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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Falling (13/18)

12. Falling

눈을 떴을 때, 태경은 기대하지 않은 온기 속에 감싸여 있었다. 그는 가장 먼저 제 가슴 위에 조심스레 올려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새근새근, 익숙한 숨결이 느껴졌다. 이어 촘촘한 속눈썹과 발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 위에 함께 몸을 뉜 예준은 자신을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파리한 안색이었으나 우려와 달리 잠든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깨어나셨어요?”

거리를 둔 채 서 있던 경호원이 물었다. 태경은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되물었다.

“잠든 지 얼마나 됐어?”

“예준 씨요?”

“어.”

“내내 버티다가 한 시간 전부터 겨우 눈 붙이셨습니다.”

잠긴 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태경은 무거운 몸을 움직여 예준을 더 편안히 제 품에 안았다. 티셔츠를 걷어 확인하자 예준의 옆구리엔 깨끗한 거즈가 덧대어져 있었다. 굳이 열어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몇 바늘 봉합하긴 했지만 확실히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쯧, 태경이 불쾌한 얼굴로 혀끝을 찼다. 그러는 그의 허리에도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었다.

“상처가 깊었지만 날이 복막이나 내장까지 파고들진 않았다고 합니다. 수술은 세 시간 정도 만에 마무리됐고 다른 후유증은 없을 거란 답도 들었습니다.”

예준의 말이 맞았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목을 노렸을 터였다. 허술하게 접근해 상처만 내고 도주한 것은 따지자면 위협에 불과했다.

이 회장이 자신의 거처를 모를 리 없는 데다, 후계자로 그의 업을 이을 생각이 없다고 못 박은 뒤였다. 생각을 바꾸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할지라도 태경은 이 회장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몇 바늘이나 꿰맸어?”

“스물일곱 바늘이요.”

“나 말고, 얘.”

“다섯 바늘이라고 들었습니다.”

경호원이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경은 눈을 뜬 이후부터 제 몸 상태보다 예준의 몸 상태에 훨씬 관심이 많아 보였다. 예준의 뽀얀 뺨을 감싼 태경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예준의 잇새에서 끙, 하고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생활 보호 같은 거 필요 없으니 대표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라고 하시던데요.”

“울었어?”

“아뇨. 눈두덩이 벌게지긴 했지만 잘 참으셨습니다.”

“편히 자면 될 걸, 왜 이러고 있지?”

“페로몬이 회복에 도움될 거라고요.”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은 서로 밀접한 영향을 끼쳤다. 알파의 페로몬이 오메가의 회복에 도움이 되는 만큼, 오메가의 페로몬 또한 알파의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태경의 입매가 휘어졌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타인 앞에서 잘 하지 않던 스킨십까지 당당히 하며 잠들었을까.

태경은 덕분에 불편한 자세로 버텨야 했다. 통증이 느껴졌지만 견딜 수 있었다. 그가 상체를 뒤척이며 미간을 찌푸리자 경호원이 다가와 손을 뻗었다.

“됐어.”

태경은 그 호의를 단박에 거절했다. 지친 기색으로 호흡하던 그가 뒤늦게 햇살이 비친 바깥을 응시했다. 겨우 하루가 바뀌었으나 무언가 달라졌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쳐.’

태경은 치문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직감은 치문이 헐레벌떡 특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부터 확신으로 변했다.

부산스러운 기척에 태경이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갔다. 잠든 예준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면박을 주자 치문이 그 자리에 서서 이마에 맺힌 땀을 쓱 닦아 냈다.

“아니. 칼빵이라뇨?”

치문이 까치발로 걸어와 속삭였다.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다는 소식 정돈 미리 들었겠으나 치문은 퍽 당황한 얼굴이었다. 서울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부산행이었으니 안색에 피로감이 완연한 것도 당연했다.

“어떻게 됐어.”

“벌써 보고 들으시게요?”

“눈멀고 귀먹은 것도 아닌데 왜 못 들어.”

“그래도 칼빵인데 적어도 사흘은 쉬셔야….”

“별일 없었나 보네.”

“그건 아니고요.”

경호원이 물러나자 치문이 침대 곁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가 꽉 끼는 재킷을 벗은 뒤 묘한 눈빛으로 예준을 훑어보았다.

“간밤에 정 사장 조직원들이 강남 업소 두 곳 접수했답니다. 그 일대 경찰서에 비빌 대로 비볐는지 소란은 없었고요. 뒤진 새끼들은 없다는데 정확한 피해 규모까진 모르겠습니다. 그건 가 보면 알 일이고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은 치문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시선은 태경이 아닌 예준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태경이 의아한 눈빛으로 치문을 보았다.

“뭘 그렇게 봐?”

“아니, 형이….”

치문이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침대에서 외간 남자랑 그러고 있는 걸 처음 봐서….”

닭살 돋는다는 듯 팔을 문지른 치문은 슬쩍 태경의 눈치를 보았다. 페로몬으로 회복을 도울 때는 늘 집을 비웠고, 영도를 떠나던 날엔 겨우 담 너머로 봤을 뿐이라 이토록 노골적인 장면은 처음 목격하는 처지였다.

굳이 언급했는데도 태경은 부끄러운 기색 없이 표정을 지워 낼 뿐이었다. 치문이 낯선 기분을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아마 보스가 약이 바짝 올랐을 겁니다. 정 사장이야 십수 년 칼 간 일이라지만, 당하는 처지에서야 하루아침 날강도나 다름없는지라….”

“내가 정 사장이랑 접선한다는 거 알았으니 아버지도 아주 몰랐다고 할 순 없지.”

“그래도 설마설마했겠죠.”

“선의로 얻어 기른 양자가 설마하니 자기 뒤통수를 칠까….”

“곱게 자라셨다고 들었는데요.”

“뒤통수 먼저 친 건 아버지야.”

“그러니까, 이게 도련님 반항 정도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보스도 제대로 깨달았을 거예요. 조금 더 몸 사리셔야 합니다. 이쪽 사람들은 상식이 안 통해요. 자기 아들한테 칼빵 놓는 아버진데, 더한 일 못 한다는 보장이 어딨어요?”

치문이 퍽 걱정된다는 어투로 말했다. 태경 또한 예상하던 일이었다.

“아, 그리고 정 사장이 조 비서도 족치기 시작했답니다.”

윤도하와의 일로 조 비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가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면 조직의 일까지도 상세히 알 확률이 높았다. 십수 년간, 이 회장을 지척에서 보필한 사내기에 그의 이중생활을 관리하고 은폐하는 일을 도맡아 했을 가능성이 컸다.

“조 비서야 아는 게 많겠지. 털면 재미 좀 볼 거야.”

“비서직은 내려놨어도 그간 보스가 돌보긴 했나 보더라고요. 아무리 으리으리한 건설사 비서였다 하더라고 가당치도 않은 곳에 살더랍니다. 자식들도 죄다 유학에 누릴 거 다 누리고요.”

음지의 일까지도 관여했다면 그런 호사를 누리는 것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 회장의 손길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제 잇속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챙겼을 터였다. 조직의 보스이기까지 한 사내에게 오랜 시간 동안 충성했으니, 응당 그만한 대가를 받아야 했다.

담담한 태경의 표정을 보고 치문이 물었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담하시려고요? 정 사장이야 본인 복수에 성공하면 그만이라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생각하기엔?”

“이 대표님이 원하는 건 복수가 아닌 것 같아서요.”

평생을 존경했던 아버지의 더러운 일면을 알았다. 동시에 그는 하나뿐인 제 연인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 우성 알파였다. 알파 대 알파로 느끼는 분노와 적대감은 상당했다. 그에게 받은 것이 많다는 데서 기인하는 죄책감은 옅었고, 불쑥 치미는 감정들은 주로 예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태경은 제 아버지에게 직접 칼날을 겨누지 않았다. 따지자면 그가 쌓아 온 세월의 균열을 파고드는 일이었고, 일련의 액션들은 이 회장의 자멸을 부채질하는 수준에 그쳤다.

“복수가 목적이라기보단, 자유가 목적이지.”

“자유요?”

치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태경은 예준이 했던 말을 다시금 상기했다.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는 기분은 어때요?’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그 지점에 있었다.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 단 한 번도 제 인생을 뜻대로 살아 보지 못한 예준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는 것. 형질의 간섭 없이 스스로 개척하는 미래를 선물하고, 위협 없는 일상을 누리게 하는 것.

예준이 다시 도복을 입었던 순간부터 분명해졌다. 예준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듯 보였지만, 무엇보다 가치 있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런 때가 아닐까 싶었다. 퇴색된 과거가 무색할 만큼 윤택한 찰나였다. 예준은 빛났고, 태경은 그 순간에 곧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발목 잡힐 일 만들지 않을 거야.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 회장처럼 감정만 내세워선 안 되지.”

박정명을 죽인 사람치곤 퍽 이성적인 말이었다. 치문은 태경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동조했다.

“완벽하게 빠져나오실 거라고요.”

“죗값을 치를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그럼 대표님이 원하는 건 뭔데요?”

태경이 씩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가 예준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얘랑 백년해로하는 거.”

“…미친.”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 탓에 치문이 바쁘게 입을 가리고 나섰다. 어쨌거나 태경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태경이 치문에게서 시선을 옮겨 예준을 내려다보았다.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는 손 아래서 예준은 속절없이 잠든 채였다.

“그렇다면 할 말은 없는데요….”

치문은 자신이 그에게 사람 같은 대접을 받는 데엔 예준의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예준이 아끼는 동생이 아니었다면, 그가 자신의 자유에까지 신경을 써 줄 리 없었다. 알파들은 으레 그러니까. 조직의 주변을 맴돌며 그를 돕는 것은 치문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래도 두 번 다치지 마세요. 우리 형 우니까.”

“그럴 일 없을 거야.”

치문은 내내 참았던 한숨을 내뱉으며 잠든 예준을 응시했다. 끝이 보이고 있었다. 진창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드디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자세한 보고는 정 사장이랑 통화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고개를 끄덕인 태경이 편히 상체를 기대었다. 통증에 잇새를 짓씹는 그를 보며 치문은 묵은 회한을 꾹꾹 눌러 삼켰다.

*

사흘 후, 뉴스는 익숙한 사실로 소란스러웠다. 치문의 연락을 받고 TV를 켠 태경은 화면 하단에 뜬 ‘<두화건설> 김향선 사장 횡령 혐의로 구속’이란 자막에 흘끗 시선을 두었다. 이어 부실 공사와 조직폭력배와의 연루를 다룬 내용이 짧게 귓가를 스쳤다. 다른 이들에게는 다사다난한 사회의 많은 사건 중 하나이겠으나, 연관된 자들에겐 제법 중대한 사안이었다.

예준 또한 말없이 뉴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볍게 세안을 마친 태경이 상의를 탈의한 채 걸어왔다. 아무리 회복력이 대단한 우성 알파라지만, 사흘 만에 저런 걸음걸이라니 놀라운 일이었다.

“제발, 내 부축 받으라니까.”

소파에 기대어 있던 예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명백히 부축이 필요 없는 태경의 팔을 굳이 어깨에 걸고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고분고분 따른 태경이 예준과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그는 어딘가 불쾌한 얼굴이었는데, 두화건설 뉴스 때문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왜? 어디 아파?”

좁아진 미간, 흐트러진 눈빛, 뻐근한 목을 계속해서 주무르는 모습이 예준의 가슴을 두방망이질 치게 했다.

“왜. 왜 그러는데.”

태경이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다소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답했다.

“러트.”

“어?”

“이 상태라면 곧 올 거야.”

알파와 함께하는 오메가, 오메가와 함께하는 알파는 S와 N극처럼 서로 당기는 힘이 있기에 혼자일 때보다 훨씬 더 잦은 발정기를 치러야 했다. 형질은 번식에 기반하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예준이 본능적으로 태경의 어깨에 코를 파묻은 채 킁킁대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준 또한 아랫배의 미약한 간지럼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는 증상이지만 시간이 꽤 흘렀으니 저 또한 언제 히트 사이클이 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면역제를 복용하고도 형질의 구속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는 시기였다. 태경의 회복이 빠르기는 하나, 회복 중에 억제제는 나쁜 영향을 끼칠 게 분명했다.

이제까지의 일로, 동시에 발정기를 겪는 것만큼 껄끄러운 일은 없었다. 예준은 피임약을 꾸준히 복용했다. 그러나 예준과 별개로 러트 때의 태경은 통제가 되지 않았다. 상처 입은 몸을 생각하자면 억제제를 먹어야 마땅하지만, 회복 자체만 두고 보자면 억제제를 피하는 것이 좋은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억제제를 먹더라도 그땐 떨어져 있는 편이 좋겠어.”

태경이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지만 예준은 아랫입술을 감쳐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치는 것보다야 잠시 떨어져 있는 편이 나았다. 물리적인 분리만 있으면 될 테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정말 그것만이 최선일까 고민하고 있는데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오늘 오후, 서울행이 결정되었기에 태경과 예준 모두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리에서 먼저 일어선 태경이 문을 향해 걸었다. 이윽고 열린 문틈 새로 경호원이 파고들었다.

“무슨 일이야?”

뒤따른 예준이 본능적으로 태경의 환자복 자락을 쥐었다. 경호원의 손엔 꽃다발이 들려 있었고 그 뒤로 장정 둘이 보였다. 새카만 정장으로 보아 이 회장의 조직원들이 틀림없었다.

