해 한껏 단장한 남자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가 미간을 구긴 채로 경호원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경호원이 졸음에 취한 준을 들쳐 안고 도장을 빠져나갔다.

상황을 무마하려 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리란 것을 예준은 직감으로 느꼈다. 어떤 말이 격양된 태경의 감정을 억누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수많은 분란에도 자신이 바라보는 사람은 오로지 그뿐이라는 것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예준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차림새의 태경을 응시했다. 태경 외에는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속삭였다.

“오늘 저녁 약속 잊지 마.”

둘만의 시간이 가장 중요하기에 고대하며 하루를 버텼다. 예준의 마음을 곧이 받아들인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대로 영훈을 벽으로 몰았다. 예준은 말리는 대신, 조용히 사무실 문을 닫고 돌아섰다.

*

저녁식사를 위해 오랜만에 호텔을 찾았다. 예준은 태경의 섹스 파트너가 되었던 까마득한 그때, 첫 약속 장소가 바로 이 호텔이었음을 기억했다. 묘한 기분이 들어 나란히 걷는 태경을 올려다보자, 그 또한 감회가 새로운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그때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태경을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생각했고, 보기 드문 우성 알파기에 신기했고, 그런 그에게 기대치 않은 제안을 받아 안도했다. 온종일 찬 바람 맞으며 일하고 졸음에 취해 이곳으로 왔던 때가 무색하게도 예준은 이제 배달 스쿠터가 낯설었다. 과거의 자신과는 이제 우연히 닿지도 못할 만큼 멀어졌다.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로 예준은 조용히 태경을 따랐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창가 자리에 앉았다. 예준은 자신이 앉는 것을 도와준 뒤 맞은편에 자리하는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학부모와 얽혀 마음이 껄끄러웠다. 제 의지와는 관계없는 일임을 태경도 알고 있겠지만 탓하지 말란 말을 자신 있게 내뱉을 수는 없었다.

사무실을 빠져나온 두 남자에게선 어떤 상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준은 태경이 늘 하던 대로 위압적인 자신의 위치로 서열을 정리했음을 눈치챘다. 두 남자 사이에는 고성보다 힘주어 뱉어 낸 속삭임이 여러 번 오갔다. 이성적인 말이었든 아니었든 상관없었다. 영훈은 하얗게 질린 채로 도장을 빠져나갔고 상황은 곧 종료되었다.

태경 쪽에서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예준은 골몰히 머리를 써 주문을 마쳤다. 이제는 이런 고급스러운 곳에서도 제법 취향에 맞는 음식을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봤자 모두 태경이 권해서 먹어 본 메뉴였지만. 예준은 그와 경험하지 않은 메뉴들엔 절대 도전하지 않았다. 그게 마음 편해서인 이유도 있었고, 그가 뿌듯해하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아서이기도 했다.

태경은 어딘가 생각에 잠긴 기색이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예준에게 고정된 채였다. 예준은 부담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형, 오늘 되게 예쁘다.”

제 발 저려 지레 꾸며 낸 말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저 청결한 점이 노력의 다인 저와 달리 태경은 과하지 않게 꾸민 차림새였다. 정장에, 깔끔하게 올린 앞머리에, 자신이 선물해 준 커프스 버튼, 올 블랙 슈트까지. 약속을 위해 집에 들러 씻고 치장했을 것이 분명했다. 최근엔 늘 편한 차림인 그였기에 낯설게 느껴졌다.

첫 데이트도 아닌데 가슴이 쿵쿵 뛰었다. 예준은 괜히 물을 들이켜며 남자를 흘끗거렸다. 태경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예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태경이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느긋이 기대었다. 한참 눈을 맞추고 있던 그가 뒤늦게 재킷을 벗었다.

“오랜만에 데이트잖아. 예쁘게 보여야지.”

“누구? 나한테?”

“응.”

그럴 것까진 없는데…. 예준은 그가 어떤 모습을 하든 멋지다고 생각했다. 대표의 면모를 갖추었을 때도, 대학생처럼 일에 몰두했을 때도, 나신으로 침대 위에 올랐을 때도. 예준은 자주 입는 도톰한 니트를 내려다보며 머쓱한 얼굴을 했다.

“미안. 기대한 자린데 괜히 기분 나쁜 일 만들어서….”

마침 서빙된 애피타이저에 예준은 쉽게 포크를 가져가지 못했다. 태경이 직접 그의 손에 포크를 쥐여 주며 말했다.

“괜히 입에 올릴 가치 없는 일이야. 돌아가는 상황 뻔히 알면서 네 처신 탓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까 잊고 좋은 시간 보내자.”

