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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Dreaming (12/18)

11. Dreaming

눈을 떴을 때는 여느 때처럼 치문이 보이지 않았다. 새벽마다 어디를 가는지, 최근 치문은 항상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쭈뼛대며 등장하는 모습이 어딘가 수상하긴 했지만 이제 와 비행을 저지를 녀석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예준은 미심쩍은 얼굴로 이불 속을 빠져나왔다.

“어디 다녀와?”

“요 앞에.”

식은땀은 멎었고 더는 갈증이 나지 않았다. 기력은 없었으나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숨통을 트고 살 것 같았다. 예준은 한숨을 내쉬며 치문의 손에 들린 종이 가방을 바라보았다. 눈치챈 치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전복죽이야. 먹어 볼래?”

“…어디서 구했어?”

“바로 근처가 바다인 거 몰라?”

전복죽이라니 기대하지 않은 호사였다.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나마 먹는 모습을 보이면 치문도 안심할 터였다.

예준은 치문이 차려 준 전복죽을 빠르게 입 안으로 가져갔다. 역하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먹을 만했다. 내내 비어 있던 속에 자극이 갈까 봐 천천히 식사를 이어 갔다.

“너도 좀 먹지.”

“난 먹었어. 형이나 많이 먹어.”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는 치문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실랑이하기보단 녀석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편이 좋을 것이다. 예준은 느렸지만 결국 죽을 반절이나 비운 뒤 물러나 앉았다. 치문이 흡족하게 웃었다.

“잘 먹네. 속은?”

“괜찮아. 안 아프고.”

“좀 나아지는 것 같아?”

최악일 때에 비하면 감사할 정도로 편안했다.

“어. 그 약 효과가 있나 봐. 한 번 자면 해 뜰 때까지 한 번도 안 깨.”

매일매일 열두 시간 넘게 푹 자고 있었다. 사는 데는 수면이 생각보다 중요한 모양이었다. 요기도 어느 정도 하는 데다 하루의 절반은 잠들어 있으니, 몸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다행이다. 이제 좀 산 사람 같네. 아무 생각 말고 몸 낫는 데나 신경 써, 형은.”

치문이 능숙하게 잔반을 치우며 말했다. 그러기엔 안정적인 상황이 아니라 생각했으나 예준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미동 없이, 눈동자만 굴려 관찰하자 치문이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었다.

“이제 낮에 혼자 있을 수 있겠어?”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 했다. 제 몸 상태 때문에 치문은 이 주 내내 병간호에 시달려야 했다.

“혼자 있을 수 있어.”

“밥은 차려 놓고 나갈 테니까 점심도 꼭 챙겨 먹어. 저녁에 약 챙겨 먹기 전에도 꼭 죽 먹고.”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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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짐 덩이가 있을 수 있을까. 형으로서 치문을 돌봐 주어도 모자랄 판에 보살핌만 받아 민망했다. 예준은 부채감에 부러 밝게 웃어 보였다. 치, 하고 핀잔을 주던 치문의 얼굴에도 뒤늦은 미소가 맺혔다.

*

며칠이 더 지나자 약의 힘 없이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예준은 저물녘이 되기 직전 손바닥 위에 약봉지를 올려 두고 고민했다. 수면제를 너무 오래 복용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초저녁에 잠들어 아침에 깨는 습관이 들었으니 하루쯤은 걸러도 되지 않을까. 치문이 알면 타박을 할지도 모르지만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잠들지 못한다면 다시 약을 먹으면 그만이었다.

예준은 약봉지를 도로 넣어 두고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 해가 지기 전인데도 피로감이 드는 걸 보면 영 어려운 일도 아니리란 확신이 들었다.

예준은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눈을 감았다. 곧 사위가 고요해지더니 매일 꾸던 꿈이 떠올랐다. 스스로 잠들어도 그 꿈을 되풀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어쨌거나, 주변 풍경은 그 꿈속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준은 결국 잠들지 못했다. 연신 뒤척이며 억지로 잠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차라리 약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조금만 더, 하며 버티다 보니 어느새 깜깜한 밤이었다.

실패였다. 퍼석하게 마른 한숨을 내뱉고 다시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끼익-.

순간,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켠 예준은 마신 숨을 내뱉지 못하고 꾹 참았다. 도착하기 전 발소리부터 요란한 치문과 달리, 침입자는 별다른 소음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 정명 형님의 따까리들이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드디어 자신을 발견한 거라면 치문 없이 혼자 도망칠 방법 따윈 없을 터였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미닫이문이 열렸다. 침입자는 헤매는 기색 없이 곧장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예준은 뒷덜미에 서늘하게 돋아난 소름을 느낌과 동시에 익숙한 향기에 사로잡혔다.

“……!”

꿈이 아니었나?

언제부터 꿈이 아니었을까.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폭풍처럼 이는 동요에도 예준은 조용히 눈을 감고만 있었다. 자는 것처럼 보여야 남자가 놀라지 않을 테니까. 그가 옅은 한숨과 함께 이불을 열고 들어왔다.

도대체, 왜.

그는 자신을 깨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꿈에서처럼 제 몸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따뜻한 육체가 전신에 맞닿았다. 고요히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결에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서서히 페로몬이 퍼졌다. 수면제를 먹기 시작한 게 일주일 전이었고 몸이 나아진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그의 페로몬 덕분에 회복된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름 부르고 싶은데.”

푹 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감돌았다. 예준은 도무지 믿기지 않아 눈두덩 속에서 바쁘게 눈동자만 굴렸다.

“깰까 봐 부르질 못하겠네….”

티셔츠의 밑단을 끌어 쥐는 손을, 두 눈에 차오르는 열감을, 긴장감에 질척하게 배어나는 땀을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

“…….”

부드럽게 귓가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어찌나 포근한지. 그 위로와도 같은 움직임에 도리어 가슴속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예준은 속눈썹이 젖어 드는 줄도 모르고 남자의 품에 기대었다.

상태가 악화하여 치문이 먼저 연락했을까. 그게 아니라면, 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 떠난 자신을 그가 끝내 찾아내고 만 것일까. 무엇도 알 수 없었다. 모든 의문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혼란한 의식 속을 떠돌기만 했다.

태경은 잠들지 않았다. 추측하기로, 내내 허공을 보고 있는 듯했다. 어떨 때는 제 몸을 어루만지며 감각에 예민하게 신경을 기울이는 것 같기도 했다. 단단한 손은 꽤 오랫동안 등 언저리에 머물렀다.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스치는 느낌이 생생했다.

떨어진 시간 동안 낯설어진 체온 탓에 예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더, 더, 감추기가 어려워졌다. 예준이 일순 숨을 훅 들이켰다.

“……!”

동시에, 허리를 꽉 틀어쥐는 힘이 놀라울 정도였다. 끄응, 하는 신음과 함께 예준은 참았던 숨을 뱉어 냈다. 들켰다. 약을 먹지 않아 잠들 수 없었으니 예견된 순서였다.

태경이 단단히 얽혀 있던 다리를 풀자 생경한 감각이 몰아쳤다. 예준은 당황했다. 앞섶이 단단히 부푼 탓이었다.

“괜찮아.”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예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른 품을 빠져나와 고개를 들자 이마가 남자의 턱을 스쳤다. 코끝마저 입술에 스쳤고, 결국엔 입술과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비로소 눈을 마주했다. 그는 당황하진 않았으나 눈동자를 떨고 있었다.

“페로몬 때문이야. 가끔 그랬어.”

그 깊은 눈을 마주하자 숨이 막혔다. 적어도 며칠은 이런 일을 반복했다는 의미였다. 동의를 구하지 않고 떠난 일이나 텅 비어 버린 배 속 같은, 떳떳하지 못한 일들이 죄의식을 일깨웠다.

열감이 느껴지는 두 뺨과 달리, 입술은 파리하게 질렸을 터였다. 떨림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변명해야 하는데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

바보처럼 바라만 보는데도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었다. 손끝으로 물기가 맺힌 눈가를 쓰다듬거나 아랫입술을 조심스레 더듬기도 했다.

“왜 약을 안 먹었어.”

“이, 이제 괜찮은 줄… 알고….”

볼품없는 새된 음성이었다. 다만, 오고 간 대화가 안정을 주지는 않았다. 현실감이 들이쳤다. 예준은 본능적으로 태경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다. 맥없이 꺾이는 손목을 태경이 붙잡아 제 목에 둘렀다. 시선이 떠나자 다시 따뜻한 체온이 온몸을 감쌌다.

“괜찮아. 다 괜찮으니까 눈 감아, 예준아.”

미치게 간지러운 향기. 남자의 회유가 아니어도 그의 살결에 코를 묻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예준은 그의 쇄골 언저리에 이마를 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 이러면 안 돼요….”

보스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더불어, 자신의 아버지와 붙어먹은 오메가를 사랑할 알파는 없었다.

“안 될 거 없어.”

단호히 말한 그가 골반으로 손을 뻗었다. 예준이 자꾸만 하체를 바르작대자 엉덩이 아래를 단단히 당겨 고정하기까지 했다. 남자의 허벅지에 앞섶이 틈 없이 맞붙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신음이 터질 것 같았다. 페로몬이 더 짙어져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안 돼….”

다시 밀어내려고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내내 앓았던 오메가의 힘 따위 그에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눈 감아. 몸이….”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예준은 저처럼 부풀어 오른 남자의 중심을 감지했다. 제 목덜미에 입술을 꾹 누른 채 숨을 뱉은 그는, 그러나 아무 일도 벌이지 않았다.

“다 해 줄 테니까, 지금 나 밀어내지만 마.”

“…형.”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해결하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나아. 회복해. 네가 잘못한 거 아무것도 없으니까 제발, 괜찮아지라고.”

성대를 긁는 듯한 숨소리에 여유가 없었다. 애원하듯 말하는 남자의 품에 안긴 채, 예준은 벗어나지도 더 파고들지도 못했다. 페로몬의 영향으로 성감이 차올랐으나 어떤 행위도 해낼 힘이 없었다. 태경 또한 뭔가를 원하는 듯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한 몸이 되길 원하는 사람처럼 제 등을 끌어안고만 있었다.

“페로몬 감당하는 게 쉽지 않을 거야….”

긴장으로 떨리는 목소리엔 확신이 없었다.

“약을 먹어야 해.”

예준 또한 아는 사실이었다. 의식을 잠재우면 몸의 변화도 잦아들 테고 페로몬의 원초적인 영향도 줄어들 터였다. 버티려면 약을 먹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싫어.”

이성과 본능이 치열하게 마찰하는 순간이었다. 목에 두른 두 팔을 옥죄자 그가 초조한 듯 마른 얼굴을 쓸었다. 예준은 조용히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대답 대신, 뒤통수를 쓰다듬는 것으로 행위를 이어 나갔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밤이 깊어지고 방 안의 적막이 더욱 무거워졌다.

고요한 공기와 달리 예준은 비 오듯 땀을 쏟아 내었다. 말없이 태경의 티셔츠 자락을 쥐었다 풀길 반복했다. 잠들었을 땐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신경증을 앓는 사람처럼 예민해졌다. 아파서 흘려 내는 땀이 아니었다. 틈 없이 맞붙은 몸에서 열감이 치솟았다. 태경의 목덜미도 끈적해졌으니 오로지 자신만의 문제는 아닐 터였다.

“예준아….”

곤란한 듯한 한숨. 홧홧한 귀를 마주 비비는 힘. 몇 번이나 목을 축였음에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익숙한 갈망이었다.

예준은 겨우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미약하게 스민 달빛에 비친 눈이 반들반들했다. 그가 턱에 맺힌 땀을 부드럽게 닦아 내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절제는 남자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제 겨우 봄인데, 열대야처럼 방 안이 뜨거웠다. 예준은 이불 속에서 손을 움직여 남자의 티셔츠를 들추었다. 좁은 공간 속으로 탄탄하게 새겨진 복근을 더듬었다. 하아, 숨을 뱉으며 시선을 맞추자 태경의 일그러진 눈매가 보였다.

“…힘들어요.”

갈무리해서 이 흥분을 잠재우거나, 흥분을 잠재우기 위해 성욕을 해결해야 했다. 잠시간 머뭇거리던 태경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가까스로 고개를 틀었다. 그가 예준의 뒤통수를 받쳐 모로 누웠던 몸을 바로 하도록 종용했다.

다시 한번, 인내의 순간이 스쳤다. 그는 이내 몸을 겹쳐 맞닿은 중심을 크게 비볐다.

“하으…!”

눈을 크게 뜬 예준이 고개를 젖혔다. 길게 뻗은 목에 입 맞춘 태경이 좁은 턱을 잘근 깨물었다. 뜨거운 숨을 뱉은 직후, 벌어진 도톰한 입술에 입술을 맞대었다. 도무지 다물리지 않는 입술을 조심스레 핥자 예준의 온몸이 경련했다.

예준은 미동하지 않았다. 물 먹은 듯 몸이 무거웠고 화답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태경이 성기 위로 강하게 허벅지를 맞붙였다. 묵직하게 누르는 힘에 그저 떨 수밖에 없었다. 쾌감이 몰아치도록 그는 멈추지 않았다. 눈을 맞추고 입술을 문 채 허리를 움직였다. 그저 비비는 행위일 뿐인데도 예준의 눈가에 넘칠 듯 물기가 차올랐다.

“읏….”

내지르진 못한 신음을 입 안에 물어 삼켰다. 태경이 기어코 거친 숨을 쏟아냈다. 정제되지 못한 숨이 길게 이어졌다. 코끝을 맞붙인 채 헐떡였다. 예준은 그저 입술이 스치는 감각에도 전율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

곧, 둘 모두에게 은밀한 흔적이 남았다. 꿈이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예준은 제 위로 무너지듯 안기는 태경을 받아내며 입술을 짓씹었다. 환희와 동시에 절망이 찾아들었다.

*

땀이 식자 한기가 들었다. 예준은 축축한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페로몬이 습기에 스며들어 코끝을 자극했다. 푹 잠들었을 때는 느끼지 못한 흔적이니, 어젯밤은 확실히 그 전과 달랐다는 의미였다.

긴 밤이 지났다. 행위는 얕고 길었다. 몸은 더 회복되었고 탈력감도 나아진 것이 느껴졌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찰나,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단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씻은 모양이었다. 바지만 겨우 꿰입은 태경이 낮은 천장이 거슬리는 듯 몸을 숙여 방 안으로 들어섰다.

“…왜 안 갔어.”

투정처럼 들리지는 않을까. 예준은 뺨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목이 까끌까끌했다. 무릎을 굽혀 앉은 태경이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열은 없고.”

남자가 도전적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갈 거면 오지도 않았어.”

언제부터? 왜? 의문투성이였다. 그러나 예준은 성급히 묻지 않았다. 유산 후 상태가 악화하여 치문이 수를 쓴 것이라면 누구를 탓해야 할지 난감했다. 남자를 불러들인 치문인지, 부름을 받고 온 태경인지, 애초에 상태가 나빠진 자신이 문제인지.

“치문이가 연락한 거면….”

예준이 초조하게 말했다. 태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찾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가 예준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재차 말했다.

“내가 먼저 찾았어.”

예준은 한참이나 남자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속할 순 없는 관계라 생각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기하면 절로 몸이 떨렸다. 이제 더는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명성건설 이 회장과의 추한 행위까지 알아챘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떠났다고 털어놓기에는 겁이 났다. 예준이 하얗게 질린 채로 어깨를 떨자, 태경이 마른 몸을 떼어 내 다시 눈을 맞추었다.