“이석준 회장님께서 위로차 보내셨답니다.”

경호원이 꽃다발을 태경에게 건넸다. 아들을 죽일 뻔한 아버지의 선물이기에 모욕의 정도가 지나쳤다. 태경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꽃다발을 바로 옆 테이블로 던졌다.

“받는 거 확인했으면 꺼져야지. 뭘 보고 서 있어.”

면박을 들은 조직원들의 얼굴에 불쾌한 낌새가 서렸다. 두 손을 모아 잡은 채 각을 세워 서 있던 놈들이 괜히 옷깃을 매만졌다.

“모시고 J 대학 병원으로 오라는 명령이십니다.”

“명령?”

누가 누구에게. 태경은 더는 이 회장의 명령에 복종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불러들인 병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제 발로 벼랑 끝에 서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뉴스 보셨죠? 그 건으로 긴히 할 얘기도 있다고 하시고요.”

진작부터 이 회장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LK의 대표로서 명성건설과의 협업에 기뻤던 때가 무색하게도, 애당초 그 재개발 프로젝트 자체가 이 회장이 짠 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안에 두화건설이, 그 뒤에 조직이 있으므로 김향선 사장이 잡혀 들어간 시점부터 주변이 떠들썩해지고 있었다.

“호랑이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라니.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너무 가혹한 명령 아닌가.”

태경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정 사장의 목줄을 풀어 준 것이 이 회장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자명했다. 숙적이 조직의 주요 업소를 쳤으니 이 회장의 노기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형.”

가만히 지켜만 보던 예준이 태경의 팔을 당겼다. 태경이 눈을 맞추자 예준은 조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로 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당연한 말이었다. 태경을 방패막이 삼아 등 뒤에 숨은 예준은 떨고 있었다. 두 눈에 차오른 적대감과는 대비되는 반응이었다.

“예준아.”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면 안 돼.”

“그럴 일 없어.”

이 회장이 둘에게 어떤 해를 끼칠 수 있는지 눈으로 확인한 직후였다. 조직의 생태계를 직접 경험하기까지 한 예준이 어떤 두려움을 안고 있을지 모를 수 없었다. 태경은 조여드는 가슴께를 애써 무시하고 어깨들을 향해 답했다.

“회장님께는 정중히 거절하겠다고 전해 줘.”

위협은 위협일 뿐. 그가 정말 자신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저도 예준도 이미 이 자리에 없어야 마땅했다. 이 회장의 소극적인 태도가 태경의 자신감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당황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열성 알파들을 뒤로한 채 태경은 곧장 문을 닫았다.

문 너머에서 잠깐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태경은 주변이 완전히 고요해지고 나서야 뒤돌아섰다.

예준을 다시 소파에 앉힌 태경은 꽃다발을 집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불순한 마음마저 존중할 이유는 없으므로. 이내 예준 곁으로 간 그가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한 품에 쏙 안겨 오는 몸에 무게를 실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긴 했지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예준은 언제든 다른 위협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굳건히 마음먹었지만, 들이치는 무력감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어도 내가 그걸 하게 뒀을 리 없다는 생각 안 해 봤어?”

태경이 느긋하게 되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예준에게 당장 어마어마한 능력이 생겨난다고 할지라도 그걸 두고 볼 남자가 아니었다. 예준은 버석거리는 환자복에 눈가를 비비며 중얼댔다.

“그건 그렇지만.”

“지금은 여기에만 집중해.”

그가 붕대에 감긴 복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손이 이어 예준의 상처로 향했다.

“서울로 돌아가서 회복하고 러트 무사히 보내는 데만 집중하면 돼. 다른 일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말했듯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예준은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히 태경의 눈매 또한 누그러졌다.

*

서울로 향하는 차 내부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건 선영은 첫 순간부터 몹시 격양되어 있었다.

―대학 병원 신간도 캔슬, 아트 갤러리도 캔슬이야.

“알아듣게 말해 봐.”

제 무릎을 베고 잠든 예준 덕분에 태경은 목소리를 죽였다. 그의 손끝이 연약한 머리카락 사이를 스쳤다.

―재개발 프로젝트에서 우리만 쏙 뺐다니까. 너랑 나, LK. 이게 말이 돼?

선영은 억울한 듯 호소했으나 태경에겐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니었다. 이 회장과 대치하는 쪽이라면 어떤 공격이든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화살이 자신이나 예준을 넘어 LK와 관련한 일로 향하는 것도 당연했다. 태경은 당황한 기색 없이 답했다.

“그 일 없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거 아니잖아.”

―아니지. 그런데 자존심이 상하잖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배척당했는데.

“이유가 왜 없어.”

―대외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부자간에 대단한 싸움이 벌어졌다고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계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고 승인만 거치면 바로 착공인 상황에, 반년이 넘도록 공들인 일이 허사가 되었다. 뒷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대단한 음모가 숨어 있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거짓말 안 할게. 이걸로 끝이 아닐 거고, 앞으로 맡을 프로젝트에도 시도 때도 없이 태클 걸릴 거야.”

―그래서. 가만히 두고 보자는 거야?

“그럴 리가.”

예준의 이마에 옅은 땀방울이 맺혔다. 차창을 내린 그가 낮게 읊조렸다.

“이제 꼬리 자를 때가 됐단 뜻이야.”

―무슨. 야, 이태경.

태경은 LK를 키우며 명성건설의 그림자를 거부한 것이 이토록 유용하게 작용할 줄 미처 알지 못했다. 프로젝트까지 배척당했다면 더더욱 명성건설과 어떤 껄끄러운 인연도 없는 회사라고 자부해야 했다. 태경 자신만 물러나면 명성이 LK를 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대표직 사임할 거야. 업계에 소문내서 아버지 좀 무안하게 만들어 봐.”

―정말 그렇게 하겠다고?

“그러자고 미리 말한 거야. 너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테니까.”

―하, 진짜.

“주선영, 너 리더십 없지 않아. 관심이 없을 뿐이지. 자문은 언제든지 환영이야. 내가 맡은 일까지는 완벽히 마무리하고 갈 테니까….”

홀가분하진 않았다. 건축가로서 설계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과 별개로 남다른 열정을 쏟아부어 키운 회사였다. 뛰어난 인재들과 함께 수년을 보냈다. LK는 빛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제 인생의 유일한 걸작품이었다.

그런 곳에서 물러난 후의 다른 삶을 상상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예정된 순서였다고 해서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때로는 포기하는 것으로 도약해야 했다. 과거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의 미래는 다를 터였다.

예준의 이마가 어느덧 서늘해져 있었다. 태경은 칭얼대는 선영을 받아 주며 다시 창을 올렸다.

“두화건설 들쑤셔 놨으니 명성도 걸려드는 거 시간문제야. 생각보다 길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버텨. 다른 문제는 그 이후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치문의 짧은 보고로 조 비서가 입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은폐된 진실은 언제고 반드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오랜 시간 약자들에게 끼친 해악의 대가는 클 터였다.

―회사로 와서 이야기해. 칼 좀 맞았다고 엄살 부리는 거 아니지?

“겸사겸사 할 일이 있어. 애 좀 돌보고 갈 테니까 재촉하지 마.”

―애기라고 부를 때마다 질색하더니.

“애라고 했지, 애기라고 안 했어.”

―그거나, 그거나.

평정을 되찾은 선영은 다시 평소의 모습이었다. 그녀에게도 녹록지 않은 일이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가 부러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도와줄 테니까, 미리 겁먹지 마.”

―어련하실까.

뚝-.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리는 무례함에는 익숙했다. 그런 일들이야 신경을 거스르는 것 중 하나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먼저 물러나겠다는데 불같이 화를 내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자신이 무력감과 배신감에 휩싸여 있다면 그녀 또한 그럴 터였다.

긴 고속 도로 위에서 태경은 겨우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틀리던 세계가 결국 뒤집혔다. 본격적으로 무언가 변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 그것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 대한 대가라면 두렵지 않았다.

미소를 머금는 얼굴 너머로 봄기운이 스민 들판이 뻗어 있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계절처럼, 황량한 것들 위론 새 생명이 돋게 마련이었다.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다. 도전은 즐거웠다. 이제 막 한 번의 실패를 겪었을 뿐이다.

뒤따르는 적막에 도리어 뒤척인 예준이 고개를 더 깊게 파묻었다. 다물린 입술이 중심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곧 러트라니까….”

그제야 곤란해진 태경이 마른 얼굴을 쓸었다. 잠든 아이에게 탓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그는 그저 소리 없이 잇새를 짓씹었다.

*

검사복으로 갈아입는 예준의 얼굴이 부루퉁했다. 대학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예준에겐 이름이 적힌 새 병실이 생겼다. 러트가 도래했다는 명목으로 태경은 잠자리를 분리할 것을 종용했다. 그것도 모자라 형질부터, 부상당한 무릎까지 샅샅이 검사당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무릎은 그냥 고질병 같은 건데.”

“알아. 그래도 분명 더 좋아지게 할 방법이 있을 거야.”

따로 밤을 보내고 맞이한 오전이었다. 예준의 검사복을 바로잡아 준 태경은, 그럼에도 대부분 예준의 병실에 머무르고 있었다. 의학적 지식은 그리 높지 않을 텐데도 굳이 다리를 뻗게 해 무릎을 들여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예쁘긴 한데 부실해.”

무릎의 볼록하고 오목한 굴곡을 더듬던 그가 말했다. 이미 크게 문제를 일으킨 전적이 있으니 딱히 변명할 말이 없었다. 예준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아래편이 휑한 검사복을 내려다보았다.

예준의 시선이 낮아지자, 태경이 납작한 배 위로 손을 뻗었다. 내내 서글서글하던 그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여기도 볼 건데.”

아기집이 생겨났다 사라진 곳. 임신과 유산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게 어떤 압박이나 회유는 아니니까 편하게 검사하면 돼. 더 아픈 곳은 없다는 소견 정도는 받고 싶어서 그래.”

영도 의원에서 처치하기는 했으나 현재의 상태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간 받은 페로몬 치료 덕분에 컨디션은 괜찮은 편이었다.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며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답을 얻고자 한다면 어차피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예상치 못한 검진으로 면역제를 먹지 못했다. 혈액 채취, 엑스레이, 초음파, 무릎 MRI 검사까지 하느라 하루가 눈 깜짝할 새 흘러가 버렸다. 지쳐 병실로 돌아오자, 그사이 내부를 떠나지 않은 태경이 다가왔다.

페로몬의 농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태경 또한 정밀 검사 때문에 면역제를 복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눈을 마주하자마자 손목을 훅 당기는 통에 예준이 그 자리에서 휘청였다.

“너.”

직감은 대체로 예상을 어긋나지 않는다. 예준의 목덜미에 남자의 코끝이 닿았다.

“페로몬이….”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눈. 예준은 간지러운 아랫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억제제를 먹어야 할지, 먹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아직 시작된 건 아니야. 억제제 먹을게.”

말하자 태경이 허리를 끌어안으며 답했다.

“이제 내 러트는 단순히 욕구 해소의 문제가 아니야. 불편하니까 적당히 넘기면 그만인 예전과는 다르지. 욕정만 있는 게 아니라 마음도 있잖아. 발정으로 알파와 오메가가 겪는 결과는 달라. 경험으로 이해했으니까 더 까다롭게 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념하려는 노력과 달리 몸 사이가 뜨거웠다.

“난 널 아끼고, 너도 날 더 아끼는 거지.”

태경의 말을 이해한 건 그저 이해에 불과했다. 히트 사이클이 도래했기에 흥분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럼 계속 각방 써?”

예준은 제 몸속에 삽입할 때의 태경을 그려 냈다. 격동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단단한 허리와 허벅지를 떠올리면 상처는 쉽게 터져 덧나고 말 터였다.

“왜. 혼자 자기 싫어?”

함께 자는 데 익숙해지도록 길들인 건 태경이었다. 예준이 억울한 듯 되물었다.

“형은?”

“자위하면 버틸 만해.”

“…미쳤어.”

병원에서, 그 몸으로? 타박을 놓으면서도 예준은 태경의 몸에 푹 안겼다. 힘을 들이지 않고도 가뿐하게 예준을 들어 올린 태경이 침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부드럽게 안착한 예준은 멋쩍은 얼굴로 뺨을 매만졌다.

“검사하느라 힘들었잖아. 밥 먹기 전에 눈 붙이게 누워 봐.”

그런 예준을 눕힌 태경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예준의 등 뒤로 몸을 겹치고는 마른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들이치는 성감은 전희를 시작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묵직하게 발기한 중심을 무시한 채 태경이 물었다.

“피임약은?”

“먹었어.”

이번에는 형질 검사를 마치고 처방받은 약이었다. 임신 확률이 제로에 가깝기에 지난 실수를 반복할 일은 없었다.

뽀얀 살결 위로 남자의 큰 손이 오갔다. 그가 축축한 예준의 아랫도리를 훔친 뒤 말했다.

“본격적으로 러트 오면 내가 하는 말 다 믿지 마. 어떻게든 너 회유해서 구멍 들쑤실 생각만 할 테니까.”

“어차피 나도 다리 벌릴 궁리만 할 텐데…. 자지 넣고 싶어서 매달리면 밀어내.”