“형.”

“왜.”

“이해해 줘서 고마워.”

뺨을 쓰다듬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예준은 태경이 괜찮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다정한 말에 속 편하게 수긍하기에는 그에 관해 아는 것이 너무 많았다. 태경이 창밖을 응시하며 무심코 한숨을 내뱉었다. 예준은 그 짧은 순간에도 예민하게 관심을 기울였고, 그의 마음이 태도처럼 괜찮지는 않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겼다.

이따금 감도는 정적이 무거웠다. 메인 디시를 비운 예준이 냅킨으로 입술을 닦아 내며 말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물을 들이켜던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일언반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준의 팔꿈치를 감싸 쥐었다. 예준은 당황한 채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혼자 가도 돼.”

“절대 안 돼.”

오메가에게 있어 공중화장실이 녹록지 않은 공간인 건 예준도 인정했다. 그러나 이곳은 후미진 상가나 으슥한 공원이 아닌 호텔이었다. 더군다나, 바깥에서 그와 화장실을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기에 예준은 만류하려고 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같이 가.”

그렇게 말하며 악력을 싣는 태경 때문에 예준은 고분고분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 사람들이 제 허리를 감싸는 태경의 행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과하게 다정하여 머릿속이 아득했다. 그 덕분에 예준은 남자의 손을 붙잡아 빠르게 화장실로 향해야 했다.

태경은 당연하게도 안쪽 칸으로 걸어갔다. 비어 있는 화장실이었지만 언제든 남자나 알파들이 들어올 수 있었다. 외부 변기를 사용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예준은 어느새 붉어진 귀를 감추며 칸 안으로 몸을 들였다.

“형. 그냥, 좀….”

문고리를 잡고 잠시간 실랑이가 벌어졌다. 태경은 당연히 안으로 들어서려 했고, 이미 그런 전적이 있었다. 꽤 강한 힘으로 저지했음에도 그는 손쉽게 예준을 물리쳤다.

“괜히 힘 빼지 마, 예준아.”

“진짜 이거 좀 변태 같다고.”

“알아.”

“형….”

태경이 예준의 허리를 붙잡아 변기를 향해 서게 했다. 문이 철컥 잠겼다. 예준은 등 뒤에 단단히 버티고 선 남자가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빤히 알기에, 그의 말처럼 힘을 빼지 않는 편이 현명하겠으나.

“진짜…. 그냥 밖에서 기다리면 될걸….”

저답지 않게 구시렁거리자 태경이 귓가에 바짝 입술을 대며 답했다.

“바지 벗어야지.”

종용하는 말투에 장난기가 없다는 사실이 더 난감했다. 예준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소심하게 버클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떠올리면 가뜩이나 열감으로 달아오른 목덜미가 터질 것 같았다.

결국 속옷까지 끌어 내리자 핑크빛을 띠는, 매끈한 성기가 드러났다. 예준은 적당히 조준한 뒤, 머리만 감추면 숨었다고 생각하는 강아지처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강한 요의에 비해 몇 초는 견뎠다. 이내, 배뇨를 시작하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아 곤혹스러웠다.

겨우 눈을 떴다. 일을 끝마치자 태경이 휴지를 뽑아 성기 끝을 닦아 주었다. 예준은 폭발적으로 뛰는 심장이 버거워 아랫입술만 세게 깨물고 있었다. 수치스럽고, 쪽팔리고, 난감해 죽겠는데 이미 그에게 익숙해진 몸은 그저 고분고분하기만 했다. 이어지는 반항도 미약할 뿐이었다. 예준은 좁은 칸 안에서 구태여 남자를 밀어내고 바지를 입었다.

“잘했어.”

나긋한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예준은 너무 부끄러워 흐린 의식으로 먼저 칸을 박차고 나섰다. 금세 따라붙은 남자와 함께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목덜미와 귓불의 붉은 기는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손을 다 씻은 태경이 거울을 보며 구겨진 셔츠를 바로잡았다. 그의 귀도 붉게 달아올랐다는 사실을 예준은 눈치채지 못했다.

“한두 번도 아니면서 때마다 왜 그렇게 부끄러워해.”

“…진짜, 이거 좀 아닌 것 같아.”

“밖에서만 하잖아.”

“집에서 해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야….”

청결한 손으로 예준의 머리카락을 흩뜨린 남자가 웃었다.

“더한 짓을 해도 예쁘기만 해.”

“그런 문제가 아닌데….”