“얼마나 찾았는지….”

단정한 이목구비를 만지는 손끝이 떨렸다. 그 또한 저처럼 떨고 있었다. 태경은 눈을 내리뜬 채 예준의 얼굴과 몸 곳곳을 살폈다. 입술을 덧그리고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초조한 기색이 깃든 눈빛에 예준은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태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입을 맞추려고 하자 예준이 너른 어깨를 붙잡아 밀어냈다.

“나 이제 괜찮으니까 가.”

떨면서도 또렷이.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구태여 내뱉은 말에 태경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가 오히려 어깨를 맞붙이며 말했다.

“뭐가 괜찮아. 이렇게 아픈데.”

“이제 안 아파.”

말과 달리, 목소리는 연약했다. 알면서도 밀어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회복을 위해 그가 해 준 일은 고맙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면죄부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예준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자 태경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밀어내지만 말고 나 좀 봐.”

“…그냥 가.”

“너를 두고 어딜 가.”

강한 어조에 기가 눌렸다. 몇 번이고 힘을 쓰던 예준은 곧 축 늘어졌다. 불쾌하고 찝찝한 제 몸 상태가 신경 쓰였고, 남자의 체온에 다시 익숙해질까 두려웠다.

“이제 아이도 없는데….”

“…….”

“나 보기 역겹지도 않아?”

가만히 등을 쓰다듬어 주던 태경이 멈칫했다. 그가 부드럽게 예준의 뒤통수를 감쌌다. 시선을 끌어 눈을 맞추고는 가볍게 입술을 비비고 물러났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 하지 마.”

“…형.”

“권력을 이용해서 널 무력하게 만든 사람이 역겨운 거지, 단 한 번도 너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어. 질타 들어야 할 사람은 내 아버지고 그 일 때문에 죄책감 느껴야 할 사람은 나야. 대체 너한테 무슨 잘못이 있어?”

태경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의 눈에 회한이 비쳤다. 예준은 그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알파이면서도 늘 알파 같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다만, 그가 외면하고 있을 밑바닥의 불순물마저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 미약한 의심, 옅은 불쾌감, 그런 것들이 언제든 관계를 망치리라 확신했다. 어쩌면 함께 있는 것만으로 수없이 상처 입게 될지 모른다. 억울했다. 예준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 변화를 감지한 태경이 팔꿈치를 그러쥐며 말했다.

“예준아. 대체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래.”

때로는 결과만이 관계를 정의하는 법이었다. 예준은 태경을 설득하려 했다.

“형은 말로만 전해 들어서 그래. 나는… 나는 직접 다 겪었잖아. 더럽고 역겹고 무서웠어요. 그래 놓고 형이랑 함께한다는 건 말이 안 돼. 좋아하는 사람 아버지랑 그런 짓을 해 놓고 어떻게 뻔뻔하게….”

호소한 예준의 몸이 휘청였다. 어지러워 가만히 숨을 고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술을 덜덜 떨기까지 하는 모습에 태경의 눈동자가 진동했다. 그가 서늘하게 읊조렸다.

“쉽지 않다는 거 알아. 그래도 난 그 사람이 이기게 하기 싫어.”

“보스는 항상 이겨, 누구든.”

기어코 흘러나온 눈물이 눈꼬리에 고였다. 늘 승승장구한 그가 어떻게 이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짓밟혀 본 자만이 그 아픔을 안다. 발현 이후, 예준의 세상은 늘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거대한 벽 같은 것이었다.

그 중심에 보스가 존재했다. 그가 세운 조직 안에 세력을 다투는 열성 알파들이, 엄청난 빚더미가 있었다. 아이마저 그들에게 도난당할 위기에 처하는 형국이었다. 태경과 함께하기 위해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차라리 그를 떠나는 편이 나았다.

예준은 동정심과 애정이 묘하게 혼합된 태경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감정은 아름답고 고귀했다. 자신이 품은 것 또한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견고하다 여겼다. 그러나.

“난 다치기 싫어요.”

“누가 이길지는 해 봐야 아는 거지.”

“형, 내 말은.”

“무슨 뜻인지 알아. 뭐가 두려운지, 뭐가 힘든지도 알겠어. 세상이 정의하는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 이해 못 하지도 않고.”

이윽고 예준이 툭 떨군 눈물을 닦아 낸 그가 덧붙였다.

“너랑 헤어질 생각 없어. 해결할 수 없는 건 내가 다 해결할게. 대신, 너는 네 마음만 돌봐. 충분히 시간을 들여. 기다릴게. 더뎌도 괜찮으니까, 제발.”

그가 온몸으로 예준을 끌어안았다.

“그만하자는 말은 하지 마.”

어째서 그가 더 호소하는 것일까. 불결한 오메가라고 외면해도 모자랄 판에 안달하는 그를 보자, 예준은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가슴을 두드리는 원망과 별개로 지독한 애정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

그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널 좋아하니까.”

단순했다. 불가항력이었다. 어떤 문제든 과감히 상쇄시켜 버리고 마는 단 하나의 감정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일까?

그간 알지 못했던 이치를 실감한 예준이 젖은 눈을 감았다 떴다. 남자의 단단한 등에 두 손을 올려놓긴 했지만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그가 정말 보스를 이길 수 있을까. 그가 지리멸렬한 제 처지를 완벽히 구원할 수 있을까.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태경이 말했다.

“이제부터 씻고 함께 식사할 거야.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천천히 해 보면서 몸부터 회복해. 생각은 그다음에, 결정도 그다음에. 재촉 안 할 테니까. 응?”

예준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자 그의 떨림도 차차 잦아들었다.

“여기 있고 싶다면 거처 옮길 필요 없어. 당분간 나도 여기 머무를 테니까 마음만 닫지 마. 열어 줘. 내가 너 돌보게 해 줘, 예준아.”

그런 아버지를 두었더라도.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인 말에 예준은 아무런 대답도 내어놓지 않았다.

잠시간 예준을 어루만진 태경이 눈에 띄게 마른 몸을 들어 올렸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욕실로 향했다. 문간이 낮아 허리를 굽혀 욕실로 들어온 태경은 예준을 낡은 구식 욕조 위에 앉혔다. 한 번 더 이마의 열을 확인한 후 티셔츠로 뻗는 손을 예준이 저지했다.

“혼자 할 수 있어.”

예전이었다면 억지로라도 씻기려 들었을 그가 날 선 눈빛을 보고 자세를 낮추었다. 예준은 자신의 볼품없이 마른 몸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배를 보면 기분이 이상해졌으니, 그건 그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나쁜 일은 상기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래서 손길을 마다했을 뿐인데 태경이 티셔츠 위로 손바닥을 대었다.

“내 잘못이야. 혹시라도 죄책감 느끼고 있다면 그럴 필요 없어.”

편편한 배를 쓰다듬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그가 착잡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혼자 감당하게 해서 미안해. 다신 그럴 일 없을 거야.”

가슴 아플 여유도 없었던 예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멍하니 바라만 보자 태경이 낮추었던 몸을 일으켰다. 젖은 목덜미에 사뿐히 뽀뽀하고는 샤워기의 물 온도를 조절했다. 좁은 공간 안에 물소리가 퍼지며 대화는 멎었다. 따뜻한 온도가 되기까진 한참 걸렸다.

“도움 필요하면 불러.”

아직 젖어 있는 뺨을 문지르는 손끝이 애틋했다. 예준은 부러 외면한 채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얼굴을 붉히고 뒤돌아선 태경은 빠르게 욕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예준의 샤워가 끝날 때까지 착실히 문 앞을 서성이기만 했다.

*

경호원이 가져온 도시락은 고급 한정식 식당에서 포장해 온 것이었다. 단칸방에서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개다리소반을 펼친 태경이 음식을 위에 놓았다. 내내 죽만 먹었던 예준은 제가 일반식을 삼킬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어두운 낯빛으로 밥상 앞에 앉아 살피니 어느덧 해가 쨍한 한낮이었다.

태경이 미닫이문을 열어 부드러운 바람이 안쪽까지 스미도록 했다. 그가 귓속까지 꼼꼼히 닦아 주었고 머리카락도 말려 준 덕분에 예준은 한기가 들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보송보송한 채로 식사를 하자 별일 아닌데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보자던 태경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얼굴에도 미약한 생기가 스몄다.

분위기는 어딘가 어색했다. 남자는 이 누추한 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여전히 위압적인 체격에 흠 없는 피붓결을 지니고 있었고 눈빛 또한 총명했다. 무심하게 찬 손목시계는 몹시 값비싼 것이어서 이질감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예준은 천천히 밥을 씹어 삼켰다. 맛이 유달리 좋아 먹기가 확실히 수월했다. 굳이 입을 연 건 그와 저 사이의 침묵이 부담스러워서였다.

“전복죽도 형이 사 준 거예요?”

간이 잘 된 미역국을 저으며 물었다.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한술 떠올릴 때마다 입 주변을 닦아 주는 데 열을 다 하고 있었다. 정갈한 손끝이 입술을 스치기라도 하면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눈치 없이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리기라도 할까 봐, 예준은 초조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잘 먹었어요. 고마워.”

말한 예준이 태경의 눈을 피했다. 깨작거리다 조금 삼키고, 버텼다 다시 먹느라 밥그릇을 어느 정도 비우기까진 한참이 걸렸다. 자꾸만 손을 떨어서 태경의 불안한 눈빛이 수시로 와닿았다.

“괜찮으면.”

태경은 뒷말을 잇지 않고 예준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허리를 세워 앉아 있기도 버거운 걸 눈치챘는지, 제 상체에 몸을 기댈 수 있게 도와주었다. 태경의 가슴에 등을 맞붙인 예준은 홧홧한 체온을 감지하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허리를 감은 남자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식사 후, 양치하고 나오자 태경이 알약 두 알을 건넸다.

“하나는 면역제고, 하나는 피임약이야.”

페로몬으로 치료를 받는 데다 언제 발정기가 올지 모르니 먹어 두는 편이 효과적일 터였다.

“어제….”

간밤, 긴 접촉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자제력이 없었다. 정신없이 중심을 비벼 댔던 일에 태경은 가책을 느끼는 듯 보였다.

“그런 일 없게 먹어 두는 게 좋겠어.”

아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너무 성급한 행위였음을 예준 또한 인정했다. 예준은 망설임 없이 약을 삼켰다. 아이를 또 가지기도, 잃기도 두려웠기에 절박한 심정이었다.

해가 중천을 벗어났을 즈음에는 짧게 낮잠을 자기로 했다. 치문이 열심히 세탁해 놓은 여벌 이불이 있기는 했으나 턱없이 질이 좋지 않았다. 태경이 못마땅해했지만, 예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쨌거나 그 이불을 덮고 누웠다. 곁에 앉은 태경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지 않았다. 곧, 큰 손이 예준의 얼굴 절반을 덮었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자 쉽사리 졸음이 몰려왔다. 다만, 그의 손길이 몹시도 그리웠기에 예준은 쉬이 잠들고 싶지 않았다. 뜨거운 손끝이 귓불을 쓸고 목선을 덧그렸다. 티셔츠 위로 보이는 쇄골까지 매만지던 태경의 귀는 어느덧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광경을 흘끗 흘긴 예준이 두 눈을 감았다. 이내 떴다가 다시 감길 반복하는 통에 길게 뻗은 속눈썹이 떨렸다.

왜 아직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냐고 묻는 대신 딴청을 피웠다. 손길을 밀어내자 그의 손이 애꿎은 이불자락을 쥐었다. 예준은 두근대는 심장 박동을 무시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외면해 버렸다. 태경의 기분과 태도는 알 수 없었다.

“밖에 있을 테니까 편히 자.”

무겁게 물러나는 기척이 심장을 두드렸다.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이상한 기분에 눈두덩에 열이 몰렸다. 옥죄는 가슴을 움켜쥔 채 예준은 한동안 뒤척였다.

한참이나 눈을 붙이지 못하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서자 벽면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태경이 보였다. 비척비척 다가간 예준이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묵직하게 차오르는 열감은 분명 그간 새겨진 애착 때문일 터였다.

예준은 불편하게 잠든 남자를 구태여 깨웠다. 어깨를 흔들며 속삭였다.

“같이 자.”

태경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사이 상기된 예준의 뺨을 눈치챈 그가 제 귓불을 매만졌다.

“왜.”

서늘한 시선에 예준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빨리 회복하고 싶어.”

강요는 아니었다. 원하지 않는다면 돌아설 작정이었는데 마침 부드러운 손이 손목을 감쌌다.

태경은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고 예준의 몸을 들어 올렸다. 안전하게 안아 이불 위에 눕히고는 몸을 맞대며 누웠다. 두 다리를 꿰고 남자의 품속으로 들어간 예준은 그제야 편히 숨 쉴 수 있었다. 단단한 가슴에 뺨을 기대자 태경이 등을 토닥여 주었다.

페로몬이 열렸음을 느낄 수 있었으나 면역제 덕분에 성감이 몰아치진 않았다. 예준은 상기된 얼굴로 가만히 눈만 감았다 떴다.

그때, 태경이 말했다.

“계속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말해 줄게.”

예준이 고개를 들어 태경을 보았다.

“난 아버지의 친자가 아니야. 다섯 살 때 입양됐거든.”

예준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이 회장과 태경은 비교적 닮은 구석이 있었고 같은 형질을 지녔다. 당연히 피를 나눈 부자 사이리라 단정했는데.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놀랍도록 보스와 달랐다. 태생부터 지녔으리라 추측했던 자태는 보스에게선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성질이었다. 선하고 고귀한 데다 우성 알파답게 강인한 면모도 있지만, 태경은 그것을 무기 삼아 타인을 괴롭히는 이들과 같지 않았다.

“의미가 없진 않을 거라 생각해. 인연과 운명의 차이는 크니까. 이걸로 네가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다면….”

그가 왜 진실을 밝히는지는 명확했다. 이 회장과 자신이 접대로 엮인 사이라면 그들 부자 사이의 매듭은 느슨한 편이 나았다. 그럼에도 수십 년을 함께한 관계였다. 예준은 태경이 그 인연을 단칼에 잘라 내진 않으리라 확신했다.

다만, 죄책감을 조금은 덜었다. 예준은 진동하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한 채 태경을 보았다. 평온한 얼굴의 그는 무엇도 감추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예준이 태경의 티셔츠 자락을 쥐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안도의 말은 없을지 고민했다. 무엇이 그가 떠안은 마음의 짐을 덜게 할까.

“이걸로 형 기분이 좀 나아진다면…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어렵지만, 숨기고 싶지 않았다. 낱낱이 밝히길 꺼렸으나 그 일은 분명 일어났다. 태경이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스가 나를 보고…. 나를 조금, 만지긴 했지만….”

태경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예준은 멈추지 않았다.

“내 몸에 들어오거나 하진 않았어요. 임신시킬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아. 그냥 혼자 했어요. 나 보면서….”

“널 만지면서.”

태경이 조용히 곱씹었다. 그가 손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잇새를 악물어 다물린 입술이 보였다. 담담하게 말한 예준은 토로하는 일보다 태경의 반응에 더 긴장했다. 가까스로 눈을 맞춘 태경이 말했다.

“그때 일, 네 입으로 되풀이할 생각 다시는 하지 마.”

“그래도….”