하의가 없는 검사복의 특성상, 태경의 손이 예준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긴 쉬웠다. 도톰한 근육을 꽉 쥐었다 물러난 그가 가까스로 밭은 숨을 내뱉었다. 고조된 호흡을 내리누르고 다시 배 위에 손을 두려는 노력에서 가상한 인내심이 느껴졌다.

예준이 슬쩍 고개를 틀어 태경을 보았다. 마주한 남자의 눈은 곧 제 입술로 향했다. 시선의 방향은 늘 욕망하는 곳에 가닿았다. 예준은 잠시간 고민하다가 남자의 입술이 벌어진 새를 틈타 키스했다. 태경의 시선이 흔들렸다.

“나도 형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거 가까스로 참고 있어.”

“차마 그러지 말란 말은 못 하겠네.”

견디기 힘든 듯, 태경이 목덜미에 입술을 마구 비볐다. 간지러워 뒤척이자 이내 뜨끈한 이마가 닿았다. 낮게 퍼지는 웃음소리엔 여유가 없었다. 덩달아 눈가를 휘어 웃은 예준은 남자를 더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숨죽였다.

“네 밑에서 엉망이 될 생각에 벌써 쌀 것 같은데.”

그러나 태경은 그치지 않았다. 왜 위가 아닌 밑일까. 언제나 삽입하는 쪽은 그인데.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고 질문의 답을 찾긴 쉬웠다. 그는 상위 자세를 좋아했다. 예준 또한 자신의 아래에서 폐부를 부풀리는 그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예준은 결국 뒤돌아 남자와 마주 누웠다. 그의 단단한 턱을 제법 세게 쥐고 속삭였다.

“그만 가. 이렇게 이 악물고 참을 바에야 그냥 잘래.”

눈을 붙이고 깨어난다 한들 이 열감이 가실까. 그럼에도 보채며 바라보자 태경은 순순히 예준을 당겨 품에 안았다. 긴 한숨을 자장가 삼아 예준은 눈을 감았다. 파고든 세상은 온통 검었으나 공포와는 거리가 멀었다.

쌔액, 쌕….

잠든 숨소리 사이에 이따금 신음이 파고들었다. 잠들지 못한 태경은 아프도록 주먹만 쥐었다 펼 뿐이었다.

*

두화건설의 부실 공사가 한 케이블 방송에서 집중 조명되었다. 콘크리트를 뜯어내 부족한 철근을 보여 주거나 여기저기 균열이 간 건물의 외벽을 더듬어 가기도 했다. 불안에 떠는 건물 입주자의 인터뷰가 모자이크된 채 흘러나왔고, 건물 관리자의 정체에 관한 의혹도 노출되었다.

몸을 뒤덮은 문신, 까까머리, 열성 알파라는 몇 가지 단서만으로 방송의 화자는 그가 조직폭력배라는 사실을 손쉽게 유추했다. 관련자들은 인터뷰를 거부했으며 자재를 납품한 하청 업체들은 모두 셔터를 내렸다.

한동안 메말랐던 땅이 젖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어느새 굵은 빗발이 되어 아스팔트를 내리쳤다. 예준은 취한 듯 몽롱한 의식으로 TV를 껐다. 익숙한 동네의 뒷골목을 다시 보자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다시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확신이 있는데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기시감은 과거의 기억을 손쉽게 불러들였다. 오메가로서 멸시당했던 수년과 잘못된 방식으로 발정기를 보냈던 자신을 향한 자책, 그 어둡고 습한 분위기에서 풍기는 모든 이질감 때문에 온몸의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소름이 돋고 어지러워, 예준은 아직 과거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낙인처럼 선명하게 찍힌 흔적을 어떻게 다 지워 내야 할지 아득했다.

어둠이 깔린 데다 창이 흠뻑 젖어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희고 붉은 헤드라이트 불빛만이 이따금 비쳤다. 무의식적으로 커튼을 친 예준은 온도가 찬 침대 위에 올라앉았다.

오늘 오후엔 정밀 검사 결과를 받았다. 아기집을 긁어내는 과정에서 상처가 많이 난 덕분에 당분간은 착상이 힘들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무릎은 선수 시절보다 되돌릴 수 없이 더 나빠지진 않은 정도였다. 의사는 주사와 약물, 물리 치료를 제안했으나 어쨌든 지금은 안전을 위해 일정을 미루어야 했다.

히트 사이클 증상이 심해지고 있었다. 예준은 끝내 억제제를 먹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다디단 향기를 풍길지 태경의 타는 눈빛만 돌이켜 봐도 알 수 있었다.

불을 끄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깊이 빠질 수 없는 초저녁잠이었다. 빗발이 워낙 거세어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을씨년스러웠다.

이불을 걷고 화장실로 향할 참이었다. 그때, 슬리퍼를 신으려던 예준이 질척이는 구둣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빠르고 강하게 바닥을 내리찍는 걸로 보아 분명 사내 여럿의 기척이었다. 비에 젖은 탓에 쩍쩍 달라붙는 밑창 소리가 불쾌하다고 느낄 즈음.

쾅-!

누군가 옆 병실 문을 발로 찼다.

“……!”

동시에 예준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태경의 병실 앞에서 고성이 오갔다. 겁에 질린 예준이 재빨리 제 병실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가장 먼저 거대한 실루엣이 보였다. 어두운 복도 아래, 노인은 거리를 둔 채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흘끗, 제게 닿았다 멀어진 시선엔 경멸이 묻어 있었다. 시선을 둘 가치조차 없다는 듯 빠르게 눈을 떼어 낸 보스는 강제로 열린 문과 그 너머를 관조하고 있었다.

보스의 따까리 셋과 뒤엉킨 경호원이 넷. 누가 이기고 있는지 가늠할 방법은 없었다. 정신없이 주먹질과 발길질이 오가던 가운데, 보스가 가볍게 손을 들어 상황을 정리했다.

“소란 피울 필요 없다.”

병실 안의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어찌나 몸이 떨리는지 두 발로 몸을 지탱하고 서 있기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보스를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예준은 기척을 죽여 태경의 병실로 다가갔다. 태경은 조명등 하나에 의지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차분히 미간을 구겼다.

씩씩대며 구겨진 옷을 가다듬는 사내 중 누구도 안으로 들어서는 예준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삼자대면이었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경멸하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사랑했으며, 누군가는 누군가를 지독히 원망했다. 온갖 감정이 뒤엉켜 병실 내에선 페로몬보다도 더한 악취가 풍겼다.

떨림을 도무지 가라앉히지 못하던 예준이 먼저 걸음을 뗐다. 내부를 꽉 채운 태경의 페로몬에 질식할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러트가 임박했다. 이 상태라면 페로몬뿐만 아니라 감정도 수시로 널을 뛸 것이다. 때가 좋지 않았다. 태경이 자제력을 잃으면 상황은 더 악화하고 말 테니까.

예준의 기척을 발견한 태경이 눈을 맞추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준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이내 꾹 다물린 입술을 뗐다.

“네 병실로 가 있어.”

이번엔 예준이 도리질 쳤다. 예준은 이 회장을 경계하며 태경 가까이 다가가 섰다. 도저히 그를 혼자 둘 수 없었다. 태경은 지금 다친 데다, 상대는 아들을 해한 아버지였다.

“쯧!”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회장이 혀끝을 찼다. 이 회장이 한 번 더 손을 들어 보이자 열려 있던 병실 문이 닫혔다. 빗줄기가 창을 때리는 소리가 컸다. 그러나 내부를 맴도는 정적의 무게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이쯤 했으면 알아들었을 줄로 알았다. 그런데 아직도 저 천한 것을 곁에 둬? 네 배우자는 오메가가 아니라 알파여야 마땅해. 그 우아한 부잣집 따님들 마다하고 만난다는 게 고작 저런…!”

이 회장은 자신의 저열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예준은 태경이 이끄는 대로 그의 등 뒤로 가 숨었다. 태경이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이 아이가 지금 얼마나 역겨울지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오메가란 본래 그런 법이다. 알파 앞에서라면 언제든 다리 벌리길 마다하지 않아. 내 앞이라고 다를 줄 알았어?”

크리스마스이브의 일은 분명 강제였다. 예준은 제 팔다리를 결박하던 따까리들의 거친 힘을 똑똑히 기억했다. 숨이 막혀 태경의 등에 이마를 맞대었다.

“이 아이 모욕하지 마세요.”

태경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탕, 이 회장이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왔다. 풍채는 대단했으나 지팡이에 의지한 터라 걸음걸이는 둔해 보였다. 겨우 세 걸음 거리에 선 그가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 아비를 만나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냐? 저런 천것을 두둔한답시고 평생을 키워 준 아비를 나무라?”

“아버지!”

부자 사이의 공기가 팽팽히 당겨졌다. 태경의 목에 돋아난 핏발이 무서울 정도였다. 살의에 가득 찬 눈빛은 이제껏 남자가 예준 앞에서 절대 드러내지 않던 것 중 하나였다.

이 회장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지켜보던 태경이 예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무력하게 끌려간 예준은 욕실 안으로 저를 밀어 넣는 남자에게 반항했다.

“이거 놔.”

“그건 안 되겠어.”

태경이 예준을 억지로 욕조에 기대 앉힌 뒤 샤워기를 틀어 수압을 최대로 높였다.

“귀 막고, 여기 꼼짝 말고 있는 거야.”

“싫어. 저 사람이 형 다치게 하면…!”

“그럴 일 없어.”

터질 듯 붉어진 목을 감싸 쥔 그가 단호하게 답했다. 뿜어내는 페로몬이 심상치 않았다. 조절하려는 시도만으로도 고통스럽다는 것을, 그 페로몬을 온몸으로 흡수하는 예준 또한 감지할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은 예준이 느슨하게 벌어졌던 두 다리를 조였다. …아래가 젖고 있었다.

“…….”

태경의 시선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의 폐부가 크게 부풀었다 제자리를 찾았다. 터질 듯 뛰는 심장 박동을 어떤 접촉 없이도 예측할 수 있었다. 그 또한 끔찍한 성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네 냄새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으니까… 제발, 날 위해서 여기 있어 줘.”

그럴 순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잇새를 짓씹는 남자의 얼굴을 보자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보스 앞에서 어떤 약점을 보이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가 천하다 이르는 짓까지 서슴없이 저지르게 될지 모른다.

부드럽게 예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태경은 곧 등을 보였다. 욕실 문을 단단히 닫고 나간 자리에 페로몬의 흔적이 짙게 남았다.

“하아….”

예준은 그제야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들이치는 성감을 참아 내느라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남자의 말대로 양쪽 귀를 틀어막았기에, 그다음에 벌어질 일은 알 수 없었다.

욕실을 나선 태경은 이 회장의 바로 눈앞에 섰다. 두 손으로 허리를 짚은 그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이 회장의 눈을 정면에서 직시했다. 일부분이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 못 본 새 짙어진 주름이 노쇠한 그의 나이를 실감케 했다. 권력을 두 손에 다 쥐고도 간절한 것은 인간의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리라.

“넌 분명 자격이 있어. 매사에 옳은 길로만 갈 순 없는 법이다. 더 큰 일을 해내려면 희생이 뒤따르게 마련이야. 내 아들이 범이라는데, 어찌 하룻강아지보다 못한 태세로 꽁무니만 빼는 게야?”

태경은 더운 숨을 가까스로 내뱉었다. 몸이 확연한 이상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고 온 신경이 욕실에 틀어박힌 오메가를 향했다. 그가 거칠게 상의를 구겼다 놓았다. 이 회장은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이 사업에 평생을 갈아 넣었다. 내 몸 바쳐 일군 업적이야.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 내 널 기꺼이 우두머리 자리에 앉히고 싶다는데 이제 와 겁을 먹을 줄은….”

“겁을 먹은 게 아닙니다.”

“그럼!”

“당신의 업적을 혐오하고, 아무렇지 않게 내보이는 그 오만함이 역겨워서 이러는….”

짜악-!

커다란 손이 태경의 뺨을 후려쳤다. 스스럼없는 비난에 이 회장은 눈이 돌듯 역정을 냈다. 사내는 게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유난스럽게 몸을 떨었으나 뺨을 맞은 태경은 오히려 차분했다. 단지 치열한 눈빛으로 맞서자 이 회장이 푸릇하게 변한 입술을 뗐다.

“…주인의 목을 물어서야.”

“그러니까 더 치밀하게 행동하셨어야죠, 아버지.”

태경이 빗방울에 젖은 이 회장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이제 와 당신 뒤를 이으라 말할 거였으면, 명성건설 이석준 회장이 아니라 조직의 보스를 동경하게 만드셨어야죠. …수가 틀려먹었어. 약자들 등쳐 먹고 군림한 강자 따위 존중할 생각 없어요. 당신에게 물려받은 일면을 도려낼 수 있다면 도려내고 싶을 지경이야. 닮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어.”

…위선자.

“정 사장이랑 해 먹어 보니 더더욱 그렇더군요. 추잡하고 냄새나서 발 들이기 싫습니다. 그러니까 실패작을 키웠다고 우울해하지 마십시오.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니 원망도 하지 마시고요.”

태경에게 과거는 중요치 않았다. 지하 세계를 호령했다 할지라도 과거의 오명을 벗고자 노력했던 아버지는 오랜 시간 존경할 만한 선도자였다. 자신에게 보였던 다정함, 피 한 방울 나누지 않고도 기꺼이 내어 주었던 모든 것들이 당신의 탐욕을 위한 투자였다니.