예준이 손을 툭툭 털자 태경이 티슈로 물기를 닦아 주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지 않은데도 등 뒤에서 자신을 감싼 태경의 자신감이 예준은 신기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거울 속에서나마 들여다보는데, 허리 뒤쪽에서 심상치 않은 굴곡이 느껴졌다. 예준은 그 자리에 멎은 듯 굳었다.

귓가에 가볍게 뽀뽀한 남자가 시간을 확인했다. 그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디저트는 위에서 먹자.”

“어?”

“방 잡자고.”

장난은커녕, 예민하게 인상을 구기기까지 하는 태경이었다. 그의 발기가 자신의 성기를 본 탓인지, 배뇨 장면을 본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두 뺨까지 벌겋게 붉힌 예준은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다짜고짜 다시 칸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면 데이트가 끝까지 이성적인 날은 몇 없었다. 다른 알파와 트러블까지 있었던 오늘이라면 당연했다. 다만, 그가 꼴린 지점이 잘 이해되지 않아 예준은 머뭇거렸다.

답을 얻긴 쉬웠다. 태경이 여유 없이 읊조린 탓이다.

“자지까지 예쁜 건 좀 너무하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예준은 남자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빠르게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

며칠간 가라앉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식사도 함께, 잠자리도 함께하지만 묘하게 차가운 기류가 예준과 태경 사이에 감돌았다. 예준은 남자의 태도가 예민하게 곤두세운 신경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오메가라면 앞으로도 숱한 희롱이나 스토킹을 견뎌야 한다는 명백한 사실과 별개로, 태경은 조금 지쳐 보였다. 나쁜 의도 없이도 번번이 그를 속여야 하는 예준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태경과 함께 즐거운 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간 예준이었지만, 가슴이 꽉 막힌 듯한 부채감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또 형을 피곤하게 해서, 신경 쓰이게 해서, 속여서.

그러고 싶지 않은데 늘 그렇게 되었다. 예준은 어쩐지 열이 오르는 것 같아 해열제를 두 알 챙겨 먹었다. 그리고는 경호원과 함께 빈 도장을 등지고 나섰다.

태경과 그의 친구가 새로 연 건축 사무소는 LK와 분위기가 사뭇 다른 곳에 있었다. 빌딩이 숲을 이루던 LK와 달리, 제법 한적한 도로에 누가 봐도 미관에 정성을 기울인 듯한 작은 회사들이 즐비한 거리였다. 어딘가 주택가를 연상케 하는 도로변에 서서 예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2층 건물이라 바깥에서도 미팅 룸을 오가는 태경이 너무 잘 보였다. 그가 여성 고객과 화기애애하게 차를 나눠 마시는 모습을 예준은 조금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냥 일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보다 못한 경호원이 말했다. 예준 또한 아는 사실이지만 속이 탔다. 예준은 뺨을 긁적이며 답했다.

“혹시 담배 있어요?”

“늘 피우던 걸로 드릴까요?”

본인이 피우고 남은 게 있느냐는 뜻이었는데 그는 이미 자신의 취향에 맞는 담배를 지니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예준은 경호원의 치밀함에 놀라며 담배를 받아 들었다.

“형 방해하기 싫어서 시간 좀 때우려는데, 괜찮죠?”

“네. 문제없습니다.”

예준은 으슥한 길가 벤치에 앉은 채로 담배를 두어 개 피웠다. 통창으로 보이는 태경은 예준을 발견하지 못했고, 미팅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조금 지루해지기 시작했을 때쯤 끝났다.

경호원이 건축 사무소를 나서는 고객을 확인하고 나서야 예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뵈어요.”

“내일 뵙겠습니다.”

경호원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예준이 태경이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혹시나 해서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금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예준을 발견한 태경의 두 눈이 커졌다.

“어떻게 왔어?”

당황한 그가 시간을 확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로 상대를 데리러 가는 쪽은 태경이었다. 예준은 태경이 왜 당황했는지, 당황했으면서도 왜 입은 귀에 걸릴 듯 벌어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일찍 끝나서. 형이랑 같이 집 가려고.”

주변을 둘러보자 사무소에 남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머쓱하게 두 손을 비비며 시선을 던지자 태경이 예준의 등허리를 어루만지며 힘을 주었다. 예준은 태경에게 이끌려 그의 사무실에 발을 들였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 게 채 세 번도 되지 않았다.

그는 거의 매일 자신을 데리러 오는데. 태경을 먼저 찾는 일이 얼마나 드물었으면, 그의 얼굴에 이토록 기쁜 기색이 완연할까 싶었다.

“가끔은 와도 괜찮은 거 맞지?”

“당연한 소리를 해.”