“그거 고문이야. 스스로한테 둔감하게 굴면 안 돼. 날 이해시킬 이유 없어. 어떤 일이 있었어도 난 네 편이니까 불안해할 필요도 없고.”

그가 마른 등을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이제부터 잊는 거야. 내 옆에서, 전부 다.”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마스이브, 데이트를 위해 케이크를 샀던 날은 몹시 추웠다. 만날 생각에 들떠 추악한 일 따위는 망각해 버렸던 찰나의 순간이 떠올랐다. 결국엔 후폭풍에 무너져 버렸던 일까지 모조리 잊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짓밟혀 망가져 버린 케이크나 차가운 보도블록의 감각은 지워야 했다. 그렇게 해서 가슴 가득 품었던 설렘 하나만 오롯이 남길 터였다.

예준이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그의 품 안에서는 이곳이 아주 먼 타지임을 잊을 수 있었다. 꿈속을 유영하기 시작하는 말간 낯이 누그러졌다. 그 점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예준은 편히 잠들었다.

실로 오랜만의 단잠이었다.

*

서류 더미를 옆구리에 낀 치문이 머쓱한 얼굴로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잡은 문틈 사이로 더러운 운동화가 불쑥 끼어들었다. 다시 나타난 치문은 의외의 인물과 함께였다. 바로 선영이었다.

“예준 씨,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캐주얼한 정장 차림의 선영은 재킷 소매를 걷은 채였다. 그녀가 치문의 어깨를 지지대 삼아 안으로 들어서자 태경이 미닫이문을 열고 나왔다. 집 앞에 어정쩡하게 선 예준은 제 허리를 감아 오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몸은 좀 괜찮아?”

“어. 많이 나았어.”

“다행이네.”

치문이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그동안 살이 올랐는지 치문은 이전의 건장한 체격을 되찾은 듯 보였다.

얼마 전, 호텔에서 호의호식하고 있다며 전화 통화로나마 떵떵거린 기억이 났다. 녀석은 태경의 도움으로 조직원들에게 쫓기는 일 따윈 없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치문이 자신과 엮여 갖은 고생을 다 했던 게 마음에 걸려서 예준의 입술에선 옅은 한숨이 샜다.

선영은 낯선 눈빛으로 집 곳곳을 살폈다. 태경의 수수한 차림새까지 확인한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아무튼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천하의 이태경이 이런 데서 휴가를 다 보내고.”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초라한 주택이지만 예준이 생활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태경의 의중은 알 수 없었으나 그 또한 불만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조용하긴 하네.”

선영의 시선이 담 위로 솟은 벚나무로 향했다. 골목 사이사이에 선 꽃나무들이 바람에 몸을 흔드는 4월이었다. 이제 예준의 몸은 제법 회복되었다. 아침저녁으로 태경과 산책을 했고 삼시 세끼 식사도 잘 소화해 내고 있었다.

24시간 내내 함께하다 보니 마음의 거리도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 덕분에, 예준이 격 없이 반말을 써도 태경은 반기기만 할 뿐 아무런 타박도 주지 않았다.

“대표가 회사를 내팽개치는 바람에 내가 등골이 휘어, 예준 씨.”

선영이 허리를 두드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태경이 느긋하게 답했다.

“어쩔 수 없이 떠맡은 자리라는 거 잊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떳떳이 직무 유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여기서 한 건 업무 아니면 뭔데. 제대로 쉬지도 못했어.”

그도 그럴 것이 태경은 종종 경호원이 가져다준 자료와 노트북에 매달려 있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급한 일은 없다는 해명을 들었지만, 직함이 있으니 곧이곧대로 믿긴 어려웠다. 예준은 민망해 고개를 숙였다.

“저 때문이에요.”

“어허. 예준 씨,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 LK가 예준 씨 것도 아닌데.”

선영이 달래듯 말했다. 태경이 덩달아 예준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설립하고 첫 휴가야. 그런 거라면 당연히 널 위해서 썼을 거고.”

다정한 눈빛에 예준은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휴가다운 일은 전혀 없었지만 24시간 붙어 있는 데다 느긋한 오후도 즐기고 있으니, 영 휴가가 아니라고 하기에도 모호했다. 가관이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은 선영이 치문과 눈을 맞추었다. 치문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재미없는 일 얘기 하러 근처에 좀 다녀올게. 농땡이 부리는 대표 잡아다가 설교 좀 할 테니까, 다녀오면 같이 맛있는 거 먹어요. 그동안은 치문 씨가 놀아 준대.”

아이를 혼자 남겨 두고 떠나는 부모 같은 말투였다. 예준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곁에 두고 있었으니 그에게도 환기가 필요할 터였다.

“두 시간 정도. 괜찮겠어?”

태경이 구태여 물었다. 고작 두 시간인데도 초조해하다니.

“괜찮아.”

예준이 담백하게 답했다. 따뜻한 손이 뺨에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그가 오로지 자신에게만 허락을 구하는 것이 싫지 않았다.

태경은 헝클어진 예준의 머리카락을 정리한 뒤 선영과 집을 나섰다. 대문을 지난 후에도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예준은 얼른 치문을 당겼다.

*

“형 아파서 홧김에 나갔던 날, 집 앞에서 이 대표 만났어. 너무 어둡고 볼캡 쓰고 있어서 못 알아봤는데 내 앞에 딱 버티고 서는 거 보니까 그 사람이더라고. 이 대표가 제안했어. 형한테 수면제 먹이는 거.”

대강 짐작하고 있던 이야기였다. 초콜릿 과자를 씹으며 말하는 치문을 보고 예준은 잠자코 눈을 내리떴다. 성정대로라면 치문이 먼저 연락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으나, 결국 태경이 먼저 자신을 찾아낸 게 맞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마음먹으면 못 찾을 인간 없어. 흔적 안 남기고 잠적하긴 어려우니까.”

그렇다면 보스나 정명 형님이 제 거처를 알아내기도 어려운 일은 아닐 터였다. 고립되어 생활하고 있다지만 태경은 타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길 꺼리지 않았다. 처음은 분명 도피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생활의 터전을 옮긴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보스나 정명 형님한테 연락 없었어? 미행이 붙었다거나, 그런 낌새는?”

우려를 떨치지 못한 예준이 물었다. 조직원들은 악랄하고 끈질긴 편이었다. 걱정과 달리 치문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보스는 이 대표가 카바 쳐 주겠지. 그리고 정명 형님은 우리 찾아낼 일 없어. 영영.”

확신에 찬 어조가 믿기지 않았다. 때때로 물렁물렁해 보여도 치문 역시 뼛속까지 조직원의 기질을 갖춘 사람이었다.

“어떻게 확신해. 떠나던 날 그 창고도 찾아왔는데….”

예준의 흰 낯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치문은 퉁명스레 답했다.

“죽었어. 그 새끼.”

예준의 두 눈이 커졌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를 보며 치문이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죽었다 깨어나지 않는 이상 우리 못 찾아.”

치문이 사납게 과자를 씹어 댔다. 쌓인 게 많아 이를 가는 눈치였다. 예준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아 굳어 버렸다. 조직에서 십수 년을 버틴 사람이 죽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치문과 자신이 떠난 시점에.

“죽었다고?”

“죽었어.”

“어떻게 죽었는데?”

치문이 작은 눈을 좌우로 굴렸다.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는 기색이 수상했다.

“이 대표한테 물어봐. 나도 그쪽 통해 들었으니까.”

예상치 못한 이름에 예준이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는 보스의 아들이나 조직의 가담자가 아니었다. 자신을 추적하다 정명의 발자취까지 찾아내게 되었을까? 사채를 갚는 과정 중에 무언가 알았다면 태경이 그를 가만둘 리 없었다. 돈을 빌미로 괴롭힌 것도 모자라 접대를 주선한 자가 바로 정명이니까.

예준은 불길한 직감을 지우지 못했다.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며 치문을 보았다.

“혹시 그 사람이….”

“부하들한테 당했다고 들었어. 확실히는 몰라, 나도.”

수년간 자신을 괴롭혔던 정명이 죽었으니 통쾌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배제할 수 없는 의심이 남았다. 화살이 향한 방향이 분명했기에 예준은 불안했다. 마음 한구석이 서걱거렸다.

“잘 죽었네, 하면 그만이야.”

치문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보스와 정명 중 하나는 사라져 다행인가 싶었지만, 애초에 정명은 보스의 부하일 뿐이었다. 먹이사슬 가장 위에 있는 이는 아직 완고했다. 제 연인의 양부이자 탄탄한 기업의 회장, 동시에 한 조직을 이끄는 보스 이석준이었다.

태경의 속내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도 한결같이 평온한 그의 태도가 예준을 초조하게 했다. 가족의 연으로 묶인 데다 거대한 조직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었다.

태경이 위험에 빠지는 일만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태연한 치문과 달리 예준은 쉬이 마음을 놓지 못했다.

*

미팅 룸으로 들어선 선영이 양손을 허리 위에 올려놓았다. 서류 더미 위에 치문의 것을 더한 태경은 테이블 의자를 당겨 앉았다. 느긋한 태도를 지켜보던 선영이 테이블을 탁, 내려쳤다.

“이게 다 뭐야. 너 뭐 하자는 거야?”

정 사장으로부터 건네받은 두화건설 하청 업체 관련 자료였다. 명성건설과의 연관성도 대강 소명되었고, 자료에는 명성건설이 두화건설을 통해 오랜 시간 자금 세탁을 해 왔다는 정황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청 업체들이 몇 번이나 사명을 바꾸고 기록을 은폐했기에 가닥을 잡기가 까다로웠다. 정 사장이 아니었다면 근간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터였다.

두화건설이 세탁한 자금은 서울 일대의 조직에게로 흘러들어, 세력을 불리고 더 큰 자금을 불러들이는 데 사용되었다. 인신매매, 성매매, 도박, 마약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정황이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 여기 있는 자료들도 아직은 정황일 뿐이고.”

“이게 다 어르신 작품이라는 거야?”

“어.”

태경 못지않게 이 회장을 존경해 온 선영이었다. 충격이 가시지 않는 듯, 연거푸 한숨을 내쉰 그녀가 물었다.

“넌. 괜찮고?”

가장 충격을 받을 사람을 꼽으라면 태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싣지 않은 눈빛으로 답했다.

“아버지 과거가 어땠는지 알고 있었으니 대단한 반전은 아니야. 배신감 같은 건 느낄 여유도 없고 관심도 없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이 정도 스케일이면 예준 씨랑 만난 거 마냥 우연으로 보기도 힘들어.”

미간을 좁히는 선영을 향해 태경이 웃었다.

“우연 아니면.”

“필연이지, 악연일 수도 있고.”

어떻게 이름 붙이든 상관없었다. 예준이 이석준 회장의 정체를 밝히는 시발점이 되긴 했지만, 결국 그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사람은 태경이었다. 안온한 일생의 일부에는 후계자가 되기 위한 밑거름이 존재했다. 재력의 덕을 본 건 사실이나 태경이 일군 것들은 이 회장의 통제 아래 있지 않았다. 다행인 일이었다. 그에게서 독립하고자 했던 욕망이 일종의 본능이자 직감이었다는 게.

“합병 얘긴 어르신 협박이야?”

“LK를 명성건설로 흡수시켜서 당신 후임으로 날 앉히겠다는 생각이야.”

선영이 다시 한번 테이블을 내리쳤다.

“우리가 어떻게 키운 회산데!”

“그러니까. 그럴 일 없어. 막다른 길로 몰리면 나만 물러나면 그만이지.”

“야, 이태경.”

“대표 자리 생각해 둬. 놓치기 싫은 게 있으면 희생해야지. 언제까지고 좋아하는 일만 할 순 없잖아.”

“꼰대 나셨네.”

비웃은 선영이 덧붙였다.

“잘 생각해, 너. LK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이태경이 대표여서일 수도 있어. 내 성격 알지? 난 너처럼 회사 못 이끌어. 얼마 안 가 침몰할 거야.”

“칭찬은 고마운데.”

“칭찬으로 듣지 말고, 정신 차리란 뜻이야. 어르신 상대해야 한다면 기꺼이 할게. 우리 회사는 지키자. 어?”

회사 운영은 늘 뒷전이던 선영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LK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태경 못지않기 때문이었다. 밑바닥부터 발로 뛰어 일군 성과였다. 표면적으로는 머리와 부속 같은 관계지만, 실상은 완벽히 맞물린 톱니바퀴나 다름없었다. LK는 선영과 태경, 둘 중 하나 없이 굴러가기 어려웠다.

“회사도 지키고 너도 자리 지켜. 명성에 숙이고 들어갈 이유도 없고, 어르신이 합병 쪽으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거절하면 그만이잖아. 누구보다 깨끗이 운영한 회사야. LK엔 흠 없어. 흠잡아서 구실 못 만든다고, 너도 알다시피.”

선영이 한배에 타길 마다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태경은 이미 알았다. 막역한 친구이자 동료니까. 겹겹이 쌓인 세월이 견고하게 다져진 두 사람의 우정을 증명했다.

“명성 쪽에서 우리한테 흠집 내기 어렵지 않을 거야. 흠이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지. 조직에서 하는 일이 그거잖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태경은 어딘가 절박한 선영을 보며 경고했다.

“다칠 것 같으면 물러나는 게 최선이야.”

“그래서. 어쩔 생각인데?”

선영이 대답 대신 질문을 내놓았다. 태경은 잔뜩 쌓인 서류들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아버지한테 받은 게 많아.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막막할 정도지.”

“은혜 갚아도 모자랄 판에 키워 준 어르신 목을 물어뜯을 판이잖아.”

“복수하려는 게 아니야. 내가 뭔가 한다면 그건 악당들에게 칼자루를 쥐여 주는 일이지, 직접적인 공격은 아닐 거란 의미기도 하고.”

선영이 의문스럽게 물었다.

“공격이 아니면?”

“아버지의 약점은 당신 스스로 만든 거야. 가면을 쓴 것도 아버지고, 지하 세계를 호령한 것도 아버지니까.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인격을 죽이고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렸겠어. 균열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돼. 원망 품은 사람들만 해도….”

태경은 무고한 예준과 오점 하나 없었던 자신의 삶을 떠올렸다. 세상은 평등하지 않았다. 자신이 우위에 있을 때, 누군가의 인생은 밑바닥에 눌어붙었다. 그 괴리가 견디기 힘든 죄책감을 불러들였다.

“명성이든 조직이든, 애초에 터도 다지지 않고 막무가내로 쌓아 올린 꼴이겠지. 조금만 충격이 가도 무너져. 이 방대한 자료가 그걸 증명하는 거고.”

선영이 거칠게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태경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덧붙였다.

“그게 어떻게 공격이야, 자멸이지.”

선영은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직시하는 태경은 여전히 차분하고 자신만만했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해야 할지,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었다. 선영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너도 분명 잃는 게 있을 거야.”

“난 좀 잃어도 돼.”

“뭐?”

“평생 누리고 살았어. 그러니 좀 잃어도 된다고.”

단호히 답한 태경이 턱을 괴었다. 그의 입가에 은은히 번지는 미소가 누구 때문인지는 명확했다. 골치가 아파 관자놀이를 눌러 대는 선영과 달리 태경은 부드럽게 눈을 내리뜰 뿐이었다. 그가 읊조리듯 말했다.

“하나만 지키면 돼. 간단하지.”

“사랑에 목매는 건 좋은데 이성은 좀 찾지, 이 대표?”