태경이 이 회장을 등진 채 걸었다. 창가로 다가가 난간을 짚고 선 그가 창에 비친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 용하다는 무당 말을 철석같이 믿고 거두신 겁니까? 그 무당이 다른 소린 안 하던가요. 집안 일으키는 범이라. 범이 우두머리 자리 차지하려고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안답니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는 없었어요? 끝까지, 제대로 들으신 거 맞습니까?”

씩씩거리던 이 회장이 절뚝이며 다가와 태경을 돌려세웠다. 눈을 부라리며 멱살을 움켜쥐는 손은 여전히 강한 악력을 지니고 있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

내부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대단한 고함이었다. 태경의 두 눈에는 회한만이 스쳤다.

“믿으실진 모르겠지만, 저는 아버지가 내밀었던 그 손 잊지 못해요.”

갈증과 굶주림 속에서 버려진 채 수일을 보냈다. 세상의 이치를 몰랐던 다섯 살의 태경은 하나뿐인 혈육을 잃고 두려움에 젖어 있었다.

“본능적으로 당신 손이 내 유일한 동아줄이라는 거 모르지는 않았어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알았고 선의라고 믿었죠. 귀한 동정심이라고. 그러니까 적어도 당신 실체 알기 전까지는 절실한 심정으로 보답하려고 한 거 아니겠어요?”

이 회장이 태경의 멱살을 뒤흔들며 소리쳤다.

“그런데 왜!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는 못하겠다는 게야!”

목이 졸렸으나 태경은 분노한 아버지의 손을 저지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집착할까 생각해 봤어요. 그깟 조직이야 아무나 이끌면 그만인 걸, 왜 그 자리가 꼭 내 것이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큼직한 이 회장의 주먹이 사정없이 떨릴 때마다 태경의 얼굴엔 핏발이 섰다. 그러나 태경의 눈빛에서 살의가 가시기 시작하자, 이 회장의 동공도 느슨해졌다. 이내 악력이 풀렸다. 이번엔 태경이 제 아버지를 벽으로 몰았다.

“세습으로 물려주어야 죽어서도 그 업적이 당신 것이 되니까. 피를 나눴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당신 아들이 뒤를 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

“번식 능력 없는 우성 알파가 그 의도가 아니라면 굳이 양자를 들일 필요는 없죠. 제3의 인물이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면 그간의 당신 업적은 그걸로 끝이야. 충신들도 없진 않겠지만, 지하 세계 조직원들이야 자기 사리사욕에 눈먼 자들이니 애초에 기대하지 않으실 테고요.”

“이…, 이…!”

“내 결론은 그건데. 맞습니까, 회장님? 그게 아니라면 나한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실 텐데요.”

태경이 깨끗이 손질된 이 회장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역으로, 목덜미가 눌리도록 몰아붙이자 이 회장의 숨은 금세 가빠졌다.

“그 오메가는…!”

“오메가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으!”

“아버지는 탐욕이 지나쳐요. 늙어서 부리는 욕심은 야망이 아닙니다, 추태일 뿐이지. 지금 이 꼴을 당신 조직원들이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이빨 빠진 호랑이한테 충성할 머저리는 세상에 없어.”

이 회장의 얼굴이 한계까지 달아오르자 태경이 뒤늦게 악력을 풀었다.

“절박한 건 아버지지, 내가 아니에요.”

힘이 빠진 이 회장은 곧 지팡이를 놓쳤다. 휘청이던 그가 가까스로 벽면을 짚고 섰다. 내내 차분하던 태경의 숨이 거칠게 변했다.

“오메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욕실로 다가간 태경은 굳게 닫혀 있던 문을 거세게 열어젖혔다. 예준은 자기 말대로 귀를 막은 채 무릎 위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히트 사이클에 도달한 오메가는 기대를 뛰어넘는 야릇한 페로몬을 뿜어냈다. 태경의 이지가 위태하게 흔들렸다. 그가 가까스로 버티며 예준을 일으켜 세웠다.

태경은 예준의 무게를 제 쪽으로 지탱한 채 이 회장과 마주 섰다. 영문을 모르고 따라나선 예준은 가까스로 태경의 팔꿈치에 매달렸다. 태경이 자비 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사죄하세요, 아버지.”

예준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알파의 페로몬으로 혼몽한 가운데 땀에 흠뻑 젖은 보스의 얼굴만큼은 선명히 보였다.

“어림없는 소리!”

이 회장이 버럭 소리쳤다. 태경이 나뒹구는 지팡이를 치운 뒤 이 회장의 무릎을 툭 건드렸다. 약점을 기습당해 무너진 이 회장은 타의에 의해, 그러나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사죄하세요.”

온몸에 피가 돌고 눈가에 열이 몰렸다. 예준은 죽을힘을 다해 눈물을 참았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귀에선 이명이 들렸다. 태경은 약속을 지켰고, 예준은 기대하지 않았던 역전의 순간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사죄해.”

태경이 몸을 낮추어 이 회장과 눈을 맞추었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종용했다.

“저 문 열어서 당신 부하들한테 전시하기 전에 사죄하라고.”

단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상관없었다. 놀랍게도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군림한 적 없던 예준은 이 순간 그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해방감과도 비슷한 그 짜릿한 쾌감은 오메가가 된 이후 처음 느껴 보는 자극이었다. 어쩌면, 다 가진 자들이 구태여 약자들을 밟고 올라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그러나 쾌감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제 아래에서 악을 쓰고 버티는 보스를 보자 예준은 곧 서글퍼졌다. 몇 번이나 가슴이 무너졌다. 마치 끝도 없는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예준이 기어코 태경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만, 됐어.”

저 같은 애송이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부탁했으나 태경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가 매몰차게 예준의 손을 떨쳐 냈다. 섬세하고 긴 손가락이 이윽고 보스의 목에 도달했다. 꽉 틀어쥐는 힘, 터질 듯 조여드는 보스의 목덜미를 보자 예준은 덜컥 무서워졌다.

“…….”

어떤 종용도 만류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끅, 끅, 돼지 울음 같은 보스의 소리가 내부를 시끄럽게 맴돌았다.

태경은 한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피가 몰린 손등과 압력에 도리어 하얗게 변한 손끝이 첫 순간의 긴장을 놓지 않고 버텼다. 그 힘에 보스는 결국 발버둥 쳤으나 매서운 눈빛만큼은 그대로였다. 아버지를 응시하는 남자는 쾌감에 젖어 있지도, 분노에 눈이 멀어 있지도 않았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대치하는 두 부자의 모습에 숨이 막혔다. 양 극단으로 한계 없이 당겨진 인연의 끈이, 이내 실밥을 내보이며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끝내 갈라선다면 돌이킬 방법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 또한 비극이었다. 도리어 숨죽인 예준은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

온몸이 땀에 젖어 옷이 잘 벗겨지지 않았다. 이미 탈력감에 물든 손으로 태경의 상의를 벗겨 낸 예준은 터질 듯 부푼 남자의 가슴 위에 입술을 묻었다. 숨을 쉴 때마다 크게 오르내리는 폐부에서 음란한 향기가 퍼졌다. 그대로 살을 짓씹어 삼키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예준은 어깨에 느슨하게 걸려 있던 제 상의마저 벗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상처를 피해 입을 맞추자 남자의 긴 한숨이 공기 중에 퍼졌다.

이윽고 남자의 하의를 끌어 내렸다. 경직된 복근이 보였다. 음모의 그림자가 짙었다. 움푹 팬 곳에 예준이 코를 파묻자 신음을 내뱉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하아….”

향기만으로 꿀에 절인 듯 온몸이 녹진거렸다. 전신을 아우르는 열감을 느끼며 예준은 이미 뻣뻣한 남자의 성기를 그러쥐었다. 뺨과 입술에 탱탱하게 부푼 귀두를 비볐다. 질척하게 젖어 잇새로 손쉽게 미끄러져 들어온 그것을 쩝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빨아올렸다.

“윽…!”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긴 손에 힘이 실렸다. 뒤통수를 휘어 잡힌 예준은 남자의 강요 없이도 정성껏 성기를 빨았다. 도드라진 혈관과 거친 표피에 뜨겁게 달아오른 혀를 대었고 반도 머금지 못한 기둥을 볼이 쏙 패도록 힘주어 흡입했다. 그럴 때마다 격렬히 흔들리는 태경의 골반을 눌러 고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읍…. 움직이지 마….”

고개를 들어 서늘한 눈을 마주하자 구멍이 움찔 조여들었다. 뱉어 낸 애액이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흘러 거추장스러웠다. 예준은 무릎으로 지탱한 다리를 덜덜 떨었다. 너무 흥분해 쉴 새 없이 조여 대는 아래쪽 감각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호흡하기 위해 성기를 뱉어 내자 태경이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예준의 엉덩이는 곧 남자의 입술 앞에 놓였다. 남자 위에 거꾸로 엎드린 채 비부를 들이댄 것이 예준은 몹시 부끄러웠다.

미끄덩한 애액을 엉덩이에 마구 치댄 남자가 회음부에 코끝을 비볐다. 모두 내어 준 채 예준은 다시 남자의 성기를 물었다. 기둥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이를 세워 귀두를 자극하자 엉덩이를 틀어쥔 태경이 볼기를 환히 벌렸다.

“아흣!”

이내 쑥 침입하는 혀가 느껴졌다. 몸과 몸 사이로 아래쪽을 들여다보자 핏대를 잔뜩 세운 남자의 목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단단한 턱이 게걸스레 벌어졌다. 붙잡힌 살덩이가 몹시 아팠지만 만류는 통하지 않을 터였다.

“흐읏, 그…, 아…, 좋아….”

성감을 어쩌지 못해 눈물을 떨구었다. 울음 섞인 신음에 태경은 더 격렬히 구멍을 빨았다. 예준이 허리를 마구 뒤채고 발버둥친 것은 고통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뭐든 쑤셔 주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자세를 더 낮추었다. 태경이 내벽을 뽑아낼 듯 빨아들인 탓에 예준은 굵은 성기를 문 채 도리질 쳤다.

“으응! 밑 빠질 거 같아…!”

온 신경이 아래로 쏠려 오럴 섹스를 더 이어 갈 수가 없었다. 귀두를 뱉어 낸 예준은 한동안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그러나 태경이 그 떨리는 여린 몸을 단숨에 일으켜 앉혔다. 곧, 남자의 얼굴 위에 푹 앉아 버린 예준은 끔찍한 쾌감에 눈을 감았다. 상대의 체중을 가볍게 감내한 태경은 가는 허리를 붙잡아 흔들길 망설이지 않았다.

“아응!”

예준의 입술에서 교성이 퍼졌다. 꼭 성기를 품은 채 그의 몸 위에 올라탔을 때 같았다. 예준은 남자의 가슴팍에 두 손을 올려놓고 종용하는 손길을 따라 허리를 놀렸다. 꼬리뼈에 남자의 콧대가 닿았다. 구멍엔 입술이, 회음부엔 단단한 턱이 닿아 감히 비벼 대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으응, 응!”

불 꺼진 병실은 어두웠다. 문 앞에 선 경호원은 교접 중인 두 남자가 발정기에 이르렀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신음이 복도를 넘어 어디까지 새어 나갈지 알 수 없었으나, 그 사실은 단지 스릴감에 열기를 더할 뿐이었다. 섹스 이외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예준은 성감에 잠식되어 머릿속을 하얗게 비웠다. 유일한 사고라고 해 봐야 남자의 상처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였다.

“하으…!”

상처 아래, 흉흉하게 일어선 성기는 예준의 신음이 높아질 때마다 꺼떡대었다. 그러나 뒤로 손목을 결박해 당기는 태경 때문에, 예준은 그 먹음직스러운 성기를 도무지 가까이할 수 없었다.

“…바로 박을 거니까 엎드려.”

몸이 먼저 말을 반겼다. 예준은 남자의 다리 위로 기어가 엎드렸다. 엉덩이를 높이 들고 시트에 고개를 처박자 상체를 일으킨 남자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아!”

구멍에 귀두가 닿기 무섭게 곧바로 엄청난 둔통이 느껴졌다. 퍽, 안을 쑤시고 들어온 성기가 단번에 좁은 결장까지 도달했다. 조여드는 압력마저 저지하는 대단한 힘이었다. 푸욱, 푸욱, 연달아 난잡한 소리가 났다. 얼마 되지도 않아 예준의 요도 입구에서 투명한 액이 줄줄 흘렀다.

“하, 씹…! 힘 좀….”

“아으응! 못, 하아, 뺐어…! 힘, 으…!”

힘을 다 빼도 팽창감을 이기지 못할 만한 크기의 성기였다. 주먹을 넣기라도 한 듯 아픈데 성기를 삽입하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짙은 페로몬이 그 어떤 것을 쑤셔 대도 다 받아 낼 만큼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킨 덕이었다.

“…하아, 그런데…, 이렇게 조일 리가 없잖아….”

태경이 말했다. 그가 퍽퍽 쑤셔 낸 길을 따라 내벽이 무섭도록 달라붙었다. 시트를 구겨진 예준은 통증과 쾌감에 젖어 울었다. 오줌 싼 아이의 이불처럼 더러워진 시트를 보고도 부끄러워할 틈이 없었다. 힘이 빠져 그 축축한 오염 위에 배를 붙였다. 꽈악, 악력으로 허벅지 틈을 벌린 태경이 거세게 성기를 처박았다.