어지러운 책상 위를 보자 방해가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뻐근한 듯 뒷덜미를 주무른 남자가 다시 한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근래 느꼈던 묘한 분위기는 어느 정도 상쇄되어 있었다. 예준은 남자가 책상 의자에 앉자마자 가까이 다가갔다.

“형.”

남자가 대답 대신 제 허벅지 위를 두드렸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예준은 집에서 자주 하던 것처럼 태경 위에 올라앉았다. 팔을 뻗자마자 완벽하게 맞물린 상체가 진득하게 비벼졌다.

“…아직 기분 안 좋아?”

예준은 남자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으며 물었다. 어느새 열 오른 피부가 여실히 느껴졌고, 은은한 페로몬이 몸 구석구석을 자극했다. 예준은 태경의 목을 느슨히 끌어안은 채 단단한 어깨에 뺨을 기대었다.

“아니. 다 풀렸어, 지금.”

“그럼… 그 전에는 계속 기분 별로였다는 거네?”

태경은 답이 없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런데도, 부드럽게 등을 어루만져 주는 손길이 좋아서 예준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난 나쁘지 않았어.”

“뭐가?”

태경이 다정하게 되물었다. 예준은 천천히 몸을 떼어 내고 남자의 양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피로에 젖은, 잘생긴 눈매가 바로 보였다.

“우리가 고작 이런 걸로 다툰다는 게 말이야.”

못되게 구겨지는 미간은 다정하지 않았다. 예준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오해하지 말고. 그냥, 우리한테 더 큰 문제가 많았잖아. 그래서 어느 알파가 추근댄 것 정도는 나한테는 대단한 문제도 아니라는 뜻이었어. 그런 걸로 싸우는 커플은 많을 테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랑 별다르지 않은 고민을 한다는 게 오히려 마음 편했다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한때, 혹독한 시간을 겪었다. 예준에게 사랑싸움의 연장이나 다름없는 일은 그저 행복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그보다는 태경 때문에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더 곤란했고, 날이 갈수록 커지는 사랑을 감당하는 것이, 혹여 시련이 반복되진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 더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곤 했다.

“김예준.”

“응.”

“너 초조하지.”

“…조금?”

멀리에서 보이는, 고객을 응대하는 태경만 보고도 마음을 졸인 예준이었다. 그가 많은 사람을 만난단 사실이 때때로 마음 한편을 서글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어느 일부도 나눠 갖기 싫은 욕심 정도는 스스로 해결해야 마땅했다. 하물며, 태경이라고 다를까. 그 또한 자신의 어느 일부도 타인에게 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알파의 추근거림을 가벼운 일로 치부하긴 했지만 태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메가란 이유로, 예준은 앞으로도 그에게 많은 골칫거리들을 안겨 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네 잘못 아니야.”

예준이 상념에 잠기자 태경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타일렀다. 예준은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뺨에 그의 손이 닿았다. 보드라운 피부 위를 어루만진 태경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그래도 화는 나지. 가끔은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

“그래서….”

“삐친 애처럼 말수가 적어지고 너한테서 거리를 둬. 그러면 좀 감당이 될까 싶어서.”

형용하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를 태경은 그렇게 묘사했다. 내용과 달리, 어린 구석이 없는 낮은 음성에 예준의 허벅지 근육이 뻣뻣해졌다. 꿀꺽, 침을 삼킨 예준이 남자의 어깨를 주무르며 물었다.

“그러면 조금 나아져?”

“이번엔 정확히 나흘 만에 끝나긴 했는데. 글쎄, 다음은 어떨지 장담 못 하지.”

남자가 의자를 젖히며 상체를 뒤로 물렀다. 순간, 중심을 잃은 예준이 남자에게 안겼다. 손쉽게 안으려는 술수임을 깨달았지만 이미 허리를 붙잡혔고 시선을 들자마자 남자의 턱에 코끝이 닿았다. 그대로 입술이 맞물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으음….”

부드럽게 혀가 얽혀 들고 입술이 비벼졌다. 입 안 점막을 고루 스치는 따뜻한 혀가 배 속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남자의 어깨를 감싼 셔츠를 마구 구긴 예준이 이따금 밭은 숨을 쏟아 내었다. 회음부에 닿는 익숙한 단단함이 성감을 고조시켰다.

“나도, 형이 여자랑 있는 거 보니까….”

“내가, 언제, 하아…. 여자랑 있었는데?”

“조금 전에….”

“고객도 여자로 보는 거야?”

“읍, 응….”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듯 태경이 입술을 떼어 냈다. 이마를 맞댄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문제는 넌 오메가고 난 알파라는 거야.”