유순하게 연인을 떠올리는 우성 알파라니. 늘 말했듯이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선영은 하마터면 제 친구의 멱살을 쥘 뻔했다. 대신 드넓은 그의 어깨를 퍽퍽 두드린 그녀가 의자를 끌어 태경 앞에 앉았다.

“예준 씨 데리고 서울로 와. 여기에 있다고 해서 어르신이 못 찾을 거란 생각 안 하잖아.”

“아버지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예준이가 원해서 있는 거야. 낯선 곳에서 둘이 시간 보내는 거 나쁘지 않아. 일이야 어디서든 가능하고.”

“첫사랑도 아닌데 왜 그렇게 유난이야.”

첫사랑이 언제였던가. 의미를 두기엔 너무나 까마득했다. 이왕 목을 맬 거라면 첫사랑보다는 마지막 사랑 쪽이 더 가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잔소리 그만하고 자료나 열정적으로 분석해 줘. 이것뿐만 아니라 LK와 명성 사이에 오간 대가가 없다는 사실 미리 소명해 놓는 것도 중요해.”

“넌 사랑놀이나 하고?”

“이미 절반은 해 뒀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 그리고 짚어 두자면, 너도 이 와중에 네 오메가들이랑 안 노는 거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경중은 다르겠지만.

속삭인 선영이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했다. 이내 정적이 감돌자, 재킷을 벗은 그녀가 태경의 눈앞에 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확인했어? 인터넷 가십 기사긴 한데 원하던 대로 사진은 잘 나왔네.”

사진 속엔 행사장에서 찍힌 태경과 예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 회장을 만나기 직전, 태경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걷던 예준의 얼굴은 아직 상기된 채였다. 늘씬한 체구, 흰 낯에 귀티가 흘렀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기에 예준이 보면 기함할 터였다.

전도유망한 건축가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성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간극이 역시 화제였다. 아버지의 구설수로만 언급되었던 예준의 최근 모습에 놀라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태경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가 액정 속의 예준을 어루만졌다.

“예쁘지. 근데 예쁜 걸 굳이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알릴 필요가 있나 싶다.”

“의도해 놓고 무슨 딴청이야.”

물론, 태경도 제 말의 모순을 잘 알고 있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꽁꽁 감추고픈 마음이 늘 상충했으므로.

“이니셜도 아니고 이름 석 자 찍힌 거면 작전은 성공인데. 그때 바란 건 결혼뿐이었으니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지.”

“어르신 뒷목 잡겠네. 더럽게 잘 어울려서 나까지 화날 정도니까.”

태경이 소리 없이 웃었다. 예준이 이 회장을 맞닥뜨리기 직전까지만 해도 보편적인 행복을 꿈꾸었다. 뜻하지 않던 결혼을 강행하려 마음먹은 데는 단순한 결속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예준 씨는 모르지?”

“어.”

예준은 아직 새 핸드폰을 사지 않았다. 세상과의 단절이 회복에 도움된단 사실을 아는 탓이었다. 태경이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며 으름장을 놓았다.

“입조심해.”

“뭐, 당분간은.”

고분고분 답한 선영이 가장 두꺼운 서류 더미를 끌어와 펼쳤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돌아가기까지 한 시간은 거뜬히 남아 있었다. 큰맘 먹고 부산까지 내려왔는데 활자가 빼곡한 종이 따위에 파묻혀 있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 일에 누군가의 운명이 걸렸다. 선영이 태경을 직시하며 말했다.

“빡 집중하고, 돌아가선 모른 척하는 거야.”

“어.”

“그리고 치문이 나 줘. 서울 데려가서 좀 쓰게.”

“추파는 던지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해.”

전적이 화려한 선영이기에 태경의 단속이 이어졌다. 코웃음 치며 무시한 선영은 빠르게 문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른 태경이 방해하듯 손을 내밀었다.

“펜 없어.”

“살판나셨어, 아주.”

구시렁댄 선영이 태경 앞으로 펜을 굴렸다. 펜을 쥔 태경은 이내 몰입했다. 선영과 함께 차분히 정돈되는 분위기가 LK에 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회와 삼겹살, 소주까지 거창한 한 상이었다. 양손 가득히 먹을거릴 사 들고 온 선영 덕분에 예준과 치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습관적으로 짐을 받아 드는 치문을 뒤로하고 느릿하게 걸어 나온 예준이 태경의 팔꿈치를 쥐었다.

“뭘 이렇게 많이….”

“기분 좀 내고 싶대. 그냥 둬.”

예준의 손목을 이끌어 손을 맞잡은 태경이 집 안으로 향했다. 곧장 따른 예준은 부실한 개다리소반을 꺼내는 태경과 치문을 지켜보았다. 긴 머리를 질끈 묶어 올린 선영은 소주를 세팅했다. 음식의 절반은 바닥에 둔 채 둘러앉자 좁은 집이 꽉 차 버렸다.

“집이 좀 좁다.”

“불청객이 많으니까.”

선영이 투정하자 태경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치문으로서는 최선의 집을 구한 것이었기에 녀석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분위기가 멋쩍어 예준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선영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소주 한 병을 들어 보였다.

“안주부터 먹고 마셔요.”

콕 집어 저에게만 말하기에 뜨끔했다. 예준은 몸에 해로운 걸 해 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몸은 거의 회복했지만 태경의 간섭이 극성맞을 정도였다. 은근히 눈을 맞추자 태경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응.”

의외의 허락에 굳었던 예준의 표정이 풀렸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불그스름하게 변한 하늘을 곁눈질한 예준이 불판에 고기를 굽는 치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은 담백한 음식만 먹어서 육즙이 당겼다. 가만히 바라만 보자, 치문이 익은 고기 한 점을 예준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꼭꼭 씹어 먹어.”

“이제 안 체해.”

치문까지 애 취급인가 싶어 예준은 금세 불판에서 눈을 떼어 냈다. 화끈한 뒷덜미를 긁으며 딴청을 피우자 선영이 소주 한 잔을 따라 내밀었다.

“안주부터.”

그러나 첫 잔은 태경에게 저지당했다. 태경이 쓴 소주를 가로채 삼켰다. 앞접시에 이것저것 챙겨 주기에 예준은 우선 그것부터 해결할 작정이었다.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으나 음식은 달았다. 앞접시 하나를 다 비웠을 때 두 번째 잔을 받았다. 홀짝 들이켜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봤자 다섯 잔이나 비웠을까. 적당히 취기가 오르니 담배가 끌렸다. 예준은 치문의 바지춤으로 손을 뻗어 담배를 꺼냈다.

“나 한 대만 피울게.”

치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준은 눈동자를 굴려 태경의 답을 기다렸다.

“한 대만.”

“응.”

조건을 걸긴 했으나 허락이었다. 예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닫이문으로 다가섰다. 또 허락이 필요했다.

“담까지만 나갈게.”

“알았어.”

선영이 어깨를 흔들기 시작했기에 예준은 바로 치문과 태경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깜깜하게 내려앉은 밤을 부둣가의 불빛이 밝히고 있었다. 바람은 선선했고 취기 탓에 몸은 뜨거웠다. 평소보다 훨씬 쉽게 취했지만 싫지 않았다.

대문을 나서 담 곁에 선 예준이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여 깊게 한 모금 빨자 빨라진 심장 박동이 절로 느껴졌다.

곧이어 들리는 발소리를 예상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흘끗 시선을 들자 장신의 남자는 벌써 지척에 다다라 있었다. 예준은 부담을 떨치고 태경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어설프게 불을 붙여 주자 그는 익숙하게 필터를 빨아들였다.

“안 추워?”

“응.”

춥지 않다고 말했는데도 태경이 등 뒤로 몸을 안아 왔다. 예준은 그의 담배가 귓가에 닿을까 봐 등을 굽힌 채 고개를 기울였다. 면역제 탓에 페로몬은 코끝을 간지럽히기만 할 뿐 짙지 않았다. 그저 손끝이 따끔따끔할 정도였는데도, 예준은 담배를 반 개비만 태우고 비벼 껐다.

담배를 모두 태운 태경이 속삭였다.

“쟤들 가라고 할까.”

자유로워진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쌌다. 그의 두 손이 배 위에 놓였다. 어지러운 담배 향에 예준은 말간 눈만 감았다 떴다.

“음. 글쎄….”

다정하게 굴긴 했지만 최근의 태경은 스킨십에 제동을 걸기 일쑤였다. 접촉에 성적인 함의를 담지 않은 지 오래되었고, 몸을 꼭 맞붙이는 것도 잠들 때뿐이었다. 임신으로 꽤 지독하게 아팠으니 그쪽으론 어떤 압박도 주고 싶지 않을 터였다.

그가 이제껏 보여 준 성욕에 비하면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더불어 술이 사람의 자제력을 잃게 한단 사실을 뼈저리게 잘 아는 예준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열 오른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짧은 뽀뽀가 마치 브레이크에서 그만 발을 떼고 싶다는 신호로 느껴졌다.

예준은 바짝 긴장하여 돌아섰다. 순순히 놓아준 태경은 곧이어 담 가까이 예준을 밀어붙였다. 발이 어긋나 살짝 비틀거린 예준이 낮은 벽면에 기대섰다.

“…….”

“…….”

다음에 무엇이 올까 궁금해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는 눈. 태경은 예준이 그런 눈빛을 해 보일 때가 좋았다. 그가 코끝을 부드럽게 맞대었다.

“술, 달았어?”

“응.”

예준의 아랫입술을 할짝거린 태경이 물었다.

“이것보다 달았어?”

“아니.”

곧이곧대로 답한 예준이 웃었다. 태경이 말려 올라간 예준의 입꼬리를 만지작거렸다.

“드디어 웃네.”

그러고 보니 마음 놓고 웃어 본 일도 오랜만이었다. 최근엔 감정의 높낮이가 크지 않았고 평화로운 일상만 보내고 있었다. 대단한 이벤트가 없긴 했지만 남자가 제 웃음 따위에 신경을 쓰고 있는 줄은 몰랐다.

쪽, 쪽….

좁은 턱 끝을 쥐고 입 맞추는 소리가 사랑스러웠다. 태경의 시선은 이내 예준의 웃는 낯에 고정되었다. 미지근한 미소일 뿐인데도 태경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귀엽다.”

굳이 소리 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예준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슬쩍 시선을 피하자 이번엔 귓가에 입술이 닿았다. 스킨십의 농도가 짙어졌다. 그가 몸을 더 깊숙이 밀착하며 다리 사이에 탄탄한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으응….”

큰 손으로 뒤통수를 감싼 채 귓불과 목선을 따라 정신없이 입을 맞추어 댔다. 코끝을 비벼 향기를 들이마시거나 혀끝을 할짝대며 혼을 쏙 빼놓기도 했다. 곧이어 강하게 허리를 쥐는 힘이 느껴졌다. 예준이 아연실색하며 태경을 밀어냈다.

“형. 잠시만….”

담이 낮았다. 어쩌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애정 행각을 들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손바닥에 닿은 남자의 가슴팍이 뜨거웠다. 선선한 밤바람에 비해 후끈한 체온을 감지한 예준이 곤란한 눈빛으로 남자를 보았다.

“해도 돼?”

그가 허락을 구했다.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예준이 머뭇거리며 집을 흘끗거리자 태경이 흘러내린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싫다고 하면 그만할게.”

“뭐가 싫어?”

“이런 거. 아직 싫을 수도 있으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는 입술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못했다. 쪽쪽거리는 소리가 좁은 골목을 울렸다. 예준이 간지러워 몸을 떨었다.

“괜찮아.”

싫을 리가 없었다. 떠올리기 싫은 일을 뒤로 하는 법을 천천히 배워 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것이 감정의 근간을 뒤흔들진 못했다. 막상 하게 되면 조금 힘들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달콤한 방식이라면.

“좋아. 싫을 리가 없잖아.”

그간 절제했던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잘 알았다. 예준이 태경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발끝을 들어 입을 맞추자 남자의 입술이 벌어졌다. 몸이 뒤로 훅 밀리더니 따뜻한 혀가 입 안을 침범하고 들어왔다. 예준이 고개를 기울였다. 목구멍에 닿을 듯 깊게 들어온 혀가 내부의 점막을 샅샅이 핥았다.

끄응, 끄응…. 예준의 잇새에서 고양이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맞닿은 앞섶이 노골적으로 비벼졌다. 숨이 턱 막혔다.

“하아, 하아…. 천천히….”

“후…. 괜찮아?”

“응. 괜, 찮아….”

단계마다 확인할 심산 같았다. 입 맞추어도 괜찮은지, 더 음란하게 몸을 지분대어도 괜찮은지. 허리에 놓여 있던 남자의 손이 결국 엉덩이를 콱 틀어쥐었어도 괜찮았다. 둔부를 강하게 주무르고 허벅지 뒤쪽을 감싸 성기 쪽으로 당기는 힘에도 예준은 겁을 먹지 않았다.

누구도 아닌 태경이니까. 그와의 접촉이 얼마나 황홀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쁜 기억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바지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뒤쪽의 습한 골 사이로 단단한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페로몬 없이 할 거야.”

“읏. 그럼… 몸이 안 열… 려….”

“풀어 줄게. 오래.”

입 맞추다 턱을 잘근 씹는다. 고개를 젖힌 예준이 눈동자를 굴렸다. 페로몬만 풀면 금세 열려 버리는 미끈미끈한 구멍이 싫을 알파는 없었다. 그걸 손으로 직접 하겠다는 거였다. 얼마가 걸리든.

울컥, 애액이 맺혔다. 페로몬에 잠식당했을 때처럼 과한 양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단번에 인지한 태경이 예준의 목덜미를 쪽 빨아올렸다.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소리 안 낼 수 있겠어?”

“뭐, 뭐 할 건데?”

“손으로 풀어 줄 거야.”

예준의 항문은 작은 틈도 없이 오므라져 있었다. 태경이 능숙하게 그 틈을 파고들었다. 뼈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팽팽한 근육을 벌렸다.

“아읏….”

꽉 조였다. 예준은 들이치는 배설감에 어쩔 줄 몰라 몸을 빼려고 했다. 오랜만의 행위여서 예상보다 쾌감이 낯설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뒤채기만 하자 태경이 뺨을 맞대었다.

“불편해?”

“…이상해.”

고작 손가락 한 마디에 어쩔 줄 몰랐다. 예준의 때 아닌 어수룩함이 오히려 태경의 욕망을 고조시켰다. 좀처럼 힘을 풀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앗! 아프…!”

예준이 태경의 목을 덥석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태경에게는 예준의 헐떡이는 폐부마저 자극이었다.

남자의 안광이 빛난 줄도 모르고 예준은 고개를 파묻었다. 단단한 남자의 어깨가 젖어 들었다. 예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티셔츠에 얼룩을 남긴 탓이었다.

“이래서 좆은 어떻게 받게.”

“하아…. 소리 못 참겠어.”

파고든 손끝이 기분 좋은 곳을 꾹 눌렀다. 예준은 거의 도리질 쳤다.

“하읏, 윽….”

감당하지 못하기에 태경이 손가락을 빼내었다. 미끄덩한 애액이 딸려 나와 피부 위에 묻었다. 투명한 점액을 엉덩이 사이에 치댄 태경이 예준과 눈을 맞추었다.

“하지 말까?”