“으응! 하악, 아!”

막으려고 했다. 그렇게 움직이다간 상처가 터질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히트 사이클을 맞이한 오메가의 이성이 본능을 앞지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예준은 힘 하나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남자의 허벅지를 밀어냈다. 피부 위만 겨우 덧그리던 손은 이내 더 깊은 삽입을 원하듯 맞닿은 허벅지를 당기는 쪽이 되고 말았다.

“흐으…, 으….”

태경이 몸을 겹쳤다. 그가 짓눌린 채 성기를 받아 내던 예준의 턱을 당겼다. 예준은 입 안에 가득 고인 침을 바쁘게 삼켰다. 교차하듯 맞물린 입술을 쪽 빨았다.

넘치게 물고 빨아 이미 쓰라린 입술에 촉촉한 타액이 스몄다. 남자의 혀가 격렬히 잇새를 벌리며 들어왔다. 입 안의 점막을 모조리 핥아 먹을 듯 빨아대는 통에 예준의 고개가 자꾸만 뒤로 밀렸다.

“으응, 형…, 으읍….”

곧, 배에 꽉 들어찼던 성기가 빠져나갔다. 내벽이 딸려 나가는 듯한 아찔한 통증에 예준은 가까스로 눈을 감았다 떴다. 몸이 크게 들썩이더니, 어느새 바로 누운 채였다.

“하아, 하아….”

부드럽게 뒤통수를 그러쥐는 손이 느껴졌다. 한 점 빛에 반들거리는 눈동자가 또렷했다. 허벅지가 강하게 눌렸고 한계까지 발기한 성기가 비벼졌다. 골반을 크게 움직여 성감을 고조시킨 태경은 예준의 입술에서 달뜬 신음이 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

온몸이 뜨거워 죽을 것만 같은데 몸을 에워싼 공기는 끝도 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너무 좋아 옅은 미소를 흘리자 남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미약하게 휘어진 눈가와 입술이 말초적인 자극이라도 되는 듯 그는 여지없이 동요했다.

퍽!

“하아…!”

눈가가 찡해질 만큼 강한 삽입이었다. 꿰뚫을 듯 들어온 성기는 안을 짓이겨 놓을 태세로 거칠게 움직였다. 분명 상처가 아플 텐데도 태경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차오른 열감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몸을 밀착했다. 예준의 구멍이 쩍쩍 벌어졌다. 둥글리며 더 벌리고 쑤시자 기어코 공기가 스몄다. 들어온 것이 역으로 새기도 했다.

“하으, 윽…!”

탄성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망가질까 봐 두려운 기분은 처음이 아니었다. 예준은 겁을 먹기보다 남자의 허릿짓을 따라 골반을 움직였다. 쩌억, 쩍, 무섭고 민망한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상쇄할 만큼 대단한 쾌감이었다.

“하응! 아아…!”

특실의 고급 침대가 삐걱거렸다. 거세게 침대의 난간을 붙잡은 태경이 상체를 일으켜 예준의 가슴을 눌렀다.

“이제 더… 움직이지 마.”

남자는 예준의 판판한 가슴을 억지로 쥐었다 놓았다. 팽팽히 돋은 유두를 긁다가 뼈가 도드라진 늑골을 어루만졌다. 그가 폭 팬 배꼽 위에 손바닥을 대자 그 안에서부터 명백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아…, 아, 안 돼…!”

쑤욱, 더 깊숙이 들어온 성기가 커졌다. 몸속 깊은 곳에 자리한 입구를 들쑤시는 감각이 생경했다. 예고 없이 시작된 노팅에 예준은 잔뜩 헐떡이며 남자의 상박을 밀어냈다.

꿈쩍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태경은 오히려 예준의 몸을 꽉 껴안으며 아프게 목덜미를 씹었다. 몇 번이고 물리고 빨린 목은 이미 빨갛다 못해 얼룩덜룩한 멍으로 엉망이었다. 단지, 닿는 것만으로도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예준이 호소하듯 말했다.

“형, 그…, 그만… 아파…!”

들어먹을 리 없었다. 속절없이 발버둥 치던 예준이 태경의 팔을 틀어쥔 채 눈물을 쏟았다.

“제발….”

울먹이며 속삭여 봐도 소용없었다. 태경은 밭은 숨을 쏟아 내며 읊조렸다.

“하아, 좋아….”

“…흐으! 아, 안 돼… 제발…!”

“하아….”

내벽에 갈고리가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부푼 성기가 꽉 맞물렸다. 고통스러운 사람은 예준뿐만이 아니었다. 태경의 등이 사납게 들썩였다. 그는 극악한 고통에도 접합부를 틈 없이 비볐다. 오메가의 몸속을 장악한 알파는 자비가 없었다. 여느 알파답게 씨를 뿌려 잉태시키려는 목적에만 눈이 멀었으므로.

“으응…!”

더불어, 들이치는 격렬한 쾌감, 더욱 농도 짙게 변하는 페로몬까지. 코끝은 간지럽고 배는 기묘한 팽만감에 사로잡혔으며, 구멍은 더 조일 틈도 없이 움찔거렸다. 육안으로도 부풀어 오른 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예준은 차라리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저 남자의 목에 매달려 무릎을 조였다. 손톱을 세워 상처를 만들고 아이처럼 엉엉 울어 대는데도 태경은 그저 고요히 파정의 순간을 맞이할 뿐이었다.

“윽…!”

“하윽, 아아!”

뜨거운 것이 가득 퍼졌다. 발정기의 점도 높은 정액을 가득 쏟아 내며 태경은 짐승처럼 신음했다. 여린 몸을 결박해 마지막까지 짜내었다.

긴 사정 후, 성기가 크기를 줄이자마자 하얀 점액이 구멍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성기를 빼지도 않았는데 헐겁게 새어 버리는 바람에 예준은 어쩔 줄 몰라 얼굴을 붉혔다.

“하아, 이상해….”

“쉬…, 괜찮아.”

“…아팠어.”

“…알아. 하아…. 잘 참았어. …예뻐.”

노팅으로 행위가 끝날 리 없었다. 여전히 비대한 성기를 빼내는 것만 해도 녹록지 않았다. 예준이 너무 아파하는 바람에 천천히 성기를 빼낸 태경이 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정액을 바깥으로 흘려 보내기 위해서였다. 툭, 툭, 방울처럼 시트로 떨어지던 것이 어느 순간 왈칵, 몇 번이고 쏟아져 내렸다.

“너무 많이… 계속 나와….”

초조한 듯 손끝을 깨무는 예준과 달리, 태경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비쳤다. 그가 창피해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예준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내가 싼 걸, 네가 싸고 있네.”

부드러운 음성이라 할지라도 폭발적으로 뛰는 심장 박동을 감당할 수 없었다. 예준은 그의 말처럼, 정액을 싸며 배를 어루만졌다. 여유를 주었음에도 도통 그치지 않자 태경이 그 손을 겹쳐 잡으며 무게를 더했다. 꾸욱, 눌러 마지막 한 방울까지 흘리도록 했다. 연거푸 가득 싸지를 것이므로 깨끗이 비워 둘 생각이었다.

결국, 손쓸 수 없이 시트가 젖어 버리자 태경은 침대를 떠나길 망설이지 않았다. 예준을 들어 너른 소파 위에 눕힌 그가 뒤늦게 피가 새어 나온 상처 부위를 내려다보았다. 대강 눌러 지혈하며 예준의 몸 위로 올라탔다. 다리를 벌리며 재차 자리 잡는 그를 보며 예준은 바로 옆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미리 가져다 둔 환자복을 가져와 엉덩이 밑에 깔았다.

“조금 더 지혈해….”

예준은 남자를 느슨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갈무리하지 않은 페로몬은 거의 물리적인 압력과도 다름없었다. 정제되지 않은, 정제할 생각이 없는 태경은 야생처럼 생경했고 그 천연덕스러운 활기가 예준의 성감을 부추겼다.

알파의 정액이 스미면 성감이 가시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예준은 차가워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 해요.”

“…….”

적당히 상처를 무마한 태경이 입꼬리를 휘어 웃었다. 시뻘겋게 드러난 구멍을 직시한 남자는 곧 미소를 감추었다.

*

무슨 일이 있었나.

아버지를 굴복시킨 그는 절망했을까.

잠시 스친 잔상이 섬뜩했다. 그러나 두려움에 떨었던 지난밤을 계속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잊고 싶다면 잊게 해 주고 싶었다. 발정기에 이른 알파는 발정기에 이른 오메가로 망각해야 마땅하니까.

예준은 처연했던 남자의 시선을 상기하며 살결 위로 코끝을 묻었다. 깊게 들이켜자 온몸이 떨릴 만큼 달콤한 페로몬이 스몄다.

“…으응!”

애액은 무용지물이었다. 너무 벌어진 구멍은 그저 입구의 탄력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그토록 파괴적으로 들쑤시는데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후으….”

더는 아프지 않았지만, 빗물처럼 찰박이는 소리가 싫었다. 힘을 빼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몇 시간 전과 달리, 이제 조이지 않고는 성기를 뻑뻑하게 감쌀 수 없었다.

“흐으, 으….”

의식이 흐리고 숨이 가빴다. 예준은 반쯤 감긴 눈으로 여전히 열에 들뜬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내 다정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더 세게 빨아 봐.”

입이 아닌, 구멍으로.

예준은 배에 잔뜩 힘을 줘 입구를 조였다.

“아응…, 응….”

굴곡진 귀두가 쉼 없이 전립선을 자극했다. 몇 번이고 찔려 부푼 그곳에 점액질로 둔갑한 성기가 부드럽게 비벼졌다. 태경은 성기를 쿡 찔렀다가 비비거나, 정신이 아득할 만큼 거칠게 둥글렸다. 몇 번이고 물을 싼 성기를 쥐고 흔들기도 했다. 그러면 노력하지 않아도 구멍을 조일 수 있었다.

“…좋아?”

묻자 겨우 숨을 뱉어 낸 남자가 코끝을 비볐다.

“…좋아.”

대답을 들은 예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구멍으로 손을 뻗었다.

“이제 여기 안 조이지….”

감각이 무뎌져 물었다. 예준의 우려와 달리 입구의 주름은 탄력적으로 오므라들기 바빴다. 태경은 두려운 기색이 완연한 눈동자에 과감히 혀를 대어 핥았다.

“너 고장 났나 봐. 하아, 부드러워서 더 좋은데….”

“으응, 이제 하나도 안, 아파….”

“안쪽이 다 녹아서 그래….”

“읏, 하아…. 형….”

예준이 남자의 손을 이끌어 구멍 속으로 밀어 넣도록 종용했다. 검지와 중지가 들어와 성기와 비벼지자 예준은 끅끅대며 고개를 젖혔다. 숨을 내뱉느라 벌어진 입술을 남자는 먹음직스럽게 머금었다. 아프도록 짓씹어도 혼몽한 예준은 기꺼운 듯 웃을 뿐이었다.

“…벌써 두 번이나 했는데.”

“하아….”

“아기 가질까 봐 무서워요….”

강박적으로 피임약을 먹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걸까. 그럼에도 태경은 예준이 중얼대는 말들을 귀담아들었다. 잔뜩 잠겨 낮은 목소리가 좋았다. 애처럼 매달리며 호소하는 말에 비하여 목소리는 어른스러운 소년 같았다.

“살 오른 거 예뻤어.”

종잇장처럼 얇은 몸에 넘치게 반들반들했던 회음부가 떠올랐다. 둔하지 않은 정도로 차오른 살 덕분에 엉덩이는 평소보다 더 탱글탱글했다. 임신한 몸은 눈부시게 예뻤다. 예준이 수치스러워할지라도 태경은 종종 그때의 그를 탐하는 상상을 했다.

“음…, 하아…. 으, 너무 딱딱해….”

“안 아픈데 왜 이렇게 떨어….”

“좋아…. 읏, 좋아서….”

태경이 성기를 밀어 넣은 채 구멍을 벌리자 쿨쩍쿨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손끝에 만져지는 미끄덩한 내벽이 땀에 젖은 예준의 피부처럼 부드러웠다. 뺨에 뺨을 맞대고 퍽 쳐올리자 성기와 손가락을 동시에 품은 입구의 감각이 이질적이었다.

“씨발….”

더 했다간 피를 볼 것 같았다. 태경은 예준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틈을 타 천천히 손가락을 빼내었다.

“하아….”

탈력감에 젖은 몸은 힘들이지 않고도 쉽게 딸려 왔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예준을 허벅지에 올려 앉힌 태경이 시선을 들었다. 예준의 젖은 속눈썹이 쉴 새 없이 떨리더니 곧 혼탁한 시선이 와 닿았다.

“얼마나 좋으면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까….”

태경의 양어깨를 틀어쥔 예준이 등을 굽혔다.

“배 속이 가득 찼어….”

“다 싼 거 잊었어?”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중간중간 기억이 끊겨 있었다. 멍하게 눈을 맞추는 예준은 위험하리만큼 매혹적이었다. 못살게 굴었다. 가학적으로 몰아붙였다. 성감으로 꽉 채워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만든 사람은 태경이었다. 어디든 낙인처럼 흔적을 남길 작정이었다.