“…….”

“오메가한테 접근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데 혈안이 돼 있잖아. 알파한테 접근하는 사람들은 그 반대야. 굴복당할 작정하고 숙이고 들어오거든. 누구한테 위험 부담이 크겠어? 적어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위협하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지만.”

예준의 허리를 움켜쥔 태경의 손에 힘이 실렸다.

“넌 다칠 수 있어. 그래서 내가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고.”

“…….”

“거절도, 나한테는 쉬운 일이지만 너한테는 어려운 일이라는 거 알아. 같은 말이라도 나한텐 권력이 되고 너한테는 무시하면 그만인 변명이 될 수 있지. 불공평해서 화가 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화를 내면 그냥 내버려 두면 돼. 네 옆에서 회복할 거니까.”

아프지 않게 예준의 입술을 물었다 놓은 그가 덧붙였다.

“그렇게 치열하게 눈치 보는 거 숨 막히잖아, 예준아.”

“적어도 한 침대 쓸 땐 눈치 안 봐도 돼.”

“한 침대 안 쓰면 걱정해야 한다는 거야?”

그가 싸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랑이란 감정에 적신호가 켜졌을 때나 벌어질 비극이었다. 그와 자신 중 누군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거나….

그러나 예준에게 그런 일은 헛된 망상이나 다름없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

“준이는 다시 지혁이 도장으로 가겠대. 벌써 합의 봤어. 그러니까 그 사람 다시 볼 일 없어.”

말한 예준이 태경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눌렀다. 뜨겁게 달아오른 온도가 기분 좋아 눈을 감고 천천히 입 맞추었다. 허리 부근을 간지럽히며 화답한 태경은, 입술이 잠시 멀어진 타이밍에 깊게 시선을 맞추었다.

“너 혼자 해결할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

그가 확신에 차 말했기에, 예준은 어쩐지 수줍은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럴 수 있었을까. 미약한 의심은 있었으나 태경이 그렇다고 말해 주었으니 확실히 믿을 수 있었다. 가끔은 상황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했다. 예준은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태경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이해시키려 노력하는 것이 좋았다.

거기엔 단순한 위로보다 강력한 힘이 있었다. 낮은 지위, 혐오의 대상, 어디에서나 문제만 일으킨다는 편견. 일방적으로 공격당한다고 느꼈던 과거가 무색하게도 예준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게 된 지 오래였다. 분명, 태경이 노력해 준 덕분이었다. 지켜 줄 사람이 있어서,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주말에 새 집 가 볼까?”

가만히 예준을 들여다보던 태경이 물었다. 태경의 셔츠 단추로 손을 뻗으려던 예준이 눈을 크게 떴다.

“아직 공사 중인 거 아니야?”

“마감은 남았어도 조명 작업하고 나면 둘러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거야. 나한테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우리가 함께 살 집이니까. 지금쯤 같이 가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예준의 심장이 쿵쿵 두방망이질 쳤다. 몇 달 전 작업에 들어간 새 집엔 공사가 중간 정도 진행되었을 때 한 번 들러 본 것이 다였다. 골조를 드러내고 있던 집이 벌써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었다니.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떨려.”

예준이 속수무책으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집이 화두에 오르면 태경을 향한 사랑이 더 커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예준은 가까스로 들뜬 기분을 누르며, 태경의 셔츠 단추를 열었다. 이미 두 개 열려 있던 것을 두 개 더 열자, 단련된 남자의 가슴팍이 드러났다.

예준은 남자의 셔츠를 그러쥔 채, 길게 뻗은 목에 입 맞추었다. 남자를 처음 만났던 날, 태초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던 곳. 익숙한 태경은 예준을 위해 기꺼이 고개를 젖혀 주었고 그러자, 예준은 더 편안하게 남자의 향취를 들이켤 수 있었다. 젖은 입술을 묻고 부드럽게 비비는 행위는 어느덧 능숙해져 남자의 성감을 손쉽게 고조시킬 수준에 이르렀다.

“정말, 좋단 말이야. 이거.”

“여기 애무해 주는 거?”

태경이 길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준은 그의 반대편 목에 손끝을 미끄러뜨리며 열을 올렸다. 깨물고, 정신없이 입을 맞추자 한계에 다다른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쿵, 어지러운 책상 위로 던져진 예준이 다급히 버클에 손을 가져갔다. 꿰뚫려 사정없이 흔들릴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속옷 중심이 묽게 젖어 들었다. 잘 흥분하고, 잘 젖는 몸은 사랑하는 상대 앞에선 늘 축복이었다. 그 기쁨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행복해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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