예준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붉어진 눈가에 억울한 기색이 비쳤으나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예준은 치솟는 성감을 잠시나마 가라앉히기 위하여 무심하게 켜진 가로등을 곁눈질했다. 알알이 맺힌 벚꽃을 밝히는 빛. 태경과 자신이 선 곳까진 닿지 못해 사위가 어두웠다. 파르르, 떨리는 낡은 등을 외면한 예준이 태경의 트레이닝팬츠 위를 더듬었다.

어찌나 흉흉하게 부풀었는지 만지는 것만으로 배가 조여들었다. 태경이 잇새를 짓씹어, 턱 근육이 패었다 제자리를 찾는 것이 보였다. 예준이 숨죽여 말했다.

“가라고 해….”

“가라고 해?”

“응.”

얇은 천 위로 선명히 도드라진 기둥을 주물렀다. 태경이 흠칫 몸을 떨었으나 곧 예준을 품속에 파묻어 가두었다. 조그마한 뒤통수를 감추듯 감싸 쥔 그가 마침 미닫이문을 열고 나오는 치문을 보았다. 담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치문은 인사불성인 선영을 업은 채였다.

“가게?”

그가 태연히 물었다. 치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꽐라 다 됐어요. 그냥 데리고 갈게요, 내가.”

“그럼 고맙고.”

치문은 태경의 품속에 갇힌 예준을 의아하게 보았다. 그들이 둘도 없는 연인 사이임을 알기에, 그는 말을 보태는 대신 인사를 건넸다.

“형, 또 올게.”

“…응.”

예준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배 부근에 남자의 발기한 성기가 꽉 짓눌려 있었다.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라 치문을 마주하긴 어려웠다. 천만다행으로, 치문은 대문을 뻥 걷어차곤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선영은 기절해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예준은 태경의 품 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훌쩍 들렸다. 예준을 번쩍 안아 든 태경이 저벅저벅 집 안으로 향했다. 엉망이 된 주방을 지나 방으로 곧장 직행한 그가 두툼한 이불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그러고는 제대로 펼치지 않은 이불 위에 예준을 눕혔다. 부드럽게 안착한 예준은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남자가 제 티셔츠를 들추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말했듯이, 힘들면….”

“말할게.”

녹록지 않은 일을 겪었다. 다만 그의 곁에서 회복했으니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예준은 가슴께에 닿는 촉촉한 입술을 느끼며 남자의 뒤통수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유두를 빠는 입술이 제법 거칠었다. 예준이 훅 고개를 젖혔다.

“아!”

태경이 돌기를 따라 혀를 덧그렸다. 잘근 씹어 도드라지게 만들곤 색이 옅은 유륜까지 한 번에 머금어 강하게 흡입했다. 예준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발버둥 쳤다. 바지에 갇힌 성기가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아…, 형….”

태경이 더운 듯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곧장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드러난 맨몸이 사납게 달아올라 있었다. 예준이 떨리는 손끝으로 불거진 근육을 더듬었다. 그보다 더 빨개지는 남자의 낯빛과 터질 듯한 심장 박동이 생경할 지경이었다.

예준은 스스로 바지를 끌어 내리다 남자의 손길에 저지당했다. 태경에 의해 나신이 되기까진 순식간이었다. 비부를 활짝 벌린 채 예준은 애꿎은 이불자락만 끌어다 쥐었다.

오금을 잡아 고정한 태경의 눈이 오물거리는 구멍에 가닿았다. 그가 바지를 내리자 발기한 성기가 퉁 튕겨 나와 꼿꼿이 섰다.

미소를 띤 채 바라보는 태경의 눈이 매혹적이었다. 예준은 환히 불 켜진 방이 거슬렸으나 시선을 피해 부끄러움을 상쇄했다. 곧이어 몸을 맞붙인 태경이 키스했다. 다시, 천천히 고조되는 성감이 좋았다. 예준은 조용히 입술을 벌리고 남자가 노골적으로 넘긴 타액을 받아먹었다.

“하아….”

태경이 허벅지를 주물러 긴장을 풀게 했다. 이번에는 허락을 구하지 않은 손가락이 구멍을 파고들었다. 제 목덜미에 안면을 파묻은 남자가 크게 헐떡였다. 구멍 안쪽의 부드러움이 어떨지 알았다. 쉼 없이 조이는 감각을 자신도 느끼고 있으니 단지 손가락만으로도 쾌감이 치밀 터였다.

“좁아. 미치겠네….”

“…안 열려.”

자신 없이 말하자 그가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네 탓 아니야.”

뺨에 입 맞추고 물러난 남자가 향한 곳은 예준의 다리 사이였다. 그가 예준의 성기와 고환을 모아 잡은 채 회음부를 길게 핥았다. 허벅지 안쪽까지 이어진 힘줄을 잘근 씹고 연한 피부 위에 키스 마크를 남겼다.

예준은 순순히 엎드려 다리를 벌렸다. 태경은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힘껏 벌려 구멍을 드러냈다. 새끼손톱만큼 벌어진 구멍이 발갛게 오물거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귀두도 어림없었다. 그가 입술을 축인 뒤 혀를 내어 구멍 안쪽으로 쑤셔 넣었다.

“하읏…!”

제법 질긴 입구가 푹 벌어졌다. 혀끝으로 입구의 점막을 건드리며 손가락 두 개를 쑤셔 넣자 예준이 마른 몸을 바르작대었다. 태경이 가위처럼 손가락을 벌렸다. 좁은 입구를 억지로 헤벌리는 행위였지만 예준은 반항하지 않았다.

“흐읍, 으….”

구멍 안쪽에 타액을 듬뿍 묻힌 태경이 내장을 뽑아 낼 듯 빨아들였다.

“아, 아응!”

질척질척한 입소리가 난잡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예준의 성기 끝에 투명한 액이 맺혔다. 엉덩이가 높이 치솟았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태경이 양 볼기를 꽉 틀어쥐었다.

“흥분돼?”

“으응. 조, 좋아….”

“하…. 젖었어.”

“좀… 벌어졌, 어…? 거기….”

“전혀.”

태경의 목울대가 울컥거렸다. 그가 허벅지에 걸쳐 있던 바지를 완전히 벗은 뒤 귀두를 엉덩이 사이에 비볐다. 입구의 점막을 강제로 열었으나 튕겨 나오기만 할 뿐, 삽입은 무리였다.

그가 양 볼기를 안쪽으로 힘껏 모았다. 부드러운 살덩이로 혈관이 도드라진 성기의 표피를 비볐다. 그 정도로는 어림없는 크기였다.

“아, 형…. 가, 간지러워….”

예준은 태경에게 잔뜩 쑤셔지고 싶어 안달이 났다. 갈증은 목을 축여야만 해소되는 법이었다. 입구만 비벼 대고 있으니 쾌감이 증폭될 리 없었다.

“페로몬 열어.”

“면역제 때문에 잘 느끼지도 못해.”

“그래도. 빨리할 수 있잖아.”

“풀어 줄게.”

“…안 풀어도 돼.”

예준이 몸을 바로 한 뒤 태경을 당겨 안았다. 마찰로 화끈하게 부푼 남자의 입술을 물고 오물거렸다. 혀를 내어 비비자 태경의 손가락이 내벽을 깊이 찌르며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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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읍, 아아!”

“안 풀어도 돼? 뻑뻑하게 할까?”

“으응, 으!”

그러기엔 이미 네 손가락이 다 들어온 상황이었다. 태경이 손까지 다 집어넣을 기세로 쑤신 뒤 손목을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입구가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벌어졌다. 너무 늘어져 질퍽하게 샌 애액이 꼬리뼈를 타고 흘렀다.

“하악, 아!”

찰박찰박, 젖은 구멍에서 요란한 소음이 났다. 태경이 손가락을 휘돌리거나 벌릴 때마다 빨갛다 못해 검게 깊은 곳까지 드러났다.

예준이 곱아든 발로 태경의 어깨를 밀어냈으나 가당치 않은 힘이었다. 울먹울먹 차오른 소리가 목 안에 갇혔다. 벌리고, 또 벌렸다. 안이 온통 들쑤셔지는 기분에 선을 넘을 듯 말 듯한 아슬아슬한 스릴감이 전신을 뚫고 들이쳤다.

“하으응!”

다시 오므라들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야 태경은 깊게 박힌 손을 빼내었다.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선연한 감각에 예준이 허벅지를 덜덜 떨었다. 태경은 예준의 입술을 짓씹으며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동시에 성기가 꾸역꾸역 안을 벌리며 들어왔다. 한 번에, 끝까지 도달한 성기는 몸을 가를 듯 퍽 처박혔다.

“아아!”

“하아… 예뻐.”

“흐읏, 기, 깊어….”

이내 부드럽게 둥글리는 행위에 몸속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예준이 젖은 눈을 깜빡이며 태경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배가 터질 듯 꽉 들어차는 감각이 미치게 좋았다. 숨 쉬는 법도 잊은 채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너랑 이 짓 하고 싶어서 도는 줄 알았어.”

저라고 달랐을까. 예준이 말간 눈을 감았다 떴다.

“시도 때도 없이 붙어먹을 수 있겠어?”

“읍, 으, 꽉, 흐으, 찼어!”

전신을 관통하는 날것의 감각이 좋았다. 그와 달콤한 분위기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서로의 살과 뼈를 발라 먹을 듯 깊게 맞닿을 때도 좋았다. 묵직하게 누르는 무게감이, 아래를 퍽 쳐올리는 힘이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뿌리까지 세게 박힌 성기가 러트 때처럼 부풀길 바라는 심정은 오메가라면 당연히 느끼는 것이었다. 그 쾌감을 아는 예준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하아, 읏….”

“후, 힘 조금만 더 빼 봐….”

페로몬 없는, 형질의 구속에서 벗어난 섹스는 불편했다. 애액이 충분하지 않아 뻑뻑했고 단숨에 절정에 도달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간질간질한 한계점이 오히려 가슴을 터질 듯 뛰게 했다. 예준은 태경이 제 몸 구석구석 공을 들이는 게 좋았다.

“후…. 얼마나 해야 열리겠어.”

성기가 한참 드나들었음에도 삽입이 수월해지지 않았다. 성기를 빼낸 태경이 다시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마찰로 하얗게 변한 애액을 닦아 낸 그가 부풀어 오른 입구를 혀로 핥았다. 닿자마자 바짝 오므라든 구멍은 이내 벌어졌다.

“으응…!”

바로 성기를 반쯤 밀어 넣은 태경이 예준의 성기까지 움켜쥐었다. 처음부터 강하게 훑어 올리자 예준이 자지러지듯 신음을 쏟아 내었다. 움찔움찔 조여 대는 감각을 느끼며 끝까지 꽂아 넣었다. 그러자 고조되는 시간 없이 정액이 튀었다.

“하아! 아응!”

태경이 기둥과 귀두를 한 번에 짜내었다. 예준의 정액이 남자의 손을 타고 흘렀다. 첫 순간 튄 것들은 목이나 가슴, 배 부근까지 얼룩을 남긴 뒤였다.

태경은 사정 후에도 강직도가 제법인 예준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목구멍까지 억지로 쑤셔 넣어 애무하자 예준이 어깨를 발로 밀기 시작했다.

“하윽, 그만! 아으!”

태경은 자신의 축축한 목구멍을 가학적으로 찔러 대었다. 단단한 목이 성기의 부피감으로 부풀 때까지 깊게 밀어 넣었다. 벌어져선 안 될 크기로 벌어진 목 안쪽이 예준의 성기를 쉼 없이 조였다.

“큭…!”

정신없이 오물대는 구멍엔 손가락을 끼운 채였다. 성감을 돋우자 구멍의 긴장이 덜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이나 성기를 빨던 그가 일순 파고든 것을 뱉어 냈다. 숨을 몰아쉬는 얼굴에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하아, 하아…!”

입술을 닦아 내며 웃는 태경을 보고 예준은 연이어 사정했다. 그의 얼굴과 입술에 점액질이 튀었다. 이번에 태경은 예준의 정액을 모두 빨아 삼켰다. 사탕처럼 귀두를 혀로 굴리고 기둥을 길게 핥았다.

“읏, 형, 그, 그러다 다쳐.”

“어딜.”

“여기….”

예준이 태경의 목을 어루만졌다. 제 두 손안엔 다 감기지도 않는 단단한 목이었지만 안은 연약할 터였다. 태경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예준의 입술을 할짝댔다.

“네 좆 빨면서 어떻게 됐는지 만져 봐.”

예준은 태경에게 이끌려 검붉은 성기로 손을 가져갔다.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해져 무서울 지경이었다.

성기를 천천히 문지르다 다리를 벌렸다. 그러나 태경이 제 골반을 잡아 모로 눕혔다. 그가 허벅지를 십자로 꿰어 성기를 쑤셨다. 꾸역꾸역 파고드는 섬뜩한 느낌마저 자극이었다.

“아응!”

구멍이 더 벌어져 안으로 공기가 들어갔다. 태경이 성기를 쑤시거나 둥글릴 때마다 뻐억, 뻑, 하며 마찰하는 소리가 샜다. 부끄러워진 예준이 이불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하얀 몸에 온통 손자국이 남았다. 골반을 틀어쥔 태경은 점점 더 거세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아읏, 으응! 하으!”

전신이 마구 들썩였다. 그가 본색을 드러내자 삽입은 더는 부드럽지 않았다. 그는 겨우 녹진해진 입구를 찢을 듯 강하게 성기를 찔렀다. 예준의 배꼽 부근이 불룩 솟았다. 허벅지에 세게 치이는 엉덩이가 마치 맞은 것처럼 붉어졌다.

“하아! 읍, 으!”

꼬리뼈를 누르며 성기를 짓이겼다. 자극점을 찔릴 때마다 충실히 새어 나온 애액이 구멍을 흠뻑 적셨다. 점차 수월해졌다. 성기를 받는 예준도, 예준의 몸을 들쑤시는 태경도 씹는 듯한 조임 대신 빨아들이는 듯한 흡입감에 매료되었다.

질척하고 농도 짙은 감각이 전신을 장악할 듯 몰아쳤다.

“하아, 좋아….”

태경이 예준의 귀에 속삭였다. 얼굴을 붉힌 채 눈을 맞추는 남자에게선 이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예준은 가까스로 숨을 뱉으며 태경의 턱을 쓰다듬었다. 끝내 뺨에 입을 맞춘 채 읊조렸다.

“이제 다… 풀렸어.”

쾌감에 잠식되어 헐떡이던 예준이 남자의 무게감을 견디며 돌아누웠다. 엉덩이를 곧추세우고 그사이 빠져나간 성기를 입구에 조준했다. 푹, 꽂힌 성기가 다시 온몸을 힘 있게 흔들었다.

“하응, 응!”

좁은 방 안에 헐떡이는 숨소리가 가득 찼다. 봄밤과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열기가 공기를 지배했다. 세상에 둘만, 오로지 둘만 남은 듯했다. 예준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들썩이는 뱃가죽을 두 손으로 감쌌다.

“후우…. 아파?”

“아읏, 아, 아니….”

연거푸 찌르고 들어올 때마다 눈가가 젖었다. 툭, 툭, 떨구는 눈물은 고통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마치 몸이 허공에 뜬 듯 가벼웠다. 온통 간지러워 견딜 수 없는 기분은 그와의 섹스가 아니라면 절대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다.

예준이 몸서리치듯 몸을 떨자 태경이 마른 몸을 힘껏 들어 올렸다. 상체를 바로 세운 그가 예준을 품에 안았다. 마주 본 채, 긴 키스가 이어졌다.