“형 자지가….”

“내 좆이 왜?”

말을 잇지 못한 예준이 태경의 목덜미에 고개를 쿡 처박았다.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는 반쯤 빠져나간 성기의 뿌리 부근을 쥐었다.

“하으, 으….”

뭐라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끝내 내뱉지를 못하고 끙끙대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인 예준이 태경의 성기를 움켜쥔 제 손 위로 내려앉았다.

“아아…. 으, 너무 깊어서 자꾸 거기 닿아….”

“어디에…?”

“아기….”

오메가의 몸속에 자리한 아기집을 말하는 듯했다. 예준이 말을 끝맺지 못한 덕분에 태경의 번식욕이 달아올랐다. 그는 또렷한 의식으론 절대 하지 못할 말로 예준을 위협했다.

“이번엔 내 좆물 뱉을 생각 하지 마.”

“으응, 아아…!”

그가 깊이 넣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있던 예준의 손을 치워 냈다. 허리를 붙잡아 푹 앉히자 성기는 손쉽게 한계까지 틀어박혔다.

“하악…!”

신음을 뱉어 낸 예준이 태경의 목을 감고 매달렸다. 태경이 허벅지 힘으로 엉덩이를 쳐올릴 때마다 성기가 빠르게 빠져나갔다가 박히기를 반복했다.

“흐으! 으응!”

이번엔 소파가 삐걱삐걱 울었다. 이를 악문 채 거세게 움직이던 태경이 예준의 상체를 휘어잡아 꼭 끌어안았다. 탄탄한 남자의 가슴 위로 오메가의 꼿꼿한 유두가 비벼졌다. 온기를 품은 곳 어디든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아! 아아! 앗!”

“하….”

온갖 것들을 다 쏟아 내고도 여전히 단단한 예준의 성기가 볼썽사납게 꺼떡거렸다. 태경이 성기를 쥐고 흔들자 야살스러운 신음이 퍼졌다. 태경은 뜨거운 생동의 증거를 만끽하며 예준의 성기를 강하게 쥐어짰다.

얼마 버티지 못한 예준이 투명한 액체를 뿜어냈다. 길게 뱉으며 전신을 마구 들썩였다.

“흐응, 아아, 아으!”

촤악, 소변처럼 뿜어진 물줄기가 태경의 상체를 흠뻑 적셨다.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런 냄새도 맛도 없는 액체지만 그걸 싸지를 때의 예준을 보는 것만으로 흥분은 고조되었다.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그가, 눈을 크게 뜬 채 덜덜 떠는 예준의 뺨에 입 맞추었다.

“하, 더, 더는….”

“…내 목 안고 엉덩이 뒤로 빼.”

어느 각도가 더 깊숙이 아기집을 건드릴까. 의문이 무색하게도 태경은 이미 본능으로 알았다. 혼이 빠진 예준은 순순히 엉덩이를 뒤로 뺐다. 다시 앞으로 흔들려는 것을 저지한 태경이 목 가운데 솟은 목젖을 머금었다.

“으응….”

혀로 부드러운 살결을 핥았다. 예준이 화답하며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태경은 세 번째 노팅을 앞두고 있었다. 예준이 애무를 만끽하는 틈을 타 익숙한 감각을 찾아 골반을 움직였다.

곧, 걸림쇠에 걸린 듯한 미묘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푸욱, 쑤시며 노팅을 시작하자 이미 열감으로 홧홧한 태경의 목덜미가 터질 듯 달아올랐다.

“하아, 안, 아아…!”

태경이 예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결박한 채 귀를 빨아 대니 접혔다 깨물린 귓불이 자신의 온도만큼이나 뜨거워졌다. 어쩔 줄 몰라 매달리는 예준의 눈가에 여지없이 눈물이 맺혔다.

“안 돼요, 하지 마, 못해…!”

울음 섞인 거부와 달리 몸은 알파의 파정을 반겼다. 어찌나 조여 대는지 태경 또한 정신이 나갈 듯했다. 버겁게 입 맞추며 느리게 성기를 박아 넣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눈물을 떨구기 바쁜 말간 얼굴이 예뻤다. 다칠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명확히 아는 예준이지만.

“아으, 으응!”

고조되는 성감을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예준이 태경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꾸역꾸역 허리를 둥글렸다.

“하악, 아….”

“…그만. …다쳐.”

잔뜩 힘이 들어간 근육 탓에 거즈 위로 스몄던 피가 이내 골반을 타고 흘렀다. 상처가 벌어졌다.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 모습을 목격한 예준은 우려의 끈을 놓지 못했다.

씨발, 욕설을 내뱉은 태경이 예준의 엉덩이를 틀어쥐었다. 거칠게 밀어 눕혀 벌어진 허벅지를 허벅지로 눌렀다. 태경에게서 새어 나온 핏줄기가 예준의 다리 안쪽과 회음부를 타고 흘렀다.

“움직이지 말랬지.”

태경이 예준의 턱을 붙잡으며 사납게 윽박질렀다. 끝까지 틀어박혀 크기를 키운 성기는 예준의 몸 안에 갇혀 꼼짝하지 못했다.

“흐으, 아아…. 좋아….”

무아지경에 빠진 예준이 홀린 듯 읊조렸다. 잔뜩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 반쯤 풀린 눈. 선이 고운 콧날과 달아오른 뺨에 발긋하게 생기가 돌았다. 더는 사정 욕구를 참을 수 없었다. 배 속에서 몇 번이나 꿈틀대던 태경의 성기가 한계까지 부풀었다. 좁은 내벽을 무자비하게 파고든 성기가 다시 한번 아가리를 벌렸다.

탁, 터져 나오는 힘과 뜨겁게 퍼지는 온도에 예준은 압도당했다.

“하읏! 으아!”

“하아…!”

태경은 몇 번이고 몰아붙이며 사정했다. 내벽에서 흘러나와 환자복 위로 쏟아진 정액의 양이 상당했다. 몇 번을 싸지르고도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쾌감엔 익숙해지지 않았다. 태경 또한 경련하는 몸을 추스르지 못했다.

“하아…, 으응….”

“하…, 하아….”

할 때마다 대단한 성감이었다. 도무지 후희가 가시지 않았다.

성기가 크기를 줄이자마자 태경은 빠르게 추삽질을 이어 갔다. 예준의 다리를 양쪽 어깨에 건 그가 거칠게 성기를 삽입했다. 질질 흐르던 정액이 도로 구멍 안쪽으로 들어갔다. 일부는 하얗게 거품을 일으켰다. 피까지 튀어 예준의 분홍빛 회음부가 엉망이 되었다. 예준과 태경 모두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응! 으으으! 아앗!”

예준의 유연한 다리가 귓가까지 다다랐다. 쿠션을 예준의 허리 아래에 아무렇게나 끼워 넣은 태경이 예준을 바짝 뒤집었다. 종아리를 붙잡고 정액을 흘리지 못하도록 제압했다. 그러고는 성기를 푹푹 쑤셔 넣었다. 쫀득쫀득 달라붙는 내벽이, 팽팽히 조이는 입구가 흡입하듯 성기를 빨아 먹었다.

헐겁지 않았다. 타고난 몸이었다. 다른 알파가 탐하리라 생각하면 눈이 돌 것 같았다. 태경은 재차 각인하듯 예준의 목덜미를 짓씹었다. 꾸욱, 꾸욱, 성기를 밀어 넣고 위아래로 흔들자 예준이 자지러지듯 소리를 내질렀다.

“으응, 아아! 하아!”

“하아…!”

“조, 좋아…! 으응, 더…, 흐읏!”

잔뜩 흐트러진 시선을 구태여 붙잡았다. 눈물로 짓무른 눈에 입술을 맞대고 달뜬 호흡을 쏟아냈다. 막다른 생명에 숨을 불어넣듯 다정하게 굴면서, 한편으론 난폭하게 쾌락을 취했다.

“흐읏…!”

노팅 없이 사정한 태경이 아프도록 발기한 성기를 빼내었다. 폭 소리를 내며 빠져나온 성기는 여전히 검붉고 흉흉한 크기 그대로였다.

예준은 엉망으로 벌어진 구멍을 손으로 막은 채 몸을 떨었다. 피는 온전히 태경의 것이었고, 무지하게 굴었음에도 가까스로 다치지 않았다. 잉태하고자 하는 오메가처럼 다리를 든 채 움직이지 않는 예준을 태경은 숨을 헐떡이며 지켜보았다.

그토록 지독한 악몽을 겪었으면서.

모두 망각한 몸이 어딘가 절박해 보였다. 태경이 가는 몸을 당겨 품 안에 넣었다. 달콤한 목소리로 달래었다.

“괜찮아….”

세 번의 노팅이면 잦아들어야 마땅한 발정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탈력감에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예준은 태경의 목에 입술을 묻은 채 할짝댔다.

사고를 마비시키는 유혹이었다. 태경이 다시 안을 꿰뚫고 들어갔다. 동시에, 예준은 까무룩 의식을 잃고 말았다.

*

적요한 새벽이었다. 고르게 오르내리는 예준의 가슴 위로 손끝을 댄 태경이 말했다.

“서로, 동정은 그만하기로 해.”

바로 이해하지 못한 예준이 눈을 떴다. 지끈거리는 허리와 쓰라린 아래쪽 감각을 무시하며 그는 남자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밀어 넣었다. 모로 누운 남자의 품에 안겨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넌 더는 비참한 오메가가 아니고.”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끝이 떨렸다. 예준은 그 손을 붙잡아 제 달뜬 입술에 대었다.

“난 버림받기 전에 먼저 아버지를 내친 양자니까. 가여워할 이유 없어.”

태경이 부어오른 예준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예준이 단단한 손가락을 혀를 내어 핥았다. 사탕처럼 깊게 머금어 빨기도 했다. 숨을 들이켠 태경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렸다.

예준은 목소리 내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예준의 등을 감싸 바로 눕힌 태경이 까칠한 입술을 가슴 한가운데 묻었다. 쪽, 쪽, 겨우 솜털이 누울 정도로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너한테 깊이 빠졌어. 잠기고 잠기다 아무도 닿지 못한 이곳까지 닿은 거야.”

늑골을 지나 배를 거친 입술이 허벅지 안쪽으로 향했다. 태경이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앞으로 나를 제외한 누구도 여기까진 못 닿아.”

그토록 연한 부위까지 허락할 사람은 없었다. 예준은 이미 그에게 종속된 형편이었다. 그가 가진 고유의 향기를 마다할 이유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예준은 남자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밭은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뒤채자, 남자가 새벽을 등지며 올라왔다.

뜨겁게 몸을 겹쳤다. 식어 가는 열기와 달리 가슴에 품은 것만큼은 델 듯이 높은 온도로 달아올랐다. 끓어오르며 눈시울이 붉어졌으나 이제는 비빌 온기가 있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충만한 기분에, 예준은 황폐한 과거를 과거가 될 현재로 덮었다.

누군가 빗속에 홀로 선 자신에게로 우산을 드리웠다. 비가 그쳤으니 두 발만 떼어 내면 되었다.

이제 겨우 첫걸음.

맞잡은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상의를 벗은 태경은 정 사장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명성건설에서 대대적인 보도 자료를 냈더라고요. 사회 복지 시설에 50억 기부하고, 앞으로 관련 자선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겠다고. 이미 좋은 평판을 유지하겠다는 목적도 있겠지만….’

정 사장은 허탈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한편으론 들쑤셔 봤자 건재하다, 이 말 하고 싶은 거 아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회장의 자리에 있는 이석준과 명성건설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쌓아온 조직의 시스템은 견고했고 명성건설과의 관계를 은폐하기 위한 작업에서도 빈틈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고 묻는 태경에게 정 사장이 답했다.

‘언제나 사람이 문제지요. 우리가 이미 아는 인물들 외에도 명성건설이 뒷돈 대 준 국회의원들, 시의원들부터 난다 긴다 하는 재력가들까지 머릿수가 꽤 되던데요. 하나하나 작업 쳐 보죠, 뭐.’

퇴직 후, 한량처럼 살 생각에 젖어 있던 조 비서에게도 꽤 혹독한 시련이 닥친 셈이었다. 정 사장 또한 사람 고문해 입 열게 하는 데에는 도가 튼 조폭 두목이니 두말하면 입 아픈 일이다. 지하 세계와는 거리가 먼 태경에게 정 사장은 요긴한 칼자루였다. 그는 조직과 조직 대 복수를 앞두고 있었다. 기회 삼아 편승해서 나쁠 이유가 없었다.

‘조만간 얼굴 한번 보시죠.’

알겠습니다, 하고 짧게 대답한 태경은 곧장 통화를 끝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 그는 제 앞에 무릎 꿇었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이룬 것 없이는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한 아버지가, 업적만 등에 지면 어마어마한 권력가로 변한다는 것이 새삼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그의 유산을 이어받아 그의 업적을 빛내고, 그를 불멸의 존재로 남게 만들 일은 없을 것이다.

이대로 절연이라면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어쩌면, 원하는 바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이 회장이 여전히 건재하든 곧 쇠락하든 상관없었다. 태경으로서는 제 발목에 채워진 족쇄만 풀어내면 그만이었으므로.