남자의 허벅지에 올라앉은 채였다. 무릎을 바닥에 댄 예준은 깊숙이 들어찬 성기가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신음을 내뱉기도 바쁜데, 태경은 그 신음을 삼키듯 자꾸만 입술을 감쳐물었다. 쪽쪽 빨아 대며 혀를 얽고 숨도 쉬지 못하도록 몰아붙였다.

“하아. 달아 죽겠어.”

“읏, 응.”

“하, 부드러워, 예준아….”

“하아, 응…. 느껴져….”

다시, 느린 리듬이었다. 예준은 탈력감을 이겨 내며 겨우 허리를 움직였다. 미동에도 남자는 환희했다.

예준을 힘껏 껴안은 태경이 연한 목덜미를 짓씹었다. 어깨와 손등, 손끝까지 깨물어 의식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예준도 덩달아 태경의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그가 제게 각인했을 때처럼 잇자국을 내었다. 아슬아슬하게 살점을 뜯어내진 않았으나 붉은 생채기가 남았다.

“으응….”

몸속에 들어찬 성기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씹어 주는 게 못 견디게 좋다는 듯, 그가 반대편 목까지 내어 주었다.

예준은 정신없이 태경의 피부 위를 빨아 대었다. 타액을 묻히고 살점을 짓씹고 마구 입술을 비볐다. 턱과 입술까지 아프게 물었는데도, 남자는 가쁜 신음만 쏟아 낼 뿐 마다하지 않았다.

“하아, 씨발, 좋아….”

쾌감에 어깨를 떨기까지 했다. 땀에 젖은 예준의 머리카락을 흩뜨리는 손길에서 조바심이 묻어났다. 면역제의 효과가 덜해지고 있었다. 예준은 향기로운 남자의 피부에 코끝을 파묻은 채 끙끙거렸다. 틈 없이 맞붙은 몸이 너무 뜨거워 등골을 따라 옅은 땀줄기가 흘렀다.

태경이 예준을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창가로 다가가 문을 한 뼘쯤 연 그가 차게 식은 창에 예준의 등을 대었다. 예준은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그러나 마음 놓고 몸을 기대기엔 턱없이 좁은 창틀이었다.

“예뻐.”

볼품없이 젖은 얼굴이 뭐가 예쁘다고. 예준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 끊임없이 말해 주고 있었다.

“미치게 예쁘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해.”

이내 남자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예준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받친 그가 성기를 꾸욱 밀어 넣었다. 예준은 창틀에 의지하기보다 남자에게 매달렸다. 하아, 신음이 새자 태경이 예고 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쿡, 쿡, 처박듯 밀어붙이는 통에 등에 부실한 창이 부딪쳤다.

“아! 아!”

“하아, 세게 해도 돼?”

“으읏, 응! 으응!”

“후…. 다칠 것 같으면 내 어깨 물어.”

말한 태경이 거친 삽입을 시작했다. 예준은 정신없이 흔들리는 두 다리를 남자의 골반에 감았다. 허벅지에 힘을 줄 때마다 구멍이 탄력 있게 조여들었다.

두툼한 성기를 머금은 입구는 한계까지 벌어졌다. 내벽은 뿌리까지 박힌 그것을 쉼 없이 빨아들였다. 무력할 만큼 난잡한 구멍이었다.

“후으, 응! 아읏!”

“하아…!”

“아읍, 으!”

단단하다 못해 딱딱한 성기가 거세게 빨려들었다. 자극점을 넘어 깊게 도달한 성기는 연한 내벽을 거세게 들쑤셨다. 뱃가죽이 들리고 요의가 치달았다. 낯설지 않았다. 남자의 복근에 비벼지던 성기가 묽은 액을 토해 내다 끝내 터질 듯 부풀었다.

쏴아-!

“아아읏!”

이내 남자의 상체를 흠뻑 적시는 물줄기가 느껴졌다. 예준은 차라리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극한의 절정이 이어졌다.

“아응, 흐으윽!”

발작하듯 떨며 울음소릴 뱉어냈다. 태경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제 성기를 쥐고 달래는 대신 더 몰아붙였다.

“하읏, 으, 잠깐…, 흐윽!”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바닥이었다. 태경이 아플 만큼 다리를 벌려 고정한 채 좆을 쑤셨다. 예준은 남자의 복부를 밀어내며 온몸을 뒤채었다. 어림없었다. 구멍이 화끈거려 죽어 버릴 것 같다고 느낄 즈음, 또 한 번 성기가 꿈틀대었다. 투명한 액이 뿜어져 나와 다시 태경의 상체를 흠뻑 적셨다.

“하아, 예뻐.”

“아으! 흐, 못 참겠어, 아아!”

“더 적셔 줘….”

“…안 돼, 그, …그만!”

그가 성기를 쥐어짜듯이 움직였다. 남은 물마저 모두 뱉어 내자 몸과 주변이 온통 젖어 있었다. 남자가 몸을 겹쳐 왔다. 닿는 곳마다 미끈해 온몸의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삽입은 그치지 않았다. 더 깊숙이, 거세게 쑤셔져 아래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흐윽, 으응!”

예준은 그제야 남자의 어깨를 물었다. 아프게 피부를 긁자 태경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폐부를 부풀리고 짐승처럼 헐떡였다. 회음부에 남자의 음모가 비벼졌다. 속절없이 꿰뚫렸다. 예준은 태경의 상박을 움켜쥔 채 몸을 떨었다.

“하아…!”

신음한 태경이 상체를 움츠렸다. 사정은 평소보다 길었다. 예준은 고개를 젖힌 채 꺽꺽대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힘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 충만한 기분으로 조여드는 아래의 감각을 느꼈다. 후희가 기대되었다. 그가 꽉 들어찬 성기를 빼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하아…, 하….”

사정을 마친 태경이 예준의 가슴 위로 무너졌다. 그 또한 버겁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몸이 젖고 전신의 근육이 팽팽히 부풀었다. 더 선명히 돋아난 힘줄이 남자의 뜨거운 욕망을 증명하고 있었다.

예준의 입술 위로 태경의 화끈한 입술이 겹쳤다. 태경이 다시 허리를 움직이자 가득 싸 놓은 정액이 예준의 회음부를 타고 흘렀다. 윤활제가 된 점액질 덕분에 뻑뻑하던 구멍이 더할 나위 없이 미끄덩거렸다.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내벽이 쩍 달라붙어 쾌감이 몰아쳤다.

예준은 끈적한 눈빛으로 태경과 눈을 맞추었다.

“왜 이렇게 많이 쌌어.”

말한 예준이 벌벌 떨며 구멍으로 손을 가져갔다. 질척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태경이 젖은 그의 몸과 예준의 배 부근을 누르듯 매만졌다.

“먼저 싼 게 누군데. 야해. 돌겠어.”

씨근덕대는 숨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예준은 잔뜩 얼굴을 붉힌 채 까칠하게 부푼 남자의 입술에 시선을 두었다. 단단한 턱과 팽창한 목, 뼈가 도드라진 쇄골과 어깨, 탄탄한 가슴에 차례로 눈길을 옮겼다.

“…….”

그 아래, 습한 곳까지 낱낱이 보았다. 아직 결합한 아래는 어두웠다. 감각으로 상상하자 물까지 싸지른 성기가 바짝 일어섰다.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또 흥분하기엔 체력이 허락하지 않았다.

말없이 손끝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경이 상체를 기울였다. 그가 젖은 귓불을 물고 빨았다. 예준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열기가 도저히 가시지 않았다.

“그만하자고 하지 마.”

애원하듯 말하는 남자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후희는 다시 전희로 이어졌다. 예준이 젖은 바닥을 긁었다. 이내 몸이 들썩였다. 목 언저리로 쏟아지는 더운 숨이 버거워 예준은 입김처럼 열기를 토해 냈다.

*

땀이 식었다. 그러나 열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태경의 품에 안긴 예준이 하체의 불쾌감에 몸을 뒤척였다. 이유를 알아챈 남자의 손이 엉덩이 사이에 닿았다.

“불편해?”

“…조금.”

목덜미에 닿은 입술이 부드럽게 비벼졌다. 노곤한 한숨을 내쉬자 안으로 침범한 손이 퉁퉁 부은 구멍을 벌렸다. 분명 충분히 빼내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도 끈적한 액이 새어 나왔다. 아득한 양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태경이 예준을 안아 허벅지 위에 앉혔다. 등을 세우게 하곤 조금 더 깊게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회음부와 다리 사이를 흠뻑 적시며 밀려 나온 정액이 이윽고 이불 위로 떨어졌다. 음란한 냄새가 퍼졌다. 예준은 남자의 어깨에 코끝을 파묻은 채 신음했다.

길고 긴 행위가 끝나자 어느덧 고요한 새벽이었다. 격렬했던 섹스는 온몸에 상처를 남겼다. 주로 예준의 몫이었던 상흔은 이번엔 태경에게도 가득했다. 예준이 제 잇자국으로 엉망이 된 남자의 어깨를 흘겨보며 물었다.

“아파?”

“전혀.”

태경은 그 상처가 몹시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뒤늦게 눈을 맞추자 남자의 눈빛이 끈적하게 빛났다. 까칠한 입술이 맞물리고 아래의 감각이 더 깊어졌다. 들이치는 성감에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예준은 흥분을 고조시키려던 남자를 저지했다.

“더 못해, 진짜….”

“왜 못해….”

쪼옥, 쪽…. 애정 어린 키스에 홀려서는 안 되었다. 더 했다간 그도 저도 분명 다칠 터였다. 예준은 키스에 화답하며 속삭였다.

“…그냥 안고 있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태경이 예준을 보았다. 그는 축축한 이불 위로 예준을 눕힌 뒤 곁에 모로 누웠다. 키스 마크로 울긋불긋한 가슴과 배 부근을 덧그리는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해 대었으니 그 또한 탈력감을 느낀대도 할 말이 없었다.

성감이 잦아들자 침묵이 찾아왔다. 예준은 가만히 눈만 감았다 뜨며 머릿속 생각을 정리했다. 낮에 치문이 남기고 간 말이 신경 쓰여서였다.

‘죽었어. 그 새끼.’

치문의 말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태경은 무고한 얼굴이었다. 때로는 날카로운 눈매지만, 지금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차분하고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가 얼굴을 붉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미약한 달빛이 간지러워 예준은 뜨끈한 이마를 태경의 가슴께에 기대었다.

물어볼까. 형이 박정명을 죽였느냐고.

그러나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꿈같은 시간을 깨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예준은 고른 숨만 내쉬며 남자의 탄탄한 옆구리를 어루만졌다.

그때, 태경이 먼저 침묵을 깼다.

“이러고 있으니까 모든 게 다 부질없이 느껴져.”

무슨 의미인가 싶어 예준은 고개를 들었다. 목을 젖혀 남자를 올려다보자 매끈한 눈동자가 느리게 맞닿았다.

“이 방 안에선 우리한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들이 없잖아. 예컨대 형질이든, 이룬 것들이든, 태생이든, 어떤 복잡한 골칫거리든….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무의미해.”

그가 가볍게 입 맞췄다. 그의 무릎이 예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더 단단히 얽혔다.

“이렇게 끌어안고 있을 때 우린 동등한 존재고, 이 방 안에선 무엇도 위협적이지 않다는 게 낯설어. 그게 내가 이곳에 머무르기로 결정한 이유기도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추상적으로 들릴 이야기지만, 예준에겐 그 의미가 곧이 와닿았다. 그의 말처럼 낯선 부산의 한 섬, 이름 모를 이들이 사는 이 작은 동네에선 알파와 오메가를 둘러싼 권력관계나 남자가 가진 재력, 자신이 겪었던 고난들이 무색하리만큼 옅었다. 좁은 세상으로 들어와 더 좁은 곳에서 서로의 몸을 탐할 때, 그 어떤 누구보다도 밀접하고 계산적이지 않은 관계를 누릴 수 있었다.

“불편하지 않아? 형 집이랑 비교하면….”

“난 지금 그 어떤 때보다 편안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거든.”

태경이 예준의 뺨을 어루만졌다.

“안개가 걷힌 기분이야. 내 믿음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거, 이제라도 깨달아 천만다행이고.”

채 마르지 않은 뺨 위로 남자의 손끝이 미끄러졌다. 잔인한 우연으로, 남자는 자신을 키워 준 양부의 정체를 알았다. 예준은 그가 이미 저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보스가 저지른 악행, 조직의 운영, 명성건설의 비리 같은 것들까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농도 짙은 하체의 접촉 탓에 배 부근이 저릿저릿해졌다. 예준은 애써 외면하며 덧붙였다.

“박정명…. 형이 죽였어?”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으나 태경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젖은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옅은 달빛 아래 빛나는 눈동자가 그답지 않게 서늘했다.

“죽였으면.”

급기야 제 몸 위로 올라타는 남자를 예준은 아연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내가 싫어지나?”

초조함 없이 묻는 목소리가 낮았다. 다리가 벌어지고 질퍽하게 비벼지는 하체가 아득해 예준은 신음을 삼켰다. 허리를 결박해 성기를 비벼 대는 남자의 몸짓이 끔찍하리만큼 관능적이었다. 예준은 푹 젖은 눈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었다. 다만….

“나 때문이라면.”

“너 때문이야.”

그것이 걱정이었다. 본의 아니게 그를 무기로 삼았다는 것. 결과로만 보자면 복수의 도구로 활용한 격이나 다름없었다. 정명의 죽음과 별개로, 태경을 이용하는 건 예준의 목적이 아니었다.

“형….”

“널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

예준은 그의 태연함에 놀랐으나 한편으론 그 알파다운 면모에 안도했다. 그는 강자와 약자를 구분할 줄 알았다. 저 같은 약자 앞에서는 한없이 다 내어 줄 듯 굴면서 강자 앞에서는 조금도 굽히려 들지 않았다. 강자로서 비열한 이들을 짓밟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예준은 조심스레 상기했다. 정명에게 복종했던 시간을. 세상에는 죽어 마땅한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법의 잣대는 중요치 않았다.

“그럼 난 뭘 해야 돼? 말해 줘.”

그럼에도 혼란스러웠다. 그와의 관계에선 이제껏 지켜 왔던 신념들이 뒤틀렸다. 속절없이 눈동자를 떨자 태경은 간단히 답했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그저, 내가 무슨 짓을 하든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돼 줘.”

앞으로의 일을 염두에 둔 말임이 분명했다. 우려가 마음을 번잡스럽게 했으나 그 앞에서 속내를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식이든 그에게 유일한 사람이 되는 일만큼은 가치가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책하지 않는 그를 앞에 두고 구태여 말을 내뱉을 필요가 있을까. 예준은 대신 깊게 파고든 그의 골반을 두 다리로 조였다. 이어 단단한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태경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물었다.

“정말 더 못하겠어?”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이 틀 것이다. 밑이 빠질 듯 아팠으나 페로몬 없이도 성감은 착실히 차올랐다. 남자의 뜨거운 체온과 도전적인 눈빛 앞에선 늘 속수무책이었다.

“…해.”

답한 예준이 태경의 뒤통수를 쥐어 거칠게 당겼다. 목을 내어 주며 발버둥 치는 다리 사이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논하며 흥분하는 꼴이라니.

파고드는 남자 또한 망설이지 않았다. 몸을 깊게 찌르고 들어오는 단단함에 헉, 숨을 들이마셨다. 전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센 삽입에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남자의 등에 재차 손톱을 박아 넣은 예준은 짓무른 두 눈만 질끈 감아 낼 뿐이었다.

*

하루 이틀 정도는 시도 때도 없이 새어 나오는 정액 때문에 고생을 했다. 겨우 밑이 말랐을 때, 예준은 태경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해가 저물기 전, 황금빛으로 빛나는 늦은 오후였다. 같은 볼캡을 눌러쓰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걷기 시작하자 하루가 지나는 와중에도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회복을 위한 산책이 아니었다. 태경은 잠깐의 외출에 데이트란 명목을 붙였다. 멋쩍어 어쩔 줄 모르던 예준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굽이친 내리막길을 그와 나란히 걷자 정말 평범한 연인이 된 것만 같았다. 그의 말처럼 좁은 세상에선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낯선 곳에서의 해방감을 기대하지 않았던 예준은 아주 오랜만에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남자를 따랐다.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계획을 세울 만큼 주변을 잘 알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길을 걷다 마주친 분식집에 충동적으로 들어갔다. 막 브레이크 타임이 끝난 탓에, 오픈 시간과 동시에 비좁은 내부가 꽉 차 버렸다.

예준은 얼굴의 반을 가릴 만큼 깊게 모자를 눌러썼다. 손님들은 대부분 또래로 보였으니 자신의 유명세를 알아챌 가능성이 컸다.

“김예준.”

“이름 부르지 마.”

메뉴판을 펼친 태경이 흥미로운 얼굴로 턱을 괴었다. 그는 무례하지 않은 손길로 예준의 볼캡 챙을 들어 올렸다.

“가린다고 가려질 미모가 아니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

예전처럼 근육질의 몸도 아닌 데다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특별한 일만 없다면 들키지 않고 가게를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내부가 좁은 탓인지 태경이 이름을 부른 탓인지, 이미 원치 않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예준은 상기된 직원을 흘끗거리며 다시 볼캡을 눌러썼다.

“먹다 체하기 싫어.”

“가능한 한 모르게 하고 싶었는데.”

태경이 바지에 꽂혀 있던 폰을 꺼내 액정을 두드렸다. 예준은 그가 내민 핸드폰을 무심하게 들여다보았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외면했던 세상이 좀 뜨거워.”

그가 잘못을 고백하듯 말했다. 한동안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았던 예준은 눈을 크게 떴다. 이니셜도 아닌 실명이 떡하니 거론된 스캔들 기사였다. 기사 상단엔 그와 함께 찍힌 사진까지 있었다.

“선수 치자던 거, 성공한 거야?”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부를 슬쩍 둘러보며 말했다.

“이것 때문이니 굳이 숨길 필요 없어. 너랑 나 사귀는 거 이제 다들 알 테니까.”

노골적으로 손을 맞잡기에 하마터면 그 손길을 뿌리칠 뻔했다. 예준은 얼굴이 벌게져 말썽인데 태경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그가 눈을 내리뜨며 달래었다.

“어? 예준아.”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 얘기 듣는 거 싫어.”

이런 분야에서 예준은 영 숙맥이었다. 선수로서 유명세를 치를 때에도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는데, 이번엔 비운의 오메가로 우성 알파와의 스캔들을 견뎌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와 있을 때 하는 짓들을 떠올려 보면 누군가 둘의 관계를 안다는 사실만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예준은 태경이 건넨 물컵을 빠르게 입술로 가져갔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민망해 괜히 귀를 툭툭 건드렸다. 태경이 열 오른 손끝을 훔치듯 손깍지를 꼈다.

“부끄러워하는 건 좋은데….”

겨우 눈을 맞추자 남자가 가볍게 물었다.

“그래서. 뭐 먹고 싶어, 예준아?”

예준은 아득한 눈빛으로 답했다.

“떡볶이.”

“또.”

“모듬 튀김.”

“그리고?”

“…쿨피스.”

혼자 살 때에 비하면 사치스러운 한상이었으나 태경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직원을 불러 세트 메뉴를 주문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지. 뒤늦게 생각한 예준이 슬쩍 목덜미를 매만졌다. 꽉 붙잡힌 손이 부담스러워 빼내려고 하자 남자는 도리어 더 힘을 주었다.

“다른 사람 시선 싫으면 나만 봐. 강제로 프레임을 좁히라고.”

예준은 고분고분 그의 잘생긴 얼굴에 집중했다. 자연히 주변부가 흐려졌다. 태경은 느긋하게 손등 어딘가를 간지럽힐 뿐이었다.

“내 옆에 있을 땐 움츠러들 필요 없어. 서로 좋아하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잖아.”

그의 태연한 음성을 엿들은 이들도 분명 있을 터였다. 어찌 되었든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공격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 봐야 기분 정도였다. 이해했다. 예준은 천천히 받아들였다. 그러자 쿵쾅대던 심장 박동도 차차 잦아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잔뜩 긴장했던 탓에 피로감이 느껴졌으나 맛깔스러운 떡볶이를 보자 군침이 돌았다. 태경이 포크로 떡볶이를 찍어 건넸다. 무의식적으로 한입 베어 문 예준은 그제야 포크를 받아 들었다.

“맛있어?”

묻는 얼굴이 다정했다.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으로만 먹어야 해서 불편했지만 떡볶이는 기대만큼 맛있었다.

“예전 생각나네.”

태경이 중얼거렸다. 예준은 어렵지 않게 그와 저 사이에 얽힌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떡볶이집 아주머니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알파를 물리쳐 주었을 때, 그가 더 사적인 제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왔을 때. 균열이 도리어 감정의 불씨를 더한 것은 아마도 그즈음이 아니었을까.

“그땐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될 줄 몰랐어.”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후, 왜 그토록 쉽게 그에게 끌렸을까 고민했지만 마음을 빼앗긴 건 오로지 태경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떠올릴 수 없을 뿐 아니라, 화답한 데는 그의 외모와 매력이 크게 작용했다. 모를 리 없을 테지만 예준은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형이랑 한 거, 난 다른 사람이랑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 형은 여자 친구도 많았고 경험도 여러 번이겠지만…. 형한텐 아무렇지 않았을지 모를 일들이 나한테는 엄청 특별했다고.”

조곤조곤 말을 내뱉자 태경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가셨다. 예준은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으로 떡볶이를 마저 먹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태경은 어딘가 조바심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나한테도 특별했어.”

그가 상체를 바짝 기울이며 속삭였다.

“보통은, 위로를 몸으로 하진 않지.”

예준은 자연히, 그의 작업실에서 했던 오럴 섹스를 떠올렸다.

“아, 형…. 조용히….”

“다 먹었어?”

“얼추 다 먹긴 했는데.”

티슈를 건넨 태경이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가 꼼꼼하지 못한 예준의 손을 저지했다. 끝내 직접 입가를 닦아 주고 물었다.

“그럼 나갈까? 나도 이런 대화 다른 사람들이 듣는 거 싫거든.”

배가 적당히 불렀고 음식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긴장한 채로 먹다 보니 음식 대부분이 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준은 먼저 일어나는 남자를 따라나섰다. 가게를 나서자마자 맞잡아 오는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잡았다.

“벌써 집에 들어가?”

예준은 더 오래 데이트하고 싶었다. 묻자 태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둘만 있고 싶어서 그래.”

상기된 태경이 예준을 이끌며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도, 일면식도 없는 길을 따라 걷는데도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기는 오랜만이었다. 내리막과 오르막이 반복되는 좁은 도로를 지나자 곧 하늘이 붉게 변했다. 꿈에서 자주 보았던 저물녘이었다.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 즈음, 태경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려 주었다. 그는 카페에 들어가는 대신 더 한적한 주택가를 향해 걸었다. 예준은 천천히 따르며 커피를 반쯤 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내리막에 멈춰 서는 태경이었다.

툭 불거진 턱에 어깨를 맞붙이고 앉았다. 좁은 옥상들이 보이는 여전히 높은 지대였다. 루프탑 가게 전구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집에서와는 다르게, 부두가 멀리 보였다. 조용한 가운데 태경이 허리를 감싸 왔다.

아무도 없었다. 안심되어서 예준은 태경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뭔가 하자 태경의 입술이 벌어졌다.

“와. 이거 이렇게까지 좋을 줄은 몰랐는데.”

그가 들뜬 소년처럼 말했다. 예준은 피식 웃고 말았다. 가슴속이 간지럽고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질척하지 않은 관계도 좋았다.

예준은 별다른 말 없이 눈만 깜빡였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수면제에 취해 시작한 꿈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곳에서 공포의 대상은 형체가 없었다. 외면했지만, 외면이 되는 것도 신기했다. 짧아도 투정하지 않을 터였다. 예준은 새삼 북받치는 감정을 누르며 속삭였다.

“왜 나한테 뭐라고 안 해요.”

“뭘.”

태경이 눈을 내리뜨며 되물었다. 예준은 차마 남자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왜 떠났느냐고 묻지도 않고, 원망도 안 하고….”

자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태경이 얼마나 절망했을지 상상해 보았다. 그의 감정이 처음 만난 시기처럼 가볍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아니까. 그는 언제나 자신을 위로해 주었으나, 예준은 단 한 번도 그를 위로해 준 적 없었다. 어른이라고 해서 모든 고난 앞에서 태연한 건 아닐 텐데도.

태경이 장난스레 볼캡을 벗겼다. 머리카락을 흩뜨리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내 탓이라는 거 아니까. 다 아는데 따질 필요가 뭐가 있어.”

예준은 태경을 밀어내며 다시 볼캡을 썼다. 얼굴을 감추고 애꿎은 빨대에 입을 가져갔다.

“미안해요.”

구태여 내뱉은 진심이었다. 태경이 팔짱을 낀 채 손을 붙잡았다.

“또 가도 돼.”

“어?”

“내가 또 뭔가 잘못한다면 먼 곳으로 도망가 버려도 된다고.”

고개를 드는 부채감에 예준은 어쩔 줄 몰랐다. 진담인지 반어법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정말로?”

“어. 해도 돼.”

“내가 또 쫓아가면 되니까.”

미소가 잦아드는 얼굴에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안다. 자신이 어디로 도망가든 끝까지 찾아낼 사람이라는 걸 이제 와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예준은 그를 더 이해시키고 싶었다.

“안 될 줄 알았어, 우리. 그래서 여기로 온 거야.”

“…….”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형한테 말할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무서웠고. 아무리 형이라도 이번엔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고. 임신한 것도….”

예준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형이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

아랫입술을 짓씹자 태경이 상체를 숙여 눈을 맞추었다.

“통상적으로 듣는 피임약이긴 하지만, 너한테 효과 없을 수도 있다는 거 알았어.”

예준의 눈이 커졌다. 무작정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벗은 몸 보고 아이 가진 것도 눈치챘고. 알면서 말 안 했어. 알면 내가 싫어질 테니까.”

태경은 반사적으로 몸을 빼내려고 하는 예준을 단단히 붙잡았다. 예준은 남자의 놀랍도록 강한 힘에 어깨를 움츠렸다.

“늑장 부린 거 인정할게. 그래도 강제로 내 아이 낳게 하진 않았을 거야. 네가 싫다는데 끝까지 밀어붙이는 쓰레기 같은 짓은 안 했을 거라고.”

“형….”

“선택하게 했을 거야. 나한텐 배 속 아이보다 네가 백배는 더 소중하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곳까지 찾아갈 필요 없었어. 정말로 거긴….”

태경이 마른 얼굴을 쓸었다. 그의 낯이 파리하게 가라앉았다.

“네가 거기 있었다는 거 알고 내 심정이 어땠는지 상상할 수 있겠어?”

예준의 두 눈이 떨렸다. 상상할 수 있었다. 감정을 가다듬지 못하는, 그의 숨 막히는 시선만으로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으므로. 예준은 가까스로 꽉 막힌 목구멍을 열었다.

“나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밖에 해결 못 해. 그래서….”

“알아. 아니까 네 탓 하지 않은 거야. 그냥, 널 거기까지 내몬 내 자신이 미치게 역겨워.”

곧 그의 손이 뺨에 닿았다. 데일 듯이 뜨거운 온도였다.

“너 만나기 전엔 내가 번식욕에 눈먼 알파라는 거 인지하지도 못했어. 네 안에만 들어가면 머리가 돌아.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좋아. 정신을 못 차려.”

“…….”

“그러다 네 눈 보면 그런 널 못살게 구는 내가 싫어져.”

“형질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형질 때문일까? 페로몬 없이 할 땐 어땠어? 회복 다 끝나고부턴 계속 면역제 먹었잖아.”

분명 페로몬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와 지나치게 빨리 가까워진 것도, 마음을 드러내기보다 몸을 섞기가 더 쉬운 것도 모두 페로몬 탓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더는 페로몬을 느낄 수 없다고 한들, 그 사실이 무엇을 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열리지 않는 몸은 지난밤처럼 정성껏 풀면 그만이었다. 페로몬 없이도 남자 대 남자로 충분히 끌렸다. 좁은 세상 속에 오직 둘만 남고 싶은 비약적인 욕구마저 드는 지경이었다.

예준은 남자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며 말했다.

“잘살고 있던 형 흔든 건 나야. 나만 아니었으면 형은 다 가진 채로, 뭐 하나 부족한 거 없는 알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을 수도 있어.”

“가정은 필요 없어. 다 잃어도 너 하나 가질 거야.”

툭 부딪치는 챙이 거슬렸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니까 사실은…. 네가 안 떠났으면 좋겠어. 상처 주기 싫고, 다시는 그런 끔찍한 상실감… 겪고 싶지 않아.”

붉은 해가 지고 푸른 어둠이 내려앉았다. 예준은 남자의 눈을 직시하면서도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아이처럼 터무니없이 드러내고 마는 소유욕이 아득했고, 농도 짙은 진심에 세상의 무게를 떠안은 기분이었다.

“나 같은 거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예준이 다가오는 남자의 가슴을 밀어냈다. 언제나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태경은 연거푸 부딪치는 챙이 거슬려 볼캡을 벗었다. 머리카락을 흩뜨린 남자가 입술을 맞부딪쳤다. 자연스레 벗겨진 예준의 볼캡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예준은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벌렸다. 파고드는 촉감이 좋아 남자의 맨투맨을 구기듯 쥐었다.

쪽, 쪽…. 태경이 소리 내다 멀어진 입술을 열었다.

“듣고 싶어. 지금.”

“…뭘?”

“사랑한다는 말.”

아프게 스며드는 말이었다. 선선한 저녁, 그의 품 안의 온도, 씁쓸한 아메리카노의 뒷맛까지 더할 나위 없었다. 예준은 기꺼이 남자의 뺨을 어루만졌다.

“사랑해.”

담백하게 말을 뱉고는 얼굴을 붉혔다.

“헤어져 버리면 간단한걸, 그거 못 해서 이러고 있잖아, 우리.”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예준은 남자의 두 눈에 들어차는 기쁨을 차분히 담았다. 단단한 턱을 덧그리다 드러난 목에 입 맞추었다. 간지러워 떨리는 남자의 어깨를 감지하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맞아. 그걸 못 해서 이러는 거지.”

태경이 답했다. 그에게서 옅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예준은 고개를 들어 누그러진 남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간지러워 죽겠네.”