태경이 사람을 시켜 주문한 새 셔츠를 개봉했다. 매끈한 근육질의 몸 위에 부드러운 실크 셔츠가 닿았다. 슈트 재킷은 특실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거울 앞에 선 그가 턱을 들어 올린 채 셔츠 상단에 손을 놓았다. 이어, 단추를 채우던 태경이 눈길을 돌렸다. 뒤통수에 박힌 노골적인 시선을 눈치챈 탓이었다. 그저 흘끗거리는 데 그쳤던 눈동자는 어느새 붙박은 듯 제게 고정되어 있었다.

입매를 휘어 웃은 그가 물었다.

“왜 그렇게 빤히 봐?”

멀찌감치 서 있던 예준은 얼굴을 붉히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슈트 차림이야 질리게 보았으면서 오늘은 뭐가 색다른가 싶었다. 영도에서부터 퇴원을 앞둔 지금까지 내내 캐주얼한 복장이었기에 낯선 기분이 드는 건가 했다.

회복하는 동안 살이 빠지긴 했지만, 지나칠 정도는 아니었다. 제 사이즈의 셔츠는 부담스럽지 않게 팽팽히 당겨진 채였고 드러난 견갑골도 볼 만했다. 무엇보다, 예준이 소매 아래 드러난 제 팔뚝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심미안이 뛰어난 태경 자신이 보기에도 그럴싸한 자태였다. 외모에 관한 한 절박한 기분을 느낀 적 없는 태경의 어깨가 바로 펴졌다. 야릇하게 오르내리는 시선이 좋은 이유는 상대가 본능에 솔직한 예준이기 때문이었다.

“네 거야.”

태경이 거울 속 자신을 턱짓하며 웃었다. 거울에 조그맣게 비친 예준의 입술이 실실 벌어졌다. 닥친 무게를 뒤로하고 웃는 법을 배운 아이는 부쩍 미소가 잦아졌다.

발정기가 오는 바람에 입원 기간이 두 배로 늘어났다. 격렬하게 보냈기에 의사는 다시 수술실을 잡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투정했다. 태경의 옆구리엔 이제 아주 얇은 밴드만이 부착되어 있었다. 옅게 남은 통증을 인지한 그가 몸을 돌려세웠다.

“뭐야.”

언제 이렇게 코앞까지 다가왔을까. 기척 없이 다가온 예준이 허리를 끌어안으며 폭 안겼다. 옷태가 망가질까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이면서도 결국 턱을 대고 마주하는 두 눈이 사랑스러웠다.

그런 얼굴을 보고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도톰한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춘 태경이 물었다.

“이만 갈까?”

예준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오랜만에 찾은 사무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분주했다. 예준의 손을 맞잡은 태경은 저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직원들을 차분히 둘러보았다. 놀란 것도 잠시,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비껴간 시선이 예준에게 가닿았다. 이목이 쏠렸으나 예준은 붙잡힌 손을 구태여 빼지 않았다.

“대표님…!”

“이제 대표님은 내가 아니고….”

태경이 팔짱을 낀 채 다가오는 선영을 가리켰다.

“저분이시죠.”

“뭐가 그렇게 태연한지. 너 침몰하는 난파선에서 운 좋게 탈출한 걸지도 몰라. 그러니까 홀가분하다는 듯이 그렇게 웃지 마. 거슬려.”

괜한 핀잔이었다. 그런 그녀가 예준에게만큼은 다정한 시선을 주었다.

“이제 안 아파요? 다 나았어?”

“네. 전 많이 다친 것도 아니었어요.”

“그래도 이 사람은 가슴 찢어지고도 남았을걸.”

머쓱해 어쩔 줄 모르던 예준이 태경을 올려다보았다. 가슴을 쓸어내린 그는 예준을 당겨 더 가까이 어깨를 맞붙였다.

“찢어지기만 했을까.”

입원한 내내 지나치게 걱정하긴 했다. 그러면서 러트 때에는 그렇게 사람을 못살게 굴고. 예준이 생각하기로, 그는 때때로 앞뒤가 맞지 않게 행동하곤 했다. 자신이 봐주는 면도 많다고 생각했다.

“못살아. 그렇게 끼고 돌면 예준 씨가 질릴지도 모르니까 적당히 해.”

연거푸 타박한 선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이내 조용해진 내부를 향하여 말했다.

“그래도 마지막 회식은 근사하게 할 테니까 너무 아쉬워들 하지 말아요.”

“이 대표님, 앞으로도 종종 뵐 수 있는 거죠?”

가까이 앉아 있던 혜윤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예준은 태경과 함께 회의실에 앉아 있던 그녀를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제집처럼 드나들 테니까 이럴 거면 다시 대표 자리 앉으라는 말만 하지 마.”

태경이 다정하게 답했다. 모두가 한바탕 웃고 나자, 선영이 태경의 사무실을 가리켰다. 이제는 선영의 사무실이 될 곳이었다.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내부로 들어섰다. 선영이 책상 위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직 짐 안 뺐어. 두고 갈 거, 가져갈 거 알아서 정리하라고.”

“선물은 받았어?”

“받았지. 아직 뜯진 않았지만.”

선물은 포장만 보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태경의 뒤를 이을 선영의 명패. 그 사실을 아는 선영은 부러 먼저 선물을 뜯지 않았다.

“온전히 내 거 되면 뜯을 거야. 그러니까 뒷정리는 깔끔하게 해 줘.”

냉랭하게 들리지는 않는 말이었다. 곧, 선영이 사무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사무실을 둘러본 예준은 태경의 주문 없이도 바로 익숙한 테이블에 앉았다.

그를 두 번째로 만났던 날, 건네받았던 핫초코가 떠올랐다. 직원들과 건실하게 회의하던 모습도, 가십거리에 창피해하던 자신을 배려해 주었던 일도 모두 선명했다. 세상에 그렇게 다정한 알파가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태경이 왜 이 사무실을 떠나는지 모르지 않았다. 예준은 부채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그의 인생을 망쳤을지도 모른다.

그런 예준을 지켜보던 태경이 장식장의 잡지를 집어 들었다.

“이거 가져갈래? 딸감으로 제격일 텐데.”

이미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예준은 태경을 미처 만류하지 못했다. 잡지를 받아 들고 머쓱하게 귓불을 매만지자 남자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사진은 그것뿐이야. 또 마땅히 줄 건 없는 것 같은데.”

내부를 천천히 둘러본 태경이 이내 통유리창에 시선을 두었다. 미세 먼지가 잔뜩 낀 서울의 전경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예준은 그가 책상에서 일어나 종종 그런 모습으로 바깥을 바라봤으리라 추측했다.

이곳에서 보낸 짧은 시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너른 등에 아쉬움이 한 자락 묻어 있었다. 예준은 잡지를 놓아두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등에 뺨을 대고 허리를 끌어안자, 근처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 든 그가 사무실 블라인드를 내렸다.

“내가 형 인생 망쳤어….”

생각을 고스란히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그러나 태경은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일등 신랑감, 부잣집 도련님, 회사 대표 소리 지겹게 들었어. 뭐가 아쉬울까.”

그가 예준의 떨리는 손을 겹쳐 잡았다.

“그거 버리고, 국민 요정 애인 타이틀 얻었으니 충분히 만족해.”

남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낮게 번지는 웃음소리를 듣자 예준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뻔뻔하게 들렸으나 남자의 말이 거짓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고른 숨에서 한편으론 홀가분한 기운이 전해졌다. 태경은 남김없이 털어 낸 듯 덧붙였다.

“살다 보면 종종 전환점이 와. 여기가 기점이라는 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지. 주제넘게 말해 보자면, 너한텐 금메달을 땄던 때가, 오메가로 발현했던 때가, 그리고 나를 만났던 때가 아마도 그 기점이었을 거야.”

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직선의 길이 다시 아득한 어딘가로 휘어졌다. 예준이 몸담은 세상은 변했고, 그 변화가 긍정적일 때도 부정적일 때도 있었다. 예준은 태경의 말에 동의했다. 제 인생에도 분명 평탄하지만은 않은 굴곡들이 있었다.

“다른 길로 들어섰어도 방향을 잃은 건 아니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안 했으면 좋겠어. 이 순간이 우리가 동시에 맞이하는 전환점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짜릿하지. 안 그래?”

그는 아버지를 등졌고 몰두했던 회사의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잃은 것처럼 보였으나, 따지자면 무엇도 잃지 않았다.

“지금 너랑 함께 있어서 좋아, 예준아.”

“…….”

“진심으로 행복해.”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예준은 찡한 눈가를 감추며 태경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좋은 향기와 함께 부드럽게 갈무리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그가 자신의 격양된 기분을, 달뜬 체온을 감지하지 못하기만을 바랐다.

“나도 좋아.”

세상에 어느 누가 제게 이런 사랑을 줄까? 예준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이곳이 태풍의 눈이라 한들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 벗어나면 곧바로 거센 바람과 빗줄기 가운데로 떠밀릴 텐데.

늘 하던 대로, 홀로 다녀가면 될 곳에 굳이 저를 데리고 온 건 분명한 함의가 있어서일 터였다. 그와 자신의 세계는 이미 단단히 매듭지어지고 말았다. 각인한 관계여서가 아니었다. 이제는 어떤 교묘한 기술로도 그 매듭을 풀어내지 못하리란 확신이 있었다.

단단한 결속.

예준이 가족에게서도 얻지 못한 안도를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오피스 플레이를 못 한 건 좀 아쉬운데.”

한심한 소리가 이어졌다. 예준의 입가가 휘어졌다. 도무지 깊이 가라앉을 틈을 주지 않는다. 지금 할까? 묻는 그를 밀어내며 예준은 뒷걸음질 쳤다. 새빨개진 얼굴을 들켰지만, 저와 다를 바 없는 태경의 낯을 보자 그마저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런 말 하면서 부끄러워하지나 말든가.”

예준의 핀잔에 태경이 턱을 문질렀다. 좋아하면 다 그래, 퉁명스레 말하는 얼굴은 끝내 붉었다.

*

방은 떠날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비운 동안 내내 사람의 손길이 닿았는지 먼지 한 톨 쌓여 있지 않았다. 오랜만에 방으로 들어선 예준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메달과 도복에 손을 가져갔다. 선연한 질감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다. 되찾을 수 없는 과거의 영광이라 여겼기에 모두 두고 떠난 것이었다.

“차지혁 선수한텐 양해 구해 뒀어.”

상념에 잠긴 예준을 보던 태경이 말했다. 그는 예준 곁으로 다가가 보슬보슬한 뒷머리를 어루만졌다.

“건강 때문에 도장 못 나간다고. 회복하면 연락하겠다고 둘러댔는데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였고.”

예준이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지혁과 관련된 일은 스스로 마무리하고 떠났어야 했다. 지혁과의 만남은 분명 행운이었고 세상 밖으로 다시 나서려던 노력의 보답이었다. 어깨에 진 짐이 무거워 그 일마저 내팽개쳤단 사실이 부끄러웠다.

“고마워요. 떠날 땐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아무것도 정리 못 했어. 미안해….”

“그렇게 따지면 내가 너한테 미안해야 할 일이 더 많아. 누구든 여유가 없을 땐 상대방이 돌봐 주면 되는 거야.”

어른스럽고 논리적인 대처였다. 예준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일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스스로 돌볼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단지 고마워 허리를 끌어안자 남자가 말했다.

“아직 기회가 날아간 건 아니야. 생각 있으면….”

“무슨…?”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와 동거를 시작했던 때처럼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했다. 태경도 그 점을 떠올리고 이야기를 꺼낸 게 분명했다.

“애초에 차지혁이 널 찾은 게 고용할 사람이 필요해서는 아니었을 거야. 모종의 계기로 네 생각이 났을 거고, 함께 보낸 시간이 좋았으니까 연락한 걸 테고.”

태경의 미간이 좁아졌다. 다행히도 예준은 서늘하게 가라앉은 남자의 두 눈에 면역이 되어 있었다.

“호의든 우정이든, 좋은 감정일 거라 생각해. 그러니까 다시 연락해도 받아 줄 거야. 그 도장에 네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아닐 테니까.”

“그럼 형은, 지혁이가 나랑 시간 보내고 싶어서 연락했다고 생각해?”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보니까 더 좋았겠지.”

“응?”

“여전히 예쁘고, 귀엽고….”

예준은 말을 이으려던 태경의 입을 틀어막았다. 선수들과 만나는 자리에 제 첫사랑인 지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데리러 오기까지 했던 태경 아니었던가. 자신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그가 지혁에게 품은 감정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도장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걸 보면, 응원해 주고 싶은 모양이다. 예준은 그 마음이 기꺼웠다.

“원하면 내가 먼저 이야기해 줄 수도 있어. 너 거기 갔던 날 정말 좋아 보였으니까.”

도복 차림을 보고 덥석 결혼부터 하자고 말했던 그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대로 차로 끌려들어 가 어디든 물고 빨리기까지 했었다. 예준의 뺨이 발긋하게 상기되었다. 예준이 태경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도복 입은 거?”

“그래. 미치게 귀엽더라.”

결혼하고 싶을 만큼.

“그때 확신했어. 적어도 그걸 계속 입을 거면 유부남이라는 표식 정도는 새기는 게 좋겠다고. 없으면 여기저기서 다 찔러 볼 거 아냐. 저 앳된 사범 애인 있는지 없는지.”

“이젠 다 알잖아. 내가 누군지, 내 애인이 누군지.”

태경이 예준의 머리카락을 마구 흩뜨려 놓았다.