토로하는 말끝에서 아직 해소되지 못한 갈증이 느껴졌다. 그는 아마 천 번을 말해 주어도 모자라다 느낄 터였다. 그건 예준도 마찬가지였다. 깊어질수록 더 안달하는 것이 사랑인가 했다. 예준은 연애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자신이 낯설어 덩달아 웃었다.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한 남자가 예준의 등을 끌어안았다. 예준은 이번에 태경의 목을 감아 더 깊이 안겼다.

“한 품에 쏙 들어와. 사람 미치게.”

곤란한 듯 뺨을 맞대는 남자가 좋았다. 예준이 화답했다.

“어떻게 해도 한 품에 다 안을 수가 없어. 열받아.”

한눈에도 뻔한 체격 차이였지만, 가끔은 그를 위해 더 너른 품을 갖고 싶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예준은 투정만 뱉은 뒤 입을 다물었다. 옥죄어 오는 힘이 좋아 가만히 시간만 죽였다. 어둠이 깊어지고 이내 깜깜한 밤이 내려앉을 때까지 안았다가, 입을 맞추었다가, 서로를 바라보기만 반복했다.

상념은 의식 속에 잠들어 어떤 위화감도 없는 봄밤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정적은 집 앞 골목에 다다라서야 깨졌다.

“서울로 돌아가는 거, 어떻게 생각해?”

태경이 물었다. 머리 위, 흐드러진 벚꽃에서 서서히 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예준은 아름다운 전경을 눈에 담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아직 잘 모르겠어.”

그저 회피에 불과할지라도 이곳에서의 생활은 편안했다. 단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라고 질타받아도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서울이 이곳보다 더 안전할 수 있어. 거기에 내 사람들이 있으니까.”

선영도 치문도 서울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그가 말하는 사람들을 전부 알 수는 없었으나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고 꿈만 꾸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태경이 고개를 기울인 채 예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눈을 맞추며 읊조리는 태도가 섬세했다.

“더는 미루기 힘든 일들이 있어. 너 여기 혼자 두고 가야 하는데 그러긴 싫거든.”

몸은 회복되었으나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지금의 상태라면 그와 떨어져선 하루도 버티지 못할 터였다. 예준이 조급한 기색으로 맞잡은 손을 당겼다.

“서울 가야 해?”

“당장은 아니야. 그래도 슬슬 고려해 줬으면 좋겠어. 언제까지고 여기서 살 순 없으니까.”

“보스가….”

뒷말을 잇지 못했으나 태경은 말의 의미를 이해한 기색이었다. 그가 일순 서늘한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해 줄까.”

“응?”

“어떻게 하면 네 상처가 조금이나마 낫겠어?”

턱에 놓여 있던 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어루만지듯 쓰다듬는 손길에 예준의 눈가가 붉어졌다. 몸이 아닌 마음의 회복에 관해서는 그 무엇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누구도 제 마음 따위엔 관심이 없었고, 자신을 해한 사람들 또한 단 한 번도 죗값을 치른 적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예준은 죽었다던 정명을 떠올렸다. 이제는 남자를 무기로 악한 자들을 징벌할 수 있었다. 다만, 보스는 그의 양부였다. 예준이 이를 악물며 답했다.

“내 앞에서 사죄했으면 좋겠어. 잘못했다고.”

사실은, 죽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떠나 다른 누구도 해할 수 없도록. 그러나 그건 보스의 아들로서 태경이 살아온 세월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들 부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간의 일면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태경은 분명 그의 아버지를 아꼈고 자신과의 관계를 인정받고 싶어 했다. 결혼을 결심하고 보스에게 저를 소개하려 했던 일만 봐도 자명했다.

“그걸로 되겠어?”

“안 되더라도 상관없어.”

원하는 바를 늘 이룰 순 없는 일이었다. 예준은 보스에게 사죄받길 원했으나 한편으론 그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기 두렵기도 했다.

“형이 다칠 바엔 그깟 사죄 안 받는 게 나아요. 그러니까 위험한 일은 하지 마.”

조직의 보스였다. 그를 무릎 꿇리려면 대가가 뒤따를지 모른다. 횡설수설하는 자신과 달리 태경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말했었지. 원하는 건 다 이루게 해 주겠다고. 사죄받아야 할 일이야. 권력 아래 짓밟힌 거. 사죄받아야 마땅해. 받게 해 줄게.”

“그래도, 형 아버지잖아. 힘든 거 알아.”

“혈육이라고 싸고도는 거 추한 짓이야. 게다가 아버지와 난 피를 나눈 사이도 아니고.”

그가 사납게 덧붙였다.

“키워 준 은혜는 어느 정도 갚았다고 생각해. 애초에 대가를 바라고 날 키운 거면 보답할 필요도 없겠지만.”

“대가?”

예준이 물었다. 깊게 생각해 보면, 보스가 굳이 양자를 들인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보스가 형한테 무슨 대가를 바라는데?”

“후계자.”

예준의 두 눈이 떨렸다. 예준은 당연하게도 명성건설뿐만 아니라 조직을 떠올렸다. 명성건설이라면 위화감이 덜했을 테지만, 조직은 달랐다. 그가 이끄는 LK와 조직은 조금도 매치가 되지 않았다. 비열함의 온상이기도 한 지하 세계에 몸담기엔 지나치리만큼 건실한 남자였다.

“설마, 조직 말하는 거야? 그 조직을 형이 이끌게 할 셈이라고?”

“그럴 일 없어. 나와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야. 아버지가 원한다면 더더욱 쉽게 내어 줄 생각 없고.”

태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겨우 숨을 토해 낸 예준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빠르게 태경을 당겨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신경이 곤두섰다. 오랜 세월 믿고 따른 아버지에게 배신당해 놓고 이토록 아무렇지 않은 듯 굴다니. 예준이 생각하기에 태경은 자신을 무감하다 나무랄 자격이 없었다.

“나한텐 그렇게 열성이면서 왜 형 마음엔 관심이 없어?”

“무슨 뜻이야.”

“형을 거둔 데 목적이 있었다는 거잖아. 그런데 아무렇지 않아? 보스가 형을… 그렇게 할 작정으로….”

태경은 예준의 눈동자에 이는 동정심이 낯설었다. 그러나 싫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동정의 대상이 되는 일은 차라리 고귀하고 충만했다. 태경이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답했다.

“그래서. 내가 가여워?”

“그러면 안 돼?”

되묻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예준이 입술을 떨기까지 하며 덧붙였다.

“나도 형 돌볼 수 있어. 그러니까 숨기지 말고 말해 줘.”

“내가 얼마나 가여운 사람인지?”

말하며 예준의 옆구리를 파고든 태경이 마른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안겨 드는 체격이 버거워 예준은 절로 뒷걸음질 쳤다. 미닫이문까지 밀려 등을 기댄 예준이 부드럽게 태경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난 다 들켰지만 형은 잘 숨기는 거 알아. 꼭 내 문제 아니더라도 힘든 일 많잖아. 그러면, 나한테, 읏…. 말해도 되는….”

남자가 목덜미를 잘근 씹었다. 미약한 통증에 몸을 움츠리자 이번에는 따뜻한 혀끝이 붉게 달아오른 피부 위를 눌렀다.

“예준아. 난 괜찮아.”

숨처럼 흩어지는 속삭임과 달리 남자의 두 손에는 힘이 실렸다.

“마음 써 주는 건 꼴릴 정도로 좋지만 그 정도로 약하지 않으니까 불안해할 필요 없어.”

노골적인 쪽쪽거림이 목과 귀를 타고 올라왔다. 온종일 물고 빨려 그에게 흡수되는 기분이었다. 예준이 뒤늦게 태경을 밀어냈다.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단단해진 남자의 중심을 감지하자마자 몸이 쑥 들렸다. 그제야 이마가 대등하게 맞닿는 높이였다. 태경의 눈은 진중했다.

“싸울 거고 아버지한테 질 일 없어.”

그가 더운 숨을 쏟아 내었다.

“그러니까 위로해 줄 거면 몸으로 해 줬으면 좋겠는데.”

느긋하게 웃는 얼굴이 야릇했다. 예준은 기시감에 아연해하면서도 남자를 뿌리치지 못했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온통 어두운 내부로 들어선 태경은 좁은 주방 초입에서 예준을 눕혔다.

“어? 예준아.”

과감히 올라탄 태경이 재차 물었다. 예준이 티셔츠 속을 파고드는 미끈한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럼 좀 괜찮아지겠어?”

“훨씬.”

거부할 구실이 없었다. 예준은 배에 닿는 따뜻한 입술을 느끼며 폐부를 부풀렸다. 벌린 채 한껏 들린 무릎 뒤로 높이 뜬 달이 보였다.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하고 태평하게 치부해 버릴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원하기에 몸을 맡겼다. 곪는 속을 무던히 감춘 채 예준은 온몸으로 남자의 무게를 떠안았다.

*

이틀 후, 치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초저녁부터 자기 시작한 예준은 아직 깨지 않았다. 어둠 속에 앉아 예준을 지켜보던 태경이 몸을 일으켰다. 진동하는 폰을 손에 쥔 채 대문을 나서자 익숙한 밤의 전경이 눈에 들었다.

“어떻게 됐어.”

묻자 치문은 곧바로 답했다.

―그쪽으로 손쓸 수도 있다는 거 맞았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납치될 뻔했어. 김 씨 아저씨 거처는 말씀한 곳으로 옮겼고,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하게 조치했어요. 사람도 붙여 놨으니 보스가 찾긴 힘들 거예요.

사람 찾는 데 도가 튼 이 회장이 김재우를 찾아내지 못할 리 없었다. 예준이 가진 것이라고 해 봐야 혈육 하나가 전부였다. 원하는 걸 얻어 내기 위해서라면 자신이라도 그 카드를 먼저 손에 쥐고 일을 시작했을 터였다.

처음 의도는 김재우와 예준의 삶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장과 갈등을 빚는 상황이라면 김재우는 자신과 예준의 약점이 될 수 있었다. 김재우가 다치면 예준의 상심이 클 것이다. 이제는 분리가 아닌 보호가 필요했고, 태경은 먼저 손을 써 이 회장이 김재우를 이용할 기회를 박탈했다.

―그래도 구해 준 일자리엔 빠지지 않고 나갔나 보더라고요. 노름은 끊었는지 어쨌는지 확인 못 했어요. 급해서. 묻지도 않았고요. 별로 보고 싶은 얼굴도 아닌데 뭐.

치문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태경 역시 김재우가 어떻게 사는지엔 관심이 없었다.

“그거면 됐어. 두화건설 건은?”

―대표님 일 있고 나서부터 보스는 김향선 사장이랑 일절 접촉을 안 해요. 현장에 있던 간이 건물도 다 철거했는데 그건 뭐 완공 앞두고 있으니까 밟은 절차라 둘러대면 그만이고요. 어쨌든 만남을 끊었다는 건 구실을 안 만들겠다는 거니까, 조지려면 김향선 쪽을 조지는 게 맞는 거 같다 이 말이에요.

“정 사장은?”

―이를 갈던데요. 김향선 그 새끼도 존나게 악질이라고. 예전 수법 어디 안 간다고 하청업체 리스트 뽑아서 하나하나 캐 보는 중인데 건설사들 뻔하죠. 자잿값으로 장난쳐서 돈 빼돌리고, 그거 조직이 굴리는 단란주점 밑에 밀어 넣어서 힘 좀 쓴다 하는 분들한테 꽂아 주고.

건설사의 횡령에는 공권력의 힘이 불가피했다. 특히 재개발 사업은 관련자들과 관할청의 승인이 까다롭고 복잡하므로 일을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로비도 불사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내로라하는 회사들만 참여하는 재개발 사업에 잔챙이나 다름없는 두화건설이 명함을 내민 것만 해도 의심스러운 판이었다.

―당장 빌딩 벽만 파 봐도 싸구려 자재 쓴 건 들통날걸요. 지금 폭로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정도라니까요. 문제는 명성건설인데….

조직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두화건설과 명성건설, 조직의 연관성을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 회장은 태초부터 꼬리를 자를 심산이었는지 연결 고리를 밝히기가 쉽지 않았다.

―정 사장이 이미 물밑 작업 시작하긴 했더라고요. 조직 와해시킬 거라고 스파이도 여럿 심어 놔서 몇몇 장부는 손에 넣었어요.

“구색 갖추는 데까지 얼마나 걸리겠어.”

―한 달 정도. 그런데 서울은 언제 오시려고요. 정 사장은 준비 다 됐다고, 치라고 말만 하면 친다는데.

버젓한 건물이라 할지라도 닦은 터가 부실하면 으레 균열이 가기 마련이다. 물밑부터 무너뜨리는 것도 괜찮은 전략이었다.

태경이 잠시간 침묵하는 사이,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담 안쪽을 들여다보자 잠에 취한 예준이 눈가를 비비며 비척비척 걷는 모습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도톰한 입술을 벌리며 웃는다.

대문을 열고 나온 예준이 태경의 품을 파고들었다. 내내 이불 속에 있었던 탓인지 안겨 드는 몸이 뜨거웠다. 태경이 예준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치라고 해.”

―예? 진짜 쳐요?

“쳐.”

뭔가 덧붙이려던 태경이 일순 멈추었다. 태경은 순간, 들이치는 낯선 인기척을 예민하게 감지했다. 그가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동시에 시커먼 형체가 빠른 속도로 눈앞을 스쳤다.

“……!”

이어, 무언가 날카롭게 허리춤을 가르고 사라졌다. 엄청난 통증과 함께 안겨 있던 예준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고르게 들이마시고 내쉬던 숨을 버겁게 토해 냈다. 옆구리에 손을 가져간 예준이 윽, 하고 신음했다.

“…형.”

칼날이 예준과 자신의 허리를 동시에 스친 것이 분명했다. 태경이 몸을 떼어 내 예준의 티셔츠에 밴 피를 내려다보았다. 티셔츠를 들어 그의 살갗을 확인하자 다행히도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다만.

“형…!”

자신의 상처는 무척이나 깊었다. 손으로 눌러 지혈했으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의 양이 상당했다. 손등을 겹친 예준이 말했다.

“…괜찮아. 나한테 기대.”

담으로 자신을 이끌어 안는 몸에 편히 기댈 수 없었다. 그런데도 예준은 담을 짚고 선 자신의 무게를 견뎠다.

“죽일 거였으면 목을 노렸을 거야. 알지, 형도.”

“…알아.”

살의가 아니다. 분명 경고였다.

“우리가 너무 안일했어.”

“…맞아. 안일했지.”

미간을 좁힌 태경이 다시 한번 예준의 허리춤을 살폈다. 예준이 그 손을 저지하며 덧붙였다.

“난 괜찮아요. 저기 형이 심어 둔 경호원들 오고 있어. 금방 병원 가면 돼.”

예준의 목소리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담담했다. 그러나 태경은 하얗게 질린 안색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몸의 떨림이 말해 주고 있었다.

“하아….”

예준의 어깨에 턱을 댄 채, 태경은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가 깊은 어둠을 직시하며 예준의 마른 허리를 떠올렸다. 하얗고 보드라운 살결 위에 상처라니. 용납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으나 버틸 수 있었다. 그는 차분히 예준의 목에 코끝을 대었다. 호흡하기 위해 입술을 벌리자 곧 투박한 손이 닿았다.

“…차는 어디 있어요?”

“골목만 나가시면 됩니다.”

그제야 울먹이는 목소리에 가슴이 터질 듯했다. 버거운 눈두덩을 열면서, 태경은 끝내 예준의 팔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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