“그땐 사람들 대부분이 네가 누군지는 알아도 네 애인이 누구인지는 몰랐어. 그러니까 하루빨리 실행에 옮기고 싶었어.”

관계가 꼬이고 어그러진 탓에 결혼에 관해선 내내 함구하고 있었다. 상견례 자리나 다름없는 곳에서 그와 보스가 부자 사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결혼 같은 건 다시 손에 잡히지 않을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네가 그렇게 순수하고 열정적일 때, 차지혁이 네 사랑을 받고. 그런 너와 함께였을 거라 생각하면 거의 상처가 될 정돈데.”

지혁에겐 우정이었을 감정을 태경은 과대평가했다. 예준은 머쓱한 얼굴로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그렇게까진 아니야. 그래 봤자 풋사랑이었고.”

“그 풋사랑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거 아니잖아.”

“정말 별거 아니었는데.”

“그때로 돌아갈 방법은 없으니 받아들일 뿐이지.”

다정한 말투였으나 가슴 한구석이 저릿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상대를 얼마나 좋아해야 과거까지 질투하게 되는 걸까? 의문을 품었던 예준은 그러나 몇 초도 흐르지 않아 그 감정을 이해했다.

“그때처럼 조급하게 굴지 않을 테니까 다시 운동하고 싶으면 해. 대신, 무릎 재활 열심히 받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달고 다니는 경호원들도 귀찮게 생각하면 안 돼. 어디까지나 안전을 위해서니까.”

“응.”

그마저도 지혁이 허락해야 하는 일이지만 태경은 퍽 긍정적이었다. 예준은 긴장과 안도를 동시에 느끼며 동의했다.

애꿎은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남자를 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도복을 꼭 도장에서만 입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아?”

이마를 맞대고 바라보는 눈빛이 야릇했다. 그건 그렇지만 도복을 남자의 성욕을 부추길 코스튬으로 전락시키고 싶지 않았다. 예준은 대신 코끝을 비비며 고개를 기울였다. 자연히 맞물린 입술이 벌어졌다.

“다시 입기 전까진 더럽히고 싶지 않아.”

속삭이자 태경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입맞춤으로 관심을 돌리는 데 성공했기에 더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긴 키스 후엔 뺨을 맞대었다. 슬슬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예준은 남자의 허리를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이 무색했다. 씻어야 하고 이제 곧 식사도 해야 하는데 방 안에 우두커니 서서 서로만 끌어안고 있다니. 그런데 그 품이 좋고 그 고요함이 좋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예준은 그 무렵 생각했다. 뒤늦게나마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추락하고 한동안은 끝도 없는 터널 속에서 헤매는 기분이었다. 유일한 안식처였던 단칸방은 때때로 형님들 손에 들쑤셔졌을 뿐 아니라, 돌아와 봤자 늘 혼자였다. 추위도 더위도 제대로 견딜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자신을 지켜 주는 것이라고 해 봐야 이불 한 장이 다였다.

그런 자신이 원점을 생각할 때 태경을 떠올린다. 이제 집은 그 단칸방이 아니라 남자의 아름다운 주택이 되었다. 이곳에 들어서며 너무 정을 붙여선 안 된다거나, 언제든 떠날 마음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다짐은 하지 않았다.

안식처에서 예준은 안도하고 있었다. 예준은 남자의 품 안에서 공기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 토닥토닥 체온을 나눠 주는 손길이 오로지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면, 무엇이든 조금은 내려놓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

고층 오피스에서 만난 정 사장은 활기찬 모습이었다. 치문과 함께 안으로 들어선 태경은 서울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통창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과거, 이석준 회장이 그러했던 것처럼 정 사장 또한 양지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태경과 치문은 조용히 눈을 맞춘 뒤 돌아섰다.

“그럴싸하죠?”

정 사장이 너른 내부를 가리키며 물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 태경이 먼저 테이블에 앉았다. 그와 나란히 앉은 치문은 자리가 어색한 듯 헛기침했다. 정 사장은 먼 상석 대신 태경 가까이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전화로 간단히 이야기해 드렸다시피 명성건설 뒤 봐주는 국회의원들한테 떡밥 좀 물렸습니다. 세월이 세월인 만큼 충성도가 높은 의원들도 있지만, 두어 명 정돈 포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곧 선거 아닙니까?”

“맞아요. 이 기회에 넉넉히 찔러주면 배 갈아타게 만드는 것 정도야 어려운 게 아니죠.”

마른 손을 비빈 정 사장이 덩치가 산만 한 어깨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 거절하려던 태경은 꽤 정성을 들인 커피가 의외라고 생각했고, 치문은 커피 믹스가 아닌 것이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무엇보다 대전 사업이 중요합니다. 이 대표님은 설계에만 신경 쓰시면 됩니다. 또 명망 높은 곳에 이름 올릴지 누가 압니까? 우리 랜드 마크에 수상 이력이 생기면 고객 끌어들이는 데도 큰 힘이 되겠죠.”

이미 냄새를 맡고 몰려든 투자자들도 상당했다. 일만 잘 성사된다면 수익뿐 아니라 명성까지 얻을 만한 사업이었다. 이윤을 낸 만큼 정 사장의 조직으로 흘러들어 가는 자금도 상당할 터였다. 지하 세계로 흘러간 돈이 다시 국회의원이나 재력가에게 꽂히면 꼭대기에 있는 자들과 밑바닥에 있는 자들이 상생하게 되는 구조였다. 이 회장의 조직이나 명성건설 또한 다를 바 없었다.

“두화건설 사장은 곧 풀려날 겁니다. 아직은 뒤 봐주는 높으신 분들이 널리고 널려서요.”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태경은 향긋한 커피를 들이켜며 수긍했다.

“아마 처음엔 쉽게 내줄 겁니다. 손가락 정도야, 손목 정도야 하다가 어느 순간 팔 한쪽을 내줘야 하는 순간이 올 겁니다. 이미 건재한 조직에 흠내기는 쉽지 않으니 돌고 도는 자금줄부터 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강남 일대 유흥 주점은 여럿 접수하지 않았습니까?”

“예. 서서히 숨통을 조일 겁니다. 자금이 끊기면 명성건설에서 돈 끌어다 쓸 거고 빈틈이 생기겠죠. 한번 물꼬가 트이면 조직은 와해되기 십상입니다. 그때 접수해도 늦지 않을 테고요.”

정 사장은 꽤 대담한 열정을 품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덩치 키워 맞짱 뜨는 건 별 의미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말려 죽일 생각입니다.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태경이 마른 얼굴을 쓸었다. 조직을 무너뜨릴 생각에 들뜬 정 사장도, 그의 복수를 방관하는 자신도 괴물 같았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려던 순수한 욕망의 본질은 훼손된 지 오래였다. 자신에겐 단죄할 자격이 없음에도 이 진창에 발을 들였다. 보이지 않는 손이 두 발을 옥죄어 더 깊은 늪으로 잡아당겼다.

대전 사업이 정 사장의 계획에 중대한 자금줄이 된다면, 정말로 아버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아들이 되는 격이었다.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쳤다. 연인을 상처 입히고 오랜 시간 자신을 기만한 이 회장이지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이 회장의 원대한 계획 중 하나였다는 사실과 별개로 진실한 정을 나누었던 때가 있었으니까.

치문이 회한이 스친 태경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정 사장에게 말을 던졌다.

“어차피 이 대표님 없이도 하려고 했던 일 아닙니까?”

정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경의 두 눈이 누그러졌다. 치문을 바라보며 팔짱을 낀 그는 어느새 흥미로운 눈빛이 되어 있었다. 어차피 이 모든 일이 들이칠 파도였으니 죄책감 따윈 갖지 말라 이건가. 제법이었다. 태경과 치문 사이에 긴밀히 오간 무언가를 눈치채지 못한 정 사장이 덧붙였다.

“우리 조직으로서는 숙명과도 같은 일입니다. 이 대표님 연락이 의외이기는 했지만, 협력이 없었더라도 우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석준을 쳤을 겁니다.”

치문이 그렇다는데요, 하는 식의 눈짓을 해 보였다. 치문과 눈을 맞춘 태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 정식으로 오픈하시면 화환이라도 하나 보내죠.”

무심히 말을 던진 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사장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벌써 가시려고요? 저녁 드시고 좋은 데서 한잔할까 했는데요.”

꼴깍, 입으로 소리를 내며 말하는 곳은 분명 룸살롱일 것이다. 환영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태경은 곧….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애인 데리러 갈 시간이라.”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입가에 그럴듯한 미소가 걸렸다. 주변 공기마저 환하게 바꾸는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치문은 재차 오만상을 찌푸렸다. 치문이 휘적휘적 걸어 나가는 태경을 따랐다.

“다음엔 꼭 한잔하시죠.”

금세 멀어진 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

“너도 이쯤에서 발 빼.”

건물 뒤편에서 담배를 피우던 태경이 말했다. 치문은 그와 마주 선 채 삐딱하게 담배를 물고 있었다. 명령치곤 부드러운 목소리였기에 치문이 귀를 긁으며 물었다.

“벌써요?”

“우리 할 일은 끝났어. 괜히 엮이면 머리 아파지니까 지금 발 빼는 게 여러모로 좋아.”

조직의 자금이 오간 장부도 손에 넣었고 명성건설과 LK Architects 간에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도 충분히 소명했다. 나머지는 의욕에 찬 정 사장이 해결할 문제였고. 더 엮였다가는 귀찮은 적만 만들게 될 가능성이 컸다.

“하고 싶은 일 있으면 도와줄게.”

“뭐든?”

“뭐든.”

긴 여정이 끝났다. 치문은 홀가분한 얼굴로 답했다.

“생각해 볼게요.”

치문은 조직폭력배의 정체성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와중이었다. 저를 만나기 전까지 예준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녀석이다. 그런 치문이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예준의 세상 일부를 공유하는 기분을 갖게 했다. 그가 누구 못지않게 잘 살아야만 예준도 저도 안심할 터였다. 누구에게나 한 번은 사람답게 살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했다.

“형은 잘 있죠?”

“잘 있지.”

“보고 싶은데, 씨발…. 좀 자고 가고 그러면 안 돼요? 형이랑 나랑은 백날 한 이불 써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 알잖아요.”

“자고 가.”

꽁초를 비벼 끈 치문이 의심스러운 듯 팔짱을 꼈다.

“진짜?”

“진짜.”

허락은 오로지 예준 때문이었다. 감정의 폭이 늘어난 만큼 잘 웃기도, 자주 우울해하기도 하는 예준이었다. 치문은 그런 아이에게 안정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날 잡아서 갈게요. 잠옷 챙겨 갈 거니까 두고 봐요.”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이불은 어림도 없는 일이겠으나 한 지붕은 허락할 작정이었다. 예준의 웃는 낯만 볼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치문을 마주하고 머쓱해할 말간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허벅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태경은 담배 필터를 깊게 빨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때, 치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알파들은 오메가한테 약하잖아요.”

“그렇지.”

“그렇게 좋은 향이 나요? 외모나 사람 됨됨이나 그런 거 다 따질 필요도 없을 만큼 그렇게 좋으냐고요.”

새삼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의아했다. 형질이 궁금하다면 오메가의 입장에서도 물어볼 법한 일인데 굳이 알파를 콕 집어 묻는 것이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태경이 새 담배를 입에 물며 물었다.

“왜. 베타한텐 관심 없을까 봐 초조해?”

“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짚이는 데가 있었다. 딱히 치문을 좌절시키고 싶진 않았으나 사실은 사실이었다.

“좋다는 말론 설명이 안 돼. 정신이 나갈 정도로 황홀해. 눈이 멀어도 오메가한테는 끌리게 되어 있어. 본능이니까.”

“…그렇단 말이죠.”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치문이 마지막 담배를 손에 끼웠다. 그의 이마에 때 아닌 땀방울이 맺혔다. 느긋하게 불을 붙여 준 태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주선영은 미개척지에 환장해. 자기가 개척하는 걸 무척이나 좋아하기도 하고 길들이는 것도 좋아하고. 베타는 따지자면 미개척지에 속하지. 그러니까….”

“알아먹었어요. 대표님이랑 이런 얘기 어색하니까 그만합시다.”

“원하던 바야.”

치문이 실실 웃으며 폐부를 부풀렸다. 그즈음 태경의 담배는 꽁초가 되었다. 주변을 정리한 그가 골목에 서 있는 세단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예준이 데리러 가기 전에 태워 줄게.”

“그럼 고맙게 타고요.”

두 사람이 자리를 벗어나자 근처에 서 있던 경호원이 세단 문을 열어 주었다. 그 덩치에 뒷좌석으로 쏙 올라타는 치문을 보며 태경은 자연스레 조수석 문을 열었다. 다 큰 사내와 어깨가 맞닿는 것은 불쾌하므로, 매너 있게 피해 줄 요량이었다.

시트 가죽이 훌륭하다고 떠드는 치문을 가만히 둔 채 차는 대로변으로 향했다. 저물기 전, 황금빛으로 빛나는 서울의 도로는 빽빽하고 시끄러웠다. 다만, 매끈하게 대열을 이루고 몸채를 뽐내는 빌딩 숲에는 이끌리듯 시선이 갔다.

태경은 까맣게 선팅된 창을 내렸다.

선선한 바람 속에 매캐한 공기가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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